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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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아, 잘 들어둬라. 이브가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나뭇잎으로 아랫도리를 가렸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진실은 이렇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담을 유혹하기 위함이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을 때보다 뭔가를 살짝 걸쳤을 때 사내들이 환장한다는 걸 깨달은 게지. 아담은 당혹스러웠지. 아랫도리가 불끈거리는 이 느낌은 대체 뭐지? 바야흐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란다. 네놈이 세상 바람 쐬게 된 것도 모두 무화과 나뭇잎 덕분이지."-66쪽

모든 초가집 굴뚝에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밥 짓는 연기라고 했다. 연기는 만개한 꽃처럼 피어올라 어스름 속으로 녹아들었다. 도성을 감싼 부드러운 어둠은 우수에 젖은 듯했다. 어스름한 푸른빛 저편에는 도성을 바람벽처럼 둘러선 산과 그 산들의 옆구리를 연결한 성벽의 실루엣이 어렴풋했다. 성벽 아래쪽의 푸른빛 어딘가에 국왕의 궁전이 있을 것이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세상의 끝에 당도한 기분이었다.-75쪽

이교도들은 모두 대식가였다. 그들은 끝없이 먹고 마셨다. 그들의 식사는 궁극의 쾌락을 향한 무모하고 덧없는 열정에 바쳐졌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식사가 아니라 식사를 누리기 위한 삶이었다. 곁을 지키고 있던 시종들이 동난 음식을 신속히 보충해서 그릇은 바닥을 드러낼 틈이 없었다. 이교도 사내들은 걸신들린 마귀처럼 음식을 집어삼켰다. 그들의 식탐은 삶의 뿌리에 들러붙은 죽음마저 집어삼킬 듯 게걸스러웠다.-105쪽

여인들은 갓 피어나려는 꽃망울처럼 여리고 싱그러웠다. 짙게 바른 분도 물오른 풋풋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은 사슴처럼 갸름했고 눈매는 초승달을 닮아 고즈넉했다. 크고 검은 눈동자와 꼭 다문 작은 입술은 슬픈 사연을 머금은 듯했다. 그들의 가냘픈 아름다움에는 우수가 질병처럼 들러붙었다.-136쪽

생과 사를 넘나드는 활극에 관객들은 넋을 빼앗겼다. 칼날과 칼날이 엉킬 때 허공에 벼락처럼 피어나는 죽음의 꽃에 영혼을 빼앗긴 관객들에게 배우들이 목숨을 걸고 겨루는 이유 따위는 무의미했다. 죽음을 향한 열정적인 몸짓은 시들어가던 삶의 열정에 독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관객들은 죽음의 허방을 딛고 일어서는 활달한 생의 쾌감에 진저리쳤다. 사투를 주시하는 이교도들의 생기로 빛나는 눈빛에서 나는 생의 속살 깊이 뿌리박힌 권태를 보았다. 그들은 죽음의 무(武)로써 삶의 무(無)를 견디고자 했다. -182쪽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 하나의 거대한 강이 머리 위에서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우주의 젖줄, 은하의 남쪽 가장자리에 못 보던 별들이 옹기종기 둥지를 틀었다. 찬찬히 보니 기지개를 켜는 호랑이 같았다. 그중 유난히 환한 별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호랑이의 눈처럼 번득였다. 데니슨의 영혼이 거기 맹렬한 기세로 빛나고 있었다.-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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