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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널 사랑해
교코 모리 지음, 김이숙 옮김 / 노블마인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군대에서였다. 유키의 담담한 서술에 가슴을 내맡기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굳이 이 얘기를 꺼내는 건 그 당시와 이 책을 읽은 후 감정이 워낙 강렬하게 이어져 있어, 둘을 떼어 놓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회에 나와 다시 읽으려 찾아보니 제목이 바뀌어 있다. 원래 한국어판도 원제처럼 '시즈코의 딸'이었는데, '그래도 널 사랑해'로…묻혀있는 좋은 작품에 새로운 옷을 입혀주고 싶었나 보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어가며 처음 느꼈던 감정을 되살렸다. 사람의 감정을 출렁이게 한다는 거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해내고 있다. 충격적인 사건의 한가운데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담담히 그리고 당당히 성장하는 유키의 모습을 통해…
"가스는 드디어 단내가 났다. 불결한 달콤함이었다. 시즈코는 그 냄새를 맡자 어릴 적 등굣길에 본 조그맣고 노란 들꽃이 생각났다. 작은별 모양의 그 꽃에서 불결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꽃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가을이면 꽃은 하얀 솜털로 변해 사방으로 날아다녀 시즈코의 머리카락에 묻었다. (중략) 시즈코는 종이조각을 흩뿌렸다. 색종이 조각처럼, 흰 벚꽃 잎처럼, 서까래에서 허공으로 떨어지는 떡처럼, 종잇조각들이 떨어지는 걸 지켜보다가 시즈코는 육박해오는 어둠에 굴복했다." (p.16-17) 섬뜩하다. 시즈코의 죽음이 섬뜩한게 아니라, 죽음에 대한 놀라운, 어찌보면 환상적이기까지 한 묘사가 섬뜩하다.
유키는 '자기가 이런 짓을 저지른다 해도, 널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시즈코의 편지내용을 떠올린다. 시즈코는 유키에게만 작은 메모를 남겼을 뿐 어느 누구에도 유서 같은걸 남기지 않는다. 시즈코가 남편에서 쓴 편지를 마지막에 찢고 흩날리는 부분은 그녀의 상실감이 절정을 지나 넘쳐 흐름을 암시한다. 유키에게 시즈코의 빈자리는 크다. 이어지는 시즈코의 장례식, 아버지의 재혼 등은 유키의 시각으로 아슬아슬 세밀하게 묘사되는데, 사춘기 소녀의 슬픈 감수성이 문장 하나하나에 묻어있다.
유키는 과연 자기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에 대해 직접 언급되는 부분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비판적이고 냉소적이다. 다음 장면을 보자. 결혼식(아버지의 재혼)때 신랑, 신부, 하객들이 다 같이 마시는 사발의 곡주, 유키가 사발을 받게 되자…'유키는 체중을 가득 실어 바닥에 뒤꿈치를 대며, 사발을 테이블에 떨어뜨려 산산조각 내버렸다, 장례식날 아침, 엄마의 영혼이 아버지의 집이나 그 집안의 어느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게 아버지가 엄마의 밥그릇을 현관 층층대에 던져 깨버린 것처럼…"(p.41) 사발을 깬 건 아버지에 대한 유키의 반발이다. 시즈코가 죽자마자 다른 여자와 재혼해버린 아버지에 대한 반발. 생각해보자. 아내가 죽었는데, 슬퍼하지는 못할 망정 귀신이 붙을 줄 모르니 밥그릇을 깨야한다며 층층대에 내던지는 그런 남편이 과연 아내에 대한 애정이 있을까? 시즈코를 그토록 깊은 외로움과 슬픔속으로 내던져 버린건 과연 누구였을지…왠지 그가 미워진다.
아버지와 새엄마 사이에서 위태위태 견뎌가던 유키. 그녀의 마음속엔 항상 시즈코가 있다. 부엌에 남겨진 도자기, 엄마가 하던 스카프등 시즈코의 작은 흔적을 따라 유키는 시즈코를 추억한다. 그런 유키에게 있어 새엄마는 시즈코를 죽게한 원흉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즈코의 눈을 피해 수년간 만나오며 시즈코가 죽기만을 기다려 온 두사람' 그것이 유키가 이들에 대해 가지는 감정의 근원이다.
"넌 폐쇄적이고 교활한 애야, 유키. 왜 날 그렇게 끔찍한 계모로 만드는거야? 해마다 옷을 사주잖니, 그런데 넌 내가 그런 의무를 행하지 않는것처럼 군단 말이야" / "일부러 그런적은 전혀없어요. 가장 하는건 당신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주위에 있을때면 날 좋아하는 것처럼 굴잖아요. 우리모두 행복한것처럼 행동하잖아요. 난 꾸미지는 않아요. 당신이 싫어요!"(p.133)
유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나, 아니 아버지와 새엄마를 피해 먼지방의 미술전문대학에 진학한다. 거기서 만난 이사무와의 짧은 사랑…유키는 엄청난 시련속에서도 자신을 놓지않고 성장한다. 유키를 덮친 그 엄청난 시련과 고통은 그녀에게 어떤걸 남겼을까…? 유키의 애잔하고도 가슴아픈, 그래서 아름다운 이야기, 많은 이들이 함께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