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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백 - 소유할 수 없는 자유에 관한 아홉 가지 이야기
바히이 나크자바니 지음, 이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 스포일러 있을지도
제목부터 생소한 이 책을 읽는내내 난 사막을 거닐었다. 베두인 도둑, 아름다운 소녀, 터번을 두른 이국인들과 함께…그 여행이 즐거운 것이든, 그 반대이든 상관없었다. 잠시나마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그 하나만으로 행복했다.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근사한 책이 많이 읽히지 않았다는 아쉬움과 동시에 이 책을 잃은 사람은 얼마 없다는 안도감. (심술은^^)
<새들백>의 구성은 상당히 독특하다. 하나의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이를 여러 인물들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등장하는 9가지 이야기는 각기 독립된 단편이면서 동시에 단편이 아니다. 연작소설도 아니다. 한마디로 색다르다는 말밖에.
'새들백'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새들백은 '노새나 낙타 안장에 다는 주머니'로, 9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키포인트다. 9개의 이야기를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보았다. 첫번째는 '제1장 도둑'으로 새들백이 이야기의 전면으로 부각되는 도입부분, 두번째는 '제2장부터 제8장'까지로 중심사건을 축으로 다양한 인물들과 얽힌 새들백 이야기, 세번째가 '제9장 시체'로 이야기를 마무리. 자, 그럼 이야기속으로 들어가자.
고아인 베두인 도둑이 있다. 그는 혼자였기에, 배운것이 없기에 항상 자유로웠다. 율법따위도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 자유는 그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사막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도적떼들의 길잡이를 하며 자유를 일정부분 양보한다. 그가 도적떼 길잡이를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보자. 좀 길긴 하지만, 인상적인 부분이라 그대로 인용한다.
"도둑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는 신앙을 재물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흐르는 모래 바로 옆에 섰을 때 혹은 낭떠러지 주변에 섰을 때 그를 공포로 떨게 하던 그 위대한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종교는 외면적인 경건함만을 요구했을뿐 그가 신성하다고 판단한 존재가 야기하는 공포를 실질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는 순례자들의 신이 자신의 신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들의 물질을 훔쳐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p.12)
베두인은 하지만 자기가 진정 원하는 자유를 위해 도적떼를 배신한다.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던 중 그는 금빛으로 물들인 두툼한 새들백을 가지고 있는 순례자일행을 발견한다. 그는 새들백을 훔쳐내는데 성공하지만 그 안에 들은건 단순한 종이꾸러미에 불과한 것 뿐이다. 이것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한편, 도적떼는 끈질기게 배신자를 추격한다. 결국 궁지에 몰리는 베두인, 그는 새들백과 함께 수백피트나 되는 골짜기에서 뛰어내린다.
제2장부터 제8장까지는 하나의 중심사건을 축으로 이야기가 파생된다. 중심사건이란 '아버지에 의해 돈많고 늙은 터키인에게 시집가는 딸의 행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말한다. 겉으로는 개종했지만 실제는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아버지는, 아름답지만 예지능력때문에 미쳤다는 소문까지 도는 딸이 있다. 새로 맞은 아내가 딸을 너무나 미워해 시집보내라고 안달하자, 그는 딸과 헤어지기 싫은 까닭에 늙고 돈많은 사위감을 고른다. 사위가 죽으면 다시 함께 할 수 있기 때문. 딸의 시중을 드는건 천연두자국으로 얼굴에 얽힌 자국이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목욕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신부를 보좌하며 머나먼 길을 함께하는데…
제2장은 제1장과는 다른 이야기이지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제2장의 시작이 골짜기에서 뛰어내리는 베두인을 신부가 목격하는 장면이고, 제1장에서 등장해 베두인 도둑을 추격하던 도적때가 여기서도 그대로 등장해, 신부일행을 위협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치밀한 구성은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준다.
예지능력이 있는 신부는 천사의 메시지를 받고는 이렇게 말한다. "천사가 부를 테니까 준비하라고 했어. (중략) 기뻐해야 해. 이 세상에서 울어야 할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건 사오야이안트가 나를 잊고 데리러 오지 않는 거야"(p.86-87) 신부가 말하는 천사의 부름이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한참뒤에야 알았다. 그녀는 이미 종교적으로 초탈했던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사오야이안트는 바로 도적떼의 두목. 도적때가 일행을 습격한 것이다. 사실 줄거리는 여기서 끝이난다. 이후 이어지는 서술은 다양한 인물들 입장에서 이 사건을 재해석해 돌아보는 것이다.
신부가 터키까지 가는 행로는 험란함 그 자체이며, 일행들간의 갈등과 반목은 더운 사막만큼이나 숨이 막힌다. 등장인물들은 신부의 시중을 드는 유대교도인 아비시니아 노예여인(제5장), 그 신부의 재산을 노리는 거세당한 인도인(제4장), 까다롭고 열광적인 성직자(제7장), 멀리 위구르에서 온 늙은 순례자(제6장), 그리고 탁발승으로 변장한 영국인 스파이(제8장)등이다. 이들은 종교내지 신앙을 이유로 갈등, 반목하고 결국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그 종교적 사유의 깊이는 대단하다.
9개의 이야기는 단순한 소설을 넘어, 종교적 성찰의 길까지 제시한다. 세계주요 종교들의 다양한 성전에 나오는 전통,언어,은유,상징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저자…너무나 환상적으로 그려냈다. 내 능력부족으로 이런 아름다운 책을 잘 소개하지 못한거 같아 민망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