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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 - 라만차 돈 키호테의 길
서영은 지음 / 비채 / 2013년 8월
평점 :
첫 장을 펼치고, 다시 몇 장을 읽어내기가 조금 힘들었던 책이었다. 왜 그랬을까아. 아마도 '돈 키호테'라는 인물에 대해 내가 아는 거라곤 풍차를 향해 바보처럼 돌진했다는 것과 그를 창조해낸 사람이 세르반테스라는 작가라는 점 뿐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돈 키호테]를 완독한 적도 없는 내가 작품을 기반으로 그 여정을 따라가는 길이 조금은 버거웠었다. 그것은 초반에 작가 서영은님이 동행한 출판사 직원 Y를 바라보는 눈길에서 뭔가 깔보는 듯한, 철 없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이 든 노작가의, 자신이 사랑하는 '돈 키호테'라는 인물에 대해 출판사 직원 Y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한숨이었달까. 나의 착각일 수 있겠지만 나는 작가가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세계를 잘 모르는 독자들에 대해서도 그런 기분으로 책을 써내려간 것은 아닌지 약간은 불편했다.
그런데 이 책, 읽을 수록 읽는 맛이 난다. 평범한 여행 에세이가 아니라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를 사랑하는 작가와 출판사 직원 Y, 문학박사 J가 함께하는 [돈 키호테] 읽기 모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직 초점은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에게 맞춰져 있고, 물론 여과되었겠지만 그들의 대화에 등장하는 소재 또한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이다. 어떤 작품을 무척이나 사랑해서 그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찾아가고, 그 곳에서 작품 속 장면을 재현해내는 여행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만약 내가 이런 여행을 떠난다면 이렇게나 충실한 과정을 보낼 수 있을까 혀를 내두를만큼 성실한 여행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중간중간, 졸려하거나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는 상황에서 작가가 동행자 둘의 공부를 재촉하듯 [돈 키호테]에 등장하는 구절을 읽어주는 모습은 가히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 구절 중 가장 인상적인 문구는.
세상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아주 복잡한 미로에도 들어가고, 가는 곳마다 불가능한 곳에 뛰어들며, 한여름의 불타는 태양 볕에도 인적 없는 황무지에서 버티며 살고, 겨울에는 바람과 얼음의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사자들도 무서워하지 않고 요괴에도 놀라지 않으며 괴물도 두려워하지 않지요. 이놈들을 찾고 저놈들을 쳐부수고 모두를 이기는 게 기사의 중요한 진짜 임무올시다. 때문에 편력기사의 일원이 될 운명을 타고난 본인은 의무의 한계 속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나 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금 사자들을 공격한 것은 기상천외한 무모함인 줄은 알았으나, 용기라고 하는 건 비겁이냐 무모함이냐 하는 두 극단적인 악덕 사이에서 구한 높은 덕을 말하지요. 그러다 용기 있는 자에겐 비겁이라는 상황에 다다를 만큼 내려가는 것보다는 무모함의 경지까지라도 올라가는 게 그래도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겁니다. -p116
이런저런 문구들을 읽다보면 [돈 키호테]는 단순히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무모함과 어리석음으로 가득찬 한 남자의 표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우리 생에서 반드시 깨달아야만 하는 진리를 그린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있는 자리에서 만족하는 마을 사람들과 돈 키호테의 친구 신부 등은 더 높은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없는, 일반 소시민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전쟁에서 팔을 잃고, 타국에서 노예가 되어 극한 체험을 했고, 매인 데 없이 전국을 유랑하며 드라마 같은 분방한 생활을 했던 시절이 있었나 하면, 유부녀와의 불 같은 사랑 이후 피폐한 마음을 추스리려고 애쓰는 작가(p138)-가 생의 휴식처로 여겼음직한 에스키비아스라는 마을의 평화로움을 오히려 위기로 감지한, 작가의 마음이 녹아들어 있다.
초반에도 나의 마음을 강렬하게 뒤흔 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돈 키호테가 객줏집을 성곽이라고, 객줏집 주인을 성주라 여겨 그에게 기사 서품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처음 객줏집 주인은 그런 돈 키호테를 우스꽝스럽게 여기고 그를 놀리고자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는데, 그를 비롯하여 귀부인이라 여겨진 창녀와 주위 사람들도 처음에는 돈 키호테를 깔보고 비웃지만 차츰 그의 요청 아닌 요청에 따라 그 역할에 맞는 말투와 태도를 갖추게 된다. 그만큼 돈 키호테의 기사에 대한 마음이 깊고 강하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도 깨닫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비록 어리석고 우스워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열망은 주위 사람들도 감화시키는 법이니까.
작가와 Y, 그리고 J의 여정은 돈 키호테가 로신안테를 타고 산초와 동행했던 바로 그 길이다. 신실한 신자에 워낙 [돈 키호테]를 사랑하는 작가에게 그 두 사람 역시, 특히 Y가 시간이 지날수록 [돈 키호테]에 깊이 빠져드는 모습은 뭐랄까,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 신기하다고 해야 하나. 작가 역시 이 여행에서 또 다른 돈 키호테였으니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악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아름답다. 언젠가 스페인에 가게 된다면, 그저 관광지를 기웃기웃하는 그런 단순한 여행이 아닌, 서영은 작가님처럼 의미있는 무언가를 해내야겠다. 어쩌면 그것이 돈 키호테의 길이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