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지의 표본
오가와 요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수첩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그녀는 섹스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책을 덮고 나서 제일 처음 든 생각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보여준 오가와 요코의 참신한 이야기전개는 인상적이었다. 자연히 <약지의 표본> 역시 많은 기대를 하고 손에 잡았다. 이 작품은 표제작 [약지의 표본]과 [육각형의 작은방] 두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먼저 [약지의 표본]을 살펴보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나'가 등장한다. 그녀는 사이다공장에서 일하다 약지손가락 끝 살점을 살짝 떼이는 상처를 입은 여성...그녀는 사무원을 구하는 표본실의 구인광고를 보게되고, 표본전문가 데시마루와 만나게 된다. 데시마루의 표본실이 있는 곳은 퇴락한 여성전용아파트를 개조한 곳으로 지금은 노부인 두명만이 살고 있다.

표본실은 일반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 예를들어 악보속 음악, 소녀의 얼굴의 화상흔적등도 표본 해준다. 이 점에 표본전문가 데시마루는 이야기내내 미스테리한 인물로 부각되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난 그에 대한 이미지를 굳혔다. 데시마루는 비정상적, 한마디로 변태에 정신이상자다.

여성전용 아파트에 아직 살고 있는 한 노부인은 그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곳이 표본실로 바뀐지 한참 되었는데, 대부부의 아가씨가 1년이 안되어 다들 그만뒀어. 뭐, 그만둔다는 표현이 옳은지 어떤지는 의문이지만, 느닷없이 뚝, 안보이는거야. 공기에 녹아든 것처럼 없어져 버려. 아무 인사도 없이…(중략) 그나저나 그 데시마루라는 사람도 정체불명이야"(p.99) 표본실 여직원들은 어디로 간걸까? 갑자기 전부 어디로 사라진걸까?

제일 처음 언급한 섹스얘기를 해야겠다. 데시마루는 종업원인 그녀와 섹스를 한다. 한참 표본이란 색다른 세계에 빠져 몰입하던 내게 그들의 섹스는 한마디로 어이없음을 넘어 실망감까지 안겨주었다. 흥미로운 소설이 갑자기 신파로 전략해 버렸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들이 섹스를 하기 전후 서술을 보면 데시마루의 본색을 추론해 볼만한게 꽤 있다. 내가 보기엔 그는 여직원들을 채용하고 접근해서, 농락하는 전형적인 파렴치한이다. 그런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몸을 맞기는 그녀 역시 내가 보기엔 철없는 철부지 아가씨에 불과했다.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없이 소설에 몰입한다는 건 무척이나 힘들다. 하지만 지금까지 읽은게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읽었고, 섹스와 그로 인해 야기된 신파분위기만 배제한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꽤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도 데시마루와 추잡한 행동(그의 행동으로 추단되는)과 그녀의 철없음은 신파이상으로 봐 줄 수 없다. 한마디로 그녀는 섹스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육각형의 작은 방] 이 이야기는 꽤 환상적인,미스테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다. 그녀는 의사인 남친과 아무 이유없이 헤어진다.(정확히 얘기하면 차버린) 그녀가 왜 미치오와 헤어질 결심을 했는지, 그녀는 아무 이유없다고 하지만, 육각형방의 주인의 유즈루와 대화를 볼때, 항상 호출이 있으면 언제라도 달려가야 하는...자기보다도 일이 우선인 미치오의 태도가 한가지 이유인것 같다. 그녀는 헤어짐의 한가지 단초인 약혼식 사건(음식은 준비하다 실수로 엎어버리고 병원 호출로 병원으로 달려가 버린 미치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다.

"레스토랑에서 메인 디시를 한 입 먹자마자, 침대에서 벌거숭이가 되자마자, 그것은 자주 삐이삐이 울렸습니다. (중략) 나는 그 소리를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요. 어떤 소란스러움에도 지지 않고, 준엄하고도 정확하게 울리는 그 소리는 내 고막을 찌르고 아픔을 남기고, 죽음과 이별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그는 나를 혼자 남겨두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달려갔습니다."(p.187~188)

내가 그녀의 이별을 중요하게 부각시켰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핵심이 아니다. 모자지간인 미도리와 유즈루가 운영하는 육각형의 작은 방. 여긴 사람들이 들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는, 혼자서, 아무런 도청장치도 없이....그런 곳이다. 우연히 저 곳을 알게된 그녀는 당황해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 그녀가 하고 싶어하던 말들을 쏟아낸다. 저 이야기를 들으면 독자는 자신에게 고해성사하고 있는 듯한 그녀의 내면을 공유하고, 공감하게 된다. 

<약지의 표본>은 독자에 따라 평이 크게 엊갈릴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난 기대 이하였지만, 프랑스에서는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데시마루와 그녀의 관계를 하나의 사랑으로도 봐줄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건 뭐 독자마다 다른 반응이 있겠지. 한번 데시마루와 그녀의 관계를 평가해 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