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통해 정화되는 사랑 –파이란

“세상은 나를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나를 사랑이라 한다”

우리 영화를 볼 때 가장 기쁜 건 영화 속 주인공들의 정서와 환경에 우리가 완전히 녹아들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스크린 자막이나 녹음된 성우의 목소리가 아닌 우리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주인공들이 숨쉬는 공기와 그 거리의 냄새를 알고 거리낌 없이 쏟아지는 단어의 뉘앙스를 알고 있는 우리들은 그만큼 가볍고 흔쾌한 마음으로 우리 영화 앞에 서게 된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귀를 쫑긋 긴장시키지 않고도, 느긋하게 먹을 거 먹으며 뒤로 기대 누운 자세에서도 흐르는 화면만으로 알 수 있는 무엇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영화 ‘파이란’이 개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영화를 관람하러 간 내 자세도 그러했다. 엉덩이를 의자 끝부분에 걸치고 미끄러진 듯 기대앉아 편안하고도 다소 나른한 기분으로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는 푸른 바다 일렁이는 물결을 굽어보면서 시작되었다. 그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입국하는 조선족 여자, 파이란(강백란). 그리고 담배연기 매캐한 뒷골목 오락실에서 아이들의 담배 가치나 후리고 있는 건달 강재.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나는 더 이상 엉덩이를 빼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특별히 긴장할 만한 일이 벌어져서가 아니었다. 주인공 강재의 일상이 적나라하게 느껴질 만큼 생생하게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거리에서고 한번쯤은 맞닥뜨렸음직한 날건달의 모습 그대로, 만화와 오락으로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고 가려우면 어디서고 속옷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득득 긁어대며 ‘쌍시옷’이 빠지면 도무지 말을 할 수 없는 건달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 정서와 말이 완벽히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 이럴 땐 참으로 난감하다. 저리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말과 행동들에 누군들 느긋하게 뒤로 기대 앉을 수 있겠는가. 찝찝함의 극치는 설거지감 놓여있는 개수대에 오줌을 갈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돗물을 내리는 장면이었다. 으윽! 그래도 강재가 우리 눈에 밉지 않게 보였던 건 그가 건달치고는 순진하고 마음이 여리며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방 한쪽 벽에는 ‘男子답게 산다’고 적힌 종이쪽을 붙여놓고서 피카츄 인형을 베고 뒹굴며 같이 사는 후배 경수와 티격태격하는 강재는 돈을 수금하러 간 동네 슈퍼에서도 오히려 아주머니에게 머리털을 쥐어뜯기고, 함께 간 건달패들이 아주머니에게 하는 막말을 차마 듣지 못해 “어이~” 하고 나섰다가 웃음거리만 사는 마음 여린 건달이다. 그가 직업소개소 소장(파이란을 죽음으로 몰아넣고서도 그녀의 주검 앞에서 히죽거리며 받지 못할 돈만 아까워했던)을 운동장에서 신나게 두드려 팰 때 우리는 그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던가. 삼류 중에서도 오갈 데 없는 삼류 인생 강재가 그렇게 이뻐보였던 것은 그가 날 것 그대로인 밑바닥 인생에서도 따뜻한 인정(人情)과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재가 있는 풍경

주인공이 삼류 인생이듯 줄거리로만 보자면 신파를 면할 길 없는 이 영화가, 상큼하지도 독특하지도 그렇다고 보고나서 기분이 좋아지지도 않는 이 영화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모든 통속적인 이야기들이 그러하듯이 이 영화도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극적인 구도를 취하고 있다. 건달과 조선족 처녀와의 위장결혼, 거친 조직세계에서 뻥만 남은 늙다리 건달과 부지런하고 착한 데다 예쁘기까지 한 조선족 처녀, 그 사이에서 소리없이 싹트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과 함께 소리없이 커져가는 그녀의 병(病), 끝내 그녀는 죽고 이미 가버린 사랑과 이루지 못한 망향(望鄕)의 꿈 속에서 건달은 죽임을 당한다. 소위 막장 인생끼리 만나 사랑하고 죽는다는, 아니 서로 만나보지도 못한 채 사랑하고 죽는다는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이토록 마음이 동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미 짜여진 구도 속에서 감동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파이란이 생전 보지도 못한 남자를 다만 그가 계약상의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워하는 모습이나 강재가 파이란의 그 순진한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많이 알려졌지만 오히려 그닥 마음을 울리지는 못하였다. 파이란의 그 청승스러울 정도의 착한 면면(병 치료를 위해 직업소개소 소장에게 입금을 연기해달라고 사정하러 갔을 때도 그녀는 고스톱을 치며 이죽거리는 그 앞에서 돌아나오며 수차례 고개 깊이 인사를 하지 않았던가)은 답답증이 날 지경이었고 강재가 속한 조직세계의 밑그림도 보통 사람들의 통념(머리와 가슴은 없고 몸과 주먹만 있는 세계라는)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단지 이뿐이었다면 나는 ‘파이란’을 본 다음날 이미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이란’에는 ‘여백’이 있었다. 말을 하지 않고 지나는 한 순간의 숨죽임, 눈을 깜박 감았다 뜨는 그 한순에 흐르는 어떤 감정이 있었다. 소란하고 너저분한 풍경 속에서도 ‘찰칵’ 사진을 찍듯이 멈추는 어떤 순간이 있었다. ‘파이란’의 시작, 그 푸른 바다빛이 그랬고 영화 도입부와 마지막에 한번씩 휘돌아 보여주었던 강재의 방 풍경이 그랬다. 또 화랑을 지나치다 그 안에 전시된 배 그림을 흘낏, 못내 눈을 떼지 못했던 강재의 얼굴이 그랬다. 파이란의 편지를 읽으며 달리는 기차, 그 철길 풍경 속에 날아드는 눈발도 그러하였고 그녀의 죽음을 향해 몸을 움츠리고 걸어가던 강재의 모습도 그러하였다. “여기에서 왜 내려? 아직 멀었는데…” “내리라면 내려, 임마” 그들은 버스에서 내려 칼바람 속을 걷는다. 빙판을 만나자마자 뛰어들어 춤추는 강재, 마음 속 애잔함의 표현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그들, 죽어서야 만나지는 파이란과 강재의 사랑은 말로 한마디 표현되어지지 못한 채 그렇게 철길 속 눈발로 녹고 매서운 강바람에 움츠리고 강재가 처음 입었음직한 양복 속에 감겨든다. 이에 비하면 바닷가에서 파이란의 편지를 읽고 강재가 울음을 터뜨리는 씬은 오히려 싱거우리라. 마음 속에 쉼표를 툭툭 떨어뜨려놓는 이러한 여백의 순간들은 영화 속에서건 책 속에서건 한 페이지를 넘기고 그 다음 페이지를 펼치기 전, 혹은 한 문장이 끝나고 다른 문장이 시작되려는 참의 그 잠깐의 공백 속에 숨어있다. 작품이 그 자신만의 표정을 갖게 되는 것은 이렇게 잠시 멈추는 순간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말 없이 말을 하는 순간들, ‘파이란’에서 이러한 여백들은 주로 강재가 있는 풍경 속에서 등장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영화는 그만큼 강재의 케릭터에 빚을 지고 있다.

파이란의 죽음 그리고 바다

이 영화 속에서 파이란의 죽음은 그녀 자신의 사랑을 완성시키는 동시에 강재와 그를 둘러싼 세상을 정화시키는 하나의 기제로 작용한다. 파이란의 부지런함이 그녀의 공간을 지저분한 창고방에서 깨끗하고 아담한 방으로 바꿔놓은 것처럼, 그녀의 죽음은 강재를 그녀에게로 이끌어들이고 조직세계에서 빠져나와 마침내 그를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강재의 고향은 어디인가. 그곳은 6기통 디젤 배 통통거리고 돌아갈 어촌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어머니의 품이며 사랑하는 여자 파이란의 품이다. 바다 풍경이 이 영화에서 설핏설핏 자주 비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바다는 이곳에서 저곳, 혹은 이생에서 저생을 건너가는 다리이자 모성(母性)이나 모태(母胎)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물이다. 파이란이 건너온 곳, 그리고 머물고 있던 곳도 바닷가였고 강재가 죽어가면서 흐릿하게 감겨오는 눈으로 마지막까지 시선을 두고 있었던 곳도 ‘파이란 봄바다’였다. 바다는 강재의 고향이자 그와 그녀의 사랑이 죽음을 건너 완성되는 곳인 셈이다. 영화는 이렇게 바다를 건너오는 파이란을 보여주면서 시작되고 바다를 향해 떠나가는 강재를 보여주면서 끝맺는다.

    만약 파이란이 병에 걸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들은 만날 일도, 사랑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건달 강재의 망향가는 꿈으로 끝났을 것이며 부지런한 조선족 처녀는 돈을 많이 벌어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래서, 강재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파이란은 아파야 했다. 각혈을 하면서 다림질을 하고 빨래를 해야 했다. 한번 만나보지도 못한 남자를 단지 사진만으로 사랑하게 된 그녀의 기다림에, 그 얼토당토 않은 사랑에 우리가 동참하게 된 것도 그녀의 상황이 그만큼이나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예견된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녀는 죽음 뒤에 찾아올 사랑에게 편지를 쓴다. 싫든 좋든 그녀의 존재를 인정해주어야만 할 사람에게. 그녀가 사 둔 두 개의 치솔 중 하나를 지니게 될 사람에게.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무엇이었든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통해 서로를 알아보았던 것이고 그 ‘알아봄’ 을 통해 세상에서 떠밀린 삼류 건달 강재는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파이란의 편지는 그 구원으로 가는 통로였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왜냐하면 나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 당신 덕분에 여기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이 없어서 미안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 당신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들. 강재가 파이란에게 건네준 빨간 스카프, 빨래를 하던 파이란의 하얀 종아리, 눈부시게 나부끼던 흰 빨래, 그 뒤로 넘실대던 동해바다, 강재의 방, 그녀의 방, 철길 위로 그리도 순결하게 내리던 눈, 그리고 죽어가는 강재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파이란의 얼굴… .

    한밤중에도 잠을 쉬 이루지 못하고 깨어있는 이들이 있다. 을씨년스러운 바깥 날씨를 내다보면서 어느 낯선 거리에서 헤매이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거나 이루지 못한 사랑들을 떠올리는 이들, 혹은 이미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이들. 달콤하지는 않지만 한번 맛보면 영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가진 사람들. 그런 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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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29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이란 너무 좋게 봤어요. 강원도 바닷가가 나오던데...어딘지는 들었는데 기억이 안나네요. 장백지도 너무 이쁘고 최민식의 연기도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