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고전 : 한국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김욱동 지음 / 비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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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에는,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무젓가락을 만들기 위해 아마존의 삼림이 파괴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모르고 있던 내용은 아니었지만 막상 문자로 접하고나니 그 충격이 상당했다. 영화나 여타 영상으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충격이라고 할까. 어쩌면 그 때 내가 나무젓가락이나 종이컵을 사용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보면서 ‘고작 이따위 물건을 만들기 위해 아마존의 나무들이 잘려나가고 있다는 말이야?’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평소 에코컵을 사용하고 카페에 갈 때도 텀블러를 준비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커피 한 잔은 종이컵에 마셔야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밖에서 배달된 음식을 먹을 때는 나무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한다. 순간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의 무게가 몸 전체로 다가왔었다.  

 

[녹색 고전]은 그 동안 학교에서 국어 시간에 배웠거나 혹은 대강 넘겨왔던 우리의 고전문학들을 환경과 연결하여 다른 시각에서 소개해준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기상이변과 그로 인한 자연재해, 그리고 각 국가별로 발표하고 있는 지구의 잔여수명. 어쩌면 2050년쯤에는 지구는 황폐화되고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갖춘 행성으로의 대이동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영화로만 봤던 그런 장면들이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진다면...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작가는 전체적으로 인간들의 이기심을 지적하며 자연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인간들은 스스로를 사고할 수 있는 능력과 언어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그들만의 언어가 존재하며(<새들도 말을 하고>) 결코 그들이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연암 박지원의 <호질>에는 호랑이가 인간을 꾸짖는 장면이 등장한다.

 

너희가 이(理 )를 말하고 성(性)을 논할 적에 걸핏하면 하늘을 들먹이지만, 하늘의 소명으로 보자면 범이나 사람이나 다 같이 만물 중의 하나이다......너희들이 먹이를 얻는 것이란 불인(不仁)하기 짝이 없도다! 덫이나 함정을 놓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모자라서 새 그물․노루망․큰 그물․고기 그물․수레 그물․삼태 그물 따위의 온갖 그물을 만들어냈으니, 처음 그것을 만들어낸 놈이야말로 이 세상에 가장 재앙을 끼친 자이다. -p76

호랑이의 꾸짖음의 내용의 대부분은 인간이 자연에 행하는 지나침에 대한 것이다.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탐욕이 지나쳐 그릇된 결과를 가져왔다는 질책. 조선 시대의 연암 박지원 선생은 일찍부터 인간들의 욕망에 대한 경계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베르나르의 [제3인류]는 지구에게 의식을 부여해 지구가 인간들로 인해 느끼는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지구가 고통을 느끼는 한, 인간들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이제는 자연을 존경하고 지구와 공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물론 현대의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등장한다. 이규보의 <이와 개에 관한 생각>에는 개와 이의 죽음은 한가지이며 각기 기운과 숨을 받은 자로서 어찌 죽음을 좋아하는 존재가 있겠느냐는 내용이 나온다. 어떤 길손에게 ‘나’가 어떤 사람이 이글이글하는 화로의 불 속에 이를 던져 넣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다는 말에, 길손이 자신을 놀리느냐며 화를 내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에게 있어 이는 당연히 잡아야 하는 생물이다. 나도 어렸을 때 반 친구에게 이가 옮아 이약을 뿌리고 한동안 보자기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던 추억 아닌 추억이 있다. 그런 이의 생명조차 소중하다 여기고 함부로 죽이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터무니없이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은 우리 인간뿐만이 아니니 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환경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렵다. 사소한 것을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라 더 어렵다.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물질에 사로잡히지 말기 등 대부분 우리 삶의 편리함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렵다. 그냥 눈 한 번 딱 감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어렵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았던 한 번의 눈을 떠야 할 때인 것 같다. 후손들의 일까지는 너무 멀어서 상상도 안 되지만 잘못하다가는 우리 젊은이들이 노년이 되었을 때 타행성으로의 이전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중에 살아남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환경의 중요성을 전파하고 우리가 지금 직면한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한 ‘녹색’ 고전 읽기는 그래서 고무적이다.

 

일 년에 백만 종의 영혼이 지구를 떠나고 있다. 매연과 소음과 농약으로 썩어가는 지구에서 살 수가 없어서 다른 별들로 이민을 떠나고 있다.  

-김백겸 <멸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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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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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이 더 중요한 작품이지만 결말 부분이 언급되어 있으니 주의하세요~!!

 

어렸을 때는 어른만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공부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성적을 걱정하는 것보다 더 생산적인 일에 마음을 쓰고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죠. 지금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의 삶은 생각처럼 그리 녹록하지 않고 어째서인지 때때로 마음이 공허해질 때도 있어요.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은 더 복잡해지고 생각해야 할 것들은 늘어나며 하고 싶은 일들은 더 많아지고 학창시절보다 더 나의 존재 이유에 대해 탐구하게 됩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결혼을 하면 하는대로, 안 하면 안 하는대로 나름대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인생의 무게는 존재하기 마련이거든요. 역시 남자면 남자인대로, 여자면 여자인대로 느껴야 하는 삶의 비애는 저마다의 몫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역사와 상황들을 보면 여자가 더 살기 힘든 세상인 건 맞는 것 같은데요, 그건 제가 여자여서 그런 걸까요? 갑자기 어떤 이의 -남자가 직장을 다니는 이유는 다녀야 하니까, 안 다니면 이상하니까 다니는 거지만, 결혼한 여자가 직장을 다니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는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내달리는 한 여성-이사도라-의 이야기입니다. 무역상 아버지와 화가였으나 외할아버지에 의해 꿈을 좌절당한 어머니, 레바논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거의 찬양하다시피 하는 언니와 그 뒤를 따르는 여동생들 사이에서 유난히 독특한 취급을 받는 그녀는, 두 번째 남편 베넷과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분석학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 안에 있죠. 거기서부터 시작된 그녀의 과거에 대한 회고와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지퍼 터지는 섹스의 대상과의 환희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빠르게 진행됩니다. 부정하면서 살아왔지만 떨쳐버릴 수 없었던 나치에 대한 혐오와 분노, '여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자연스레 생리가 멈춰버린 몸, 그 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정신과 상담, 결국 정신병자가 되어버린 첫 번째 남편 브라이언, 현재의 남편인 베넷이 곁에 있음에도 늘 외로움과 방황에 힘들어했던 시간들, 그리고 마침내 환상을 채워주기 위해 나타난 남자 에이드리언까지 그녀의 성찰은 굉장한 성적묘사와 함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사도라는 자유를 원하지만 남자-의존하고 함께 있어줄 사람-를 떠나지 못하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에요. '지퍼 터지는 섹스'라는 말의 대상으로 인해 그녀가 원하는 것이 환상적인 섹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 교감과 따뜻한 입맞춤입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베넷이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시절, 한없이 차갑게 침묵했던 베넷에게 이사도라는 희망합니다. 말을 걸어주기를, 따뜻하게 키스해주기를. 하지만 이런 친밀한 행위는 그녀 뿐만 아니라 모든 여자(남자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들이 갈망하지 않을까요. 아기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것'만'을 강요하는 사회에 부당하고 외치죠. '여자'가 되는 것으로 인해 강요받아야 하는 것들,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작가로서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여자'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결국 그녀는 한 인간으로서 자립하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음에 절망하고 계속적인 내적 고민을 끌어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에이드리언을 만나 인생에 한 획을 그을 일탈을, 그제서야 처음 해보게 되는 거죠.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반영되어 1973년 발표된 이 작품은, 그러나 지금 읽어도 시간의 간극을 느낄 수 없을만큼 현실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이 그 시대에 나왔다는 게 더 놀라울 정도로 여성이 성에 대해 갖는 환상, 비유들이 거침없이 묘사되어 있어요. 프로이트상 문학부문을 수상했다고 해서 처음에는 굉장히 어렵고 형이상학적인 소설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고민해왔던 것들, 그리고 고민할 수 있었을 일들이 생생하게 쓰여 있고, 아마도 많은 여성 독자들이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고민해왔던 시간들을 반추할 수 있고 공감하는 기회를 갖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페미니스트의 진짜 의미는 뭘까요?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라면 아마 이 사회는 페미니스트로 넘쳐날 겁니다. 하지만 저는 [비행공포]를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인 고민이 담긴 책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둘러싼, 그다지 반갑지 않은 환경에 저항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다만 이 작품의 화자가 여성이었을 뿐, 그래서 여성의 시각에서 쓰여졌고 또한 그래서 섹스에 대한 묘사가 많은 것에 어쩌면 보수적인 독자들은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많은 남성 독자들도 이 부분-행복과 잘 살아기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에이드리언과 함께 떠났던 이사도라는 결국 그와 헤어져 다시 베넷을 만나러 갑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평소 자신이 상상했던 '지퍼 터지는 섹스'의 상황과 맞닥뜨리지만 이 때의 그녀의 반응이 또 재미있어요. 아직 베넷과 마주치지 못한 상태로 결말을 맺는 방식에서 어쩌면 이사도라의 고민은 종지부를 찍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차라리 그 편이 더 마음에 드네요. 그녀의 긴긴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고민에 대한 해결책은 등장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우왕좌왕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욕조 속에 들어가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으니까요. 우리 존재에 대한 고민, 우리의 행복에 대한 고민의 답은 없으며, 그저 순간순간 마주한 상황을 헤쳐갈 뿐이라는 의도가 담긴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사도라는 결국 늘 자신의 존재에 대해 탐구하며 고민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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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와 길을 걷다 -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동화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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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고 싶은 글자들이 있다. 쉽게 넘겨버릴 수 없는 책장과 한 페이지를 지나칠 때마다 가슴에 박히는 감정들이 있다. 문학작품이 아닌 여행에세이를 읽을 때의 이야기다. 보통 여행에세이에 크게 감동받으며 읽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여행서에는 동경과 부러움의 감정이 더 크며, 다녀왔던 장소에 대한 여행기에는 공감과 추억이 차지하는 자리가 크다. 이들과 '감동'은 조금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유독 오소희님의 여행서를 읽을 때는 책장 넘기기가 쉽지 않다. 어디를 다녀왔을까, 누구를 만났을까, 어떤 경험을 했을까 궁금하면서도, 읽는 순간조차 아쉽다. 그리고 그녀와 아들 중빈이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정신 못차리고 책을 붙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말로는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는 감정을 부여잡고서. 그런 순간을 '감동'으로 이름붙일 수 있지 않을까.

 

[어린왕자와 길을 걷다]는 여행에세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예전에 그녀가 지은 [나는 달랄이야! 너는?] 과 같은 동화책도 아니다. 그녀가 이 책은.

 

 "진심이 있다고 믿으시나요?"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출간을 기념하는 모임에서 진지하게 질문한 독자와, 또 진지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독자들. 그녀는 같은 질문을 80년대나 90년대에 했다면 웃음이 터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절대 다수가 진심이라는 것이 있는지 몰라 웃지 못한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질문과 더불어, 꿈과 희망, 안식같은 말들이 살아숨쉬는 곳이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어렸을 적 읽었던 [꽃들에게 희망을]을 다시 읽게 된다.

 

그런데 지금,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내가 동화를 멀리한 사이,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거기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산처럼 거대한 애벌레 탑을 기어올랐었고, 굴러 떨어졌었고,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친구를 부럽게 바라보았었다. 애벌레가 좌절한 그대로 나는 좌절했었고, 애벌레가 희망을 품은 그대로 나는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니까 내가 오래전, 이런 삶에 대한 계시를, 생의 예고편을 미리 접했단 말인가. 이토록 감사하고 선명한 가르침을......

 

나에게 진심이 없다면 그것을 어디쯤에서 떨어뜨렸는지 동화가 알려주었다. 나에게 행복이 없다면 그 또한 어디쯤에서 잃어버렸는지 동화가 알려주었다. 동화는 그림으로 된 '인생 지도'였다. 그 안에 잃어버린 모든 것들의 좌표가 들어 있었다. 꿈, 희망, 행복, 베풂, 안식, 우정...... 

이렇게 그녀의 동화가 시작된다. 20편의 동화와 그녀의 삶의 이야기가. 그것은 때로는 여행기가 되기도 하고 넋두리가 되기도 하며 삶의 고백이 되기도 한다. 모든 이야기가 다 주옥같다. 그것은 아마도 인공적인 요소는 최대한 배제된, 그녀가 직접 겪고 깨달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서 듣고 배워서 아는 척하며 하는 말이 아니라 순간순간에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속에서 숙성시켜 내보낸 보석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일상 에세이처럼, 한 사람의 수다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이야기들에, 나는 자꾸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고 그랬었던 것 같다.

 

여행을 다녀왔더랬다. 이번에는 그녀처럼 자유로이 발길 닿는 곳으로 향하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무는 여행이 아니라, 그저 차에 타라고 하면 타고, 먹을 시간이라고 하면 먹고, 화장실 가야 한다고 하면 가는 여행사 상품을 통한 여행이었다. 동유럽은 처음이었으니 처음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좋았다. 가이드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도 평소보다 귀에 쏙쏙 들어왔고, 교통편이라거나 무거운 짐에 대한 소소한 걱정이 사라져서 한결 홀가분했다. 돌아오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와서 기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여행은 돌아갈 자리가 있어야만 완성되는 것이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자꾸 마음이 답답한 거다.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충분히 만족했고 즐겼다고 생각했지만 뭔가가 모자랐던 걸까. 아니면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그러면서 여행과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인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인가.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순간순간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분명 아닌데, 나는 자꾸만 뭔가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단순한 답을 얻었다. 나는 자유롭고 싶은 거다.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 밖을 보고 싶고, 단단하게 나를 지켜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주고받는 것을 계산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계산할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절로, 계산을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p25

그녀의 책은 이렇다. 예전에 읽은 여행서들도 단순히 그 곳에 가고 싶다, 부럽다 뿐만이 아닌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게 해준다. [어린왕자와 길을 걷다]도 동화에 젖어들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내 삶, 행복, 사랑, 희망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 책을 연초에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더. 또 하나의 큰 바람은. 나도 언젠가 그녀와 같이 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를. 그리고 마음에 남는 진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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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1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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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산마처럼 비웃는 것],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에 이어 네 번째 <~처럼~하는 것> 작품이 출간되었습니다. 대망의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네네, 당연히 불길하죠!!) 의 표지가 원초적인 공포를 전달하고 있었다면,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의 표지는 직접적이지는 않은, 간접적이지만 결코 오래 쳐다보고 싶지는 않은 섬뜩함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한밤에 오래 쳐다보면 볼수록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랄까요. 작품은 하미 땅에서 신비하면서도 두려운 물의 신 '미즈치 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데요, 그래서 폭포라든지, 호수라든지, 물소리에 대한 묘사가 제법 등장합니다. 그 호수에, 물소리에 이끌리는 것처럼 이 표지에, 그리고 민속학자이자 작가이자 명탐정인 도조 겐야에게도 다시 한 번 강력하게 끌려들어가고 말았어요.

 

이야기는 도조 겐야와 그의 편집자 시노 소후에에게, 도조 겐야의 선배이자 한 신사의 후계자인 아부쿠마가와가 미즈치님을 모시는 하미 땅에 대해 전달하면서 시작됩니다. 기괴한 사건에 늘상 휘말리면서도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는 도조 겐야가 내심 부러웠던 듯, 아부쿠마가와는 미즈치님에 관해 알려주면서도 꼭 함께 가야한다고 떼를 쓰듯 이야기하는데요, 이 세 명의 조합이 엉뚱하면서도 묘하게 균형이 맞아서, 복잡할 수도 있는 하미 땅과 미즈치님, 제의와 그 제의를 모시는 신남에 관한 내용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이를테면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건이 터지기까지 꽤 많은 책장을 넘겨야 하지만 저는 내용이 전개되는 단계단계가 참 좋았어요. 이런 장면들을 통해 혼란스럽지 않고 쉽게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고, 등장인물들에게 더 깊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듯 합니다.

 

사정이 생겨 어쩌다 둘이 떠나게 된 하미 행. 하지만 이 도조 겐야 일행이 하미 땅의 사람들과 만나기 전부터, 아부쿠마가와가 등장할 때부터, 또 다른 이야기의 줄기가 처음부터 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머니, 큰누나 쓰루코, 작은 누나 사요코, 그리고 막내 아들 쇼이치로 이루어진 어떤 가족.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양녀로 있었던 미즈시 신사에 몸을 의탁하게 됩니다. 하미 땅에는 미즈시 신사, 미즈치 신사, 스이바 신사, 미쿠마리 신사라고 해서 제의를 담당하는 신사들이 있는데 그 중 미스시 신사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신사입니다. 어머니와 양외할아버지 류지 사이에 오가는 이상한 대화. 어머니의 사망 후 큰누나인 쓰루코에게 유독 집착하는 류지. 그리고 쇼이치에게만 보이는 그것. 요런 상황 속에 도조 겐야가 짠!! 나타나는 겁니다. 그리고 벌어지는 신남연쇄살인사건.

 

제가 <~처럼~하는 것>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는 일본의 괴담이나 전통적인 부분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음양사라는 존재를 통해 일본의 주술적인 면과 옛날 이야기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물론 우리나라 옛날 이야기도 좋아해요), 더 알고 싶었지만 차마 스스로 찾아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는 저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무서워요, 이 시리즈는. 표지도 그렇지만 작품 안에서 전달해주는 정보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떠나 오싹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누구를 해하고 상처입히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는 다른,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랄까요.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 영향을 받을 것 같은 공포심이지만, 또 어찌된 일인지 무서워하면서도 읽게 되니 참 괴이하죠.

 

하지만 이 작품은 또 다른 공포를 선보입니다. 어떤 것에 집착해서 그 하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요? 그 희생의 범주에는 타인은 물론 자신의 핏줄까지 포함돼요. 그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명예와 전통만을 중시해서 무작정 돌진해버리는 사람. 현대물에 등장하는 인물로 치면 소시오패스 정도 될 것 같은데요, 저는 이 인물을 보면서 어찌나 속이 터지던지, 정말 옆에 있으면 몇 번 때려주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저의 이 마음을 이런 단어로밖에 표현하지 못해 정말 안타깝지만, 정말 그랬어요.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미운 인물, 있습니다.

 

꽤 두꺼운 분량이고 오싹한 내용이었지만 전 지금까지 출간된 <~처럼~하는 것> 시리즈 중 최고점을 주고 싶어요. 이야기의 짜임과 분위기, 등장인물들에 대한 감정이입, 그리고 에필로그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떼 없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아웅, 이 책을 읽고 났더니 [잘린 머리처럼...]부터 시작해서 모든 시리즈를 다시 읽고 싶어졌습니다. 긴긴 겨울밤, 약간은 어벙한 도조 겐야와 일본 민속탐방을 떠나보시면 어떠시려나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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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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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제목이 -안녕, 긴 잠이여-인지 내내 궁금했다. 책을 다 읽은 다음에야 깨달았다. 이 제목이 가진 슬픔과 안타까움의 깊이를. 그런 의미에서 표지는 더할 나위없이 책의 주제를 선명히 드러내주는 것 같다. 아름다운 바다 색깔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의 형태는 그 슬픔과 안타까움에 잠식당한 듯 점점 그 실체를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우연과 운명에 의해 궤도를 잃고 흔들리는 우리의 인생길을 나타내는 것일까. 자신의 의지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과 잔인한 운명의 장난들을.

 

하도 오래되어서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내가 죽인 소녀]와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시리즈 중 세 번째로 [안녕, 긴 잠이여]가 출간되었다. 많은 팬들은 이 작품을 꽤 오랫동안 목말라하며 기다린 듯 하지만 재미있는 책은 언제나 있어왔고 또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나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인지 나의 기다림은 그리 괴롭지 않았더랬다. 그런데 [안녕, 긴 잠이여]를 붙잡고 읽으니 앞서 읽은 두 편의 재미가 되살아나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앞의 두 작품보다 이 작품이 훨씬 재미있었다. 사와자키에게 익숙해진 것인지 작가에게 익숙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시리즈가 매력적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무슨 일에선지 400일 넘게 도쿄의 사무실을 비운 사와자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의뢰인의 전언을 부탁받은 한 노숙자였다. 그로부터 우오즈미 아키라라는 사람이 사건을 의뢰하고 싶다는 전달을 받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의 연락처가 메모되어 있는 명함에 적힌 가와시마 히로타카에게 연락을 취해보지만 그는 골프 접대를 마친 후 실종되어 죽음을 맞은 상태였다. 사건을 파고들수록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간관계들. 우오즈미 아키라는 11년 전 승부조작 루머에 휩쓸려 야구계에서 은퇴했고 그의 누나 유키는 그 일을 계기로 자살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키라는 누나가 그런 일로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며 사와자키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부탁한다. 일을 확실히 의뢰하기 전 벌어진 아키라의 피습, 그리고 사와자키를 노리는 검은 손들. 여기에 예전 그의 파트너였던 와타나베를 끈질기게 쫓는 니시고리 경부와 조직폭력단인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의 압력이 사와자키에게 가해지는 가운데 사건은 전혀 생각지 못한 국면을 맞이한다.

 

이렇게 적어보니 꽤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인데 그 해결이 산뜻하고 깔끔하다.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목적지에 도달하는 느낌이랄까. 사와자키는 탐정이므로 사건의 흐름과 관계를 한 번에 꿰뚫어볼 수 있겠지만, 독자 또한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문장을 읽다보면 작은 단서 정도는 발견할 수 있다. 배경이 1990년대에 약간 낡은 분위기를 풍기고는 있지만 그런 점이 더 하드보일드의 매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듯 하다. 그러고보면 어쩌면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드보일드는 어울리지 않는 장르일지도. 고독과 한기, 탐정이 풍기는 날카로움과 섬세함은 소음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문장 또한 실소를 자아내면서도 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첫 페이지부터

 

편히 죽지 못한 시체처럼 뻣뻣한 몸으로 차에서 내렸다

라는 문장에 그만 쏙 빨려들어갔으니. 그 뒤에 계속 등장하는 맛깔나는 문장들은 단연 일품이다.

 

작품 마지막에 우오즈미 아키라는 자신이 사와자키에게 일을 의뢰한 것이 옳은 것이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진실은 의외로 너무나 가깝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는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의 휴식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진실을 추구한 보람이 있지 않았을까. 인생에서 진실은 달콤하지만은 않다. 그나저나. 작품 맨 뒤에 실린 부록 때문에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말았다. 작가의 한 수에 멋지게 속아넘어갔지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다행이다'라는 감정이 먼저 찾아오니, 난 이 시리즈에 단단히 빠져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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