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프 -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
메리 로취 지음, 권 루시안 옮김 / 파라북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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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랫동안 죽음과 관련해서는 '완전한 무'라는 개념에 느끼는 관념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를 버릴 수 없었던 것도 그 탓이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한 게 있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시체가 남는다.

이 몸을 그럼, 내 것이라 부를 수 있나. 메리 로취는 '한때 내 것이었던 몸'이라고 표현하는데, 어느 순간 그조차도 적절치 않은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내가 죽은 후 물론 나는 아무 감각도 못하겠지만, 내 시체가 그런 모양으로 썩어들어가거나 혹은 불에 태워지거나... 만약 시신기증을 한다면 칼로 후벼파이거나... 이건 도대체. 머리로 논리적인 사실들을 알긴 알겠는데 계속해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이 드는 건...

하지만 그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죽음의 얼굴이란 것은. 근육의 텐션이 풀려서 배설물이 나오고 어쩌고 하는 얘긴 충분히 들어 알고 있지 않았는가. 게다가 썩지 않는 시신이란 게 더 끔찍하지 않나. 그 썩는 과정이란 게 시쳇물이 흐르고, 구더기가 꼬물대고, 살이 터지고, 하는 거라고 해도. 그게 결국 자연의 섭리이지 않나. 그걸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 않나. '썩어없어질 육신'이라는 말을 그간 얼마나 상투적인 어구처럼 썼나. 그런데 나는 '썩어없어질'이라는 말을 제대로 몰랐던 듯싶다. 정말로 '썩어없어지는' 그 과정이 묘사된 글을 보자 이제껏 내가 '썩어없어질 육신'같은 말을 아무 생각없이 참 쉽게 써왔구나, 생각이 들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사체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까 영화에서의 신체 훼손 장면이든 케이블 의학방송에서 수술을 하는 장면이든 꺅꺅대며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한, 죽음을 무조건 고통스럽고 무섭고 피해야 할 무엇으로 주입받은, 또 하나의 관념인 셈이다. 그러고 나면 내가 죽은 후 내 시신을 장기 기증을 하건 '퇴비'로 쓰이게 하건, 아니면 뇌사 상태에서 장기를 기증하건, 오히려 이 사체를 '잘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는 거다. 사체를 고압냉축하여 액화시켜 하수구로 흘려보내거나 건조시켜 퇴비화하는 것에 묘한 불편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은 엄연히 공해가 가장 적은 사체 처리 방식이다. 인간의 사체가 지구상의 ' 재활용 불가 쓰레기' 혹은 '유해물질'이 되는 것만큼 슬픈 것은, 또 죽은 이에게 진정으로 모욕적인 것은 없을 거란 생각도 든다.

최근 미국이나 특히 스웨덴 등에서 얘기되고 있는 사체의 퇴비화나 액화는 장례의식이 필요이상으로 화려하고 낭비적인 것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그 사람들과 생각이 조금 다르다. 장례식이란 원래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문화란 그렇게 단순하게 경제적이고 실리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온갖 상징과 은유의 형태를 띈다. 동양의 제사 역시 (원래의 목적은) 죽은자가 아니라 산자를 위로하기 위한 의식이었고. 이런 연장선상에서 쓰잘데기 없이 사치하거나 화려하지 않게 하는 범위에서, 나는 내 유족들이 소박한 규모의 장례식을 치루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은, 영화 <맨 온 더 문>에서 앤디 카우프먼의 장례이 그러했듯,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함께 웃고 춤을 췄으면 좋겠다.

하여간, '나의 (미래의) 사체'에 대해 드는 이런저런 감정을 제외한다면, 이 책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책이다. 일단 저자가 충분히 존중감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유머러스한 데다, 번역자도 일부 표현을 제외하곤 매우 센스있게 번역해 놓았다. 그 일부 표현이라는 건 도저히 한국말로 제대로 유머러스하게 옮기기 힘든 그런 표현이었을 게다. 읽다가 나는 어떤 문장들은, 도대체 이게 원문이 뭘까? 싶을 정도로 감각있는 한국 문장을 보기도 했다. (대체로 원문을 궁금해 하는 건 번역이 형편없어 한글 문장 자체가 뜻이 모호할 때였는데 말이다.)

저자가 꼼꼼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각종 사체에 대한 전세계의 문헌들과 역사들 역시 재미있고 흥미롭다. 항목도 다양해서, 저자는 기증된 시신에 행해지는 수술연습이나 해부 혹은 뇌사 (및 뇌사자의 장기이식) 등의 문제는 물론 시체에 가하는 총상 실험이나 운전 충격실험, 성의(聖衣) 증명 실험(예수의 수의의 진위 논쟁), 낙하실험 같은 것 외에도 식인 풍습(혹은 루머)같은 다소 껄끄러운 주제도 사정없이, 예의 그 유머감각을 발휘해 건드린다. 밀화인(蜜化人)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는데, 가히 사체에 대한 전세계적인 인문학적 / 역사학적 사실들이 총망라된 듯하다. 이것이 메리 로취 특유의 유머와 넉살에 의해 무겁지 않게 술술 넘어간다.

새삼 우리가 '죽음'이라는 것을 정의하는 방식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 '뇌사'만 해도 한국에선 아직 거부감이 남아있는 듯하고, 더욱이 '안락사'는 혹은 '낙태' 등의 문제는 여전히 매우 민감한 이슈다. 어쨌든... 죽은 사체들이 이제껏 우리에게 얼마나 수많은 유용한 지식과 현대의 과학과 문화적 풍성함을 제공해 주었나, 생각하니, 과연 사람이란 살아있을 때는 물론 죽어서도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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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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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도에 일련의 폴 오스터의 소설들을 연달아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동행]을 제외하곤 도통 내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 분명 그 시점까지 나온 폴 오스터의 책을 '다' 읽은 건 아니었다 - ,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이 어떠한 건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이전에 내가 쓴 감상문들을 뒤적거려보니 [동행]과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을 차례대로 읽었다고 되어 있다.) 다만 폴 오스터의 소설들이 내게는, '우연'이라는 키워드로 관통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들만 기억난다. 그리고 그 우연이라는 게, 보통 소설가들이 구성에 실패해서 궁여지책으로 마구 끼워넣는 그런 우연이 아니라, 폴 오스터 세계의 인물들의 삶을 관장하고 풀어나가는, 그들의 삶과 사건들을 지배하는 법칙으로서의 우연이었다고 느꼈던 그 느낌들만. 그리하여 미욱한 인간, 당하는 인간에겐 그것이 '우연'으로 느껴질지라도, 결국은 어떤 거대한 필연의 법칙의 일부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것만. 어쩌다 오랜만에 다시 접하게 된 폴 오스터 세계의 새로운 책 [신탁의 밤]도 비슷한 느낌이다.

주인공은 시드니 오어라는 작가이다. 저승의 문턱까지 갔다왔으나 이제 몸을 회복하고 아울러 자신의 사회적 생활도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그는 어느 날 중국인 장이 운영하는 문방구점에서 포르투갈제 공책을 사오면서 거기에 이야기를 써나간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시드니 오어의 이야기와, 시드니 오어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 닉 보언의 이야기와, 책 편집자인 닉 보언이 새로이 받아들게 된 소설, 그리고 그 소설이 그리고 있는 예언의 능력이 있는 사람의 삶. 그러니까 소설 속에 소설이 있고 다시 그 속에 소설이 있어 겹겹이 쌓인 이야기들이 마구 풀어헤쳐진다.

게다가 포르투칼제 공책에 시드니가 쓰는 이야기는 닉 보언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자기 부부의 친구인 존 트로즈에 대한 이야기도 쓴다. 또 한편으론 H.G.웰즈의 [타임머신]을 원작으로 새로운 영화 시나리오물도 쓴다. 이 이야기들은 각각 다 다른 이야기들인 듯하면서도 긴밀하게 연결이 돼 있다. 닉 보언의 이야기를 쓰며 현실을 예언하고, 자신이 한번도 의식의 영역으로 떠올리지 못했던, 자신에겐 숨겨졌던 이야기들을 어느 날 갑자기 명료하게 깨닫고(아내와 트로즈의 이야기), 또 미래와 과거가 교차하며 어떤 사건을 막고자 하지만 실패한 채 결국 운명은 실현된다([타임머신]의 시나리오 내용).

번역자는 책후기에서 말이 현실을 구성하고 예언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나는 요 근래에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주제, 그러니까, "인간은 애초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무의식에 밀어둔 채, 이것을 '다시 알기' 위해 어떤 자극과 계제를 필요로 할 뿐이다"라는 플라톤의 가설을 떠올린다. 플라톤의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자신이 쓴 허구가 일종의 신탁이 되어 현실에서 실현되는 것이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이나 내가 몰랐던 일을 예감하고, 나의 예감이 나중에 사실로 밝혀지는 일 등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 인간이 여섯번째 감각(육감, The Sixth Sense!) 혹은 직감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는 의외로 방대한데 이것이 의식의 영역에서 논리와 합리에 의해 정보처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일뿐 무의식 영역에는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라 가정한다면, 우리가 어느 날 충격적인 어떤 사실을 접하고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웬지 이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느낌'이 든다거나 - 데자뷔? - 혹은, '사실은 난 이걸 알고 있었고 예감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인정했을 때 느끼는 또다른 작은 놀라움과 당혹감이 충분히 설명된다. 그리고 폴 오스터가 [신탁의 밤]에서 다루는 내용들이란 결국, '허구가 현실로 성취되는' 뭔가 신비하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깨닫진 못해도 아주 종종 일어나는 일련의 흐름들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고보면 이것은 다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어떤 손길과 연결된다. 인간이 '잊어버렸기에' 혹은 '알기를 두려워하기에' 많은 부분이 묻혀진 채, '알지 못한다고 여겼던' 것들을 '예감'하는 것이란, 그것이 아주 느슨하기는 해도 어떤 일관된 흐름에 의해 일어나는 일들이라 할 수 있을 거다. 무의식의 영역에 밀어둔 상태에서 결국 '우연'이라고밖에 불릴 수 없지만 사실은 필연의 법칙들의 일부인...  그렇게 보이지 않는 손이 간섭하며 일어나는 사건들, 일들. 아마도 우리가 그걸, '운명'이라고도 부르는 것도 같은데... 폴 오스터의 주인공들은 이런 운명이라는 것들에 대해 딱히 부정하거나 도전하려 하지도, 적극적으로 받아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묵묵히 견뎌낸다. 그 손길 혹은 법칙으로 인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하긴, 그럴 도리밖에 없지 않은가.

그 공책 안의 세계를 중심으로 놓고 다시 생각해 보자면, 시드니의 소설에 존재하는 닉 보언과, 존 트로즈, 또 미래로 타임머신 여행을 한 사람들은 각각의 세계에 각자 존재하는 사람들이고, 이 각각들은, 자신들의 서로 다른 세계가 하나의 우주에 펼쳐진 것을 각각 신기해 하겠지만, 이들은 시드니 오어라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의 창작의 인물이거나 지인이거나 다른 소설의 세계에서 불려온 사람들이고, 결국 시드니 오어라는 인물에 종속되어 있는 느슨하긴 해도 하나의 필연의 법칙의 지배 하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종국엔 비슷한 운명을 맞이한다. 한 사람은 지하 방공호에 갇히고, 다른 사람은 이루지 못할 사랑과 실패한 결혼, 그리고 아들과의 관계가 잘못 얽힌 미로에 갇히고, 타임머신을 탄 과거의 그가 살던 시대를 기준으로 미래에 갇힌다. 그리고 박박 뜯겨져 시드니의 집에서 떨어진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그들이라고 자신들의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박박 뜯겨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즉 파멸 중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짐작이나 했겠는가. [신탁의 밤]의 주인공 시드니의 관점에서야 그 각각의 허구의 인물 / 실제를 반영한 인물들이란 자신이 노트에 쓴 이야기의 인물에 불과하고, 그리하여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걸 (소심하게) 두려워하며 노트를 박박 찢어 쓰레기봉투에 담아 브룩클린의 어느 쓰레기장에다 버릴 수밖에 없는 무엇이었지만 - 사실 소설가가 자신의 완성되지 않은 트리트먼트 상태의 이야기를 쓰레기통에 쳐박는 일이 얼마나 흔한가 - 그렇게 생겨난 허구 세계의 인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의 운명이란 어쩌다 존재하게 되어 기막힌 우연의 일련의 사건을 겪다가 결국 어이없는 파국을 맞은 꼴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건, 오늘도 오늘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비슷한 꼴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어떤 창조주를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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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 메피스토(Mephisto) 14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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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이어리]를 읽다보니 그런 의문이 든다. 내가 이제껏 척 팔라닉의 책을 제대로 읽긴 읽었던 것일까? 나는 [파이트 클럽]으로 시작하여 [질식]을 읽고, [서바이버]를 경유해 [자장가]에 거친 뒤, [인비저블 몬스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다이어리]에 도달하면서, 그간 너무나 익숙하다고 느껴졌던 팔라닉 월드가 갑자기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건 다만 [다이어리]의 화자가 처음으로 여성이고, 책날개의 척 팔라닉 사진이 [다이어리]에 와서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고, 이제까지의 주인공과 달리 [다이어리]의 주인공이 처음으로 도시에서 떨어진 외딴 섬, 외부의 질서나 도덕과 상관없이 자체의 폐쇄적인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기 때문인 걸까?

주인공의 성별이 바뀌었다는 큰 차이 외에, 여전히 1인칭 화자가 기억의 열거라는 형식으로 시제를 마구 오가는 독백체라는 것, 책장을 넘길수록 미스테리가 증폭했다가 마침내 끝에 가서야 비밀이 폭로되고, 엄청난 음모 혹은 사건의 전모가 비로소 완성되고, 우리의 주인공들은 이를 악물고 이 모든 상황을 그저 견뎌내고, 예정된 파국을 모두 지나고 난 뒤 별 희망도 없이 그러나 별 절망도 없이 남겨진다는 점에서, [다이어리] 역시 명백히 척 팔라닉표 소설이다. 또한 우리의 주인공 미스티-마리 윌멋 역시, 성별만 바뀌었지 파국의 운명에 휩쓸려가는 (일견) 소심한, 그러나 이 모든 걸 실은 이미 예감하고 알고 있었던, 전형적인 척 팔라닉표 인물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이토록이나 척 팔라닉의 세계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가? 여성 주인공이기에 내가 다른 척 팔라닉 인물보다 좀더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이어리]에 와서야 비로소, 척 팔라닉의 인물들이 겪는 그 무시무시한 운명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직시하고 깨달았기 때문일까?

이제껏 내가 척 팔라닉의 인물들을, 언제나 거리를 둔 채 '구경하는' 입장이었다는 사실을 [다이어리]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렇다고 내가 미스티에게 동화되거나 완전히 감정이입한 것도 아니다. 나에겐 다른 인물들보다 미스티가 조금 더 구체적이고, 조금 더 생생하게 여겨진다. 깊이 뿌리박은 증오, 분노, 그럼에도 이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는/못하는 고갈된 에너지, 거기에서 비롯한 헛헛하고 일견 냉소적인 태도. 다른 주인공들처럼 그녀 역시 그렇다. 다만 이것이 조금 더 이해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조금 더 생생하게 느껴지고 약간의 감정이입을 한 미스티에게조차,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구경꾼'의 입장이다. 

언제나 척 팔라닉의 인물들은, 고도로 자본주의화된 현대의 도시를 배경으로, 미디어든 트렌드든 이미지가, 허상이 실제를 대체하는 현상을 겪으며 자아분열을 해왔다. 사랑이라는 말랑말랑한 것은 끼어들 틈이 없다. 조심스럽게 시도하지만 언제나 실패하고, 심지어 실패를 예견하고 있다. 잃어버린 사랑, 아니 처음부터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사랑이 언젠가 찾아오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 않는다. 척 팔라닉의 인물들은 언제나 부모 세대에 대한 격심한 증오를, 그럼에도 자신을 만든 기원임을 부정하지 못하는 딜레마를 겪어왔다. 그것은, 이 부모 세대가 자아분열의 고통을 안겨주는 지금의 현대 자본주의 도시 사회를 만든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식으로서 주인공들은, 현대 자본주의 도시 사회가 주는 달콤한 독약에 중독되어 있고, 그 사회의 시스템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의 예정된 운명은 파국임을 잘 안다. 그리하여 저항한다. 저항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파멸로 끝난다. 그럼에도 다시 저항을 계속한다. 그리하여 파멸은 반복된다.

[다이어리]의 미스티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환생을 통해서까지, 시지푸스의 노동, 아니 노동력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착취당하며, 버려지고, 저항하고, 파멸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제 [다이어리]]의 주인공은, 척 팔라닉의 소설 중 처음으로 부모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갖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자식과도 역시 소통에, 사랑에 실패한다. 자식으로부터도 소외된다. 환생이 계속되듯, 미스티의 소외 역시 계속될 것이다. 부모에게서 소외되었듯 이제 자식에게도 소외될 것이다. 자식은 나의 부모가 된다. 나는 내 자식의 자식이다. 파멸이 반복된다. 마침내 완전한, 예정된 파국에 도달할 때까지. 아이러니컬하게도 반복되는 파멸을 멈추어줄 수 있는 것은 완전한 파국, 궁극의 소멸이다.

척 팔라닉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 시대가, 이 사회가 결국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재치있는 문장의 우화와 같은 서사로 전달해주는 또 한 명의 예지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의 세계가 이전보다도 더욱 어두워졌고, 절망으로 치닫는다. 이번 달 (2005년 5월) 미국에서 출간 예정인 그의 신작 [Haunted]는 과연 여기에서 어떻게 더 나아갈지... 국내에서 출간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2003년작인 [다이어리]도 이제 고작 출간 두 달이 됐을 뿐이므로.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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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 지음, 안정효 옮김 / 한빛문화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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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페이지부터 후회를 했습니다. 맨 첫페이지의 맨마지막 줄에 있는 단어는 '엉덩이'였어요. 그 바로 앞엔 암시적인 문장이 있었지요. 그제서야 나는 다시 기억해냈어요. 그 책을 소개하던 말 중에 강간, 임신 등의 말이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책이 시작하자마자 그녀가 아버지한테 강간 당하는 게 나와버리는 건 다른 문제죠. 그녀는 아직 열네살도 안 된 자그마하고 마른 어린 여자이이인데!

눈은 그 '엉덩이'라는 단어 이후로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었어요. 서서히 호흡이 가빠졌어요. 심호흡을 해야 했지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결국 책을 덮었어요. 띠지에서 작가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광고문구를 천천히 읽었지요. 표지 디자인의 그림과 글자들을 들여다보기도 했죠. 하지만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었어요. 내 입에서는 짧은 탄식의 한숨이 새어나왔죠. 첫 페이지를 다시 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책날개에 달린 저자소개를 아주 천천히 읽었습니다. 문득 눈물이 나려는 거예요.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내키지 않아하는 손가락을 달래 마침내 두번째 페이지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책 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씰리가 나직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계속 울 수밖에 없었어요.

여기까지 읽은 당신들은 이 책이 한많은 불쌍한 어떤 여자의 비극적이고 비참한 인생에 대한 소설일 거라 오해하시겠지요. 이 책을 소개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가난한 흑인의 어린 여성으로서 당한 '파란만장 비극사'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워낙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초장에 화라라락 열거돼 버리니까요.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그건, 어떤 '불쌍한' 사람 하나를 여전히 대상화하는 방식이지요.

앨리스 워커는 그런 식의 쉬운 자기연민이나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끌어가지 않아요. 그녀는 쓸데없이 과장하지 않아요. 비극을 화려하게 치장하지도 않아요. 이 책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씰리가 하나님께 털어놓는 비밀편지 형식이거든요. 그녀는 모든 고통을 버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감각을, 생각을 스스로 정지시켜 놓은 나무같은 여자입니다. 게다가 교육의 기회도 짧았어요. 그렇기에 자신이 당하는 끔찍한 일에 대해서도 별 감정 표현도 없이 지극히 건조하게, 생략도 많이 해가며, 아주 어눌하게, 또 넌즈시 조금 얘기하다 말뿐입니다. 독자는 그래서 충격을 받으면서도 자기연민이나 동정에 마구 쉽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구요.


이 책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건 그녀의 이런 고난을 저런 고난을 겪는 곳에서가 아니라, 그녀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떨리는 가슴을 느끼면서부터예요. 그제서야 그녀는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비로소 세상을 향해 감각을 느끼고, 파고와 같은 감정을 조금씩 드러냅니다. 그녀가 비로소 '절망'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건, 강간이나 폭력 피해자일 때가 아니라, 옆방에서 그 여자(슈그)와 남편이 히히덕거리며 밤을 지내는 소리를 들으면서예요. 그리고 자신과는 너무나 비교가 되는 아름답고 당당한 슈그가 만인의 주목을 받으며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을 보면서지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고 느끼면서부터예요. 그녀는, 그녀의 삶은, 비로소 오랜 잠에서 조금씩 깨어납니다. 제가 엉엉 울어버렸던 것도 바로 그런 장면들에서랍니다.

 

나 슈그를 쳐다보고는 가슴 조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고통이 어찌나 심했는지 손으로 가슴을 눌렀어요. 나는 누가 보건 말건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어요. 나는 내 꼴이 실었고, 내가 입은 옷도 한심하게 생각되었어요. 내 옷장에는 교회에 갈 때 입는 옷 말고는 하나도 없죠. 그리고 미스터 ____는 몸에 꼭 끼는 빨간 드레스 입은 슈그의 발 쳐다보았어요. 그녀의 머리카락이 파도치며 빛났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줄로 흘러내린 눈물이 턱에서 만났어요.
그리고 나는 뭐가 뭔지 알 길이 없었어요.
그이는 슈그 쳐다보기를 좋아해요. 나도 슈그 구경하기 좋아하고요. 하지만 슈그는 우리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봐요. 미스터 ____를요.
하지만 그것 당연한 일이죠. 나 그걸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면 왜 나 이토록 마음이 아플까요?
나 잔에 닿을 정도로 잔뜩 머리 떨구었어요.(p.86 ~ 87)

 

이후의 이야기는 여러분들의 즐거운 독서를 위해 생략하렵니다. 다만 이 말씀을 드리곤 싶어요. 이 책에 나오는 여자들은 씰리뿐 아니라 소피아, 네티, 슈그, 메어리 아그네스, 모두 사랑스러워요. 물론 각각의 단점도 답답한 점도 있지만, 용감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또한 네티가 아프리카로 건너가면서 이 소설은 단순히 미국 내 인종간 갈등 - 인종차별 - 의 문제뿐 아니라 흑인이라는 인종의, 말하자면 민족주의와 비슷한 이즘의 긍정적인 면과 한계, 흑인임에도 어쩔 수 없이 제국주의의 첨병이 될 수밖에 없는 미국인의 한계 등을 섬세하면서도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날카롭게 짚어나갑니다. 정말 대단해요. 게다가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해피 엔딩입니다.

불만도 없지 않지만, 그건 스포일러가 될 테니 마이리뷰에 쓰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이 책의 단점으로 느끼는 그런 불만지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름다움에 대한,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 아름다운 책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이성과 논리의 차원이 아니라 다분히 영혼과 성찰의 차원에서 말이죠. 무엇보다도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은, 오만한 완벽주의자의 기질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가혹한 심판자처럼 구는 게 아니라, 지금의 못나고 부족하고 한심한 부분들을, 나의 장점과 예쁘고 멋진 면들과 함께,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가 절실하다는 사실도. 이 책은, 새로운 내 인생을 꿈꿀 수 있도록 힘과 격려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아주 나지막하고 따뜻한 어루만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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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 책 2005-05-1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주에 당선된 리뷰도 그렇지만, 노바리님 리뷰는 책을 읽고 싶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 같네요..^^

노바리 2005-05-11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아마 제가 줄창 보도자료를 줄창 써내는 사람인지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
앨리스 워커의 책이 참 멋져서, 다른 책들도 찬찬히 읽어나갈 예정이에요. [더 컬러 퍼플]의 후속편 격으로 씰리의 며느리인 타쉬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더군요. 알라딘엔 품절로 떠있는데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최근에는 앨리스 워커의 신간 [새로운 나여, 안녕]도 출간되었답니다.
 
피버 피치 -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피버 피치]는, 좀 점잖게 말하면, 어떤 열렬한 팬덤에 대한 보고서다. 하지만 툭하면 거품 물고 쓰러질 정도로 몰입하며 지름신의 강림을 적극 팔벌려 맞곤 하는 소위 빠순모드 강한 나나 친구들와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어떤 열혈 빠순모드에 대한 고백서"라 할 수 있을 거다.내 빠순상대 1순위가 영화라면 그의 상대가 영국 프로페셔널 축구, 그 중에서도 1부 리그 팀인 아스날이라는 것만 다를 뿐, 이 사람, 빠순모드에 대해 아주 제대로 알고 있다. 재미있는 건 나의 빠순모드의 대상에 이 닉 혼비도 이미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어바웃 어 보이] 한 권과,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닉 혼비식 체취로.

[어바웃 어 보이]를 버스 안에서고 지하철 안에서고 거의 미친 듯이 킬킬대며 보고는 "나의 사랑하는 책" 리스트에 망설임 없이 넣어놓고, 닉 혼비의 책이 한국엔 도대체 왜 이리도 안 나오는 거냐며 투덜대고, 내가 아는 범위의 출판사에 다니는 모든 사람에게 제발 닉 혼비 책을 내달라고 졸라대고... 했던 건 변명컨데 결코! 나만 했던 행위가 아니다.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던 격한 반응을 보이면서 나와 공감대를 형성한 친구가 적어도 한 명이 있고, 또 한 명은, 물론 나처럼 그런 격한 반응으로 빠순 기질을 마음껏 드러내는 스타일의 친구는 아니지만, 조심스레 닉 혼비의 책 저작권을 추적했다. (그는 출판사에 다니고 있다.)

닉 혼비는 나나 내 주변 친구들이 종종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곤 하는 빠순행위들을 대상만 바꾸어 그대로 전시해 놓고 있다. 심지어는 일련의 빠순행위 - 남들이 보기엔 강박증에서 기인한 온갖 기행과 괴벽 - 을 스스로도 한심하게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엔 슬쩍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까지 톡까놓고 밝혀놔 버려서 민망해 하면서도 키득댈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하면, 내 비록 지난 월드컵 때마저도 경기를 전혀 안 볼 정도로 축구를 안 좋아하고 또 전혀 모르는 사람임에도 그가 축구와 관련해 보이는 온갖 기행과 강박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가 써내려간 글을 보고 있노라면 이 부분에선 얼마나 스스로 쪽팔려하며 썼을지, 저 부분에선 또 얼마나 피를 토하며 썼을지, 조 부분에선 남들이 다 돌 던질 것이라 얼마나 단단히 각오하며 썼을지, 요 부분에선 얼마나 이상한 시선을 각오하며 썼을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뿐인가. 그 사람이 쓰는 어떤 문장에 대해선 그래, 요쯤에서 이런 자기방어 기제로서의 발언 한 마디를 아니 할 수 없지, 하면서 고 심리를 빤히 꿰뚫어볼 수 있을 수밖에 없더란 거다. 만약 닉 혼비가 나를 개인적으로 알았더라면, 그 사람 역시 내가 영화에 대해 하고 있는 짓거리들의 속내를 빤히 다 꿰뚫어보았을 것이다.

굳이 어른이 되려고 하지 않고, 혹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자기자신을 바꾸고자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철딱써니없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 여유만만하고 유연한 삶의 자세. 물론 그 역시 그렇게 살기 위해 많은 걸 치러야 했을 거다. 하지만 자신을 부정하는 방향이 아니라, 아무리 유년기에 여전히 머물러있다 한들 그런 자신을 그대로 긍정하며 그걸 그냥 담담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바로 그때 그 지점에서는 또다른 종류의 어른스러움이 획득된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그렇게 살아도 살아지는 사회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각 개인들의 성인이 되는 나이가 계속 더 뒤로 유예되는 게 현대사회의 특성이기도 하다. 과거 공동체 중심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과 오늘날 특히 이 자본주의 사회의 대도시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성년의 나이가 계속해서 늦춰지는 건 단순히 피터팬 컴플렉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개인의 탓이 아니라, 최대한 오랫동안 청소년기에 묶어두려는 사회 시스템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사회로 올수록 성년식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도 이 탓이다. 덧붙여 신화학에서 통과의례 이야기를 아주 슬쩍 끌어오자면, 현대사회로 올수록 통과의례는 거세되었다.) 과거의 사고가 여전히 남아있는 현대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우리가 여전히 키덜트로 남기를 부추키면서, 또다른 한 편으론 '빨리 어른이 돼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만큼 착취를 당해달라고' 부추킨다. 개인은 이 사이에서 당연히 정신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에서, 인생의 고난과 슬픔의 무게를 감당도 못할 거면서 직접적으로 맞으면서 허덕대고 자기연민에 시달리는 것보다, 이렇게 세상과 나 사이에 축구, 혹은 또다른 '열렬한 팬덤 대상'을 끼워넣어 완충제로 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그대로 인정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 미쳐버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엔 꽤나 유용한 요령이 된다. 어쩌면 더 나아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른이 되는 방법은 닉 혼비식의 이런 방법일지 모른다.

문장이 아주 유려하다. 비록 번역이라는 필터와, 교열과정에서 채 잡아내지 못한 비문들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어바웃 어 보이]와 이 책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어떤 특성들은 분명 닉 혼비의 것이라 추측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솔직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재치있는, 그렇다고 억지로 비아냥과 이런 걸 과장해서 짜내지 않은 자연스러운 문체. 그리고 그런 문장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낙관론자 특유의 유머와, 따뜻한 위로와, 소통에의 의지. 감동이다. (제발 출판사들은 닉 혼비의 다른 책들도 내달라! 내달라! 내달라~~!)

고백하자면, 축구에 대한 닉 혼비의 그 열정과 '어쩔 수 없는 운명'에서 비롯한 행태를 본다면, 영화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지나치게 깍쟁이같아서 감히 '영화팬'이란 말을 못 하겠다. 영화를 직업으로 삼은 건 어쩌면 닉 혼비처럼 솔직하지 못했던,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앞에서 정신분열하던 나의 마지막 타협책이었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진작 닉 혼비를 만났더라면, 시행착오가 조금은 줄어들었을텐데.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빠순모드가 강해지는 나는, 사실은 이제서야, 나를 억누르고 있던 무언가에서 조금씩 해방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에 굳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토닥여주는 닉 혼비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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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05-05-11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잘봤습니다. 저도 어바웃 어 보이 보고 닉 혼비 책을 원서로 살까, 말까 고민하면서 모사이트의 카트에만 넣어뒀었더랬지요. 결국 귀찮아서(그리고 사봤자 안읽을테니까?;) 내비뒀더니만 어느날 품절-_-. 괜히 아쉽고.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노바리 2005-05-1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제가 축구를 알았더라면 이 책을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겠지만,
몰라도 재미있었어요. 다만 별이 네 개뿐인 건 제게는 [어바웃 어 보이]가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죠. ^^;  즐거운 책읽기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마태우스 2005-05-1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어요. 노바리님이 좋아하실 줄은 몰랐어요. 축구 얘기라서요. 근데 제 생각이 짧았군요. 어느 종목이나 적용이 가능한 책이었네요. 글구 역쉬 님은 리뷰의 제왕이십니다.

노바리 2005-05-15 0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홍 마태우스님 리뷰는 아주 예전에 넘 재밌게 잘 읽었지용. ^^


강한벌레 2005-05-21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 책이 드디어 우리 나라에도 나왔군요. ㅠ_ㅠ 원서로 꾸역꾸역 읽다가 우리 나라에 나온지도 몰랐네요. 미국에서는 이미 영화도 개봉했는데, 과연 우리 나라에는 언제쯤 들어올런지... 리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번역본도 얼른 사 봐야겠네요..^^

노바리 2005-05-22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 이번에 개봉한 영화는 '야구'로 각색을 했다죠? 직배사 영화니 한국에서도 여름쯤 분명 개봉할 거예요. 전 그보다는, 그 바람을 타고 영국에서 원래 만든 영화도 개봉했으면 좋겠는데... 
영국판 오리지널은 닉 혼비가 직접 각색을 한 데다 카메오 출연도 하고있고, 제가 너무 좋아하는 콜린 퍼스가 주인공 역할을 맡아서 말이죠. ^^;

아, 근데 원서를 읽고 계셨다니 드리는 질문인데요, 원서, 읽기가 어떤가요? 많이 어려운가요? 닉 혼비 책들을 너무 읽고 싶어서요. 출판된 건 [어바웃 어 보이]까지 해서 두 권뿐이니...


강한벌레 2005-05-2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마침 <어바웃 어 보이>도 원서로 읽었답니다.^^ 그런데 <어바웃 어 보이>는 영화를 읽고 봐서인지 훨씬 쉬웠었죠. 그래서 <피버 피치>도 그 정도 수준으로 봤다가 익숙치 않은 영국식 축구 용어나 문화적 차이 때문에 조금 애를 먹는 중이네요. 그래도 작가 특유의 유머는 날 것 그대로 먹는 기분이라 꽤 즐거워요~ (말은 이래놓았지만, 쉽고 빠른 길을 택해서 <피버피치> 번역본을 살 예정이랍니다.^^;;)

galapagos55 2005-07-09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닉 혼비 글 너무 재밌어요~^^(그래봐야 어바웃 어 보이와 이것을 본게 전부지만) 글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번역본을 읽고 싶지만 망설여지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에요.>_<

원작과 다르면서 같은, 콜린 퍼스의 피버피치도 너무 재밌었어요~!
특히 콜린 퍼스가 입고 있었던 아스날 팬티가 압권이었던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