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문장화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의 톤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 톤만 확실하게 포착하고 있으면, 그 이야기는 진실한 이야기가 된다.-46쪽
"만약 약속을 하라고 하면 하겠어. 난 너랑 잘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내가 누군가와 결혼한 다음에 너랑 잘 거야. 거짓말이 아니야. 약속해." 그때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66쪽
여자는 운 다음에만 그를 원했다. 그 밖의 경우에는 늘 그 쪽에서, 여자를 원했다. 여자가 거절하는 때도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고개를 젓는다. 그런 때 그녀의 눈은, 하늘 한 끝에 떠 있는, 새벽녘의 하얀 달처럼 보였다. 새 날을 알리는 새들의 지저귐에 몸을 떠는, 납작하고 암시적인 달. 그런 눈을 보면, 그는 더 이상 채근할 수 없었다.-90쪽
"사람의 마음이란 깊은 우물 같은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해. 그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 가끔 떠오르는 것들의 모양을 보고 상상할 수밖에."-96쪽
나는 잠의 테두리 같은 것을 손가락 끝으로 어렴풋하게 느낀다. 그러나 나의 의식은 깨어 있다. 나는 잠시 존다. 그러나 얇은 벽으로 나누어진 옆방에서, 그 의식은 말똥말똥하게 깨어, 나를 지그시 보고 있다. 나의 육체응 어슬렁어슬렁 어두컴컴한 공중을 떠다니면서, 내 자신의 의식과 시선과 숨결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나는 잠자고 싶어하는 육체이며, 그와 동시에 각성하려 하는 의식이다.-106쪽
사람이란 것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행동과 사고의 경향을 형성해 가는 법이고, 일단 형성된 그런 경향은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지워지지 않는다. 즉 사람은 그런 경향이란 우리 안에 갇혀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잠이야말로 그런 경향의 편향을 중화시킨다. 즉 잠이 그 편향을 조절하고 치유하는 것이다. 인간은 잠을 통해 집중적으로 사용한 근육을 자연스레 풀고, 집중적으로 사용된 사고 회로를 진정시키고, 또 방전한다. 그런 식으로 인간은 냉각되는 것이다.-153쪽
TV피플은 일부러 일요일 저녁나절을 노려 내 방에 찿아왔다. 마치 우울한 상념이나, 소리도 없이 비밀스레 내리는 비처럼, 그들은 어슴프레한 시각에 슬며시 파고 들어오는 것이다.-180쪽
내 경우, 일요일 오후에는 많은 것이 그렇게 조금씩 되고 만다, 무슨 일을 해도 전부 어중간해지고 만다. 무언가에 재대로 열중할 수가 없다. 아침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듯 느껴진다. 오늘은 이 책을 읽고, 이 레코드를 듣고, 지난번에 받은 편지의 답장을 써야지, 하고 생각한다. 오늘이야말로 책상 서랍을 정리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오랜만에 세차를 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계 바늘이 두 시를 돌고, 세 시를 돌아 점점 저녁에 가까워지면 모든 생각이 허물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언제나, 소파에 누워 어쩔 줄 모른다. 귀에는 시계 소리만 들린다. 타르푸-쿠-샤우스-타르푸-쿠-샤우스, 하고. 그 소리가 빗줄기처럼 주변의 사물을 조금씩 깍아내려 간다. 타르푸-쿠-샤우스-타르푸-쿠-샤우스. 일요일 오후에는 그렇게 모든 것이 조금씩 마모되어 크기가 작게 보인다. 마치 TV피플 그 자체인 것처럼.-184,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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