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자연'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본원적 그리움, 혹은 포근함일지 모르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공포'다. 물론 잘 가꿔진 산책길 가에 세워진 가로수와 인근의 호수가 있는 공원 같은 것, 마당에 잘 세운 정원수들과 이름모를 풀꽃, 그리고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깔 상큼하고 폐를 자극하는 공기는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자연 역시, 도시 한가운데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자연이다. 나는 자연이라고 했을 때 엄청난 크기의 해일이나 사납게 요동치는 바다, 혹은 너무 빽빽해서 태양이 보이지도 않는 밀림의 정글 등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온갖 종류의 벌레들과 역삼각형 대가리를 꼿꼿이 세운 독사(毒蛇) 등이 연상된다. (어릴 땐 가로수에서 무수히 떨어지는 송충이도 얼마나 혐오를 했던가.)

남미쪽 소설을 읽을 때, 특히 '자연'과 밀착된 소설들을 읽을 때 불편한 감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다. 나는 18세기도, 19세기도 아닌, 전형적인 20세기형 인간이다. 20세기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인간. 그런데 한편으론, 그 불편하고 두려운 감정 외에도 묘하게 신비스럽고 어딘지 친숙한 감이 든다. 어쩌면 전생에 나는 아프리카 밀림에서 사자의 발톱에 찢기거나, 독사의 맹독에 물려 안타깝게 삶을 마감한 전사가 아니었을까.

칠레에서 태어나 피노체트 군사정권 하에서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감옥생활, 국제사면위원회 도움으로 풀려난 뒤 망명. 세풀베다의 이력은 그렇다. 나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과 세풀베다의 이름을, 대학시절 당시 열독했던 장정일의 독서일기 어디에선가 처음 만났다. 제목에 흥미가 땡겨 읽어야지, 읽어야지, 한 게 벌써 몇 년. 그리고 얼마 전 후배의 자취방에 새벽의 급습을 실행했다가(주인장과 같이 가는 게 뭔 ‘급습’이겠냐만) 발견하고 빌려왔다.

제목에서 내가 상상한 그런 내용은 아니었다. 남미의 정글에 있을 법한 온갖 동물들이 그려진 표지에서 이미, 내가 오랫동안 상상해 왔던 그런 내용은 아닌 것 같다는 불안감은 느꼈지만, 읽어갈수록 그것은 사실로 판명났다. 하지만 나는 이런 소설에서 읽는 그 불편감 외에도 그 친밀함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주인공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가 암살쾡이를 좇는 모험, 그리고 그와의 마지막 대면에서 느껴지는 숭고함은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정글의 법칙은 확실히, 아무데나 총을 갈겨대고 지극히 어린 살쾡이의 가죽마저 탐내는 인간들의 법칙보다 훨씬 더 숭고하고 공평하다. 다만 나는, 그 정글에서 별로 ‘강자’의 입장이 아니라 언제건 쫓기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정글을 무서워하는 것뿐이다. (물론 인간의 법칙 하에서의 나의 삶 역시 그리 여유롭지는 않지만.)

초반에 등장한 치과의사는 왠지 허겁지겁 실종된 느낌이 든다. 소설이 본격적으로 암살쾡이를 좇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의 이야기로 옮아가면서 그의 존재는 지워지니까. 오로지, 이 노인네에게 일년에 두 번씩 연애소설들을 전달해 주는 역할로만 끝나고 만다. 게다가 소설 중간엔 노인네의 과거가 시도때도 없이 플래시백으로 끼어든다. 이 플래시백이 또 파란만장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좀 산만한 느낌이다. 그런데, 바로 그 느낌이, 이 소설이 서구의 세련된 근대적 소설보다는 입담 좋은 할아버지의 구술문학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아니, 사실은 그 세련된 근대적 느낌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들이 공존한다.

열린책들에서 세풀베다의 다른 책들도 꽤 출판을 해낸 모양이다. 알라딘을 검색해 보니, 서너 권의 다른 책들이 더 뜬다. 찬찬히 이 책들을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한동안 탐닉했다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그만두었던 다른 남미 작가의 소설들도...

 

ps. 본문과 역자후기에 빈번히 나오는,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이라는 표현이 계속 눈에 거슬린다. 너무 상투적인 이 클리셰는, 이 표현이 본래적으로 담고 있는 '강간'이라는 끔찍하고 잔인한 의미마저 상투적으로 전락시킬 뿐 아니라, 여성의 처녀성에 대한 낡은 관습의 산물이기까지 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딸기 2005-11-17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이 책을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마지막 문단 ps 부분, 동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