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밟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낮잠을 잔 데다 바람이 거세 창문이 소란스럽게 덜컹거리는 바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이 뻑뻑해서 책읽기도 싫어 TV를 켜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고정한 프로는 <사랑과 전쟁>. 좋지 않은 이야기들은 유독 머릿속에 쉽게 남는다. 영향을 받기도 쉽다. 그래서 평소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프로였지만 시간은 밤을 넘고 새벽을 건너 아침을 향해가던 때라 취침예약을 해놓고 멍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 날의 주제는 <못생긴 남편>. 앞부분부터 보지는 못했지만 신부대기실에서 신부가 울상을 짓고 있는 데다 찾아오는 친구들은 신부를 불쌍해하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기에 신랑이 정말 못생겼구나 짐작은 했다. 결혼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변호사인 신랑의 선물공세와 주위사정에 의해 쫓기듯 결혼하게 됐다는 신부의 넋두리 뒤에 등장한 그의 얼굴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해도 못생겼었다. 물론 분장을 과도하게 한 탓도 있겠지만 코주부 코에 툭 튀어나와 다물어지지 않는 입, 고르지 않다는 표현도 과분할 정도로 뒤틀린 치열. 아내는 아이를 임신한 뒤로 남편이 자기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자기 할 도리는 다 했다며 육아를 남편에게 맡긴 채 다른 남자를 만나며 밖으로 겉돌기 시작한다.

예전 알랭 드 보통의 [너를 사랑한다는 건] 이라는 책에서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발톱이 발에 붙어 있으면 그건 괜찮아. 하지만 일단 떨어져 나가면 그건 쓰레기잖아. 예를 들어, 사람 머리에 난 머리카락을 보는 것하고 욕조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보는 건 다르잖아.

그런데 왜 발톱을 깎는 게 섹스를 하는 것보다 더 친밀한 거야?

섹스를 하는 상대는 그 앞에서 발톱을 깎아도 창피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얘기일 뿐이야.

나는 이 문장들을 보면서 결국 사랑한다는 건 자신의 가장 부끄럽고 창피한 부분을 공유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사랑의 결실이라고 생각하는 결혼은 아마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깊은 부끄러운 부분들을 공유하게 되는 일일 것이다. 사랑해서 결혼해도 헤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선물공세와 남편의 경제력에 떠밀려 결혼한 신부의 마음은 어땠을까. 쳐다보기만 해도 싫고 밥 먹는 모습도 꼴 보기 싫어지는 사람과 평생을 같이 살 약속을 한 그녀의 어리석음을 탓할 일이지만 그것이 과연 남의 일이기만 할까 생각해보게 된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그런 때가 찾아오지 않을까. 그가 밥 먹는 모습, 걸음걸이, 말투 그 외의 많은 것들을 사랑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그 모든 것들에 진저리를 치게 되는 날이. 발톱을 깎는 그의 모습이 싫어지게 되는 날이.

루이스 어드리크의 [그림자밟기]는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아내 아이린과 그런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는 남편 길의 이야기이다.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 마음에 그녀가 쓰는 일기를 훔쳐보는 길. 그리고 그런 길의 행동을 알아채고 블루 노트북과 레드 다이어리, 두 권의 일기장을 만드는 아이린. 아이린은 블루 노트북에는 진실을, 레드 다이어리에는 길에게 보여주기 위한 내용을 적으며 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화가와 모델로 만나 한 때는 깊은 친밀감을 느끼며 서로에게 애정을 쏟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나고, 비뚤어진 욕망만이 그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아내를 모델로 그녀의 속살까지 화폭에 옮겨담으며 그녀의 이미지를 통해 예술가의 혼을 불태우려했던 길. 그런 남편 옆에서 타인에게 소모되는 이미지가 더 이상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주체성을 되찾고 싶어하는 아이린은 이혼을 요구한다.

아이린은 생각했다. 이미지는 사람이 아냐. 심지어 사람의 그림자도 못 돼. 그러니 이미지처럼 모호한 것을 묘사한 그림, 설령 비약이나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그림에 굳이 상처받을 필요는 없잖아?

 

그들의 관계는 기괴하다. 사랑이라기보다 이제는 집착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길의 언행과 그를 감싸안는 듯 내치는 아이린의 모습. 특히 마지막에서 보여지는 아이린의 선택-그것이 정말 그녀의 선택일까 싶기도 하다-을 보면 그녀의 길에 대한 감정도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린은 멈추지 않는다.

예전에 위니 제인은 아이린에게 자갈로 그림자를 덮어 없애려 하는 아이들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로 병자들을 치료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자기 그림자에서 힘을 얻는 어느 사악한 위디고 전사는 딱 정오만되면 어린 소녀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영혼은 그림자를 통해 빼앗을 수 있었다. 이것을 오지브웨 언어에서는 ‘와바무지차그완’이라고 하는데, 거울을 뜻하는 이 말은 그림자와 영혼을 뜻하기도 한다. 인간의 영혼은 눈에 보인다는 것. 길은 아이린을 그리면서 그녀의 그림자를 밟았다. 그녀가 아무리 기를 써도 그의 발에 짓밟힌 그림자의 실타래를 당길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을 통해 부부사이에서의 소유라는 개념과 애증이라는 감정을 표현한 작가는 대학시절 교수와 학생으로 만난 마이클 도리스와 결혼했지만 16년의 결혼생활 끝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이린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길에게는 남편 마이클의 모습을 투영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화한 바 있다고 고백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가 이 작품을 어렵게 느꼈던 이유는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엮이지 않는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 있을 것이므로. 지금의 나는 알 듯도, 모를 듯도 하다. 손에 잡힐 것처럼 잡히지 않는 생각들이 있다. 언젠가 내가 결혼을 하고 오랜 시간 누군가와 함께 보내게 된다면 이 작품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지독하게 길을 밀어내고 싶어했지만 그의 심장에서 흔들리지 않는 빛을 봤을지도 모를 아이린의 선택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신
강희진 지음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이, 진실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이지요?”

“벌을 주기 위해서지요. 백성들에게 전쟁의 상처를 남기고, 수많은 여인들로 하여금 목숨을 끊게 만든 죄. 제 아내와 딸아이를 잃어버리게 만든 죄. 왜 아무도 벌을 받지 않습니까? 저는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죄 지은 자에게 벌을 주어야겠습니다.”

기묘하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4월, 세월호 사건이 벌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자 했다. 그 날 그 시각에 사라져간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궁금해 했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와 사람들을 지켜야 했던 선장과 선원들은 제 목숨 살리고자 그 책임을 버렸고, 애꿎은 생명들이 대신 값을 치렀다. 국무총리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그 자리에서 물러난다 했지만 이어진 인사의 난항으로 그는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선장과 선원들을 규탄하는 목소리는 점점 잦아지고, 세월호 사건을 보도하던 방송들도 이제 다른 사건들을 보도하느라 바쁘다. 백성들을 버려두고 홀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 가장 먼저 탈출하면서 자신의 짐들을 싣느라 백성들 태울 자리 하나 만들지 못했던 강화도 책임자, 청에게 끌려가면 어떤 꼴을 당할지 너무나 빤히 보여 강화도 앞 바다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여인들. 백성과 나라를 돌봐야 했음에도 가장 먼저 도망친 사람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벌은 내려지지 않았다. 소름끼치게도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소설 [이신]은 이씨의 신하로 살고자 했으나 다른 왕을 섬기게 된 ‘이신’의 이야기다. 그의 복수극이자 한 여자만을 사랑했던 남자의 애처로운 고백이기도 하다. 얼자로 태어난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전에 계해년의 반정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광해군의 내금위장으로 끝까지 그를 지키다 목숨을 잃었고, 이신은 친우 유병기의 누이이자 동경하던 소녀인 선화, 어머니, 동생 숙이와 함께 산으로 도망간다. 선화와 연을 맺었고, 딸 난이를 얻었으며, 갖바치로서의 생활을 이어나가던 어느 날 일어난 정묘호란.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고 청으로 끌려갔으나 청 태종인 홍타이지의 눈에 들어 관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이신은 아이러니하게도 청의 칙사로서 다시 조선을 찾는다. 조선은 변한 것이 없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두 번의 호란을 겪으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무능한 관리자들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반정에 성공하여 왕의 자리를 차지한 임금은 단지 반정공신들의 하수에 지나지 않았다. 고통 받는 것은 백성들, 그 중에서도 여인들이었다. 환향녀라는 이름으로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 하여 자진을 강요당하고, 쫓겨나고, 살해당했다.

돌아온 여인들과 이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왕에게 주청드리던 사대부들의 모습은 그들이 그토록 멸시하던 노비와 다르지 않다. 전쟁에 졌고, 민심은 어지러워졌고, 백성의 원성은 천지를 울리는 시대를 만든 것은 그들의 대의와 명분 때문이었음에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 대의와 명분을 버리지 못한 채 여인들을 내친다. 일을 벌이고 책임을 져야 하는 자들이, 제 배 두드리며 권리만 누리면서 의무와 책임은 엉뚱한 사람들에게 전가해버린 것이다. 벌을 받아야 하는 이는 누구인가. 회절강을 만들어 돌아오는 여인들이 그 곳에서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사죄하고 몸을 씻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사대부들이 그녀들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먼저 몸을 씻었어야 하지 않을까. 400년 전에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애꿎은 목숨들만 사라져갔었다.

그런 어지러움 속에서 이신은 꿈을 꾼다. 정묘호란 당시 아내 선화와 함께 도망치던 때의 꿈을. 꿈속에서 그는 결코 그녀를 구해낼 수 없고, 오히려 강화도에서 가장 먼저 도망쳤던 김흥진이 그의 앞을 막아선다. 아내의 등에 화살이 박히고 어머니와 누이는 차가운 얼음물 속으로 빠지던 그 때. 김흥진을 죽여야 한다는 격렬한 살기 속에서 잠에서 깬 이신은 칼을 쥐고 그의 집을 찾지만 뜻밖에도 칼에 찔려 절명한 김흥진의 시신을 발견한다. 이어지는 자객과의 대치. 하지만 그 집을 찾은 제 삼의 인물에 의해 자객은 살해되고, 마치 꿈에서 일어난 듯 현실감각이 부족한 상태에서 아내 선화와 비슷한 여인을 발견한다. 아내의 행방을 쫓는 와중 이신은 역모의 낌새를 알아채고, 인조로부터 반정공신들의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는 부탁을 받은 채 심상찮은 흐름에 휩쓸린다.

권력이 무엇인가 싶다. 수많은 사대부들이 지키고자 했던 그 자리가 과연 많은 백성의 생명보다 귀중했던가 알고 싶다. 그들에게도 나름 할 말이 있었겠다. 태어나면서 보고 배운 것은 대의와 명분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정한 대의와 명분이 자기희생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던가. 결국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대의와 명분을 지키고자 그리 했다-하는 것이 아닌, 오직 살고자 그랬다, 이 자리가 너무 아까워 그랬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솔직해진다면 그들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하겠다.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 현실, 가슴에 새겨진 상처만큼이나 힘든 하루하루 속에 힘없는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보듬어줄 사람, 그들을 버리지 않을 사람이었다. 백성들을 버리고 먼저 도망가버리는 힘없는 왕이 아니라. 그들 전체에 이신은 백성들의 몫만큼 분노한다. 이신은 한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그가 짊어진 분노와 복수심은 모두의 것이었다.  우리 모두가 이신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저 밖에 있다.

2014년, 두 번의 호란과 같은 일들이 벌어졌고, 국제정세는 어지럽다. 일본은 집단자위권 행사가 가능해졌고, 중국의 시진핑이 방한해 한국의 지도자와 국제 정세를 논했으며, 북한은 당장 오늘 새벽 개성 북쪽에서 단거리 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책으로 읽었던 비극이, 역사 속의 그 상처가 다시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결정적인 순간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들의 소중한 ‘선화’를 지키기 위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곱 성당 이야기
밀로시 우르반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 중 완독한 것은 [장미의 이름]밖에 없지만 그 작품을 생각하면 여전히 제 마음 속에는 ‘굉장했어, 재미있었어’ 라는 감정이 솟아납니다. 물론 그 작품도 처음부터 완독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장미의 이름]을 처음 집어들었을 때의 나이가 무척 어렸기(?) 때문에, 그 때는 읽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덮어버렸죠.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는 금방 빠져들었답니다. 특유의 분위기에 매료되었다고 할까요. 그 움베르토 에코의 이름을 이어받아 ‘체코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체코작가 밀로시 우르반. 체코문학에 고딕 느와르 장르를 부활시켰다는 평가와 함께 현재 체코에서 가장 핫한 작가로 떠오르고 있는 듯한데요, 사실 전 이 ‘열린책들’이라는 출판사에 묘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출판사 자체는 좋아해요! 정말입니다! 그런데 이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 중에는 제가 쉬이 읽을 수 없는 작품들이 꽤 있었어요. [장미의 이름] 때도 그랬지만, 순간 정신이 어디 다녀온다고 할까요. 그래서 [일곱 성당 이야기]에도 흥미가 동하긴 했지만 내심 걱정도 했습니다. 읽다 포기하게 될까봐요.

그런데 체코를 좋아하는 저의 성향이 작품 읽기에도 도움이 되었나 봅니다. 올 겨울 다녀왔던 프라하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면서 생소한 지명들도 전혀 생소하지 않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는 한 남자가 종탑에 매달려 그 스스로의 신체로 종을 치고 있는 사건이 벌어지며 진행됩니다. 주인공은 좀 소심하고 편집증적으로 느껴지는, 체코의 역사에 깊이 빠져있고 현실감각은 약간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전직 경찰이에요. 슈바흐 크베토슬라프라는 이름-슬라브 민족의 나약한 꽃 이라는 의미-으로 인해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고, 직접 보지 않아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왜소하고 자신감 없어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을 듯한 그런 인물입니다. 그에게는 경찰로서 실수했다는 트라우마가 있어요. 자신이 보호하던 여성이 자살로 결론 났지만 심상찮은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죠. 그 일로 인해 경찰 일을 그만두어야 했지만 종탑에 매달려있던 남자로 인해 조건부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의 앞에 나타난 그뮌드라는 남자와 그의 친구이자 하수인인 프룬슬릭, 그리고 매력적인 여성경찰 로제타와 함께.

저에게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밝지는 않습니다. 고딕. 느와르. 이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저는 프라하나 체코에 대해서도 또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어쩐지 흐린 날이나 어두운 분위기가 어울릴 것 같다는-오히려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답니다. 작품은 저에게 [장미의 이름]을 처음 읽던 때를 떠올리게 했어요. 이야기는 살인사건이 주가 된다기보다 체코에 존재하는 6개의 성당과 제7성당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많은 사실들이 작품의 중반 정도는 가야 밝혀지기 때문이에요. 만약 제가 인내심이 부족한 독자였다면 진즉 책을 덮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문장 한 줄 한 줄을 읽어내려가다보면 마치 체코의,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도중에 포기하는 게 또 쉽지는 않더라고요. 기묘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왔던 작품들과 비교하면 그리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종교와 건축, 문화와 역사가 어우러진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셨다면, 그리고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를 동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핀란드 슬로우 라이프 - 천천히, 조금씩, 다 같이 행복을 찾는 사람들
나유리.미셸 램블린 지음 / 미래의창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나에게는 바로 이런 책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핀란드를 여행한 책이나 핀란드를 소개하는 책이 아닌, 핀란드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 다룬 책이. [카모메 식당]으로 핀란드에 대한 동경의 감정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 책을 읽을 당시만 해도 핀란드에 대해 이렇게 애틋한 마음이 생길 줄은 몰랐다. 나의 마음속에 –꼭 가봐야 하는 나라-로 드디어 자리 잡은 것이다. 계기는 간단했다. 모 방송국에서 언뜻 보게 된 핀란드의 교육. 국가가 교육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사교육을 해도 그 사교육이 학교 성적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말.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중시하며 심지어 시험 시간에도 학생이 교사에게 조언을 구하는 나라. 한 반에 학생이 많아야 열 명 정도일까.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에서, 진심으로 공부를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계적인 학업성취도평가인 피사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고, 2위를 차지한 우리나라가 건넨 ‘근소한 차이로 졌다’는 말에 ‘당신네 나라 학생들은 울면서 공부하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은 웃으면서 공부하기 때문에 월등한 차이로 이겼다’고 뼈있는 말을 던졌다는 일화에는 그만 찔끔했다. 교육에서 시작한 관심은 이제 핀란드 사회 전반으로 번져가고 있다.

저자는 핀란드의 예술에 끌려 핀란드에서 공예와 디자인을 전공했다고 한다. 스위스와 프랑스, 캐나다 국적을 갖고 있고 두바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에서 공부를 한 남편과 핀란드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 ‘레스토랑 데이’로 시작한 특별한 문화행사부터 교육과 복지에 관한 이야기, 친환경적인 생활방식 등 넓고 깊은 정보들로 꽉꽉 차 있다. 각자가 준비한 음식을 판매하며 행복을 느끼는 레스토랑 데이, 집 주변 텃밭에서 야채를 키우며 느끼는 충족감, 각자의 집을 공개하는 헬싱키 어반 하우징 페어, 반려동물에 관한 이야기, 학생과 엄마를 위한 복지, 핀란드의 디자인을 다룬 내용들은 역동적이거나 맛깔난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조금 덤덤하게까지 느껴지는 문체와 내용들이 참 좋았다. 그 동안 내가 보고 있던 핀란드는 어쩌면 환상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환상이 이 책으로 인해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이 책은 오히려 핀란드에 대한 나의 기대를 증폭시켜 주었다.

가장 인상적이고 또한 책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배려’다. 인구가 많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경쟁하는 것보다 협력을 택했다는 핀란드. 높은 세금을 내고 있지만 그에 따른 혜택 또한 뒤떨어지지 않아 국민들이 모두 충분히 국가를 믿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경쟁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슈라라봉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3
마키메 마나부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에게 마키메 마나부라는 작가는 엉뚱하고 코믹한 상상력의 소유자라는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호루모’라는 독특한 경기를 만들어냈고 그 ‘호루모’를 소재로 [가모가와 호루모]와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 두 작품을 썼죠. 그 밖에도 최근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 된다고 알려진 일드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신이치 역으로 열연한 배우 타마키 히로시 주연의 <사슴남자>도 마키메 마나부 작가의 작품이랍니다. 인간과 개의 말을 알아듣는 영특한 능력을 가진 고양이 마들렌이 등장하는 [가노코와 마들렌 여사] 까지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요, 예전부터 저는 이 작가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쓴 모리미 도미히코 작가가 헷갈리더라고요. 독특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일까요. 어떤 의미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 [위대한 슈라라봉]이라는, 다소 만화스러운 제목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 아무생각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 새 이 상상력에 푹 빠져버렸네요.

히노데 료스케는 신비한 힘을 지닌 가문의 자손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하게 만들 수 있죠. 이를테면 나중에 히노데가 영업사원이 되었을 때 어떤 물건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팔아야 할 때, 사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그는 그런 힘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어해요. 그런 마음을 안고 어쩔 수 없이 수련을 받기 위해 이와바시리의 큰아버지댁으로 들어가는 히노데. 엄청나게 커다란 저택에서 수상한 가정부 씨를 만나고, 사촌인 단주로도 만납니다. 독특한 성격의 단주로로 인해 전학 첫날부터 붉은 교복을 입고 등장한 히노데. 자신을 기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한 반 친구들 중 유일하게 그를 상대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무척 특이한 방법으로요. 전학 첫날부터 이 나쓰메 히로미에게 얻어맞은 히노데는 그가 자신의 가문과 라이벌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문뿐만 아니라 또 다른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히노데 가문에게 쫓겨나다시피 했던 원래 번주였던 하야세 가문. 그 가문의 후손은 히노데와 가 나쓰메가 있는 반의 반장으로 당차고 똘똘한 여학생입니다. 이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히로뚱 단주로. 하지만 그녀가 관심있어 하는 것은 나쓰메죠. 이로 인해 더욱 서로를 라이벌로 의식해가는 와중, 하야세의 아버지인 교장이 두 가문에게 시간을 줄테니 당장 이 땅을 떠나라고 경고해요. 다른 두 가문의 아버지들을 볼모로 잡고. 이에 고민에 빠진 세 명의 어린양들. 교장의 위협에 최대한 맞서는 순간 요상한 소리를 내며 엄청난 힘이 쏟아지고, 영문도 모르는 이 어린양들은 서로 너의 힘이니, 아니다 너의 힘이니 티격태격합니다. 결국 협상 없이 결투하게 되는 어린양들은 의외의 반전을 보이며 아련한 결말까지 선사합니다.

마키메 마나부 특유의 코믹한 요소가 잘 녹아들어있는 작품이에요. 주된 시각인 히노데 료스케는 오히려 주변인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의 캐릭터가 강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나머지 캐릭터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주로의 히로뚱이라는 별명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코믹한 부분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살짝 건드리는 재능도 여전하네요.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에서 느꼈던 아련한 기분이 이 작품에서도 잘 살아있습니다. 결말뿐만 아니라 소년들이 협력하는 과정이라거나 그들을 위협했던 존재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랬는지 이해하게 만드는 부분도 꽤 설득력이 있거든요. 그저 웃긴 코믹소설이 아니라 세 소년의 성장을 다룬 작품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지닌 소설이기도 해요.

[위대한 슈라라봉]에서 ‘슈라라봉’이 대체 뭘까 정말 궁금했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습니다. 엉뚱한 데서 허를 찌르는 것도 대단한 재능이겠죠. 시종일관 코믹과 아련함을 번갈아가며 구사하는 것도요. 작가의 머릿속은 어떤 상상들로 가득 차 있을지 한 번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저나. 일본에는 정말 이런 가문들이 있을까요. 마키메 마나부가 써서 그런지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는, 요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