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 피쉬
오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정신없는 일상속에서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고 책속에 빠져드는 것, 힘든 일이다. 고민이 너무 많았다. 미친 듯 책을 읽다, 잠시 뒤를 돌아보려니 이상한 느낌이 든다. 뭔가 해서는 안 될 장난을 한 아이같은. 기운을 추스르고 <파일럿 피쉬>를 손에 잡았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 난 덕인지, 풋풋한 스펀지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에 스며들었다. 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은 처음이었는데, 한마디로 좋았다. 글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궁합이 맞는다고나 할까? 이상하게 친근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접한 그 어떤 일본작가와도 다른 그만의 매력을 느꼈다.

'사람은 몸 어딘가에는 그 모든 기억을 저장해 놓는 거대한 호수 같은 장소가 있어서, 그 바닥에는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수한 과거가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고,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눈을 뜬 아침, 아주 먼 옛날 잊어버렸던 기억이 그 호수의 바닥에서 불현듯 둥실 떠오르는 때가 있다'(p.9) 가슴을 뒤흔드는 멋진 말로 오사키 요시오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화자는 야마자키. 그는 '월간 에레쿠트'의 편집장이고, 쿠와 모모란 롱코트 치와와를 키우고 있는 미혼남이다. 이야기는 '40대인 야마자키의 오늘'과 '19년 전 20대인 야마자키의 과거'가 챕터를 나눠 서술되는데, 야마자키와 사귀었던 유키코의 19년만의 전화는 양자의 징검다리가 된다. 19년 만에 걸려온 사귀었던 여자의 전화…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야마사키는 19년이란 세윌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유키코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챈다. 유키코가 야마사키 인생에 미친 영향을 떠올려보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월간 에레쿠트' 역시 유키코덕에 얻은 직장이다. 유키코는 야마사키가 편집일을 하고 싶어 한다고는 걸 알고는 수많은 출판사에 전화를 해서 결국 '월간 에레쿠트'의 긍정적인 대답을 얻어낸다. 결국 야마사키가 편집장까지 된 출판사 '월간 에레쿠트'. 에레쿠트가 뭔 뜻인지 아는가? '남성성기가 발기한다'에 '발기'이다. 그렇다. 바로 '월간 에레쿠트'는 에로잡지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야마사키는 편집자인 사와이의 말에 이끌린다. "발기시켜서 판다. 이 단순한 도식이 간단하면서도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고 또 공부가 되는 거야. (중략) 에로 잡기의 편집자야말로 편집자 중에 편집자인 셈이지"(p.44-45)

리뷰가 조금 길어질거 같은, 약간의 두려움이 들긴 하지만 유키코와 야마사키의 만남부분을 살펴보자.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방황하던 야마사키는 한 카페에 들어가고 울고 있는 한 여성을 보게 된다. 그녀는 바로 유키코. 유키코가 울고 있던 이유는 친구인 이쓰코가 자기 남자친구와 놀아났음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 배신감이 얼마나 컸을까? 결국 이쓰고가 둘의 만남의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는데, 헤어짐 역시 그녀 때문(이 부분은 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임)이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저런 만남뒤에 둘은 사귀게 된다.

야마사키가 아르바이트하는 가게 주인인 '와타나베' 이 인물 역시 언급하지 아니할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와타나베는 야마사키와 유키코를 특별한 친근감으로 대해 주었고 가족식사에도 자주 초대해 함께 식사를 했다. (스토리전개와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 야마사키가 식사 중에 하는 '우산의 공유화'(p.121-123)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저런 와타나베는 KAL기 격추사건으로 사망하고, 많은 이들이 충격에 사로잡힌다. 이러던 와중에 야마사키는 이쓰코의 유혹에 빠지게 되고…유키코는 그를 떠난다. (유키코가 이별을 통보하는 p.138 아래에서 3번째, 5번째 줄을 음미해 보시길.)

쿠와 모모가 야마사키와 함께하게 된 내력이 밝혀지는데, 그건 바로 잡지취재과정에서 알게 된 '가나짱'이란 여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월간 에레쿠트의 '신주쿠 풍속아가씨 스토리'란 기획물을 통해 인기를 얻게 된 가나짱이 여기저기서 시기를 받고 몸도 마음도 지쳐 야마사키 집으로 오게 되고, 그녀는 강아지 두마를 사달라고 부탁한다. 그 강아지가 바로 쿠와 모모. (이 부분에서 오사키 요시오의 다른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아디안텀 블루'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p.198 상당히 흥미로웠다)

<파일럿 피쉬>를 읽고 상당히 많은 생각을 했다. 저자가 '파일럿 피쉬'를 통해,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찾기 위해서…. 오사키 요시오가 여기저기 던진 화두는 한두번 생각만으로 고개를 끄덕이기엔 너무나 심오하다. 특히, 이야기에 있어 모리모토의 존재의미, 파일럿 피쉬와 어항에 대해 깊이 있게 언급한 근본 이유, 요시코 가나짱 나나미가 야마사키에게 또는 이야기에 있어 가지는 의미, 월간 에레쿠트의 편집장 사와이의 존재이유와 죽음직전에 퍼부었던 말들의 의미 등등 더 이해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여러번 읽으면서 조금씩 음미해야 할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품이라 생각한다. 조만간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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