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없어 가려질 데가 없는 초원의 하늘은 초원보다 더 아스라하게 넓었다. 그 하늘에서 크고 작은 새떼들이 휘돌고 맴돌면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새떼들은 맘껏 날갯짓하며 무성한 풀숲으로 급강하하고는 했다. 시체를 뜯어 먹으려는 독수리떼와 까마귀떼였다. 그것들은 날마다 포식을 했다. 새떼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맘대로 뜯어 먹고 있으니 산 사람도 먹이로 보이는 것인지 몰랐다. 새떼들은 대포가 폭음을 터트릴 때나 겨우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들은 비웃기라도 하는 듯 소총 소리나 기관총 소리에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8쪽
독수리떼와 까마귀떼는 포식한 것을 소화라도 시키려는 듯 가끔씩 그 푸른 하늘로 날아올라 빠르게 휘돌고, 느리게 맴돌고, 어지럽게 감돌면서 검은 군무를 추고는 했다. 그 검은 춤은 검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검은 날갯짓들은 소련군의 살기를 실어와 이쪽에 뿌려대는 것처럼 불길했다. 새떼는 더 많이 포식하기 위해서 죽음을 부르는 저승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고, 제멋대로 까욱까욱 울어대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들은 영락없는 장송곡이었다.-34쪽
사람끼리 말이 통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중대한 것인지 신실만은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사람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가 아니었다.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으니 사람과 짐승 사이나 같았고, 서로 아무 감정도 통하지 않는 바윗덩어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사람끼리 말이 통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중대한 일이었다.-56쪽
시체 위에 시체가 포개졌고, 부상자들이 눈보라 속에 그대로 버려져 죽어갔다. 하얗게 눈 덮인 대지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 위에 다시 눈이 내려 덮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눈은 또 붉게 물들었다. 마치 하늘과 인간이 거대한 화폭의 추상화를 그리고 지우는 다툼을 벌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105쪽
추위 속에서 이천여 명은 삽시간에 발가숭이가 되었다. 알몸으로 우글거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상스럽게 생긴 짐승들이었다. 그들은 알몸이 되자마자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하나같이 몸을 웅크리며 두 손을 모아 아래를 가렸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니 그 모습은 옷을 입고 움직이는 독일군들과는 너무나 다르게 보였다. 인간은 옷을 입어야만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을 갖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117쪽
신길만은 고기를 잘라 입에 넣었다. 구수한 고기 냄새가 입안에 퍼졌다. 군침이 지르르 흘렀다. 고기의 감촉에 혀가 요동쳤다. 고기를 꿀떡 삼켜버리고 싶도록 목구멍이 크게 열리고, 어서 넘겨달라고 뱃속에서는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대로 삼키고 싶은 욕구를 누르며 고기를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졸깃졸깃한 육질의 탄력에 이들이 일제히 환호한다. 향기로운 고기 냄새가 씹을수록 진하게 퍼진다. 그리고 달치근하면서도 고소한 고깃물이 입 안 곳곳으로 스며든다. 막으려고 했지만 고깃물이 저절로 목구멍으로 넘어가 뱃속으로 흘러들어간다.-169,170쪽
흰 종이 위에 새빨간 피글씨들이 한 자씩 그려져나갔다. 몸속에 감추어져 몸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피들이 이제 주인의 몸을 구하려고 몸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는 붉었지만 단순히 붉은색이 아니었고, 액체였지만 단순히 액체가 아니었다. 피의 붉은색은 피만의 독특한 붉은색이었고, 액체이되 농도와 온기가 다른 액체였다. 그건 목숨이 담긴 붉은색이었고. 영혼이 스며 있는 액체였다. 주인의 생명을 구하려고 그려지고 있는 떨리는 피글씨들은 숙연하고 처연했다.-19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