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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와 길을 걷다 -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동화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2월
평점 :
잡고 싶은 글자들이 있다. 쉽게 넘겨버릴 수 없는 책장과 한 페이지를 지나칠 때마다 가슴에 박히는 감정들이 있다. 문학작품이 아닌 여행에세이를 읽을 때의 이야기다. 보통 여행에세이에 크게 감동받으며 읽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여행서에는 동경과 부러움의 감정이 더 크며, 다녀왔던 장소에 대한 여행기에는 공감과 추억이 차지하는 자리가 크다. 이들과 '감동'은 조금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유독 오소희님의 여행서를 읽을 때는 책장 넘기기가 쉽지 않다. 어디를 다녀왔을까, 누구를 만났을까, 어떤 경험을 했을까 궁금하면서도, 읽는 순간조차 아쉽다. 그리고 그녀와 아들 중빈이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정신 못차리고 책을 붙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말로는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는 감정을 부여잡고서. 그런 순간을 '감동'으로 이름붙일 수 있지 않을까.
[어린왕자와 길을 걷다]는 여행에세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예전에 그녀가 지은 [나는 달랄이야! 너는?] 과 같은 동화책도 아니다. 그녀가 이 책은.
"진심이 있다고 믿으시나요?"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출간을 기념하는 모임에서 진지하게 질문한 독자와, 또 진지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독자들. 그녀는 같은 질문을 80년대나 90년대에 했다면 웃음이 터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절대 다수가 진심이라는 것이 있는지 몰라 웃지 못한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질문과 더불어, 꿈과 희망, 안식같은 말들이 살아숨쉬는 곳이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어렸을 적 읽었던 [꽃들에게 희망을]을 다시 읽게 된다.
그런데 지금,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내가 동화를 멀리한 사이,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거기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산처럼 거대한 애벌레 탑을 기어올랐었고, 굴러 떨어졌었고,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친구를 부럽게 바라보았었다. 애벌레가 좌절한 그대로 나는 좌절했었고, 애벌레가 희망을 품은 그대로 나는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니까 내가 오래전, 이런 삶에 대한 계시를, 생의 예고편을 미리 접했단 말인가. 이토록 감사하고 선명한 가르침을......
나에게 진심이 없다면 그것을 어디쯤에서 떨어뜨렸는지 동화가 알려주었다. 나에게 행복이 없다면 그 또한 어디쯤에서 잃어버렸는지 동화가 알려주었다. 동화는 그림으로 된 '인생 지도'였다. 그 안에 잃어버린 모든 것들의 좌표가 들어 있었다. 꿈, 희망, 행복, 베풂, 안식, 우정......
이렇게 그녀의 동화가 시작된다. 20편의 동화와 그녀의 삶의 이야기가. 그것은 때로는 여행기가 되기도 하고 넋두리가 되기도 하며 삶의 고백이 되기도 한다. 모든 이야기가 다 주옥같다. 그것은 아마도 인공적인 요소는 최대한 배제된, 그녀가 직접 겪고 깨달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서 듣고 배워서 아는 척하며 하는 말이 아니라 순간순간에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속에서 숙성시켜 내보낸 보석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일상 에세이처럼, 한 사람의 수다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이야기들에, 나는 자꾸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고 그랬었던 것 같다.
여행을 다녀왔더랬다. 이번에는 그녀처럼 자유로이 발길 닿는 곳으로 향하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무는 여행이 아니라, 그저 차에 타라고 하면 타고, 먹을 시간이라고 하면 먹고, 화장실 가야 한다고 하면 가는 여행사 상품을 통한 여행이었다. 동유럽은 처음이었으니 처음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좋았다. 가이드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도 평소보다 귀에 쏙쏙 들어왔고, 교통편이라거나 무거운 짐에 대한 소소한 걱정이 사라져서 한결 홀가분했다. 돌아오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와서 기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여행은 돌아갈 자리가 있어야만 완성되는 것이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자꾸 마음이 답답한 거다.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충분히 만족했고 즐겼다고 생각했지만 뭔가가 모자랐던 걸까. 아니면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그러면서 여행과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인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인가.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순간순간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분명 아닌데, 나는 자꾸만 뭔가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단순한 답을 얻었다. 나는 자유롭고 싶은 거다.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 밖을 보고 싶고, 단단하게 나를 지켜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주고받는 것을 계산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계산할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절로, 계산을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p25
그녀의 책은 이렇다. 예전에 읽은 여행서들도 단순히 그 곳에 가고 싶다, 부럽다 뿐만이 아닌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게 해준다. [어린왕자와 길을 걷다]도 동화에 젖어들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내 삶, 행복, 사랑, 희망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 책을 연초에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더. 또 하나의 큰 바람은. 나도 언젠가 그녀와 같이 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를. 그리고 마음에 남는 진짜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