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둘러싼 한중일 삼국간의 공방이 뜨겁다. 모든 역사를 마치 자국의 역사인 것 마냥 해석하는 속에서 우리는 고구려를 잃어가고 있다. 한반도 내에 있는 아차산 등의 고구려 유적에 대해서는 전혀 관리하지도 않다가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하니 그제서야 들고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르는 우리의 모습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 와중에서도 계속되는 사대주의 외교까지. 이런 상황에서 고선지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실로 행운이었다. 분명 그는 당나라의 장수였다. 하지만 그는 라는 성까지 부인할 순 없는, 고구려 유민이었다.

유럽 문명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낯설게 느껴진다. 도대체 그가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단 말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는 부끄러움도 잠시, 페이지를 넘기다 발견한 지도 앞에서 난 할말을 잃고 말았다. 중앙 아시아 깊숙한 곳까지 넓게 드리워진 당나라의 영토, 안서도호부. 그 곳이 고선지의 활동 주무대(?)라고 했다. 이슬람 문화권과 동양 문화권의 접경 지역에서 활동했던 그였던 것이다.

말년 양귀비에게 빠져 정세를 돌보지 않음으로써 당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갔지만 분명 당나라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현종, 고선지는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고구려계 유민으로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노예 신분일 수 밖에 없었던 그에게 무(武)는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어려서는 병약했고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고구려인 특유의 대범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였기에, 험악한 산악 지대에서도 주눅들지 않았으며, 아버지와도 같은 넓은 가슴으로 부하들을 끌어안았다. (소발률국 점령을 위해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파미르 고원을 뛰어넘기도 했는데, 이 높이는 나폴레옹이 넘었던 2,500미터의 알프스 산맥의 거의 2배였다고) 비록 패하긴 했지만 탈라스 전투는 동양 문명의 우수함을 유럽 사회에 알릴 수 있는 기회였기에, 그는 유럽 문명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인이라는 태생으로 인해 그는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넓은 도량을 갖추지 못한 부몽영찰은 고선지의 전공을 헐뜯었다. <구당서>를 비롯, 대다수의 기록들은 한족 중심주의적 사관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는지, 고선지의 공을 한족 장수의 것으로 돌리다 못해 고선지를 깎아 내리기에 급급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양귀비에 푹 빠져버린 현종이 정치를 멀리하기 시작하면서, 당나라는 절도사와 환관의 나라로 돌변해버렸고, 이는 한족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세한 고선지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안록산의 난과 함께 고선지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나라 잃은 설움이 이런 것이었던가. 그는 영웅을 알아보지 못한 시대의 희생양이었고, 왜곡된 역사 기록 속에서 다시 한 번 생명을 잃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 아닌 당나라의 기록, 우리나라 학자의 연구 아닌 외국 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의존한 복원이었지만, 지금껏 알지 못했던 너무도 멋진 고구려인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아울러, 말로만 고구려 역사 수호를 부르짖지 말고, 부디 한반도 내에 있는 고구려 유적 관리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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