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바람난 여자
아니 프랑수아 지음, 이상해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서재 결혼시키기]를 거의 데굴데굴 구르면서 봤었다. 그 책이나 이 책, [책과 바람난 여자]나, 책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여자들이 독서와 책에 대해 늘어놓는 수다다. 차이가 있다면, [서재 결혼시키기]가 글 하나하나는 물론 각 문장들도 호흡이 다소 길고 완만하다면 [책과 바람난 여자]는 스타카토처럼 톡톡, 짤막한 호흡을 자랑한달까. 오죽하면 한 챕터의 끝나는 문장도 끝나는 문장 같지가 않다. 그러니까 전자는 끝없이 주거니 받거니 이어지는 줄줄이 수다고 후자는 톡 찌르고 빠지고 톡 찌르고 빠지는 종류의 수다. 공통점은, 내 취향은 다소 전자 쪽이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책이 있었나' 싶게 생소한, 이름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책들이 그야말로 줄줄이 비엔나 사탕으로 나온다는 것.

그녀들만큼 엄청난 독서가는 아니기 때문에 그녀들의 수다에 100% 공감하긴 힘들다. 예를 들면 나는 일단 몰입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고, 그 전까진 주의가 산만한 편이어서 두 페이지 읽다가 딴짓을 하거나 갑자기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문자를 보내거나 또 갑자기 부스럭부스럭 시디 플레이어에 새 시디를 넣는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고, 졸리면 세 줄 읽었다가도 자버리고, 조금 배고프다 싶으면 과감하게 읽던 책 던져놓고 먹을 걸 찾아 헤맨다. (게다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 왜 그리 갑자기 간식거리도 음료수도 막 땡기는지.) 이런 식으로 책 끝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밥을 먹으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해 와인잔을 접시에 놓는달지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나 역시 일단 식당에 들어가면 음식을 주문한 후 책부터 펴지만, 음식이 나오면 재빨리 책을 닫아 한쪽으로 치워놓고 먹는 데에만 열중한다.

아참, 나는 그녀들만큼 심각한 문자중독증도 아니다. 내가 언제나 가방 속에 무언가 읽을거리를 넣고 다니는 것은 무어라도 읽어야 해서가 아니라 이 병적인 소심증으로 시선처리를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게 싫기 때문이다. 책보다 사람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지만, 특히 지하철에서, 멍하게 있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는 것만큼 당황스러운 것도 없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예쁜 여자들이나, 도끼병 증세가 심각해 보이는 또래 남자들은 더욱. 책에 코를 처박고 있으면 일단 멍하게 서거나 앉아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고 시선 처리도 자연스럽고 덤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건질 수 있다. 난 화장실에서도 변비 환자 주제에 똥싸는 것에만 집중한다.

내 방 여기저기에 마구 쌓여있어 발 딛는 것도 어렵게 만드는 온갖 종류의 책들이 잠든 사이에 날 공격하리라는 걱정도 절대 안 한다. 가끔 제발 절 읽어주세요, 불쌍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책들을 느끼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잔혹냉정의 얼음공주가 아니던가. 걍 생까버린다. 덕분에 현재 집에 사놓은 책 중 안 읽은 게 반을 훌쩍 넘어가버려도, 언제건 읽어야지, 하지만 공포에 떨진 않는다.

하지만 몇 가지 면에서는 역시나 맞아맞아!를 외칠 수밖에 없는데, 예를 들면 이건 이래서 처분 못하고 저건 저래서 처분 못하는 증세. 김현이 아르빠공 컴플렉스라고 했던 그 증세들을 나도 가지고 있다. 음, 또 이런저런 강박증들. 충동구매. 한권만 사야지, 혹은 구경만 해야지, 해놓고 나올 땐 두 손에 주렁주렁, 그리고 카드청구서 날아올 때마다 얼굴 파랗게 질리고. 어릴 땐 물론 독서로 인해 고무줄 놀이를 마다하고 책을 읽었고, 반 애들이 다 청소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혼자 책을 읽다가 당시 나를 못마땅해하던 담임 선생에게 찍힌 적도 있다. 어디 여행갈 땐 책부터 챙긴다. 평소 가방엔 언제나 읽을거리가 들어있다. (하지만 난 되도록 가볍고 날렵한 게 좋다. 허리가 약해서리.) 직장인이란 핑계에 출퇴근 시간 버스/지하철 안에서만 책을 읽는데 그 덕에 내려야 할 역/정거장을 놓치는 일도 상당히 있다. 아니 프랑수아가 글자를 대강 뭉개서 읽는, 남들 모르는 난독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종류는 좀 다르지만 남들 모르는 난독증을 약간 가지고 있다.

그녀처럼 책에 일어나는 어이없는 실수들도 매우 좋아한다. 오타나 비문이라도 발견할라 치면 꼭 씹으면서 즐거워하고, 특히 내가 아는 이가 그 책에 참여했을 때엔 그 사람에게 내가 발견한 오타와 실수를 꼭 말해주며 놀린다 (으하, 이건 정말 특별한 즐거움이다.) 모서리가 잘못 접혀 여분의 종이가 발생하고 위아래가 붙었을 때에 떼어내는 것도 좋아한다. (손으로 그냥 뜯어내는 게 좋다.) 물론 책을 읽을 때 나는 온갖 소음들, 예컨대 책 넘어갈 때 나는 팔랑거리는 소리, 두꺼운 책을 접을 때 나는 탁 소리, 심지어 책을 읽던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내는 키들거리는 웃음소리나 한숨소리 듣는 것도 좋아한다. 나 역시 남이 내 책을 흘끔대는 건 불편해 하면서 남이 어떤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으면 제목을 보기 위해 궁금해서 미친다. 여행갈 때 무슨 책 가져갈까 고민을 가장 먼저 하는 것도 비슷하고, 또... 아, 근시의 장점들! 하하. 인사하기 싫은 사람을 만나거나 했을 때 자연스럽게 쌩깔 수 있는 거. (내 근시는 책이 아니라 컴퓨터 때문에 심해진 것이긴 하지만)

예전엔 나 역시 아니처럼 장서표를 사용하지 않고 내가 읽었던 부분을 찾는 데에만 한참 시간을 들이곤 했다. 요즘은 3M 반투명 라벨 테이프를 사용한다. (근데 꼭 비싼 돈 주고선 몇 개 못 쓰고 잃어버리더라.) 책에 낙서도 못한다. 첫 페이지에만, 책을 사거나 처음 읽은 날짜(한권만 특별히 샀을 땐 산 날짜, 아닌 경우 대부분 처음 읽기 시작한 날짜)와 간단한 한 문장 정도를 적어놓는다. (물론 아니처럼 헌사를 훨씬 더 좋아한다.) 예전엔 책 윗쪽 모서리에 도장을 꽝 찍었는데, 어느 날부턴 싸인을 해놓다가, 요즘은 ''노바리'란 이름으로 장서표시용 막도장을 하나 파야되는데..." 생각만 하며 아무 표시도 안 해놓고 있다. 참, 아니는 인상적인 구절들을 따서 베껴놓는 작업을 할까? 난 번번이 인상깊은 구절을 잊어버리는지라, 요즘엔 포스트잇 대짜를 갖고 다니면서 그런 구절 나올 때마다 표시할 생각을 한다. (물론 그 포스트잇도 몇번 못 쓰고 또 잃어버린다.)

마지막으로 내 주변 책 좋아하는 지인들이나 아니나, 자신을 굉장한 독서가 혹은 교양 철철 넘치는 지식인으로 오해받는 게 꼭 사기치는 것같아 당황한다지만, 나는... 좀 다르다. 물론 오해가 불편하고 민망하긴 한데, 또 한편으로는, 뭐랄까, 열등감에서의 자기보호 욕구가 있달까. 내가 외국문학을 좋아하는 게 워낙 어릴 때부터 외국소설 위주로 읽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잘난 척 하기 좋아서이기도 하니까. *씨익*

예를 들어 가브리엘 마르시아 마르케스가 화제가 될 때 [백년 동안의 고독]만이 아니라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나 [사랑과 다른 악마] 혹은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이 두 권은 '절판된' 책임을 확인하고 긴급히 덧붙였다. ㅎㅎ) 같은 책들, 아옌데파빌라 같은 작가를 같이 언급해 준달지, 한국에선 인기도 없고 아동문학가로만 각인되어 있는 마크 트웨인에 대해 미시시피 3부작 외에 단편들이나 [아더왕과 양키] 같은 책을 한번 언급해주면, 그 다음엔 잘난 척하기가 매우 쉬워진다. 제인 오스틴을 얘기하면서 [오만과 편견]뿐 아니라 그 옆에 [노댕거 사원]이니 [설득] 같은 책(이 두 권 역시 제인 오스틴의 책 중 가장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다.ㅎㅎ)의 제목을 같이 언급하면 - "그런데 한국엔 제대로 번역된 게 없어" 같은 말을 덧붙이면 완벽해진다 -, 다소 사대주의자란 놀림을 받을 순 있어도 대략 꿀리지는 않게 된다. 이런 연막을 치고 나면, 인문학도 출신 주제에 대학을 졸업하고도 8년이 지나도록 실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나 플라톤의 [국가론], 혹은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책도 안 읽은 무식쟁이란 사실을 그럭저럭 커버할 수 있다.

뭐, 그렇다고 내가 오로지 잘난척만을 위해 그 책들을 억지로 읽는 것도 아니고, 읽지 않은 책 읽었다고 하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난 전작주의자 기질이 없지 않다. 할 수 있다면 작품 전체를 그것도 연대순으로 읽어가는 걸 좋아하니까. 남들이 안 읽었음직한 혹은 제목만 보고 지나쳤을 수많은 책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아니 프랑수아를 보며 이 여자,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나랑 심정이 비슷하지 않을까? 라고 억지로 믿어버리고 있다. ^^ 하지만 약간의 스노비즘을 즐기는 건 그리 고상하진 못해도 워낙 꿀리는 거 많은 사람의 나름 자기방패막이라고 귀엽게 봐줄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짤막짤막하고 내용도 금방 읽을 수 있는데 무려 하드커버에 비싼 책. 하지만 크기도 마음에 들고 - 가방에 쏘옥 들어가는 작은 책들이 너무 좋다. - 그리고, 재미있다. 닉 혼비더글라스 애덤스의 책을 읽으며 나는 사정없이 터져나오는 낄낄대는 웃음을, 소리는 전혀 내지 않고 목울림대 혹은 배 근육만 움직이는 방식으로 웃는 방식을 익혔는데 - 이 방식을 사용하면 남의 눈 의식 않고 내 맘껏 웃어댈 수 있다 - 이 책을 읽을 때도 그렇게 참 많이 웃었다. 가끔은 억지로 소리를 참는 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뭐 어떠랴. 이 책은 그렇게 웃으면서 볼 수 있다. 이 여자의 그 까다로움과 강박증, 얼마든지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말이다.


 


ps. 내가 만약 아니였다면 나는 이걸 꼭 추가시켰을 것이다. 절판된 책을 찾고 있는 사람에게 '난 사놨지롱~' 하면서 놀려먹기. 고약하지만 특별한 즐거움이다. 물론 이건 나만의 즐거움도 아니고, 종종 나도 똑같이 당하면서 파르르 떨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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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5-04-2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우스트에 대해서 쓰신 리뷰가 맞는 것인지. <책과 바람난 여자>의 리뷰같은...

노바리 2005-04-26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바람난 여자] 독후감인데요...

노바리 2005-04-26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재미있는 오류를 제가 발견한 것 같군요.
제 마이서재에서 [책과 바람난 여자] 마이리뷰를 쓰면서 본문에서 제가 언급한 책제목마다 각 책의 알리딘 페이지를 링크시켰는데, 그 페이지마다 이 마이리뷰가 다 카피되어 등록된 것 같습니다. 알라딘에 문의를 요청했으니 곧 조치가 있을 듯합니다. ^^

폴오스터 2005-05-05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잘 쓰셨네요. 개인적으로 아니 프랑수아보다는 노바리님에 제가 더 가까운 듯하여 뭐 다행이라고 할까요. 너무 재미있게 읽은 책임에도 결코 동화되기란 쉽지 않았거든요.

노바리 2005-05-05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사실 아니 프랑수아 정도면 책에 미친 일종의 '폐인'이죠. 우리나라야 워낙 독서율이 낮아 독서를 지나치게 장려하는 분위기가 있으니까 책 폐인이 게임폐인이나 드라마폐인보다야 대접을 받지만, 사실 아니가 고백한 대로,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인간관계 맺기 힘들 겁니다. 흐흐.

앨런 2006-11-1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 책은 감동입니다.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