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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갑작스런 사고로 이승의 끈을 놓는 사람들을 보면, 삶과 죽음의 경계란 무얼지 의문이 든다. 어제까지만 해도 귀엽다고 쓰다듬었던 개가 사고로 죽어있는 모습(p.38), 익사한 젊은 여자의 사체(p.45) 그리고 그걸 보는 13세 소녀…소녀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녀의 이름은 '오니시 아오이'. 다섯살 때 아버지는 병으로 죽고, 엄마는 3년전 한 어부와 재혼을 했다. 새 아빠는 알코올 중독에 심장질환을 가진 자로, 처음에는 아오이를 귀여워 해주었지만 사고를 당해 어부일을 못하게 된 다음부터는 매일 술만 먹고 행패를 부린다. 아오이는 새 아빠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엄마는 괴물을 키우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강자이며 나의 보호자이지만, 그러나 그는 괴물이다. 썩은 과자냄새 같은 몸 안에서 발효한 알코올 냄새가 점점 진동하기 시작했다.'(p.29)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처음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관심을 둔 부분은 '소녀가 살인을 해야했던 이유'와 '살인을 하게 된 소녀의 내면심리'였다. 정상적인 성장과정의 소녀가 사람을 죽일 이유는 없기에, 무언가 살인을 해야만 했던 외부적 요인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랬다. 소녀는 극히 불안정한 가정환경 속에 놓여 있었다. "(새아빠는) 지갑을 바닥에 내던지더니,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글러브처럼 커다랗고 검은 손을 들어 내 빰을 세게 때렸다. (중략) 나는 휘청거리며 일어나, 새 아빠의 커다란 몸뚱이에 주먹을 휘둘렀다. 염소를 두들겨 팰 때처럼. 염소와 달리 새 아빠는 강하고 난폭해서,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벽에다 내동댕이쳤다."(p.52,53) 그는 이런 폭력뿐만 아니라 아오이의 친아빠를 모욕하기까지 한다. 특히 새 아빠가 아오이가 즐겨하는 게임 '드래곤 클로저의 자기카드'를 망가트리는 부분(p.55)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세대차이와 갈등을 보여준다.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그건 바로 '미야노시타 시즈카'. 시즈카는 섬에서 가장 부자이며 고집센 노인의 손녀로, 항상 책을 읽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아이이다. 아오이와 시즈카를 이어주는건 태평양전쟁 때 지어진 일본군의 포대와 요새. 그들은 여기서 만나 각자 책을 보고 게임을 하다, 마침내 친구가 된다.
결국, 아오이는 살인을 한다. 시즈카와 공모한 살인방법은 유치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살인이라 하기도 어렵지만, 적어도 살인의 미필적 고의는 가지고 있었다. 그럼 과연 그들을 살인자라 비난할 수 있을까? 난 책장을 덮는 그 순간까지 아오이를 비난할 수 없었다. 사춘기 소녀가 겪는 성장의 고통과 힘겨운 가족관계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녀에게, 살인이란 무거운 허물은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이 소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만, 놀랍게도 아주 편하게 읽힌다. 이는 저자가 소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아오이의 내면묘사에 성공했음을 반증한다. 사쿠라바 가즈키는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아오리의 내면을 묘사한다. 20대 중반의 남자인 내가, 13세 소녀 아오이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로…
이후는 시즈카와 그의 집안의 비밀이 중심으로, 상당히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풍기며 이어진다. 시즈카는 아오이에게 이런 고백을 한다. 'p.179~187'(스포일러 때문에 생략. 해당부분 직접 읽어보세요^^) 과연 시즈카의 고백은 진실일까? 진실은 과연 무었일까? 아오이와 시즈카는 과연 두번째 살인을 감행할 것인지. 왜 살인을 해야만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