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과정이 더 중요한 작품이지만 결말 부분이 언급되어 있으니 주의하세요~!!

 

어렸을 때는 어른만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공부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성적을 걱정하는 것보다 더 생산적인 일에 마음을 쓰고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죠. 지금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의 삶은 생각처럼 그리 녹록하지 않고 어째서인지 때때로 마음이 공허해질 때도 있어요.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은 더 복잡해지고 생각해야 할 것들은 늘어나며 하고 싶은 일들은 더 많아지고 학창시절보다 더 나의 존재 이유에 대해 탐구하게 됩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결혼을 하면 하는대로, 안 하면 안 하는대로 나름대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인생의 무게는 존재하기 마련이거든요. 역시 남자면 남자인대로, 여자면 여자인대로 느껴야 하는 삶의 비애는 저마다의 몫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역사와 상황들을 보면 여자가 더 살기 힘든 세상인 건 맞는 것 같은데요, 그건 제가 여자여서 그런 걸까요? 갑자기 어떤 이의 -남자가 직장을 다니는 이유는 다녀야 하니까, 안 다니면 이상하니까 다니는 거지만, 결혼한 여자가 직장을 다니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는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내달리는 한 여성-이사도라-의 이야기입니다. 무역상 아버지와 화가였으나 외할아버지에 의해 꿈을 좌절당한 어머니, 레바논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거의 찬양하다시피 하는 언니와 그 뒤를 따르는 여동생들 사이에서 유난히 독특한 취급을 받는 그녀는, 두 번째 남편 베넷과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분석학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 안에 있죠. 거기서부터 시작된 그녀의 과거에 대한 회고와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지퍼 터지는 섹스의 대상과의 환희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빠르게 진행됩니다. 부정하면서 살아왔지만 떨쳐버릴 수 없었던 나치에 대한 혐오와 분노, '여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자연스레 생리가 멈춰버린 몸, 그 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정신과 상담, 결국 정신병자가 되어버린 첫 번째 남편 브라이언, 현재의 남편인 베넷이 곁에 있음에도 늘 외로움과 방황에 힘들어했던 시간들, 그리고 마침내 환상을 채워주기 위해 나타난 남자 에이드리언까지 그녀의 성찰은 굉장한 성적묘사와 함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사도라는 자유를 원하지만 남자-의존하고 함께 있어줄 사람-를 떠나지 못하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에요. '지퍼 터지는 섹스'라는 말의 대상으로 인해 그녀가 원하는 것이 환상적인 섹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 교감과 따뜻한 입맞춤입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베넷이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시절, 한없이 차갑게 침묵했던 베넷에게 이사도라는 희망합니다. 말을 걸어주기를, 따뜻하게 키스해주기를. 하지만 이런 친밀한 행위는 그녀 뿐만 아니라 모든 여자(남자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들이 갈망하지 않을까요. 아기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것'만'을 강요하는 사회에 부당하고 외치죠. '여자'가 되는 것으로 인해 강요받아야 하는 것들,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작가로서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여자'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결국 그녀는 한 인간으로서 자립하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음에 절망하고 계속적인 내적 고민을 끌어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에이드리언을 만나 인생에 한 획을 그을 일탈을, 그제서야 처음 해보게 되는 거죠.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반영되어 1973년 발표된 이 작품은, 그러나 지금 읽어도 시간의 간극을 느낄 수 없을만큼 현실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이 그 시대에 나왔다는 게 더 놀라울 정도로 여성이 성에 대해 갖는 환상, 비유들이 거침없이 묘사되어 있어요. 프로이트상 문학부문을 수상했다고 해서 처음에는 굉장히 어렵고 형이상학적인 소설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고민해왔던 것들, 그리고 고민할 수 있었을 일들이 생생하게 쓰여 있고, 아마도 많은 여성 독자들이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고민해왔던 시간들을 반추할 수 있고 공감하는 기회를 갖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페미니스트의 진짜 의미는 뭘까요?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라면 아마 이 사회는 페미니스트로 넘쳐날 겁니다. 하지만 저는 [비행공포]를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인 고민이 담긴 책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둘러싼, 그다지 반갑지 않은 환경에 저항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다만 이 작품의 화자가 여성이었을 뿐, 그래서 여성의 시각에서 쓰여졌고 또한 그래서 섹스에 대한 묘사가 많은 것에 어쩌면 보수적인 독자들은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많은 남성 독자들도 이 부분-행복과 잘 살아기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에이드리언과 함께 떠났던 이사도라는 결국 그와 헤어져 다시 베넷을 만나러 갑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평소 자신이 상상했던 '지퍼 터지는 섹스'의 상황과 맞닥뜨리지만 이 때의 그녀의 반응이 또 재미있어요. 아직 베넷과 마주치지 못한 상태로 결말을 맺는 방식에서 어쩌면 이사도라의 고민은 종지부를 찍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차라리 그 편이 더 마음에 드네요. 그녀의 긴긴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고민에 대한 해결책은 등장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우왕좌왕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욕조 속에 들어가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으니까요. 우리 존재에 대한 고민, 우리의 행복에 대한 고민의 답은 없으며, 그저 순간순간 마주한 상황을 헤쳐갈 뿐이라는 의도가 담긴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사도라는 결국 늘 자신의 존재에 대해 탐구하며 고민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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