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은 4월, 새 학기의 상징이다. 나는 4월이 싫었다. 주변이 갑자기 어수선해지고, 반이 바뀌고 자리가 바뀌면서 좋든 싫든 익숙해진 것들과 헤어져야 한다. 인관관계를 처음부터 새로 쌓아야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그 어수선한 분위기가 지긋지긋하게 싫었다.-16쪽
"난 막연히 벚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뭐야. 나쁜 버릇이지. 내가 좋아하는 걸 남들도 좋아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한테 있더라고. 그걸 부정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괜히 튀려고 저런다고 단정해 버리고 말이야"-19쪽
실제로 그 빙수는 2천 엔씩이나 하는 가격에 걸맞게, 몽블랑이나 마차푸차르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얼음산이었다. 딸기의 빨강, 멜론의 초록, 레몬의 노랑 시럽이 색동무늬를 그리며 둠뿍 끼얹어져 있고, 통조림에 든 체리와 황도, 귤, 파인애플, 종잇장처럼 얇게 자른 멜론 등이 산기슭을 빽빽이 메우고 있다. 4부 능선 부근에는 푸딩, 5부 능선에는 팥, 6부 능선에는 설탕에 조린 밤이 매몰되어 있다.-88쪽
"잠깐,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콩트는 하나도 안 가벼워. 장편이 무겁고 단편이 가볍다는 건 좌우지간 양만 많으면 된다는 일본사람의 가난뱅이 근성이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쳐서 생긴 망상에 지나지 않아. 무지막지하게 긴 대하소설보다 스파이시한 콩트가 훨신 무거운 경우도 있다고."-96쪽
"어머, 대하소설 무시하네. 성공한 대하소설은 신이 창조한 이 세상보다 훨신 뛰어날 때가 많은걸. 인물 묘사, 복잡한 인간관계, 멋진 배경, 콩트가 그런 깊이를 표현할 수 있겠어?"-96쪽
"콩트에 깊이가 없다고 한다면 그건 독자 쪽에 문제가 있는 거야. 판단력과 상상력이 없는 독자가 콩트를 몇백 편 읽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원래 일본은 뭐든지 상 다 차려놓고 떠먹여주기를 바라는 마마보이 피터 팬들이 활개 치면서 어른인 척하는 나라고, 일본사람은 전세계에서 유례를 찿아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정신적 미숙아들이라고. 그래서 쓸모라곤 길이밖에 없는 소설 따위에 껌뻑 죽는 거야."-96,97쪽
여름이 되어 몇 년 만에 무더위가 찿아왔다. 나는 오히려 이 끔찍한 무더위를 즐기면서, 풍경과 모기향을 갖춰놓고 유카타를 느슨하게 입고 다다미방에 앉아 나팔꽃 모양의 부채를 부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워드프로세서 앞에서 지냈다. 에어컨은 물론이고 선풍기조차도 쓰지 않는 것은 반쯤은 취미 같은 것이니 본인은 꽤 즐겁게 살지만, 가끔 놀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열탕지옥이 따로 없다.-114쪽
버린다는 행위가 신체의 배설작용과 연관......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버리는 일은 일종의 쾌감을 불러일으킨다.-169쪽
우리는 가끔씩 침을 튀겨가며 소설 이야기를 하고, 시시한 농을 주고받고, 합숙을 하고, 술을 마시며 실연의 상처를 서로 핥아주었다. 오늘 모이는 사람들은 모두 당시 나의 '상처'를 핥아주신 분들이다. 물론 그들이 상처를 입었을 때는 나도 열심히 핥아주었다. 그렇게 말하니 꼭 무슨 개 같지만, 결국 대학시절의 친구관계는 무리지어 장난치는 개들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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