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다큐멘터리)를 만든 Marina Lutz의 이야기. 

그녀는 97년 LA에서 예전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의 창고에 

세상을 떠난 부모가 남긴 물건들이 가득했고 그것들을 정리하면서 

놀라운 발견을 한다. 그녀 부친이 남긴 1만장에 이르는 그녀의 사진. 

역시 그녀를 찍은, 수백 릴에 이르는 super 8 필름. 그리고 몇 박스 분량의 오디오테입들. 

유아기부터 16세까지 강박적으로 그녀를 관찰(관음)했던 아버지가 남긴 기록. 그녀는 이 기록을 

검토하면서 10년을 보내고, 위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오늘 새벽에 깨서 누워 있다가 ; 

To the best of our knowledge 최근 에피에 포함된 그녀 인터뷰를 들었다. 

대략 이런 얘기를 한다. 


"창고에서 이것들을 발견했을 때 내 친구 진이 나와 같이 있었다. 그녀는 이건 보물 발굴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들을 전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 


열세살 쯤의 나를 찍은 필름이 있는데 

여기서 내 머리는 잘려 있고 카메라는 막 나오고 있는 내 가슴에 집중한다. 

나는 내 고양이를 괴롭히는 중이고 그건 내 가슴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관심을 흩트리기 위해서인 거 같다. 

그 장면 속의 나를 보면, 내가 그 자리에 실제로 있지도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내 몸을 떠나 있었다고 느낀다. 

그 자리에 현존하지 않고 정신이 내 몸을 떠나는 일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무엇이 있을 때마다 지금도 늘 

일어나는 일이다. 


배변훈련하는 나를 찍은 사진들이 있다. 이 사진들 중 몇 장을 아무렇게나 뽑아 보여준다면 

보는 사람은 '배변훈련하는 아이를 찍은 사진이구나' 반응하고 별 생각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찍힌 이 사진들에서 관심은 엉덩이에 있다. 내 엉덩이를 필요 이상 오래 보고 있는 아버지가 있다. 여자의 엉덩이를 보는 남자의 시선이 있다. 


사춘기 시절 흰색 면속옷을 입고 집 복도에서 아버지 요구에 따라 포즈를 취하면서 찍은 필름도 있다. 

여기서 나는 극히 불행하고 극히 불편해 보인다. 속옷 차림 딸에게 포즈를 취하게 하고 홈무비를 찍는 건 옳지 않다. 


오디오테입에 

싫다고 우는 나와 강요하고 괴롭히는 아버지가 있다. 이 테입들을 들으면서 나의 온몸이 반응했다. 

2003년에 나는 나의 테라피스트에게 이 필름, 오디오테입, 사진들의 일부를 보여주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야 테라피스트가 내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알 거 같았다. (*이것이 영화화의 시작이었다...) 


The Marina Experiment를 발표하고 나서 

나는 내게 고마움을 전하는 수많은 이메일들을 받았다.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진정 끔찍한 일이다. 

그들은 내게,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며 그리고 이것들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증거를 마침내 갖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이들만큼 많은 수로 받은 건 아니지만, 적지 않은 항의의 

이메일도 받아야 했다.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하는 딸은 교도소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찍은 사진엔 죄가 없고 그 사진을 아버지를 중상하는 방식으로 진열한 내게 죄가 있다고 했다. 


나는 이 필름, 오디오테입, 사진들을 "증거"로 본다. 이것들은 행복한 유년기의 기록이 아니다. 

이 안에 사랑은 완전히 부재한다. 나를 안고 나를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하라는 대로 

포즈를 취하는, 불행하고 슬픈 아이가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아주 슬픈 유년기의 기록이다. 


나는 "피해자(victim)"라는 말 대신 "반대자(opponent)"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보통은 

나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를 피해자로 느낄 때도 있는데, 내가 과거의 일로 두고 떠날 만큼 

온전히 극복하지는 못하는 난제와 언제나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러겠듯이 나도 내 삶에서 사랑을 원한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나의 경험이 너무도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누가 날 소중히 여기는 게 내겐 고통을 안긴다. 그건 내게 공포심을 자극한다." 



비몽사몽간이다가 그녀의 말들 들으면서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내게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말들이 극히 지적이고 정신적이어서. 

악을 녹이는 지성. 그게 바로 여기 있어서. 이렇게 텍스트만으론 (그리고 이건 온전히 옮겨 온 것도 아니고) 

충분히 전해지지 않을 거 같다. 


그녀 영화를 이렇게 요약한 관객이 있다. 

"(....) The daughter, who is also the filmmaker, presents this evidence in a subtle intellectual investigation that is grotesquely truthful and forthrightly condemning."


"영화 감독인 딸이 제시하는 이 섬세하고 지적인 탐구는 그로테스크하게 진실하고 

정직하게(꾸밈없이, 우회없이) 단죄한다." 


특히 마지막 두 단어. forthrightly condemning. 두고두고 생각해 볼만한 두 단어가 아닌가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7세 소년. 

고고학 교수인 아버지의 연구를 돕기 위해 여름 동안 집에 살러 오는 청년과 사랑에 빠짐. 

소년은 광적인 탐서가, 애서가, 모르는 것이 없는 독서광. 불어, 이탈리아어, 영어 셋을 경계 없이 

오가며 쓰는 polyglot. 


말로 들으면 

그걸로 걸작 영화가 나올 수가 없어 보이게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있지만 실제 영화에서 그 구멍들 모두가 사라진다고 한다. 

17세에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은 소년. : 이게 완전히 믿기며 그것이 그 소년의 매혹으로 

온전히 다가온다는 점 포함. 







이런 얕고 맑은 물. 

너무 좋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17-11-30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포스터도 너무 좋아요. 너무!! ㅠㅠ

몰리 2017-11-30 20:18   좋아요 0 | URL
포스터 맘에 들더라고요. 뭘까 하면서 맘에 듬. 녹색일까 청년일까 뭘까.
그리고 love와 sex의 교집합과 합집합(주제가 이런 거라고도 하던데) 이것도 참
.... 본격적이며 섬세한 접근은 없었던 거 같아서, 기대됩니다.

2017-11-30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30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딧세이>의 영어 번역은 

1615년경 조지 채프먼의 번역이 최초고 

지금까지 약 60여 종이 나왔다 한다. 그 중 올해 나온 

에밀리 윌슨의 번역이 최초의 여성 역자에 의한 번역이고 

기존 번역들이 흔히 공유했던 "여성혐오주의적 어젠다"를 바로잡는 외에도 

여러 면에서 작지만 급진적인 수정들을 하고 있다고. 윌슨 인터뷰와 번역에 대한 얘기가 

뉴욕타임즈 매거진에 실렸다. 전체 공개. 기사 제목이: The First Woman to Translate the "Odyssey" into English. 

윌슨은 유펜 고전학과 교수이고 71년 영국 출생. 옥스퍼드에서 학부,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 이미 자기 저서(단독저자로)도 두 권이나 썼으며 고전 번역도 <오딧세이>가 처음이 아니라 이미 (서너 권? 세어 보려다 말았다)....... 또 기사를 읽으면서 알게 되는 건 세 아이의 어머니기도 하다. 





외모를 보면 

꺼지지 않는 (그리고 오류 없는. 강력한) 개소리탐지기실 듯. 








기사에서 번역에 대한 얘기는 <오딧세이>의 첫 문장, 거기서도 다섯번째 단어에 집중한다. 

그녀의 영어 번역문은 "Tell me about a complicated man." 문제의 다섯번째 단어는 영어 번역문에서도 

다섯번째 단어인데 그리스어는 


"polytropos". 

poly는 "다수, 여럿"을 뜻하고 

tropos는 "방향, 전환"을 뜻하는데 (*poly도 많은 영어단어들에 흔적을 남겼지만 tropos도 적지 않은 영어단어들의 어근이 되었다. phototropic (굴광성의) 같은 단어들)


그런데 tropos가 수동인지 능동인지 결정할 수 없다고 한다. 

수동이면 "much turned"가 되고 능동이면 "much turning"이 되는데

전자라면 오딧세우스에게 일어난 일들, 시련들을 말하는 쪽으로 생각할 수 있겠고 

후자라면 오딧세우스의 다재다능함을 말하는 쪽. 지금까지 영어 번역들을 보면 

둘 중 하나의 방향을 명확히 선택하는 것이 다수. 원문의 모호함을 

(수동일 수도, 능동일 수도. 오딧세우스가 겪은 사건들일 수도, 오딧세우스의 내적 자질일 수도) 담은 번역은 없었다. 


사실 "polytropos" 이 단어의 모호함을 해설하고 

그 점을 감안할 때 "complicated"가 좋은 선택이라는 주석을 붙이지 않는다면 

"Tell me about a complicated man"만으로 오딧세우스가 정신적 역량이 다방면인 인물일 수도, 겪은 시련들이 

적지 않은 인물일 수도, 둘 다일 수도... 같은 생각이 들 거 같진 않다. 아무리 천천히 깊이 읽는 독자라 해도.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오딧세이>의 첫 문장은 이 기사의 이 (이 정도면) 깊이 있는 논의 덕분에, 어떻게 읽는 게 

좋겠는지, 모두가 거기서 시작할 법한 명확한 지침이 공표된 셈. 조이스의 Ulysses는 거의 줄 단위로 주석을 제공하는 

연구서가 나와 있다. Odyssey도 아마 나와 있을 거 같지만 혹시 없다면, 혹은 있다 해도, 기사가 다룬 것 같은 내용들 담은 방대한 주석 포함한 번역도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기사의 끝에서 에밀리 윌슨이, 자기 번역이 정말 급진적이라면 

첫 문장은 "Tell me about a straying husband"가 되었어야 했다 같은 얘기를 한다. 

이 대목 재미있다. straying husband. (자꾸) 길을 잃는 남편. (자꾸) 한눈 파는 남편. (자꾸) 뻘짓하는 남편. 


번역에 대한 대중적 논의의 수준이 

뉴욕타임즈 매거진의 이 기사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느냐...... : 이 인기 없을 방향 생각을 또 해 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버트 랭은 칼텍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물리학자인데 

물리학자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버리고 종이접기 아티스트가 되었다. 

현재 그는 세계적 명성의 종이접기 아티스트, 종이접기 이론가. 그가 종이접기를 처음 

접한 건 여섯 살 때. 교실에서 그의 정신을 즐겁게 집중시킬 모든 방법을 동원했으나 실패했던 

선생님의 최후 선택이 종이접기였다. 몇 년 뒤 그는 자기만의 종이접기 패턴들을 고안하고 있게 된다. 


종이접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 그 가능성이 종이접기에만 제한되는 게 아니라 

현대의 첨단 기술로 옮겨지기도 함에 대해 어제 그의 인터뷰 들으면서 처음 알았다. 


그에 따르면, "종이는 기억한다 (paper has a memory)." 

이 말이 어쩐지 심오하게 느껴지고 인생에 대한 말 같아 보인다는 인터뷰어의 말에 그가 이어서 하던 말: 

"종이에게 기억이 있다는 건 맞다. 종이를 한 번 접으면, 그 접힘을 없앨 수 없고 종이는 영원히 그 접힘을 안다. 

한 번 접으면 종이의 섬유와 섬유의 엉킨 고리들이 영원히 바뀐다. 심오한 개념을 기술로 번역하는 게 엔지니어들이 하는 일이다. 엔지니어들에게 그 접힘은 "조형적 왜곡(plastic deformation)"일 것이다. 철판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종이가 다른 점은, 종이는 접힘을 기억하지만 동시에 행복하게 반대 방향으로 다시 접히기도 한다는 점이다 (Paper, yes, it remembers that fold but then it is also happy to fold the other direction)."  



그의 말이 

Six Feet Under에서 한 장면 기억하게 했다. 

네이트를 마사지하던 브렌다가 네이트의 목 아래를 누르다가 

"너 여기 깊은 상처가 있다. 살면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이 우리 몸에 흔적을 남긴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말 한다. 그리고 네이트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들켰다는 듯 얼떨떨해 함. 이어 브렌다가 "종이접기에서 교훈을 가져와서, 네게 삶이 남긴 이 주름을 그 주름의 

반대 방향으로 접어보도록 하자"랬다면 아무말대잔치 됐겠네. 


개인의 존중. 

개인의 인식하고 상상하는 힘의 존중. 

이거 정말,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무엇이라서 

어떻게 그것들을 실천할 수 있을까, 매일 생각하고 연습해도 부족할 거 같다. 

로버트 랭과 종이접기. 인터뷰 들으면서 했던 생각도 이 방향이었음. 이 주제로 

그 무슨 사소한 생각이든 적어두겠다. 


많이 걷고 

커피는 줄이고 

땀 흘리며 목욕도 하는데도 

오래 깊이 못 자고 오늘도 1시 조금 넘어서 깸. 

갱년기.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갱년기인 것임. 

으아핳항 아아아아아. 아주 그냥 쓰러져라 걷거나, 걷는 걸로 모자라겠다면 

뛰는 것도 시도해야할 거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하라 2017-09-14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이는 접힘을 기억하지만 동시에 행복하게 반대 방향으로 다시 접히기도 한다˝는 말 정말 여운을 주는 말이네요 삶의 어떤 시절에는 종이를 닮아야 할 것 같아요^^

몰리 2017-09-14 19:46   좋아요 0 | URL
저도 저 말을 듣자마자
접혔던 반대 방향으로 접히면서
최초의 접힘에서 그래도 회복하는 ㅎㅎㅎ 자신을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이걸 연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때들이 앞으로도 있을 거 같습니다.

윙헤드 2017-09-14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이접기에도 이런 깨달음이...좋은글 감사합니다:)

몰리 2017-09-14 19:47   좋아요 0 | URL
아이구 제가 감사합니다 ^^
 




영국의 아동문학 작가 시오반 다우드(Siobhan Dowd)가 유방암과 투병하면서 남긴 

1천 단어 분량 원고를 이어, 패트릭 네스가 완성한 소설. 다우드는 자신이 머지 않아 죽을 것임을 

알면서 죽기 전에 완성하겠다는 계획이었지만 죽음이 그녀가 바랐던 것보다 더 빨리 왔다고 한다. 

출판사의 편집자가 그녀가 남긴 원고에 대해 네스에게 얘기하고, 공동 작업은 결코 하지 않는 네스는 

타계한 작가가 남긴 원고에서 시작하는 형식 공동 작업이라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실제 

원고를 읽은 다음 입장이 바뀌었다. 그래서 이 소설이 쓰여졌고 16년 겨울 개봉했던 영화도 제작되었다. 






아마존 독자 리뷰 보면 

"암환자 이야기임. 내가 싫어하고 피하는 장르. 

이건 어쩌다 보았음. 그리고 내내 울었다. 내내 줄줄 울었다...." 이런 리뷰가 있다. 


어머니가 암환자인 소년. 아버지는 새 여자를 만나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고 

어머니와 소년은 새로 나왔다는 암 치료에 대해 얘기하기도 하지만, 아마 거의 확실히 임박한 

이별에 대해 둘 다 알고 있다. 학교엔 소년을 괴롭히는 아이도 있고 그 아이 말고는 소년을 전부 

엄마가 중병에 걸린 불쌍한 아이 취급한다. 소년을 괴롭히는 아이만이, 소년을 온전하게 (공정하게?) 자기 또래 취급. 


소년의 집 근처에 거대한 주목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몬스터'로 변신해 소년에게, 이야기의 힘을 알게 하고 

어머니의 죽음으로 소년이 알게 될 깊은 상실("profound loss")을 겪을 준비를 하게 한다. 


Bookworm에 출연한 작가 인터뷰 들으면서 

작가도 책도 영화도 금시초문인데, 듣던 동안 점점, 점점점, 점점점점, 점점점점점; 

기대가 높아지던 책이었다. 이 정도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 아니야? 정말 이런 책이 쓰여졌단 말인가? : 이런 

믿을 수 없다 느낌이 들기도 했다. 


주목나무가 변신하는 몬스터가 소년에게 찾아와서, 소년을 위로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니고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핵심은, 이야기 전엔 무슨 일이 있었으며 

이야기 후엔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라고. 작가 네스 자신이, 어린 시절 동화를 읽을 때 견딜 수 없던 

지점이 이것이었다고 한다. 이 얘기 시작 전엔 무슨 일이 있었는데? 끝난 다음 그들은 어떻게 사는 거야? 


그리고 

"어린이에게 적합한 비참의 수준은 무엇인가? What level of misery is appropriate for children?"

.... 이 질문에 무제한. 이라 답하는 책이다. 아이들은 그들이 읽은 책에서 비참을 사랑하며 비참을 원한다. 

그리고 아이들 자신(특히, 10대 중후반)이 쓰는 글들을 보면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비참이 

가득한 세계인지 모를 수 없다. 그들의 세계에 비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명랑한 책을 그들을 위해 

쓰는 건, 그들이 각자 혼자 알아서 비참을 겪어가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고 "부도덕"하다. 


"이야기의 힘은 강력하다"고 십대 아이들에게 말하면 코웃음치겠지만, 이 책은 그렇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한 다음 그리고 그 주장을 스스로 실현하는 책. 이야기들을 통해 제시되는, 진실과 인식, 진실과 인식의 

힘에 관한 이야기. 


몬스터에 대해 말하면서 작가는 "kind vs. nice" 구분이 필요하다고 했다. 

"kind가 nice보다 위대한 것이다. 조금도 kind하지 않아도 nice할 수 있다 (You can be nice without being at all kind). 그리고 이것은 사실 악행의 일종이다. 그런가 하면 그 역도 마찬가지로 끔찍할 수 있다. 전혀 nice하지 않은 데 kind한 것. 몬스터가 그런 존재다. 소년에게 닥칠 재난을 몬스터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몬스터에게 언제나 소년을 향한 kindness가 있다. 책이 끝날 때 소년은 몬스터에게 Will you stay?라고 묻는다. 이 마지막 문장. 이것이 진정 이 책의 한 줄 요약이다. 이 결말을 지금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감정이 격해진다. 몬스터는 I was to stay라고 답한다." 





원작이 그야말로 "책들을 권하는 책"이라니 

책을 펼친 이미지로 제작된 이 포스터, 원작에 충실한 포스터일 듯.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Joule 2017-08-28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엄지손가락이 열 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ten thumbs up을 드릴 수 있을 텐데. (깜박 잊고 b를 빠뜨렸었어요. 명색이 엄지손가락인데 어떻게 b를 빠뜨릴 수 있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