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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라푼첼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라푼첼'은 그림형제의 동화속 주인공 중 한명이다. 어린시절부터 마녀의 손에 자라, 외딴성에 갇혀 지내는 아름다운 아가씨. 기류 미사오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를 보면 라푼첼은 외딴 성에서 남성들을 유혹하는 것을 강요받고, 마녀는 라푼첼이 유혹한 남성들을 살해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 부분을 읽으며 '나무요괴에게 잡혀 남자들을 유혹해야 했던 천녀유혼의 왕조현'이 떠올랐었다.
<잠자는 라푼첼> 왜 저자는 라푼첼을 끌어온 것일까? 제목에 담긴 의미, 한번 생각해 볼 만한다. 이에 대해서는 끝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줄거리를 살펴보자. 결혼 6년차 전업주부 '시오미 데즈카'. 그녀는 모델활동을 잠시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의 남편은 유명 광고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는 광고기획자. 결혼 후 남편은 바쁜일 때문에 주말에만 집을 찿고, 시오미는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할 줄 모른다. 그러던 중, 그녀는 옆집 아이 '루피오', 옆집 남자 '대니', 파친코 종업원 '타카나시'등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일탈을 감행한다.
난 야마모토 후미오의 <잠자는 라푼첼>과 소설속 등장인물-특히 시오미를 분리해서 살펴보고 싶다. 이를 분리하는게 과연 타당할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둘을 분리하지 않으면 내 생각과 감정이 뒤엉켜 버린다.
<잠자는 라푼첼> 읽는 내내 불편했다. 기분이 나빴다. 시오미의 충격적 행각은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옆집사는 13살 소년, '루피오'(루피오는 본명이 아니라, 영화 '후크'의 등장인물 이름. 시오미는 영화속 등장인물과 그가 닮았다 저런 명칭으로 소년을 불렀다. 루피오의 본명은 '로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와 섹스를 한다.(p.234참조) 당신은 이것이 이해가 되는가? 15살이나 어리고, 고작 13살밖에 안 된 아이와 관계를 하다니...
그녀는 또 옆집 남자 '대니'(이 역시 본명이 아니라, 그가 영화배우 '대니 드비토'를 닮았다 하여 그녀는 이렇게 불렀다)와 섹스를 하는데, 대니는 루피오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루피오,대니)의 옷가지를 빨고, 그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그들과 게임을 한다. 거창한 윤리관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납득할 수 없다. 그녀는 한마디로 정신 나갔다.
시오미를 위한 변명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은 일에 너무 바쁜 나머지 그녀에게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해, 그녀가 느끼는 심한 외로움과 상실감이 저런 비정상적인 행각으로 이어진 걸거야, 한번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고. 내가 그녀라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하지만. 결국 난 그녀를 위한 변명을 버렸다.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
시오미는 이렇게 말한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열다섯 살이나 어린 소년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왜 우리 집에는 고양이가 있을까? 왜 나는 금붕어 시체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왜 나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일까? 왜? 왜 내 옷장에는 똑같은 향수가 열두 개나 있는 것일까? 제발 누가 대답 좀 해줘요!"(p.196,197) 하지만 과연 누가 저 물음에 답할 수 있을까? 다른이에게 물어서 될 문제가 아니다. 그런 그녀가 아주 답답하게 생각 되었다면, 난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중요한 상징으로 고양이가 언급된다. 남편이 반강제적으로 던지고 간 고양이. 그녀는 당황하지만, 곧 고양이에게 깊은 애정을 느낀다. 일종의 동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난 동질감으로 해석하고 싶다. 집 안에서만 갇혀지내는, 남아도는 시간을 잠자는데만 쓰는, 그들은 친구이자, 또하나의 자신이다. 이 고양이는 다른 쪽으로도 큰 역할을 담당한다. 그것은 고양이 '다비'가 애완동물 기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아파트에서 몰래 길러져야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야기의 결말과 맞물려 시오미에게 '고양이 기르지 마'라는 편지가 오고, 썩은 금붕어가 고양이 먹이라고 배달된다. 그리고 현관문에 스프레이로 갈겨 써진 독설까지. 과연 저런 치졸한 짓은 누가 한 것일까?
굳이 소개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야기의 결말때문에 언급해야 겠다. 옆집 루피오의 어머니는 '미노아'란 인물로 딸(주리)의 연예계 활동을 매니저하는 '스테이지 엄마'이다. 미노아는 일주일에 한번씩 열리는 생활협동조합 물건을 시오미에게 부탁하곤 했다. 뭔가 성격이 맞지 않는 그들. 결말은 이들과 관련이 있다. 스포일러 때문에 더 언급하지는 않겠다. 읽어보시길.
이처럼, 난 소설 속 시오미란 인물에 답답함과 혐오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시오미'를 창조한 야마모토 후미오까지 혐오하고 싶지는 않다.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없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저자의 깔끔한 문체와 차분한 내면묘사 덕분이었다. 그녀의 차분한 문체는 동년배 여성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과연 그녀의 다른 작품을 또 읽을지는 미지수다.
이제 젤 처음 언급했던 '잠자는 라푼첼' 제목이야기를 해보자. 성속에 갇혀 지내는 아름다운 라푼첼, 결혼 후 집안에서 잠이나, 파친코로 소일하는 시오미를 라푼첼과 병치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마녀에게 벗어나 왕자와 사랑을 나누던 라푼첼. 시오미에게 있어 왕자는 '루피오'였다. 비록 15살이나 어린 왕자였지만.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 루피오도, 대니도, 타카나시도, 전부 왕자였다. 그녀를 괴롭히는 극한의 우울과 일상의 반복, 그것에서 구해줄 사람이면 누구나가 왕자였던 것이다. (이런 해석의 바탕은 p.193에 언급된 시오미의 심정을 바탕으로 한 것임. 그 부분 참조해 보시길)
그런 마녀는 누굴까? 그야 당연히 남편이다. '그가 과연 시오미를 사랑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결혼이란 합법적인 굴레속에, 시오미를 가둬 두고, 또 다른 사랑을 찿아 다녔던 것은 아닐런지? 여러가지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다. 동시에 한아름의 씁쓸함을 던져준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