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쿳시 지음, 조규형 옮김 / 책세상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2003년 노벨문학상 작가, 라는 타이틀보다는 컬티즌에 글을 기고한 김선형 님의 '이보다 더 탈식민주의를 구현한 소설은 없으리라'라는 평에서 관심을 가졌던, 존 쿳시.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쓰기 했다는, 포.
 
책의 말미에 붙은 해설도 그렇고 김선형님의 글도 그렇고, 그러니까 존 쿳시의 책은, 로빈슨 크루스의 표류기에서 삭제됐던 여성, 그리고 프라이데이의 입장에서 다시 씀으로서 '타자'의 언어를 복원한 책, 이라는 식으로 전개된다. 심지어 책의 띠지에 박힌 선전도 그렇다. 고립된 섬과 고립된 삶에 침입한 한 여인. 그리고 그들에게 내는 여성의 목소리, 뭐 이런 식.
 
하지만 읽고 나서의 느낌은... 해석이 너무 거창하다는 느낌. 그리고 역시나, 소설은 비평을 먼저 보고 읽어선 안 된다는 교훈. 비평에 맞춰서 독서를 하게 되니...
 
탈식민주의 운운에 내가 혹했던 건, 아카데믹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나는 나의 언어가, 여성의 언어가, 페미니스트의 언어가, 언제나 '대상'의 말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몸으로 깨닫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것을 가장 그럴듯하게 표현해주고 있는 언어들이 탈식민주의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수전 바턴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살고 있던 섬에 표류하게 된 여인. 크루소가 죽고 프라이데이와 함께 극적으로 구조되어 영국에서 살면서, 소설가 다니엘 포 선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화시켜줄 것을, 그리하여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을 부탁하는 여인. 그러니까, 이 소설대로 하면, 소설가 다니엘 디포는 수전 바턴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자면 소설의 히트를 위해 수전 바턴의 존재 자체를 삭제하고, 로빈슨 크루소는 엄청나게 미화시키고, 프라이데이는 야만인 식인종으로 설정한 뒤 온갖 살을 붙인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출판한 셈이 된다.
 
여전히 우리는 프라이데이의 주체성, 프라이데이의 욕망을 알 수는 없다. 이 책에서 그는 혀가 잘린 것으로 나오니까. 과연 누가 혀를 잘랐을까. 수전 바턴이 크루소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노예상인이다. 하지만 책은, 크루소가 직접 잘랐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바턴은 여전히 프라이데이를 낯선 저편의 사람 취급을 하며, 자신의 기준을 강요한다. 글쎄, 여기서 비평자들이 언급했던 소수자의 연대란... 별로 보이지 않는데. 나로썬, 왜 이 책이 '그렇게' - 번역자의 해설, 컬티즌의 글, 띠지의 선전문구 - 해석되는지 의아할 뿐이다. 내가 너무 무얼 모르고 있는 걸까?
 
어쩌면 이건 남성 독자들을 위한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로빈슨 크루소]에 익숙한 남성독자들은 확실히, 존재 자체 지워졌던 수전 바턴의 목소리로 듣게 되는 새로운 버전의 크루소의 표류담에서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노예 밀수를 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난파를 당한 크루소와 달리, 바턴은 '납치된' 딸을 찾아 떠돌다가 남성 선원들에 의해 '버려진'다. 그리고 그녀가 런던에서 포의 집에서 살게 될 때, 그녀의 딸을 자처하는 - 그녀는 부정하는 - 소녀가 찾아온다. 번역자는 해설에서 이것이 포의 농간이었을 것이라 딱 잘라 말하지만, 사실 독자들에겐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부분이다. (번역자는 대체 무슨 권리로 그런 식의 해석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걸까.) 어쩌면 수전은 오랜 힘든 생활로 살짝 기억상실증을 겪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 삶의 목적은 어떻게든 표류담을 재생시키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그녀에 의해 부정당하는 딸의 존재는...? 그녀는 또다른 타자가 되는 것인가?
 
여전히 프라이데이의 목소리와 욕망은 표현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사연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경원시의 대상이다. 혀가 잘린 프라이데이는 실은 생식기마저 거세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들어있다. 그리고 그녀는 누구못지 않은 독립심을 가졌으나 계속 경제력을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녀는 바이아에서 경제적 생존을 위해 몸을 팔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아마도 근대소설의 선구격 작품이자, 청교도적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선구적으로 설파하고 있는 [로빈슨 크루소]는 사실은 이런 식의 시대적 협잡과, 이런 식으로 다른 이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인지도 모른다. 생존자이기에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러나 사회적/관계적 측면에선 계속 타자이고, 누군가 - 정확히 말하면 돈을 가진 백인 남성 - 에게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그녀가 프라이데이에게 의존하는 부분은 거의 없다.
 
아, 그리고, 소설의 화자는 맨 마지막 몇 장을 제외하곤 모두 수전 바턴인데, 왜 제목은 [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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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11-17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바리님께서 쓰신 리뷰들을 쭉 훑어보려고 했는데...
모두 제가 모르는 책들이고 이 책 하나 읽었네요. ^^;;

문학과 역사 2010-01-05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설의 시작 - 로빈슨 크루소 - 다니얼 디포 (원래 이름 포)
소설의 새로운 시작 - 포 - 다니얼 디포의 원래 이름
저는 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