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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失明) –낭만의 옷을 입다

어둠 속의 댄서

영화 속에서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이들이 종종 등장한다. 눈에 보이는 병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까지 포함시킨다면 아마도 모든 영화에서 병든 인물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삶이 완벽히 건강하지는 않은 것처럼 어떤 영화도 완벽히 밝지만은 않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가진 장애는 타피스트리의 무늬처럼 그들 자신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가 나름의 무늬를 만들어내고 명암을 조율한다. 명암의 대비가 뚜렷할수록 보는 이들에게는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기 마련. 이 화려한 대비를 통해 영화의 재미와 감동도 배가된다.

    <어둠 속의 댄서>도 이렇게 명암의 파동이 큰 영화 중 하나이다. 이야기 전개나 스토리 라인도 단순하고 등장인물도 많지 않지만 마치 흑백사진처럼 선명한 극적 구도로 주인공의 일탈적 삶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불행한 요소들을 두루 갖췄다. 그녀는 돈 한 푼 없는 이민자로 공장의 일용직 노동자이며 아비 없는 아이를 하나 키우며 살고 있는 데다 시력마저 점차 잃어가고 있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마냥 천진하게만 보이는 해맑은 얼굴 정도일까. 아니, 그녀에겐 아들이 있었다. 아비 없는 아이이므로 그녀에게 또 하나의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을 아이. 그러나 그 아이는 그녀에게 더없는 기쁨이며 자랑, 삶의 희망이었다. 그것은 그녀, 셀마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불편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더욱 넓은 꿈의 장(場)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과 같다. 그녀의 치명적인 장애는 결국 그의 삶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그녀, 셀마의 두꺼운 안경을 잠시만 벗겨보자. 영화는 셀마의 실명을 그녀 자신의 환상과 연결시켜 거의 낭만적인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지만 (나는 이미 보고 싶은 것들을 다 보았답니다. 빗방울과 장미꽃, 구리주전자와 크림색 양탄자... 지나온 과거와 미래도...) 그렇게 말하고 노래부르는 것이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눈이 조금이라도 나쁜 사람이라면, 그래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실명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명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손으로 더듬어 짐작하고 소리를 들어 알 수 있을 정도의 부분적인 소통은 가능할지 몰라도, 정상적인 사람들과 자유로운 인간관계를 가지거나 마치 ‘조금 안 보이는’ 정도의 근시인 것처럼 세밀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셀마는 정상적인 사람들도 잘못하면 손이 잘려나갈 수 있는 프레스 작업을 하고 있으며, 더듬거리는 몸가짐이 좀 불편해보일 뿐 장님이라서 크게 불편할 것도 없을 것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덩치 큰 기차도 잘 보이지 않는 셀마가 선로를 발로 더듬어가며 집으로 향하는 것은 관객의 긴장감을 유도해내기 위한 장치 정도가 아닐까. 프레스 작업도 하는데 땅을 울리며 다가오는 기차 정도야...) 게다가 영화 속에서는 셀마의 시력 정도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거의 완전히 실명한 상태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또다른 장면에서는 부분적인 실명 상태인가 생각되기도 한다. 주인공의 연기가 실감났던 것은 물론 뷔욕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이었겠지만 그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의 효과도 컸을 듯 하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장애의 고통과 그것의 극복과정이 아닌 이상 실제적인 표현은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실명’이란 것은 주인공의 예술(뮤지컬)에의 열정과 끈끈한 가족애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배경으로 작용할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줄거리 전체를 휘두르는 장애로 부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고통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아들의 눈 수술을 위해 재심청구도 거부하고 사형날짜만을 세고 있는 셀마에게 그의 남자친구, 제프가 묻는다.

« 진을 왜 낳았어요 ? 당신처럼 될 줄 알면서도... »

« 안아보고 싶어서... 내 품에 안아보고 싶어서요. »

관객은 눈물을 빼고 ‘실명’이라는 현실적 고통은 여기서 다시 낭만적 기운을 얻는다. 마침내 결말부분, 예정된 수순대로 셀마는 그녀의 목숨을 담보로 아들의 시력을 회복시킨다. 사형대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아들의 안경을 건네받고는 새롭게 솟구치는 사랑의 감정에 노래를 부르는 셀마. 그리고 그 순간 잘려나가는 필름처럼 툭 떨어지는 그녀의 생명.

    시력은 사람이 가진 보물 중 가장 큰 보물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목숨을 내걸고 아들의 시력을 찾아주려 했을 만큼. 그러나 여기 이 주인공은 스스로의 그 고통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초연하다. 초연할 뿐더러 그것을 뮤지컬에의 꿈으로 환치시켜 환상적으로 몰고가기조차 한다. 역시 영화이다. 그렇다면 아들이 감내해야 할 그만의 몫의 고통에 대해서도 그렇게 초연할 수는 없었을까. 그녀의 태도, 스스로의 고통은 감내할 수 있지만 아들의 실명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불사하려는 그녀의 태도는 분명 감동적인 모성애의 표본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억지스런 느낌도 든다. 그녀는 « 난 자유로워요 »라고 노래부르지만 실제로는 그 장애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신세인 것이다.

    <어둠 속의 댄서>라는 제목에서처럼 이 영화는 주인공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추는 춤을 보여준다. 환상 속에서는 화려할지라도 현실 속에서는 스스로 소진해 타버리는 춤. 댄서는 그의 노래와는 달리 어둠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의 춤 역시 장애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울다가 깨어나 그녀가 보여준 춤을 잊는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둠 속에서 추는 춤을 현실로서 드러내지 못한 이상, 이 영화는 제목에서처럼 여전히 모호한 예술의 경계선에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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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29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인상깊게 봤는데 재미 없었다는 사람이 더 많더군요. ㅎㅎ
 

두번 보지는 못할, 그러나 한번은 꼭 봐야만 할 영화

레퀴엠 (Requiem for a Dream)

그것이 늘 ‘죽음’과 연관된 것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인지, ‘레퀴엠’이란 단어는 그 발음에서부터 어딘지 모르게 장중하고 약간은 비극적인 울림을 갖는다. 레퀴엠. 성당 천정으로부터 울려퍼지는 오르간 소리처럼 명료하면서도 엄숙하고 정신을 긴장시키는 느낌. 이 영화는 그 울림의 여운을 혀끝으로 음미하면서 우연찮게 집어든 것이었다.

    영화를 말할 때 줄거리를 요약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김빠진 맥주처럼 맛없게 만들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이렇게 독특하고 파격적인 영상을 지닌, 그리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줄거리가 아닌 영상 속에 숨어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주요 등장인물들 네 명이 서서히 마약에 중독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레퀴엠은 아주 단순하고 상투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르고 있어서 줄거리만으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외로움 속에 홀로 늙어가는 여자 사라와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녀의 아들 해리, 집은 부유하지만 삶의 방향도 목적도 없는 해리의 여자친구 마리온, 그리고 해리의 친구 타이론. 이들 네 명이 엮어가는 비극적이고 암울한 사중주는 왜곡되거나 분할된 화면, 반복적으로 빠르게 교차하는 영상들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중에서도 계속 되풀이되면서 보여지는 약물 복용장면은 샘플링이나 콜라쥬, 몽타주 기법이 적절하게 사용되면서 우리에게 약물 복용자의 체험에 동참하게 만들고 있다.

    이 영화가 만약 훈계조로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려 했다면, 즉 좀 더 객관적으로 마약 복용자들을 바라보았더라면 우리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 마약 중독자가 된 것처럼 화면 속으로 빠져들게 되며, 영상은 갈수록 고통스러워져 보는 일 자체가 고문처럼 끔찍한 일이 되고 만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사라가 병원에서 전기충격 치료를 받는 장면이나 마리온이 약을 위해 음란파티에서 몸을 파는 장면, 해리의 한쪽 팔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장면들은 눈을 감고 싶어질 정도로 끔찍하다. 숨돌릴 틈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융단폭격 같은 영상들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마약은 이렇게 나쁜 것이니 하지 마시오’ 물론 그렇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경고, 훈계보다 더 무섭다. 그러나 중독자들의 이 금단현상을 보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고독하고 방향키도 없으며 무의미한 인생들을 보는 일일 것이다.

    미망인 사라가 마약 성분의 다이어트약에 중독돼 덜그덕거리는 아래턱으로 말하는 장면(« ...난 이제 돌봐야 할 사람도 없쟎니 ? 네 아빤 돌아가시고 넌 따로 살고. 청소도 음식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어... 난 그 TV쇼에 나가야만 해. 네 자랑도 하고 네 아빠 얘기도 해야지... »)이나 해리의 친구 타이론이 엄마의 따뜻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들을 보는 일은 고통스럽고 쓸쓸하다.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들의 자기확인은 중독을 통한 환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사라의 ‘빨간 드레스’는 행복했던 지난 시절에 대한 레퀴엠이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현재의 자기 모습을 다시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요술 방망이이다. 그것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아는 우리는 사라를 보면서 고통스럽다.

    해리와 마리온이 부표 같은 인생에 몸을 던져 섹스하듯이, 그렇게 어디엔가에 몸과 정신을 던지지 않으면 현실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을 ‘영화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이 바로 그렇게 때문이다. 현실이 이토록 밋밋하고 암울할진대, 어찌 중독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랴. 비단 약물 뿐만이 아닌, 커피나 담배, 일, 여자 혹은 남자, 혹은 사랑이라는 허상, 요리나... 기타 행위하고 보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에 우리는 중독되면서 살아간다. 어떤 식으로든지 현실에 기여할 수 있는 중독이라면 ‘마니아’라는 좋은 별칭으로 불러도 좋으리라. 그러나 영혼을 팔아야 하는 마약 중독만큼은 되돌이키기도, 빠져나오기도, 현실 속으로 복귀하기도 어렵다. ‘레퀴엠 ’의 주인공들은 어찌 되었던가. 그들은 현실과 꿈을 맞바꾼 대신 초점 없이 흐릿한 눈과 몽롱한 정신, 윤간당하는 육체를 얻었다. 육체는 감각적 쾌락에 맡긴 대신 정신은 사지가 뜯기우는 저승의 길목에 두고 온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시작과 끝은 고리의 양 끝처럼 펼쳐졌다가 마침내 하나로 맞닿는다. 전기충격 치료를 받는 사라, 몸을 팔고 약을 얻어온 마리온, 철창에 갇혀 피폐해진 타이론, 그리고 썩은 팔을 잘라내고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해리는 평온한 모습( !)으로 잠을 잔다. 모태 속 태아처럼 옆으로 돌아누워 웅크린 모습으로. 잠을 자는 이들은 어린 아기들처럼 죄없고 순수해보인다.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아릿했던 곳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누군들 죄가 있겠는가. 이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과 꿈, 무기력, 혹은 무의미 등에 그들의 삶을 먹혀버린 가여운 희생양일 뿐이다. 끝내 현실 속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꿈 속으로 도피하는) 이들, 이 잠이야말로 영화 속에서 그려진 가장 편안하고 아늑한 휴식처이다.

    누군가가 « 이 영화 두 번 보지는 못하겠다 »고 말했었다. 장면장면이 섬찟해, 보면서 고통스럽다고. 그러나 « 한번은 꼭 봐야 할 영화 »라고 그 누군가는 덧붙였고, 나도 거기에 동조하였다. 영화가 주는 여운도 그렇지만 잔혹한 동시에 아름다운 영상미만으로도 볼 이유는 충분하다. 거기에다 눈을 홀리는 영상들에 너무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그 영상들 뒤에 자리한 다른 요소들을 음미해볼 수도 있다. 삶은 우울하고 고독하며 또한 현실은 몽상과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삶의 가치란 것이 다만 그 빛나고 허망한 잠깐의 순간에 녹아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포기했는가 ?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아니다. 해리가 그리는 아름다운 마리온은 이미 그 자리에 없지만 우리의 마리온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 레퀴엠이란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 또는 '죽은 이의 혼을 달래기 위한 노래'로 풀이되는 카톨릭 교회의 예식용 음악이다. 진혼곡, 또는 진혼미사곡으로 번역되어 쓰이기도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 입당송(入堂頌)인 미사곡 <레퀴엠>의 첫 마디가 “requiem(안식을…)”으로 시작되는 데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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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참 평화 있을지어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샤인’

천재들의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늘 흥미를 동하게 한다. 더욱이 그러한 천재성이 삶의 다른 편에 감추어져 있는 고통(극심한 고독이나 정신적 방황, 질병 등)과 동행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취화선’에서 화가 장승업은 지독한 술꾼이었고 ‘뷰티풀 마인드’의 수학천재 존 내쉬 역시 노년에 노벨상까지 수상했지만 정신병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범하지만 그에 준할 만한 정신적, 신체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던 천재들. 그리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 꽃피워진 그들의 예술과 사랑, 학문적 업적들. 영화 ‘샤인’도 이 구도 안에 들어가 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천재들의 일화가 극단으로 향해있는 예가 대부분인지라 (그래야 보통 사람들의 호기심이 더하지 않겠는가) 이 영화 ‘샤인’의 주인공도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천재의 조건을 흡족하게 만족시킨다. 자기만의 세계에 살면서 일상사에서도 돌출적인 행동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 외골수적인 음악천재. 피아노 앞에서 연주할 때만 빼고 그는 심약한 성격에 말도 횡설수설하며 정신병까지 갖고 있다. ‘데이빗 헬프갓’ 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나는 고양이야, 고양이…” 한 남자의 중얼거리는 옆모습. 그 뒤를 이어 축축하게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 허름한 롱코트에 빗물로 얼룩진 안경을 걸쳐쓰고서 한 남자가 우산도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이제 막 문을 닫으려는 한 바(Bar)를 발견하고서 다가드는 남자... 이렇게 영화는 시작된다. ‘데이빗 헬프갓’이라는 실존하는 현역 피아니스트의 일대기를 영상화 한 이 영화는 그 화려한 수상경력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느낌을 전해준다. 논픽션 실화라는 것, 그래서 실제 인물의 삶과 얼마나 일치하는가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만, 그것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과 영화 전편에 흐르는 명곡들, 주인공 역을 맡은 제프리 러쉬의 명연기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때는 몇 년 전이었다. 오래 전이지만 몇몇 장면들은 너무도 생생하여 두번째의 관람을 망설이게 했다. 그러나 다시 읽을 때마다 감상이 달라지는 책이 있듯 좋은 영화도 되풀이해 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기쁨이 있다. ‘샤인’의 두번째 감상으로 내가 찾아낸 것은 주인공 헬프갓의 어머니와 그의 여자 형제들이었다. 내 어설픈 기억력 탓이라 할 수 밖엔 없지만 나는 헬프갓이 일찍 어머니를 잃고 독자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 영화에서 어머니의 존재란 밥 해주고 빨래하고 집안을 청소하는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미국 유학을 권유하러 음악선생이 헬프갓의 집에 들렀을 때도 헬프갓의 어머니는 시선을 외면한 채 그저 “그건 애아버지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고만 한다. 헬프갓의 여자형제들도 어린 시절 그와 함께 놀았다는 한 문장으로 족하다. 이들은 마치 그림자 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인물들과도 같다.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의 축이 헬프갓과 그의 아버지 피터를 중심으로 해서 돌고 있으니만큼 어머니와 여자형제들의 역할이 빛을 잃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영화의 기술적 측면에서가 아닌 실제의 어머니가 그렇게 무력했다면 헬프갓의 어머니 역시 헬프갓의 정신병력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권위적인 사랑법 밖에는 몰랐던 부성(父性)을 모성이 감싸안지 못했으니 말이다.

    헬프갓 아버지 ‘피터’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이 영화를 지탱하는 힘일지도 모르지만, 어린 헬프갓에게는 치명적인 사랑이었다. “나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라고 재차 못박듯 이야기하는 피터의 말은 주문처럼 ‘그러니까 넌 내게로 돌아와야만 한다’는 말로 들린다.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그러하듯 어린 헬프갓에게도 그의 아버지가 최상의 모델이자 ‘힘있고 강한 사람’으로서의 표본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터, 더욱이 아버지는 영원한 그의 음악선생이 아닌가. “이겨야만 하는 거야. 힘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살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벌레처럼 밟혀 죽어” “힘있는 사람? 아버지처럼?” 나찌에게 가족이 죽임을 당한 피터에게 있어 강한 자가 살아남을 수 있고 그러자면 경쟁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결론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또한 그토록 하고 싶었던 바이올린을 아버지의 반대로 못하게 되었던 자신과는 달리 헬프갓은 자신처럼 열심히 후원해주고 가르쳐주는 아버지를 만났으니 얼마나 ‘운 좋은 녀석’인가 말이다. 헬프갓 역시 유학 문제가 거론되기 전까지는 아버지 피터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한다. 권위적이었든 강압적이었든 그 방법 여하를 떠나 헬프갓에 들인 피터의 공력을 생각하자면, 타고난 재질이 있었다고 해도 헬프갓의 음악적 성과를 이끌어낸 동력은 ‘아버지’였다고 말할 만 하다.

    그런데 이 천재적 음악성을 지닌 행운아가 어쩌다가 정신병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던가. 영화에서는 그 이유를 난해하기로 유명하다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 탓으로 돌렸지만, 마(魔)의 음악 탓을 하기보다는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하듯이 유학을 갔지만 아버지와의 단교(斷交)로, 심리적 연결고리가 끊어짐으로써 그 공허감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버린 것이다. 여기에 더해 헬프갓의 유일한 정신적 친구였던 여류 소설가의 죽음이, 물병 속의 물을 넘치게 한 한 방울의 물처럼 그의 정신을 흘러넘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헬프갓의 음악에의 중압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바 없으나 그것이 입구가 막혀버린 항아리, 혹은 뚜껑이 꼭 닫힌 채 끓고 있는 냄비와 같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넘치고 흘러 깨어져버렸을 것이다. 천재성과 정신병이 서로 호환될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 해도 극단으로 흐르는 정신이 친구로 택하기 쉬운 것이 정신병이 아닌가.

    토막토막 끊어진 낱말들로 알지 못할 말들을 쉬지않고 중얼거리고 다니며 집안을 온통 어지럽히고 엄숙해야 할 교회에서는 자신을 돌봐주는 베릴부인의 가슴을 더듬는 헬프갓,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 정신질환 속에서도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자신있는 모습이 된다. 어디에서건 음악만 있으면 아이처럼 행복해하고 천진해지는 그. ‘샤인’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단박에, 귀에 이어폰을 꽂고 덤블링을 하던 헬프갓이 듣고 있던 음악을 기억할 것이다. 비발디의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 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목욕을 하다말고 뛰쳐나와 팬티바람에 외투만 걸친 채 덤블링을 하는 장면에서 흐르던 곡이다. 푸르디 푸른 하늘 아래 두 팔을 벌리고 그토록 해맑게 웃으며 뛰어오르는 그를 보고 초면의 점성술사 ‘길리언’이 마음을 열고, 그렇게 그는 구원받는다. 사회도, 가족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중년여인의 포옹이 해낸 셈이다. 길리언과 결혼하여 마음과 정신의 안정을 되찾고 마침내 성공적인 재기 콘서트를 여는 헬프갓.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주문과도 같은 말에서 해방된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폴란드계 유태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한 음악적 천재아가 어떻게 그 삶과 음악을 완성해가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폭넓은 질문들을 숨기고 있다. 예술이나 사랑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혹은 구원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과도하고 강압적인 애정은 상대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가, 진정한 자유와 기쁨은어디에서 오는가… . 이에 대한 대답은 영화를 보는 이들 각자가 다 다르겠지만 통틀어 한 가지의 공통분모는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그것이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동기요 기쁨일 것이다. 찾기 쉽지 않다 해도 세상에 어찌 참 평화가 없을 것인가. 아니 평화와 사랑이란 누구나의 마음 속에 이미 깃들어 있는 것, 구원이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서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집안 풀장에서 수영을 하는 헬프갓은 물 위에 라벨의 악보들을 둥둥 띄워놓고 그 속에서 자신도 하나의 악보인 양 헤엄을 치고 있다. 그 푸른 물빛, 그 자유로운 부유(浮遊)에 멈칫 가슴이 떨렸다. 마음 속의 그리고 몸 속의 질병으로부터 우리는 언제 그토록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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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29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영화 음악도 좋더군요. 저도 재미게 봤는데...
 

죽음을 통해 정화되는 사랑 –파이란

“세상은 나를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나를 사랑이라 한다”

우리 영화를 볼 때 가장 기쁜 건 영화 속 주인공들의 정서와 환경에 우리가 완전히 녹아들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스크린 자막이나 녹음된 성우의 목소리가 아닌 우리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주인공들이 숨쉬는 공기와 그 거리의 냄새를 알고 거리낌 없이 쏟아지는 단어의 뉘앙스를 알고 있는 우리들은 그만큼 가볍고 흔쾌한 마음으로 우리 영화 앞에 서게 된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귀를 쫑긋 긴장시키지 않고도, 느긋하게 먹을 거 먹으며 뒤로 기대 누운 자세에서도 흐르는 화면만으로 알 수 있는 무엇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영화 ‘파이란’이 개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영화를 관람하러 간 내 자세도 그러했다. 엉덩이를 의자 끝부분에 걸치고 미끄러진 듯 기대앉아 편안하고도 다소 나른한 기분으로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는 푸른 바다 일렁이는 물결을 굽어보면서 시작되었다. 그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입국하는 조선족 여자, 파이란(강백란). 그리고 담배연기 매캐한 뒷골목 오락실에서 아이들의 담배 가치나 후리고 있는 건달 강재.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나는 더 이상 엉덩이를 빼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특별히 긴장할 만한 일이 벌어져서가 아니었다. 주인공 강재의 일상이 적나라하게 느껴질 만큼 생생하게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거리에서고 한번쯤은 맞닥뜨렸음직한 날건달의 모습 그대로, 만화와 오락으로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고 가려우면 어디서고 속옷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득득 긁어대며 ‘쌍시옷’이 빠지면 도무지 말을 할 수 없는 건달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 정서와 말이 완벽히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 이럴 땐 참으로 난감하다. 저리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말과 행동들에 누군들 느긋하게 뒤로 기대 앉을 수 있겠는가. 찝찝함의 극치는 설거지감 놓여있는 개수대에 오줌을 갈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돗물을 내리는 장면이었다. 으윽! 그래도 강재가 우리 눈에 밉지 않게 보였던 건 그가 건달치고는 순진하고 마음이 여리며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방 한쪽 벽에는 ‘男子답게 산다’고 적힌 종이쪽을 붙여놓고서 피카츄 인형을 베고 뒹굴며 같이 사는 후배 경수와 티격태격하는 강재는 돈을 수금하러 간 동네 슈퍼에서도 오히려 아주머니에게 머리털을 쥐어뜯기고, 함께 간 건달패들이 아주머니에게 하는 막말을 차마 듣지 못해 “어이~” 하고 나섰다가 웃음거리만 사는 마음 여린 건달이다. 그가 직업소개소 소장(파이란을 죽음으로 몰아넣고서도 그녀의 주검 앞에서 히죽거리며 받지 못할 돈만 아까워했던)을 운동장에서 신나게 두드려 팰 때 우리는 그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던가. 삼류 중에서도 오갈 데 없는 삼류 인생 강재가 그렇게 이뻐보였던 것은 그가 날 것 그대로인 밑바닥 인생에서도 따뜻한 인정(人情)과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재가 있는 풍경

주인공이 삼류 인생이듯 줄거리로만 보자면 신파를 면할 길 없는 이 영화가, 상큼하지도 독특하지도 그렇다고 보고나서 기분이 좋아지지도 않는 이 영화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모든 통속적인 이야기들이 그러하듯이 이 영화도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극적인 구도를 취하고 있다. 건달과 조선족 처녀와의 위장결혼, 거친 조직세계에서 뻥만 남은 늙다리 건달과 부지런하고 착한 데다 예쁘기까지 한 조선족 처녀, 그 사이에서 소리없이 싹트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과 함께 소리없이 커져가는 그녀의 병(病), 끝내 그녀는 죽고 이미 가버린 사랑과 이루지 못한 망향(望鄕)의 꿈 속에서 건달은 죽임을 당한다. 소위 막장 인생끼리 만나 사랑하고 죽는다는, 아니 서로 만나보지도 못한 채 사랑하고 죽는다는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이토록 마음이 동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미 짜여진 구도 속에서 감동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파이란이 생전 보지도 못한 남자를 다만 그가 계약상의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워하는 모습이나 강재가 파이란의 그 순진한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많이 알려졌지만 오히려 그닥 마음을 울리지는 못하였다. 파이란의 그 청승스러울 정도의 착한 면면(병 치료를 위해 직업소개소 소장에게 입금을 연기해달라고 사정하러 갔을 때도 그녀는 고스톱을 치며 이죽거리는 그 앞에서 돌아나오며 수차례 고개 깊이 인사를 하지 않았던가)은 답답증이 날 지경이었고 강재가 속한 조직세계의 밑그림도 보통 사람들의 통념(머리와 가슴은 없고 몸과 주먹만 있는 세계라는)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단지 이뿐이었다면 나는 ‘파이란’을 본 다음날 이미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이란’에는 ‘여백’이 있었다. 말을 하지 않고 지나는 한 순간의 숨죽임, 눈을 깜박 감았다 뜨는 그 한순에 흐르는 어떤 감정이 있었다. 소란하고 너저분한 풍경 속에서도 ‘찰칵’ 사진을 찍듯이 멈추는 어떤 순간이 있었다. ‘파이란’의 시작, 그 푸른 바다빛이 그랬고 영화 도입부와 마지막에 한번씩 휘돌아 보여주었던 강재의 방 풍경이 그랬다. 또 화랑을 지나치다 그 안에 전시된 배 그림을 흘낏, 못내 눈을 떼지 못했던 강재의 얼굴이 그랬다. 파이란의 편지를 읽으며 달리는 기차, 그 철길 풍경 속에 날아드는 눈발도 그러하였고 그녀의 죽음을 향해 몸을 움츠리고 걸어가던 강재의 모습도 그러하였다. “여기에서 왜 내려? 아직 멀었는데…” “내리라면 내려, 임마” 그들은 버스에서 내려 칼바람 속을 걷는다. 빙판을 만나자마자 뛰어들어 춤추는 강재, 마음 속 애잔함의 표현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그들, 죽어서야 만나지는 파이란과 강재의 사랑은 말로 한마디 표현되어지지 못한 채 그렇게 철길 속 눈발로 녹고 매서운 강바람에 움츠리고 강재가 처음 입었음직한 양복 속에 감겨든다. 이에 비하면 바닷가에서 파이란의 편지를 읽고 강재가 울음을 터뜨리는 씬은 오히려 싱거우리라. 마음 속에 쉼표를 툭툭 떨어뜨려놓는 이러한 여백의 순간들은 영화 속에서건 책 속에서건 한 페이지를 넘기고 그 다음 페이지를 펼치기 전, 혹은 한 문장이 끝나고 다른 문장이 시작되려는 참의 그 잠깐의 공백 속에 숨어있다. 작품이 그 자신만의 표정을 갖게 되는 것은 이렇게 잠시 멈추는 순간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말 없이 말을 하는 순간들, ‘파이란’에서 이러한 여백들은 주로 강재가 있는 풍경 속에서 등장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영화는 그만큼 강재의 케릭터에 빚을 지고 있다.

파이란의 죽음 그리고 바다

이 영화 속에서 파이란의 죽음은 그녀 자신의 사랑을 완성시키는 동시에 강재와 그를 둘러싼 세상을 정화시키는 하나의 기제로 작용한다. 파이란의 부지런함이 그녀의 공간을 지저분한 창고방에서 깨끗하고 아담한 방으로 바꿔놓은 것처럼, 그녀의 죽음은 강재를 그녀에게로 이끌어들이고 조직세계에서 빠져나와 마침내 그를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강재의 고향은 어디인가. 그곳은 6기통 디젤 배 통통거리고 돌아갈 어촌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어머니의 품이며 사랑하는 여자 파이란의 품이다. 바다 풍경이 이 영화에서 설핏설핏 자주 비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바다는 이곳에서 저곳, 혹은 이생에서 저생을 건너가는 다리이자 모성(母性)이나 모태(母胎)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물이다. 파이란이 건너온 곳, 그리고 머물고 있던 곳도 바닷가였고 강재가 죽어가면서 흐릿하게 감겨오는 눈으로 마지막까지 시선을 두고 있었던 곳도 ‘파이란 봄바다’였다. 바다는 강재의 고향이자 그와 그녀의 사랑이 죽음을 건너 완성되는 곳인 셈이다. 영화는 이렇게 바다를 건너오는 파이란을 보여주면서 시작되고 바다를 향해 떠나가는 강재를 보여주면서 끝맺는다.

    만약 파이란이 병에 걸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들은 만날 일도, 사랑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건달 강재의 망향가는 꿈으로 끝났을 것이며 부지런한 조선족 처녀는 돈을 많이 벌어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래서, 강재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파이란은 아파야 했다. 각혈을 하면서 다림질을 하고 빨래를 해야 했다. 한번 만나보지도 못한 남자를 단지 사진만으로 사랑하게 된 그녀의 기다림에, 그 얼토당토 않은 사랑에 우리가 동참하게 된 것도 그녀의 상황이 그만큼이나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예견된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녀는 죽음 뒤에 찾아올 사랑에게 편지를 쓴다. 싫든 좋든 그녀의 존재를 인정해주어야만 할 사람에게. 그녀가 사 둔 두 개의 치솔 중 하나를 지니게 될 사람에게.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무엇이었든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통해 서로를 알아보았던 것이고 그 ‘알아봄’ 을 통해 세상에서 떠밀린 삼류 건달 강재는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파이란의 편지는 그 구원으로 가는 통로였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왜냐하면 나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 당신 덕분에 여기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이 없어서 미안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 당신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들. 강재가 파이란에게 건네준 빨간 스카프, 빨래를 하던 파이란의 하얀 종아리, 눈부시게 나부끼던 흰 빨래, 그 뒤로 넘실대던 동해바다, 강재의 방, 그녀의 방, 철길 위로 그리도 순결하게 내리던 눈, 그리고 죽어가는 강재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파이란의 얼굴… .

    한밤중에도 잠을 쉬 이루지 못하고 깨어있는 이들이 있다. 을씨년스러운 바깥 날씨를 내다보면서 어느 낯선 거리에서 헤매이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거나 이루지 못한 사랑들을 떠올리는 이들, 혹은 이미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이들. 달콤하지는 않지만 한번 맛보면 영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가진 사람들. 그런 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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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29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이란 너무 좋게 봤어요. 강원도 바닷가가 나오던데...어딘지는 들었는데 기억이 안나네요. 장백지도 너무 이쁘고 최민식의 연기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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