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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 지음, 안정효 옮김 / 한빛문화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첫페이지부터 후회를 했습니다. 맨 첫페이지의 맨마지막 줄에 있는 단어는 '엉덩이'였어요. 그 바로 앞엔 암시적인 문장이 있었지요. 그제서야 나는 다시 기억해냈어요. 그 책을 소개하던 말 중에 강간, 임신 등의 말이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책이 시작하자마자 그녀가 아버지한테 강간 당하는 게 나와버리는 건 다른 문제죠. 그녀는 아직 열네살도 안 된 자그마하고 마른 어린 여자이이인데!
내 눈은 그 '엉덩이'라는 단어 이후로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었어요. 서서히 호흡이 가빠졌어요. 심호흡을 해야 했지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결국 책을 덮었어요. 띠지에서 작가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광고문구를 천천히 읽었지요. 표지 디자인의 그림과 글자들을 들여다보기도 했죠. 하지만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었어요. 내 입에서는 짧은 탄식의 한숨이 새어나왔죠. 첫 페이지를 다시 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책날개에 달린 저자소개를 아주 천천히 읽었습니다. 문득 눈물이 나려는 거예요.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내키지 않아하는 손가락을 달래 마침내 두번째 페이지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책 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씰리가 나직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계속 울 수밖에 없었어요.
여기까지 읽은 당신들은 이 책이 한많은 불쌍한 어떤 여자의 비극적이고 비참한 인생에 대한 소설일 거라 오해하시겠지요. 이 책을 소개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가난한 흑인의 어린 여성으로서 당한 '파란만장 비극사'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워낙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초장에 화라라락 열거돼 버리니까요.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그건, 어떤 '불쌍한' 사람 하나를 여전히 대상화하는 방식이지요.
앨리스 워커는 그런 식의 쉬운 자기연민이나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끌어가지 않아요. 그녀는 쓸데없이 과장하지 않아요. 비극을 화려하게 치장하지도 않아요. 이 책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씰리가 하나님께 털어놓는 비밀편지 형식이거든요. 그녀는 모든 고통을 버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감각을, 생각을 스스로 정지시켜 놓은 나무같은 여자입니다. 게다가 교육의 기회도 짧았어요. 그렇기에 자신이 당하는 끔찍한 일에 대해서도 별 감정 표현도 없이 지극히 건조하게, 생략도 많이 해가며, 아주 어눌하게, 또 넌즈시 조금 얘기하다 말뿐입니다. 독자는 그래서 충격을 받으면서도 자기연민이나 동정에 마구 쉽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구요.
이 책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건 그녀의 이런 고난을 저런 고난을 겪는 곳에서가 아니라, 그녀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떨리는 가슴을 느끼면서부터예요. 그제서야 그녀는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비로소 세상을 향해 감각을 느끼고, 파고와 같은 감정을 조금씩 드러냅니다. 그녀가 비로소 '절망'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건, 강간이나 폭력 피해자일 때가 아니라, 옆방에서 그 여자(슈그)와 남편이 히히덕거리며 밤을 지내는 소리를 들으면서예요. 그리고 자신과는 너무나 비교가 되는 아름답고 당당한 슈그가 만인의 주목을 받으며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을 보면서지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고 느끼면서부터예요. 그녀는, 그녀의 삶은, 비로소 오랜 잠에서 조금씩 깨어납니다. 제가 엉엉 울어버렸던 것도 바로 그런 장면들에서랍니다.
나 슈그를 쳐다보고는 가슴 조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고통이 어찌나 심했는지 손으로 가슴을 눌렀어요. 나는 누가 보건 말건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어요. 나는 내 꼴이 실었고, 내가 입은 옷도 한심하게 생각되었어요. 내 옷장에는 교회에 갈 때 입는 옷 말고는 하나도 없죠. 그리고 미스터 ____는 몸에 꼭 끼는 빨간 드레스 입은 슈그의 발 쳐다보았어요. 그녀의 머리카락이 파도치며 빛났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줄로 흘러내린 눈물이 턱에서 만났어요.
그리고 나는 뭐가 뭔지 알 길이 없었어요.
그이는 슈그 쳐다보기를 좋아해요. 나도 슈그 구경하기 좋아하고요. 하지만 슈그는 우리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봐요. 미스터 ____를요.
하지만 그것 당연한 일이죠. 나 그걸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면 왜 나 이토록 마음이 아플까요?
나 잔에 닿을 정도로 잔뜩 머리 떨구었어요.(p.86 ~ 87)
이후의 이야기는 여러분들의 즐거운 독서를 위해 생략하렵니다. 다만 이 말씀을 드리곤 싶어요. 이 책에 나오는 여자들은 씰리뿐 아니라 소피아, 네티, 슈그, 메어리 아그네스, 모두 사랑스러워요. 물론 각각의 단점도 답답한 점도 있지만, 용감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또한 네티가 아프리카로 건너가면서 이 소설은 단순히 미국 내 인종간 갈등 - 인종차별 - 의 문제뿐 아니라 흑인이라는 인종의, 말하자면 민족주의와 비슷한 이즘의 긍정적인 면과 한계, 흑인임에도 어쩔 수 없이 제국주의의 첨병이 될 수밖에 없는 미국인의 한계 등을 섬세하면서도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날카롭게 짚어나갑니다. 정말 대단해요. 게다가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해피 엔딩입니다.
불만도 없지 않지만, 그건 스포일러가 될 테니 마이리뷰에 쓰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이 책의 단점으로 느끼는 그런 불만지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름다움에 대한,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 아름다운 책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이성과 논리의 차원이 아니라 다분히 영혼과 성찰의 차원에서 말이죠. 무엇보다도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은, 오만한 완벽주의자의 기질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가혹한 심판자처럼 구는 게 아니라, 지금의 못나고 부족하고 한심한 부분들을, 나의 장점과 예쁘고 멋진 면들과 함께,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가 절실하다는 사실도. 이 책은, 새로운 내 인생을 꿈꿀 수 있도록 힘과 격려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아주 나지막하고 따뜻한 어루만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