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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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제목이 -안녕, 긴 잠이여-인지 내내 궁금했다. 책을 다 읽은 다음에야 깨달았다. 이 제목이 가진 슬픔과 안타까움의 깊이를. 그런 의미에서 표지는 더할 나위없이 책의 주제를 선명히 드러내주는 것 같다. 아름다운 바다 색깔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의 형태는 그 슬픔과 안타까움에 잠식당한 듯 점점 그 실체를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우연과 운명에 의해 궤도를 잃고 흔들리는 우리의 인생길을 나타내는 것일까. 자신의 의지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과 잔인한 운명의 장난들을.

 

하도 오래되어서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내가 죽인 소녀]와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시리즈 중 세 번째로 [안녕, 긴 잠이여]가 출간되었다. 많은 팬들은 이 작품을 꽤 오랫동안 목말라하며 기다린 듯 하지만 재미있는 책은 언제나 있어왔고 또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나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인지 나의 기다림은 그리 괴롭지 않았더랬다. 그런데 [안녕, 긴 잠이여]를 붙잡고 읽으니 앞서 읽은 두 편의 재미가 되살아나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앞의 두 작품보다 이 작품이 훨씬 재미있었다. 사와자키에게 익숙해진 것인지 작가에게 익숙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시리즈가 매력적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무슨 일에선지 400일 넘게 도쿄의 사무실을 비운 사와자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의뢰인의 전언을 부탁받은 한 노숙자였다. 그로부터 우오즈미 아키라라는 사람이 사건을 의뢰하고 싶다는 전달을 받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의 연락처가 메모되어 있는 명함에 적힌 가와시마 히로타카에게 연락을 취해보지만 그는 골프 접대를 마친 후 실종되어 죽음을 맞은 상태였다. 사건을 파고들수록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간관계들. 우오즈미 아키라는 11년 전 승부조작 루머에 휩쓸려 야구계에서 은퇴했고 그의 누나 유키는 그 일을 계기로 자살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키라는 누나가 그런 일로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며 사와자키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부탁한다. 일을 확실히 의뢰하기 전 벌어진 아키라의 피습, 그리고 사와자키를 노리는 검은 손들. 여기에 예전 그의 파트너였던 와타나베를 끈질기게 쫓는 니시고리 경부와 조직폭력단인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의 압력이 사와자키에게 가해지는 가운데 사건은 전혀 생각지 못한 국면을 맞이한다.

 

이렇게 적어보니 꽤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인데 그 해결이 산뜻하고 깔끔하다.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목적지에 도달하는 느낌이랄까. 사와자키는 탐정이므로 사건의 흐름과 관계를 한 번에 꿰뚫어볼 수 있겠지만, 독자 또한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문장을 읽다보면 작은 단서 정도는 발견할 수 있다. 배경이 1990년대에 약간 낡은 분위기를 풍기고는 있지만 그런 점이 더 하드보일드의 매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듯 하다. 그러고보면 어쩌면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드보일드는 어울리지 않는 장르일지도. 고독과 한기, 탐정이 풍기는 날카로움과 섬세함은 소음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문장 또한 실소를 자아내면서도 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첫 페이지부터

 

편히 죽지 못한 시체처럼 뻣뻣한 몸으로 차에서 내렸다

라는 문장에 그만 쏙 빨려들어갔으니. 그 뒤에 계속 등장하는 맛깔나는 문장들은 단연 일품이다.

 

작품 마지막에 우오즈미 아키라는 자신이 사와자키에게 일을 의뢰한 것이 옳은 것이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진실은 의외로 너무나 가깝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는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의 휴식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진실을 추구한 보람이 있지 않았을까. 인생에서 진실은 달콤하지만은 않다. 그나저나. 작품 맨 뒤에 실린 부록 때문에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말았다. 작가의 한 수에 멋지게 속아넘어갔지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다행이다'라는 감정이 먼저 찾아오니, 난 이 시리즈에 단단히 빠져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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