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골의 서
로버트 실버버그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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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자와 온갖 SF 전문가들이 이 책 [두개골의 서]를 위해 해놓은 말에 의하면, '영생'은 SF의 고전적인 주제라 한다. 그래서 과연 이 소설이 SF냐 아니냐를 갖고 말이 많았던 모양이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시작하기 앞서 붙어 있는 저자의 말에도 이러한 논쟁의 그림자가 소개되어 있다만, 장르 구분에 티미한 나서는 그저 재미있는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만족.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네 명의 영생지원자가 '두개골의 서'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영생을 얻기 위해 이 책과 관련된 일종의 신비주의 집단을 찾아간다는 내용. 이 책의 비의 중 핵심은 무엇보다도 아홉 번째, 영생을 얻기 위해 사각형을 이룬 네 명 중 한 명은 스스로, 한 명은 동료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둘만 영생을 얻는다고 되어있다. 출신 성분도 가치관도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네 명이 한 팀이 되어 떠나면서 이 넷을 각각의 화자로 번갈아 가며 내레이션을 하는 것으로 장이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구성을 통해 네 명의 차이가 또렷이 드러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작가는 네 명을 번갈아 가며 1인칭 화자로 서술하는 어려운 과업을 아주 훌륭하고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는 얘기기도 하다.

누가 죽고 누가 살 것인지는 앞부분을 조금 읽다 보면 감이 온다. 물질적 풍요 때문에 영혼의 문제가 그닥 중요하지 않은, 처음부터 별로 진지하지 않았던 이는 제일 먼저 죽을 수밖에 없으며, 누구보다 ‘의식’의 차원에서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 또한 ‘의식’의 차원에서 모든 의심을 의도적으로 거세해 버린 - 이가 또한 의외의 희생자가 되지 않겠는가. 언제나 승리와 영광은, 믿음과 회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그 회의와 의심의 과정 덕에 더욱 굳건하고 더욱 ‘자기 자신의 것’인 믿음을 가진 자의 몫일 터이다. 그러나 누가 죽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왜 죽느냐는 것. 죽임을 당하는 쪽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지만, 자살하는 이가 그 이유일 거라곤 생각 못 했다. 하긴, 난 그리 눈썰미 좋은 독자는 되지 못한다. 어찌됐건 비의는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도 공간도 다른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 네 명의 인물형의 고독과 상처와 비밀과 사고관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말하자면 나는 일라이의 출신성분 - 도시 빈민가에서 자란 자수성가한 유태인의 후손 - 에서 동질감을 느끼는가 하면, 네드의 호들갑스러운 미의식과 극단적 이중성 및 나르시시즘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넷 사이에서 흐르는 갈등과 감정적, 공감적 방향을 보는 것 역시 재미있다. 티모시와 올리버, 네드와 일라이가 특히 친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듯 보인다. 네드가 올리버를 좋아하는 것 역시. 아마도 이들 넷의 정서적, 지적, 환경적 요소들이 이토록 친밀한 건, 모든 기존의 가치가 부정되던 당시 미국의 70년대와, 전통 가치는 부정된 채 새로운 대안을 찾지 못한 가치부재 시대의 2006년 대한민국의 상황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다 읽고서, 아홉번째 비의가 말하는 바, 극단적 자기부정과 배제가 실현되는 방식이 너무 직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으로까지 드러나는 자살뿐 아니라, 나는 이미 네 명 중 한명이 자신의 학문적 기반의 공허함을 밝힐 때 이미 자기부정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부정할 자기조차 갖고있지 못한 것인가. 그럼에도 '자기부정'과 '배제'를 뜻하는 죽음은, 물리적인 형태로, 비의가 글자그대로 실현된다. 하긴, 이들이 사원을 찾아가고, 마침내 사원에서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는 것자체가 거대한 신화적 메타포를 그대로 실현해놓은 것이니, 어쩌면 그런 물리적 죽음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자면, 자기 부정과 배제 역시 결국은 한 인간이 영생을 얻기 위한, 즉 성장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인 건지도 모른다. 결국 영생을 얻는 쪽인 둘은 자기 부정과 배제의 과정을 훌륭히 통과했기에 살아남은 건지도 모른다. (한 명은 자기 학문, 존재성의 기반 자체의 부정을 인정했고, 성욕 통제라는 관문에서 좌절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배제를 겪는다. 또 한 명은 성적 정체성 자체 때문에 외부로부터 계속 부정과 배제를 당해 왔으며,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이성애적 어떤 과정을 거침으로써 자기 부정을 훌륭히 수행해낸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영생이란 과연, 물리적인 차이를 뺀다면 죽음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들의 삶은 결코 이전과 같아질 수 없으며, 그들이 얻은 영생의 삶은 이전에 그들이 살고 있던, 앞으로 살게 될 것이라 생각했던 속세의 일상과는 거리가 있다. 나는 바로 그 이유로, 죽음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끝' 혹은 '소멸'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 혹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속세의 삶 이면에 그대로 평행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영생과 죽음은 사실 이음동의어가 아닐까, 라는. 

편집 때문에 책이 두꺼워지고 부피가 다소 커보일 가능성이 있다. 얘기 자체는 단순하고 짧으며, 네 명이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해 가면서 대체적으로 시간순서로 흘러가는 소설의 구성방식은 매우 매력적이다. 실버버그의 또다른 [다잉 인사이드]도 이미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에도 부쩍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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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E. M. 포스터 전집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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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 포스터의 소설 [모리스]는 여느 성장소설과 마찬가지로, 자아를 향한, 그리고 진리를 향한 여정이다. 동성애자인 모리스에게는 그것이 주로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 관련한, 사랑하는 이와 열심히 사랑하며 인생을 사는 법에 대한 것이었을 뿐. 그리하여 마침내 그가 진리를 총체적으로 깨닫고 그 진리에 몸을 내맡겼을 때, 마침내 자유를 얻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을 깨달은 모리스에게 우리는 니체의 말을 빌려 ‘초인’이라 말할 수도, 혹은 칸트의 말을 빌려 ‘윤리적 인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경험하매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미몽단계를 거쳐, 모리스가 그 진리의 형체를 경험하게 되는 건 케임브리지에서다. 우연히 마주치고 ‘잘 보이고 싶었던’ 선배인 더럼이라는 새로운 안내자를 만난 탓이다. 더럼이 고백을 해올 때도 허걱하며 펄쩍 뛰었던 그는,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감정의 정체를 깨닫고 더럼의 고백에 화답한다. 그러나 이 시간들은, 자신의 운명과 자신을 둘러싼 진리의 형체를 어렴풋이 깨닫게는 되지만 결코 그것이 함축하고 있던 본질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미숙한 단계이다. 그리고 그를 이끌었던 더럼은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이성애자가 됐어!”를 외치며 모리스와의 사랑에 마침표를 찍는다.


더럼은 전통적인 보수사회에 귀환했지만, 그의 배신은 모리스에게 있어 진정 진리를 향해 앞으로 한발짝 더 나아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더럼은 그 자신이 진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리스를 진리의 문앞으로 인도했을 뿐이다. 그리고 모리스에게 상실감을 안겨줌으로써, 그 자신은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했지만, 모리스가 정말로 통과해야 할 문 바로 앞에서 미성숙한 상태로 주저앉지 않도록 엉덩이를 쳐낸다.


외관상 그는 젊고 능력있는 증권중개업자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 보이고, 더럼과의 사랑도 문제가 없는 듯 보였지만, 그들의 사랑은 반쪽자리였으며, 스스로에게도 남들에게도 숨기여야만 하는 것, 100% 자신의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한 그런 사랑이었다. 더럼의 배신으로 인해 나락에 떨어졌던 모리스는 알렉과의 만남으로 마침내 그 모든 미망을 떨쳐내고 비로소 진리 앞에 선다.지방 유지 출신으로 모든 면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던 모리스였지만,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사랑을 심지어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이로부터도 부정당하고, 그 억압을 느끼면서 비로소,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그 어느 곳보다 유독 더 꽉 막힌 영국의 그 ‘신사사회’의 위선, 인간의 가장 고귀한 사랑마저 재단하고 ‘믿지 못할 것’으로 만드는 계급, 이성애 강요의 사회가 어떻게 인간을 억압하고 참 진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지까지 깨닫는 순간, 그리하여 그가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 심지어 자신의 가식과 위선마저도 - 벗어던지며 자신의 본연에 충실하는 순간, 그가 성취하게 된 것은 바로 자유로움이다. 진리가 주는 자유로움. 지적인 면에 다소 둔하고 인식에 있어 명민하지 못하지만 한번 깨달은 것은 다른 그 누구도 부러워할 정도로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삼는 고지식하고 윤리적인 인간 모리스가 마지막에 맺는 해피엔딩은, 그에겐 당연한 것이다. 모리스는 그 누구보다 그러한 해피엔딩을 맞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제 진리의 품안에 안긴 모리스와 위선의 계급사회로 귀환환 더럼의 대조가 뚜렷한 마지막 장면은 최고의 소설 엔딩 중 하나라고 감히 추천할 수 있다.


... 라고 거창하게 얘기했지만, 이 소설의 본질은 "연애소설"이다. E.M. 포스터라는 작가의 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사람을 정말 사정없이 빨아들인다. 우리의 주인공이 한숨지을 때 같이 한숨짓고, 환희에 들뜰 때 같이 환호성을 지르고, 고통스러워할 때 같이 가슴을 찢어지게 만든다. 마지막 장을 덮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한참을 펑펑 울게 만들기도 하고 말이지. (오빠, 왜 이제서야 오셨나요 엉엉엉~~)


E.M. 포스터의 소설은 제임스 아이보리 사단에 의해 세 편이 영화화되었고(<전망좋은 방>, <하워즈 엔드>, <모리스>), 한 편은 데이비드 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인도로 가는 길>). 국내에는 영화화되었던 소설들이 간헐적으로 소개되었다 절판되었다를 반복하면서 '제대로' 소개된 적은 없었는데, 열린책들에서 전집이 나오고 있다. (만세 삼창~!!!) 표지도 너무 예쁘다. 이번에 본 것은 97년에 나온 계몽사 버전이지만, 열린책들 버전의 전집을 모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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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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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절망한 것은, 저 폴리아모리를 실천하고 쟁취하는 저 여자가 너무나 수퍼우먼이기 때문에. (그래, 다처든 다부든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법이다.) 물론 그녀도 남편이 사귄 여자친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소설이 남자주인공이 화자여선지 그녀는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그저 대상으로서의 그녀이며,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기계적이고 별로 사람 냄새가 안 난다.


결국 그녀의 ‘뻔뻔한’ 태도 역시 실은 속 좋고 착한 남편의 묵인과 허용 하에서 가능한 듯 보이는 데다, 그녀는 일도 잘 하고 섹스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하고 시부모님께 예쁨받으며 심지어, 축구팬이다. 두집 살림을 강행하는 그녀에게 집안일을 손가락 하나 안 대는 걸로 반항하는 남자와, 군말없이 주말마다 집안을 번쩍번쩍 광내놓고 냉장고를 채워놓고 가는 여자라니, 폴리아모리가 분명 사회적으로 아직 합의가 안 되는 사랑방식임은 분명하지만, 모노가미가 인류의 원래 성질에 반한다 해놓고 그것을 실현하는 여성은 지나치게 수퍼우먼인 것도  모순이라는 느낌이 든다.


거기에, 축구. 우리 사회에서 여자들이,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분야의 한 가지를 잘 알고 있을 때 느끼는 뿌듯함과 안심, 뭐 이런 콤플렉스를 적절하게 건드리고 있달까. 자신이 ‘전통적으로 얘기되는 여성상’과 어긋난다 얘기하는 많은 여성들이, 일견 걱정스러운 말투 속에 얼마나 많은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을 섞는가. 이는 또한 많은 남성들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판타지는 더 있다. 폴리아모리를 주장하면서 상대를 상처입히는 것은 통상적으로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그에 관한 죄책감을 여성주인공에 투과시킨 남성 작가는, 남성들이 도통 점하지 못하는 피해자의 위치를 점한다.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은 그대로 가져간 채. 그로인해 우리의 여자주인공에게 현실의 여성이라면 결코 수용하지 않을 어떤 여성상의 미덕을 관철시킨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여자주인공은 결국은, 남성 ‘작가’(화자가 아닌)의 주장과 판타지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정작 남성 그 자신은 죄책감마저 떠넘긴 채 속 넓고 관용적인 - 아마도 현대의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 - 남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건, 정말이지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특권이고, 작가는 이 특권을 꽤나 약삭빠르고 똘똘하게 누릴 줄 안다. 부러운 점이다. (좋은 소설가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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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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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작인 이 책은 (그냥 일반적인 기대만 갖는다면) 당연히 지루하고 식상하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좀비상을 가지고 있고, 이 책은 그 모든 좀비 이미지의 원류이니까.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온갖 HR 공식에 익숙해진 현대 관객들에게 식상해 보이듯, 그러나 또다른 의미로 재발견되고 재해석되듯, [나는 전설이다]가 출판 당대에 좀비라는 새로운 존재 - 이물적 존재이면서도 모태는 인간인 - 의 매혹으로 어필했다면, 현대독자인 나는 이 소설의 엔딩의 혁명성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분투하는 존재임은 수가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이나 새로이 급증하고 있는 좀비나 마찬가지. 여기엔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생존투쟁의 승리만이 유일한 선이 된다. 인간과 좀비 간 전쟁에서 마침내 좀비가 사회를 구성하고 살 방법을 찾기 시작했을 때 최후의 인간 생존자는 죽어서 전설의 영역으로 입장해야 할 운명만이 남는다.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방식으로 살아남았을진데, 호모 좀비쿠스 같은 이름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호모 사피엔스를 대체한들. 그러고 보면 수많은 호러영화들이 당연한 듯 인간의 승리로 막을 내렸던 것은 그 모든 좀비물의 조상인 이 소설에 대한 반역적인 퇴행, 혹은 퇴행적 반역인 건지도 모른다. 많은 인간들이 자본주의적 인간을 중세적 인간보다, 혹은 자본주의적 냉혈인간을 온정주의적/윤리적 인간보다 진화한 것으로 믿고 있는 세상에서, 평균수명을 늘린 대신 면역결핍과 신종질병에 시달리는 현대 인류가 과거 인류보다 진화한 것이라면, 좀비가 인간보다 ‘진화한’ 존재라고 말한들 과연 언어도단이 될까. 아니, 우리들 중 대부분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새에 이미 좀비가 됐는지도 모르는데. (이게 인간 특유의 자기합리화 방식 아니었던가.)


[나는 전설이다]의 엔딩은, 가상역사에서의 미래이자, 우리의 과거이기도 하다. 제우스가 새로운 신의 계보를 시작하며 신중의 신의 자리로 등극한 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속한 타이탄 족을 멸망시킨 이후이다. [나는 전설이다]의 주인공 네빌은 결국 또다른 크로노스(제우스의 아버지, 타이탄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수긍하는 그의 모습은, '마지막 인간'으로서 전설의 주인공이 될 존재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다, 그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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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7-1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비에 대해 막연하게만 알아요. 흠...호모 좀비쿠스라... 글구 HR이 뭔가요? 휴먼 로망스? 오랜만에 글 뵈니 반갑습니다.

노바리 2006-07-17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치채셨겠지만 '호모 좀비쿠스'는 제가 지어낸 말이고...;; HR은 하이틴 로맨스란 얘기입니다. 낭만적인 성애장면의 묘사가 가미된 로맨스 소설입죠.

 
화성의 인류학자 - 뇌신경과의사가 만난 일곱 명의 기묘한 환자들
올리버 색스 지음, 이은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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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책이 지속적으로 쓰이고 팔리고 읽히고 각광받는 데에는 그닥 아름답지 못한 호기심들이 있다고 믿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이 '정상'이라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상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소위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세계를 저열한 호기심으로 엿보고, 그리고 그들에게 인도적인 관점을 내보임으로서 자신의 휴머니즘을 과시하는 것. 이런 류의 책은 그리하여 깊이보다는 소소한 에피소드들로 가득차게 된다. 주로 그들의 '특이한' 행동들. 그리고 그 뒤를 '그래도 휴머니티 넘치는' 말로 얼버무린다. '백치천재' '자폐증' 이런 말들은 언제나 그런 사람들 중 특히 자의식 과잉인 사람들을 위한 근사한 액세서리가 되어왔고,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책으로 나오고 영화로 만들어지며 박수를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좋았던 것은,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책을 찾는 것이 아무리 저열한 호기심과 한편으론 분명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사고 때문이라곤 하지만, 나 역시 결국 그렇고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올리버 색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그들을 비록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이 겪었던 고통, 혹은 '우리는 모르는' 그들의 평온한 세계를 그대로 인정하려는 시선이 있다. 그리고 슬플지라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건 결국 이 선이 한계라는 것. 사실은 이런 류의 책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삐딱하게 시작한 저런 이유들보다는 오히려, '그들'과 '우리'를 가르는 이 장벽 자체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들'과 '우리'는 또다시 더 큰 '우리'가 되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계속 인식할 필요가 있고, 그 인식을 계속 자극할 자극제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주위에 아무리 저열한 호기심이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론, 내가 갖고 있는 증상 일부가 올리브 색스가 묘사한 사람들의 특징 중 일부와 굉장히 미미한 강도로 겹친다는 데에 흥미를 가졌다. 하지만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누구나 자신이 정상이라 굳게 믿고 싶어하지만 사실 '정상'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실제 자폐증 환자의 부모들의 가슴이 썩어나갈 때, 우리는 '자폐증'이란 말을 낭만화하기 바쁘다. 거기엔 분명, 어떤 종류의 '욕망'이 숨어있다. 그 욕망은 때로 실제 자폐증과 유사한, 그러나 정도는 훨씬 덜한 어떤 증상들을 각 개인에게 심어놓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삼, 자신이 갖고 있는 비밀스러운 어떤 경미한 그 증상들에 깜짝 놀라고, 부끄러워 하고, 걱정한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어한다. 나는 정상이야, 나는 정상이야... 현대의 이 산업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이 더욱 많을 것이라고, 나는 조심스레 추측한다. 그리고 별로 정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평범한 것은 분명한 나 역시, 결국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나 별로 외롭지 않구나, 세상엔 참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구나, 라는 게 나의 솔직한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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