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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 ㅣ 메피스토(Mephisto) 14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다이어리]를 읽다보니 그런 의문이 든다. 내가 이제껏 척 팔라닉의 책을 제대로 읽긴 읽었던 것일까? 나는 [파이트 클럽]으로 시작하여 [질식]을 읽고, [서바이버]를 경유해 [자장가]에 거친 뒤, [인비저블 몬스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다이어리]에 도달하면서, 그간 너무나 익숙하다고 느껴졌던 팔라닉 월드가 갑자기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건 다만 [다이어리]의 화자가 처음으로 여성이고, 책날개의 척 팔라닉 사진이 [다이어리]에 와서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고, 이제까지의 주인공과 달리 [다이어리]의 주인공이 처음으로 도시에서 떨어진 외딴 섬, 외부의 질서나 도덕과 상관없이 자체의 폐쇄적인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기 때문인 걸까?
주인공의 성별이 바뀌었다는 큰 차이 외에, 여전히 1인칭 화자가 기억의 열거라는 형식으로 시제를 마구 오가는 독백체라는 것, 책장을 넘길수록 미스테리가 증폭했다가 마침내 끝에 가서야 비밀이 폭로되고, 엄청난 음모 혹은 사건의 전모가 비로소 완성되고, 우리의 주인공들은 이를 악물고 이 모든 상황을 그저 견뎌내고, 예정된 파국을 모두 지나고 난 뒤 별 희망도 없이 그러나 별 절망도 없이 남겨진다는 점에서, [다이어리] 역시 명백히 척 팔라닉표 소설이다. 또한 우리의 주인공 미스티-마리 윌멋 역시, 성별만 바뀌었지 파국의 운명에 휩쓸려가는 (일견) 소심한, 그러나 이 모든 걸 실은 이미 예감하고 알고 있었던, 전형적인 척 팔라닉표 인물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이토록이나 척 팔라닉의 세계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가? 여성 주인공이기에 내가 다른 척 팔라닉 인물보다 좀더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이어리]에 와서야 비로소, 척 팔라닉의 인물들이 겪는 그 무시무시한 운명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직시하고 깨달았기 때문일까?
이제껏 내가 척 팔라닉의 인물들을, 언제나 거리를 둔 채 '구경하는' 입장이었다는 사실을 [다이어리]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렇다고 내가 미스티에게 동화되거나 완전히 감정이입한 것도 아니다. 나에겐 다른 인물들보다 미스티가 조금 더 구체적이고, 조금 더 생생하게 여겨진다. 깊이 뿌리박은 증오, 분노, 그럼에도 이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는/못하는 고갈된 에너지, 거기에서 비롯한 헛헛하고 일견 냉소적인 태도. 다른 주인공들처럼 그녀 역시 그렇다. 다만 이것이 조금 더 이해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조금 더 생생하게 느껴지고 약간의 감정이입을 한 미스티에게조차,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구경꾼'의 입장이다.
언제나 척 팔라닉의 인물들은, 고도로 자본주의화된 현대의 도시를 배경으로, 미디어든 트렌드든 이미지가, 허상이 실제를 대체하는 현상을 겪으며 자아분열을 해왔다. 사랑이라는 말랑말랑한 것은 끼어들 틈이 없다. 조심스럽게 시도하지만 언제나 실패하고, 심지어 실패를 예견하고 있다. 잃어버린 사랑, 아니 처음부터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사랑이 언젠가 찾아오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 않는다. 척 팔라닉의 인물들은 언제나 부모 세대에 대한 격심한 증오를, 그럼에도 자신을 만든 기원임을 부정하지 못하는 딜레마를 겪어왔다. 그것은, 이 부모 세대가 자아분열의 고통을 안겨주는 지금의 현대 자본주의 도시 사회를 만든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식으로서 주인공들은, 현대 자본주의 도시 사회가 주는 달콤한 독약에 중독되어 있고, 그 사회의 시스템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의 예정된 운명은 파국임을 잘 안다. 그리하여 저항한다. 저항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파멸로 끝난다. 그럼에도 다시 저항을 계속한다. 그리하여 파멸은 반복된다.
[다이어리]의 미스티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환생을 통해서까지, 시지푸스의 노동, 아니 노동력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착취당하며, 버려지고, 저항하고, 파멸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제 [다이어리]]의 주인공은, 척 팔라닉의 소설 중 처음으로 부모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갖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자식과도 역시 소통에, 사랑에 실패한다. 자식으로부터도 소외된다. 환생이 계속되듯, 미스티의 소외 역시 계속될 것이다. 부모에게서 소외되었듯 이제 자식에게도 소외될 것이다. 자식은 나의 부모가 된다. 나는 내 자식의 자식이다. 파멸이 반복된다. 마침내 완전한, 예정된 파국에 도달할 때까지. 아이러니컬하게도 반복되는 파멸을 멈추어줄 수 있는 것은 완전한 파국, 궁극의 소멸이다.
척 팔라닉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 시대가, 이 사회가 결국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재치있는 문장의 우화와 같은 서사로 전달해주는 또 한 명의 예지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의 세계가 이전보다도 더욱 어두워졌고, 절망으로 치닫는다. 이번 달 (2005년 5월) 미국에서 출간 예정인 그의 신작 [Haunted]는 과연 여기에서 어떻게 더 나아갈지... 국내에서 출간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2003년작인 [다이어리]도 이제 고작 출간 두 달이 됐을 뿐이므로.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