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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보낸 백 년
조용미 지음 / 샘터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두꺼운 양장도서에 광적호감을 가지고 있는 내게 150페이지 남짓한 작디작은 이 책이 곱게 보였을리 없다. 두께나 겉모양이 그 책의 깊이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건만, 아직껏 저런 취향을 버리지 못하였으니…쩝. 그렇다. <섬에서 보낸 백 년>에 대한 첫인상은 딱 저 정도였다. 허나 보면 볼수록 예뻐보이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묘하게 정이 가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이 또 그러하였으니 내 속을 내가 알다가도 모르겠다.
<섬에서 보낸 백 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외딴섬에서의 여유와 고독을 아름답고 유려한 문체로 승화시킨 작품' 이라고나 할까…. 칭찬과 미사여구가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이 책은 그만한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다. 작품 전체에 녹아있는 저자의 시적인 문체는 날 사로잡았다. (문체가 너무 아름다워 살펴보니 저자는 시인이군요)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빈집에 들어간 나는 동백나무 아래 펼쳐진 한뼘만한 머위밭에 쪼그리고 앉아 또 한참을 머물다 이번엔 멀리서 새들이 지져귄다. 이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고, 곧 해가 진다고, 사람도 시간도 마냥 너를 기다리지는 않는다고.'(p.37.38) 문장하나하나가 전부 시라고 해야 할 정도로 감미롭고 아름답다.
이 책은 저자가 남해의 어느 섬에서 보낸 봄 한철의 기록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그 섬에서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을 모르고 지냈다. 대신 바람과 나무와 햇빛과 달빛과 바다와 등대와 먼 섬들과 고깃배와 물고기들과 안개와 비와 돌담과 벼랑과 가물거리는 불빛과 짙푸른 밤들과 함께 했다.(저자의 말중) 문명의 이기를 떠나 자연속에서 그녀가 느낀 것은 무었일까? 고요? 평온? 외로움? 저자가 '남해의 어느섬'에서 자연과 하나가 될 때 난 어디서 무얼 했는가를 떠올렸다. 그랬군. 그때 난 너무도 다른 지구 한귀퉁이에서 아둥바둥 삶의 한페이지를 끄적이고 있었다. 너무도 다르게….
저자는 자연속에 머물러만 있지 아니하고, 자연과 함께하며 친해지길 꿈꾼다. 난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날이 개고 학꽁치를 잡으로 나갔다. 밑밥을 던지고 조금 지나자 물 밑으로 학꽁치 떼가 몰려들었다. (중략) 학꽁치는 매끈하게 반짝이는 은빛비늘아래 형광빛이 도는 선명한 노란 옆줄과 밝은 코발트빛 눈꺼풀을 하고 있었다. 저를 잡았던 손바닥 가득 투명한 비늘과 비린 내음을 묻혀 놓고 풀쩍 바다로 뛰어내린, 내가 놓친 학꽁치는....'(p.42) 그녀에게 있어 이 섬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S가 주인과 함께 공룡머리쪽으로 내려가고 한나절 방에 가만 낮아 있으니 새들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내려와 저희들끼리 모여 마구 지저귄다. 염소들도 마당에 잔뜩 들어와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 나는 그들의 평화로움을 깨지 않으려 한동안 꼼짝 않고 없는 듯 있었다.'(p.47)
문명의 이기를 떠나 자연과 함께 하는 그녀에겐 멸치하나도 새롭고 소중하다. '배를 타고 섬을 한바퀴 돌았다. 배가 동굴쪽으로 천천히 들어가 멈추어 있을때 물밑을 보자 멸치떼가 은빛으로 일렁였다. 멸치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멸치가 물 밑에서 뿜어내는 은빛이 수면에서 햇살과 만나 눈이 시리고 부셨다.'(p77) 묘사하나하나가 생동감 넘처서 은빛을 뽐내며 요동칠 멸치떼 모습이 머리속에 그려진다.
위에서 나의 양장도서에 대한-그것도 두꺼운-이유없는 편애를 고백했는데, 이 책은 내게 그러한 편애가 얼마나 근거없는지 이야기 해주었다.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감미로운 묘사와 서정성을 보여준 작품이라 생각한다. 책읽는 내내 난 저자가 있던 '남해 어느 섬'에 가 있었다. 저자를 멀리서 바라보며 함께 자연을 느꼈다. 저 한마디로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설명되었을거라 믿는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