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질렀다. 마이리뷰 당선으로 받은 적립금 5만원은 물론, 그간 모아둔 마일리지를 적립금으로 전환해 다 써버렸다. 알라딘 6년 고객이 지금 현재, 마일리지도 적금도 뭣도 다 빵, 빵, 빵이다. 예전부터 사고자 했으나 눈알 튀어나오는 가격 때문에 보류해놓았던 책, 우리 루저 브러더스에게 줄 책, 얼마 전 리뷰 보고 필받은 책. 그리하여 내가 오늘 주문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김현, 프랑스 비평사(근대/현대편, 김현 문학전집 8), 문학과지성사
수전 손택, 이재원 옮김, 사진에 관하여, 시울
제프리 노웰 스미스 책임편집, 김경식 외 옮김, 옥스포드 세계영화사, 열린책들
찰스 프레드 앨퍼드, 이만우 옮김, 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 황금가지
위의 두 책은 루저 브러더스들의 희망 도서이다. 역시 '현역' 인문학도는 다르다. 그저 졸업장 따기 위해 억지로 겨우 대학을 다니면서 일관되게 날라리였던 나는 아직 한 권도 김현의 책을 읽은 게 없다. 심지어 [행복한 책읽기]도. 우리나라 문인계의 3대 천재 어쩌고에 김현과 양주동이 들어가네 마네 하는 얘기도 대학을 졸업하고서야 알았다. 물론 내가 대단히 무식한 사람임은 잘 안다. 마치 필름2.0 편집장이 썼듯, 영화 <굿바이 레닌>을 보고 나온 20대 초반 어떤 여대생이 '영화 재밌다, 근데 레닌이 누구야?'라고 반응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 여대생 못지않게 무식하다.
하지만 가녀리게 변명하자면, 대한민국처럼 정보의 흐름이 이상하게 왜곡되고 막혀있다가 이제사, 그냥 뻥하니 뚫려있을 뿐 정보와 담론의 흐름이 건강하게 돌아다니지 못하는 사회에서, 소련이 무너지고 더이상 사회주의 서적이 금서가 아닌 - 물론 그럼에도 국가보안법은 [자본론] 같은 책을 졸지에 불온서적으로 만들기는 한다만 - 시대에 갑자기 눈앞에 거대한 적이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를 너무나도 세련된 자본이 너무나도 세련된 외모와 웃음으로 들어선 지금, '어쩜 요즘 젊은 것들은 그런 것들도 모른다' 식의 필은 담론의 주도권을 가진 3, 40대 세대들의 권력의지의 일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굳이, 리오 휴버만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나 마르크스의 [자본론] 같은 책의 전부 혹은 일부를 읽었다고 자랑하며 이를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싶지 않다. 평범한 직장인의 입장에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같은 책은 여전히 부담스럽고, 엥겔스의 [사유재산의 기원]이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같은 책은 여전히 읽을 수가 없다. 내가 대학 들어오기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이 책들은 절판이다. 한국 지식인 사회를 뒤흔든 현대 프랑스 철학에 대해서도 아직은 접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라캉이나 들뢰즈나 가타리나, 그네들이 번역해놓은 책들을 내가 읽을 깜냥도 안 되거니와 한글로 읽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뻔하다. 그건 내 무식함 때문이기도 하고, 어설픈 번역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들도 선배들이 억지로 쥐어주고 때려서 읽었을 책들을, 그런 동력과 선배들의 조언 따위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아니었던 곳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잘 모른다 해서 무시하는 건 한편으로 마음이 불편하다. (물론, 나 역시 지금 대학생들의 그 어이없는 사고와 무식함에 종종 한탄을 하는 '늙어빠진' 구세대 종자긴 하지만.)
하여간에. 그래서. 내가 대학시절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는 걸 보고 떨떠름함과 기특함과 기타 등등이 섞인 기묘한 반응을 보인 선배처럼, 김현을 찾아읽는 친구녀석 - 그는 아직 대학생이다 - 을 보며 떨떠름함과 기특함과 기타 등등에 플러스, 열등감이 섞인 기묘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똑똑하고 사려깊고 잘난 주변 친구들 덕에 나 역시 실은, 김현을 읽어봐야겠다는 무언의 압력을 스스로 받고 있긴 하다. ^^
수전 손택의 책은 나도 탐을 내던 책이다. 이 친구는 내게 '빌려주겠'다고 한다. 허허... 난 남의 책 잘 못 읽는다. 행여 때라도 탈까봐. 내 것은 나중에 한 권 다시 사야지 뭐. 이 책은 현대미학사에선가, 아주 오래 전에 롤랑 바르트의 사진에 관한 글과 같이 묶어서 냈었지만, 내가 최초로 그 책을 인지하고 읽고싶다 느꼈던 약 10년 전부터 계속 절판이었다. 중간에 몇 번, 수전 손택의 책이 안 나온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이론서와 유명한 사람의 저작에 겁부터 내는 내 컴플렉스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작년에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탓에, 공포감도 많이 극복한 상태다. 게다가 수전 손택의 그 날카롭고 섬세한 통찰력, 이재원 씨의 탁월한 번역에 감탄을 했었기 때문에 이 책도, 다른 수전 손택의 책도 기대가 간다.
[옥스퍼드 세계영화사]는 가격 때문에 작년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몇번이나 보관함에 넣었다가 장바구니로 옮겼다가 다시 보관함으로 옮겼다가, 를 반복한 책이다. 결국 적립금으로 왕창 질러버리기로 했다. 집에 이런저런 영화 서적은 있지만 막상 영화사에 관한 책은 한 권도 없었는데, 시각과언어에서 나온 데이빗 보드웰의 [세계영화사]를 살까 말까 망설이던 찰나에 이 책이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기보다 필요한 부분부터 발췌독을 해도 될 것 같고, 무엇보다도, 내가 땡스투를 누른 클로에 님의 리뷰에 의하면, 이제껏 영화사가 주로 감독 위주의 작가주의 관점, 혹은 예술사조에 의해 서술되던 것과 달리 영화산업적 관점에서 서술이 되고 있다고 한다. 산업으로서의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터라 더욱 기대가 된다. 돈지랄일까 아닐까, 괜찮을까 아닐까를 가늠하다가 사버리자고 결정한 데에는 클로에님의 리뷰가 결정적이었다.
이번 마이리뷰에 나란히 당선된 JWalker님이 쓰신 리뷰의 책, [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도 질러버렸다. JWalker님이 소개한 밀그램의 실험, 그리고 그에서 발생하는 악의 의지(?)에 대한 설명이 흥미를 마구 돋구었다. 이제껏 서양 책이나 영화에서 '유명해지고 싶어서' 연쇄살인을 비롯한 각종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JWalker님의 리뷰를 읽고서야 비로소 조금 이해가 가려고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심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책값만 하면 거의 10만원이 다 된다. 주문을 하고나서야, 내가 어제 바로 보관함에 넣어두었던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 시리즈를 주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이 잘 안 팔려서 3, 4권 출판도 아리까리하다는 소리에 냉큼 보관함에 넣어놓았던 것인데 이런... 역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 3대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으면 싶다.
요즘 목하 번역작업 중이라 책을 거의 읽지 못한다. 버스 안에서도, 출력한 영어대본을 읽으면서 옆에 한글 문장을 써넣기에 바쁘니까. 아주 조금씩, 척 팔라닉의 [다이어리]를 읽는 척은 하고 있지만 번역에 마음이 급해 도저히 집중할 수도 없고. 영화도 못 보러가고 있다. <혈의 누>가 꽤 궁금한데. <주먹이 운다>와 <달콤한 인생>은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와중에 잠깐 걸렸다가 사라져가는 외국영화들... 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