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보지는 못할, 그러나 한번은 꼭 봐야만 할 영화

레퀴엠 (Requiem for a Dream)

그것이 늘 ‘죽음’과 연관된 것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인지, ‘레퀴엠’이란 단어는 그 발음에서부터 어딘지 모르게 장중하고 약간은 비극적인 울림을 갖는다. 레퀴엠. 성당 천정으로부터 울려퍼지는 오르간 소리처럼 명료하면서도 엄숙하고 정신을 긴장시키는 느낌. 이 영화는 그 울림의 여운을 혀끝으로 음미하면서 우연찮게 집어든 것이었다.

    영화를 말할 때 줄거리를 요약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김빠진 맥주처럼 맛없게 만들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이렇게 독특하고 파격적인 영상을 지닌, 그리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줄거리가 아닌 영상 속에 숨어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주요 등장인물들 네 명이 서서히 마약에 중독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레퀴엠은 아주 단순하고 상투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르고 있어서 줄거리만으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외로움 속에 홀로 늙어가는 여자 사라와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녀의 아들 해리, 집은 부유하지만 삶의 방향도 목적도 없는 해리의 여자친구 마리온, 그리고 해리의 친구 타이론. 이들 네 명이 엮어가는 비극적이고 암울한 사중주는 왜곡되거나 분할된 화면, 반복적으로 빠르게 교차하는 영상들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중에서도 계속 되풀이되면서 보여지는 약물 복용장면은 샘플링이나 콜라쥬, 몽타주 기법이 적절하게 사용되면서 우리에게 약물 복용자의 체험에 동참하게 만들고 있다.

    이 영화가 만약 훈계조로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려 했다면, 즉 좀 더 객관적으로 마약 복용자들을 바라보았더라면 우리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 마약 중독자가 된 것처럼 화면 속으로 빠져들게 되며, 영상은 갈수록 고통스러워져 보는 일 자체가 고문처럼 끔찍한 일이 되고 만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사라가 병원에서 전기충격 치료를 받는 장면이나 마리온이 약을 위해 음란파티에서 몸을 파는 장면, 해리의 한쪽 팔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장면들은 눈을 감고 싶어질 정도로 끔찍하다. 숨돌릴 틈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융단폭격 같은 영상들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마약은 이렇게 나쁜 것이니 하지 마시오’ 물론 그렇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경고, 훈계보다 더 무섭다. 그러나 중독자들의 이 금단현상을 보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고독하고 방향키도 없으며 무의미한 인생들을 보는 일일 것이다.

    미망인 사라가 마약 성분의 다이어트약에 중독돼 덜그덕거리는 아래턱으로 말하는 장면(« ...난 이제 돌봐야 할 사람도 없쟎니 ? 네 아빤 돌아가시고 넌 따로 살고. 청소도 음식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어... 난 그 TV쇼에 나가야만 해. 네 자랑도 하고 네 아빠 얘기도 해야지... »)이나 해리의 친구 타이론이 엄마의 따뜻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들을 보는 일은 고통스럽고 쓸쓸하다.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들의 자기확인은 중독을 통한 환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사라의 ‘빨간 드레스’는 행복했던 지난 시절에 대한 레퀴엠이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현재의 자기 모습을 다시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요술 방망이이다. 그것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아는 우리는 사라를 보면서 고통스럽다.

    해리와 마리온이 부표 같은 인생에 몸을 던져 섹스하듯이, 그렇게 어디엔가에 몸과 정신을 던지지 않으면 현실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을 ‘영화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이 바로 그렇게 때문이다. 현실이 이토록 밋밋하고 암울할진대, 어찌 중독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랴. 비단 약물 뿐만이 아닌, 커피나 담배, 일, 여자 혹은 남자, 혹은 사랑이라는 허상, 요리나... 기타 행위하고 보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에 우리는 중독되면서 살아간다. 어떤 식으로든지 현실에 기여할 수 있는 중독이라면 ‘마니아’라는 좋은 별칭으로 불러도 좋으리라. 그러나 영혼을 팔아야 하는 마약 중독만큼은 되돌이키기도, 빠져나오기도, 현실 속으로 복귀하기도 어렵다. ‘레퀴엠 ’의 주인공들은 어찌 되었던가. 그들은 현실과 꿈을 맞바꾼 대신 초점 없이 흐릿한 눈과 몽롱한 정신, 윤간당하는 육체를 얻었다. 육체는 감각적 쾌락에 맡긴 대신 정신은 사지가 뜯기우는 저승의 길목에 두고 온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시작과 끝은 고리의 양 끝처럼 펼쳐졌다가 마침내 하나로 맞닿는다. 전기충격 치료를 받는 사라, 몸을 팔고 약을 얻어온 마리온, 철창에 갇혀 피폐해진 타이론, 그리고 썩은 팔을 잘라내고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해리는 평온한 모습( !)으로 잠을 잔다. 모태 속 태아처럼 옆으로 돌아누워 웅크린 모습으로. 잠을 자는 이들은 어린 아기들처럼 죄없고 순수해보인다.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아릿했던 곳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누군들 죄가 있겠는가. 이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과 꿈, 무기력, 혹은 무의미 등에 그들의 삶을 먹혀버린 가여운 희생양일 뿐이다. 끝내 현실 속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꿈 속으로 도피하는) 이들, 이 잠이야말로 영화 속에서 그려진 가장 편안하고 아늑한 휴식처이다.

    누군가가 « 이 영화 두 번 보지는 못하겠다 »고 말했었다. 장면장면이 섬찟해, 보면서 고통스럽다고. 그러나 « 한번은 꼭 봐야 할 영화 »라고 그 누군가는 덧붙였고, 나도 거기에 동조하였다. 영화가 주는 여운도 그렇지만 잔혹한 동시에 아름다운 영상미만으로도 볼 이유는 충분하다. 거기에다 눈을 홀리는 영상들에 너무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그 영상들 뒤에 자리한 다른 요소들을 음미해볼 수도 있다. 삶은 우울하고 고독하며 또한 현실은 몽상과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삶의 가치란 것이 다만 그 빛나고 허망한 잠깐의 순간에 녹아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포기했는가 ?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아니다. 해리가 그리는 아름다운 마리온은 이미 그 자리에 없지만 우리의 마리온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 레퀴엠이란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 또는 '죽은 이의 혼을 달래기 위한 노래'로 풀이되는 카톨릭 교회의 예식용 음악이다. 진혼곡, 또는 진혼미사곡으로 번역되어 쓰이기도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 입당송(入堂頌)인 미사곡 <레퀴엠>의 첫 마디가 “requiem(안식을…)”으로 시작되는 데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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