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남자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습니다. 그의 이름은 양페이. 친어머니가 기차의 화장실을 이용하려다 어쩌다 세상 밖으로 쑥 나오게 된 그는, 철로에서 그를 발견한 아버지 양진뱌오 덕분에 유복하지는 않아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양진뱌오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죠. 결혼도, 젊음도. 물론 양진뱌오에게 사랑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미 마음 속에 들어와버린 아들을 버리지 못하고 오직 양페이를 위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세상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훌륭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양페이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심지어 아내와 이혼했을 때조차 그의 옆을 지켜준 건 아버지였죠. 그 아버지가 병에 걸려 양페이의 곁을 말도 없이 떠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새도 없이 양페이도 사고로 목숨을 잃어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이승을 맴도는 영혼들의 이야기인 이 작품은 양페이가 죽음을 맞은 뒤 7일간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아버지의 병원비로 인해 수도세와 가스비를 낼 돈조차 없었던 그는, 사고로 망가져버린 얼굴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영혼의 모습으로 스스로 상장을 달고 빈의관이라는 화장터로 향하죠. 친절한 안내인에 의해 번호표까지 뽑았고 대기하고 있었지만 묘지가 없으면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찾아 여정을 떠납니다. 그리고 만나게 된 그리운 사람들과 다른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혼한 아내, 어렸을 적 자신을 친자식처럼 대해주고 갓난아기였던 양페이에게 젖까지 물려준 이웃 아주머니, 이혼 후 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살았던 셋집의 옆방에 살았던 커플, 과외 아르바이트를 위해 찾았던 학생의 죽은 부모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양페이의 곁을 구름처럼, 연기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토록 찾아헤매던 아버지의 행방.  

 

언젠가 저도, 여러분도 죽음을 맞겠죠. 죽음 뒤의 세상을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막연함에 가끔 먹먹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해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어느 곳으로 가게 될까. 요즘 특히 영혼을 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는 드라마에 푹 빠져 지내다보니 만약 죽은 사람을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지까지 생각하게 되네요. 하지만 이 세상과의 인연이 끝나게 되더라도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잊지 않고 간직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죽음 뒤에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때도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양페이가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채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그래서 더 가슴 뭉클합니다.

 

죽음이 등장하지만 전체적으로 슬픈 책은 아닌 것 같은데 자꾸 눈물이 났어요. 양진뱌오가 어떤 마음으로 양페이를 키웠을지,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약속한 아가씨 대신 양페이를 선택할 수 있었을지 전 짐작조차 할 수 없어요. 늘 선량하고 검소하게 아들만을 위해 살아온 삶. 그래서 그는 죽음 뒤에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던 걸까요. 언젠가 찾아올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요. 병에 걸린 채 말없이 나간 아버지를 양페이가 얼마나 가슴 졸이며 기다렸을 지 생각하면 눈물이 안 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찾아헤맨 이야기라 해서 슬픈 러브 스토리인 줄 알았는데, 그것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랑의 모습들을 만날 수 있었던, 슬프지만 가슴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 34
마커스 세이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요즘 저는 S본부에서 수요일과 목요일에 방영하는 -주남자 태여자-드라마에 빠져 있습니다. 예전부터 워낙 좋아하던 두 배우였고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지라 일주일의 활력소가 된다고 할까요. 그런데!! 두둥!! 소간지가 공블리를 잊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어요. 공블리를 보호하려다 대신 흉기를 맞은 소간지는 잠시 심정지가 왔을 때 영혼의 모습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공블리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자신이 죽었다 생각하며 다른 세상으로 떠나려는 준비를 하죠. 그런 소간지를 위해 자신의 영혼을 제물로 바친 공블리. 영혼을 부르기 위해서는 그 동안의 추억을 모두 잊게 하는 수밖에 없다네요. 기억을 잃고 의식을 되찾은 소간지. 하지만 뭔가 답답하고 입 안에서만 맴도는 생각나지 않는 이름 때문에 허전하기만 합니다. 그건 분명 흉기를 맞은 자리가 아프기 때문만은 아닐 거에요.  

 

한 남자가, 영화로 만든다면 무음 상태에서 숨을 가쁘게 들이쉬는 소리로 시작할 것 같은 그런 장면에서 깨어납니다. 벌거벗었고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만 존재할 뿐,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조차 없이 간신히 물 밖으로 나온 남자는 이윽고 깨닫죠.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침착하자며 자신을 다독거린 남자가 발견한 것은 BMW 한 대와 '대니얼 헤이스'라는 이름이 기재된 차량등록증. 가까운 숙소로 이동한 그는 마치 정해진 것처럼 '시간이 됐다'는 생각에 한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죠. 드라마인 듯 현실인 듯 그의 꿈속에 등장하는 몇몇 장면들. 작은 단서로 알아낸 것은 자신이 대니얼 헤이스라는 것과 사랑하는 아내 레이니를 죽인 용의자로 쫓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은 그들의 결혼 생활이 완벽했다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지만 그가 때로 불같이 화를 냈다는 것과, 레이니가 죽기 일주일 전부터 심하게 다퉜다는 것 등 그에게는 불리한 증언 뿐. 게다가 이제는 정체 불명의 남자까지 그의 목숨을 노리는 상황입니다.

 

대니얼이 자신의 기억을 찾아 달려가는 모습은 조마조마합니다. 과연 그는 정말 대니얼 헤이스가 맞을까, 그가 대니얼 헤이스라면 그는 정말 아내 레이니를 죽인 것인가, 그는 왜 인적도 없는 바다에서 정신을 차린 것인가, 그리고 기억을 잃기 전의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주인공이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점 하나로 작품은 충분한 스릴을 선사해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공포, 그만큼 엄청난 공포는 없을테니까요. 그리고 이제 대니얼이 기억을 찾은 지금, 작가가 준비한 장치가 드디어 제 실력을 발휘하는 순간, 이야기는 또 다른 점을 향해 힘차게 달려갑니다.

 

스릴과 수수께끼를 제공하는 동시에 작가는 굉장히 의미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기억을 잃은 상태의 너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만약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다르다면 어떤 것이 진정한 자신일 수 있는가-에 대한. 기억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결혼생활이 완벽했다고 믿은 대니얼처럼, 작가는 과거가 어떠했든 현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때문에 작품 안에서 과거의 대니얼의 모습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현재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자신 뿐이지만, 그럼에도 기억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으니 말이에요. 결국 '기억'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요소겠죠. 드라마에서 주남자가 잃어버린 무언가 때문에 허전해하는 것처럼. 대니얼이 과거의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기억은 또 하나의 자신이니까요.

 

이 책에는 '인생은 빗방울이야'라는 문구가 꽤 자주 등장하는데요, 그에 대한 작품의 설명은.

 

 메레디스 : 인생이 빗방울이라고요? 

 대니얼 : 한때 내가 사랑했던 어떤 사람이 그 말을 해줬어요. 이 말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한 선택이 현재의 자신을 만든다는 거죠.

           하지만 자신이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은 한순간에 변해버릴수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p469

빗방울은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모양이 다르다고 하죠. 어쩌면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요. 그 수많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빗방울 안에서 무엇을 선택할 지 결정하는 것. 그리고 그런 결정이 현재의 자신을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는 것. 나중에 작품의 세세한 부부은 잊어버린다고 해도 이 -인생은 빗방울-이라는 말은 오래 기억에 남을 듯 합니다. 스릴러를 읽었는데 감성돋는 시집을 읽은 것 같기도 한 그런 오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이컵을 위하여
윌리엄 랜데이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뛰어난 실력으로 지방검찰청에서 차장검사로 일하는 앤드루 바버. 정치에는 관심없이 오직 검사 업무에만 집중하는 그는, 평생의 사랑인 로리와 아들 제이컵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조용한 그들의 마을 뉴턴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소년 살해사건. 희생자가 고작 열 네살 소년인데다 이렇다 할 큰 이슈가 없었던 뉴턴에서 살인은 너무나 큰 사건이었기에 온 마을이 들끓기 시작하고, 앤디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료형사들과 총력을 기울이지만 단서는 오리무중이다. 때마침 용의자로 성범죄자인 레너드 패츠가 지목되고 그를 조사하던 중, 뜻밖의 단서로 범인으로 몰린 앤디의 아들 제이컵. 결국 앤디는 사건에서 손을 떼고 제이컵의 무죄를 밝혀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붓지만, 그의 가족사에 얽힌 비극과 수사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제이컵의 언행으로 수사는 어려움에 빠지고 앤디와 그의 아내 로리는 그들이 알던 제이컵이 제이컵의 모든 것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과연 범인은 제이컵인 걸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제이컵은 어떤 소년인 것일까?

 

소설에서 자주 다루어졌던 소년범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에는 시각을 바꾸어 우리 앞에서 대답을 재촉한다. 그 소년범이 만약 당신의 아이라면 어떻게 할 거나고, 과연 그 아이의 무죄를 끝까지 주장할 수 있을 것이며 설사 모르고 있었던 그 아이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모든 부모에게, 앞으로 부모가 될 사람들에게 던지는 이 질문에 선뜻 대답을 내놓을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사건 전개의 긴박감에 빨리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마음과, 시련에 괴로워할 앤디와 로리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상충되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독서였다. 그 동안 소년범에 대한 소설을 읽을 때 그 소년범에 대해 초점이 맞춰졌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그 용의자의 가족들에 집중했다는 점이 새롭고,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것은 아들이 용의자로 지목된 이후 무너져가는 인물의 내면과, 분위기가 일변해버린 가족들의 상황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아들이 범인이 아닐 거라고 믿는 마음 한 편에 존재하는 만약 아들이 범인이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함, 당신과 내가 우리 아이를 잘못 키운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 가족사에 얽힌 비극을 끝까지 숨겨왔던 남편에 대한 배신감. 접촉과 대화로 많은 사람의 고민과 슬픔을 함께 할 수 있다고 믿어온 앤디의 아내 로리, 이웃들에게 의지와 화목의 상징이었던 로리가 그들에게 외면당하고 빠르게 무너져가는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처절하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6년 동안 미들섹스 카운티의 지방검사로 일해왔던 전력이 있는만큼, 작가가 묘사한 법정 공방은 생생하고 현실적이다. 비열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건을 정치적으로 몰아가는 검사의 모습에 분노를 느꼈고 손에 땀을 쥐게 할만큼 긴박한 분위기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제이컵이 과연 범인인 것일까? 범인이 아니라면 그들 부부는 앞으로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런 분위기가 한층 살아나게 되는 것은 작가가 제시한 질문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라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위해서라면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 때문에, 나는 가족을 위해서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 생각했었다. 만약 가족이 어떤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절대 그 순간을 도망가서 상황을 악화시키게 만들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힘든 순간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함께 묵묵히 곁을 지키는 것. 가족이기 때문에 잘못을 덮어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여겼다. 그들의 더 나은 한 발을 위해서. 때문에 로리의 극단적인 선택에 공감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는지 묻고 싶기도 했다. 이런. 난 이미 그들을 진짜라고 여기나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으니까.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아무리 내 아이에게 최선이라 생각되는 것을 주어도 그것이 늘 최선이 될 수 없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아직 부모가 아닌 내 마음이 이런데 세상의 많은 부모들의 마음은 어떨까. 내 자신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 시간 속에서 내 아이의 하나하나를 살피고 사랑해야 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부모님들의 마음이 애처롭게 다가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 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 - 라만차 돈 키호테의 길
서영은 지음 / 비채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 장을 펼치고, 다시 몇 장을 읽어내기가 조금 힘들었던 책이었다. 왜 그랬을까아. 아마도 '돈 키호테'라는 인물에 대해 내가 아는 거라곤 풍차를 향해 바보처럼 돌진했다는 것과 그를 창조해낸 사람이 세르반테스라는 작가라는 점 뿐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돈 키호테]를 완독한 적도 없는 내가 작품을 기반으로 그 여정을 따라가는 길이 조금은 버거웠었다. 그것은 초반에 작가 서영은님이 동행한 출판사 직원 Y를 바라보는 눈길에서 뭔가 깔보는 듯한, 철 없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이 든 노작가의, 자신이 사랑하는 '돈 키호테'라는 인물에 대해 출판사 직원 Y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한숨이었달까. 나의 착각일 수 있겠지만 나는 작가가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세계를 잘 모르는 독자들에 대해서도 그런 기분으로 책을 써내려간 것은 아닌지 약간은 불편했다.

 

그런데 이 책, 읽을 수록 읽는 맛이 난다. 평범한 여행 에세이가 아니라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를 사랑하는 작가와 출판사 직원 Y, 문학박사 J가 함께하는 [돈 키호테] 읽기 모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직 초점은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에게 맞춰져 있고, 물론 여과되었겠지만 그들의 대화에 등장하는 소재 또한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이다. 어떤 작품을 무척이나 사랑해서 그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찾아가고, 그 곳에서 작품 속 장면을 재현해내는 여행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만약 내가 이런 여행을 떠난다면 이렇게나 충실한 과정을 보낼 수 있을까 혀를 내두를만큼 성실한 여행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중간중간, 졸려하거나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는 상황에서 작가가 동행자 둘의 공부를 재촉하듯 [돈 키호테]에 등장하는 구절을 읽어주는 모습은 가히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 구절 중 가장 인상적인 문구는.

 

 세상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아주 복잡한 미로에도 들어가고, 가는 곳마다 불가능한 곳에 뛰어들며, 한여름의 불타는 태양 볕에도 인적 없는 황무지에서 버티며 살고, 겨울에는 바람과 얼음의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사자들도 무서워하지 않고 요괴에도 놀라지 않으며 괴물도 두려워하지 않지요. 이놈들을 찾고 저놈들을 쳐부수고 모두를 이기는 게 기사의 중요한 진짜 임무올시다. 때문에 편력기사의 일원이 될 운명을 타고난 본인은 의무의 한계 속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나 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금 사자들을 공격한 것은 기상천외한 무모함인 줄은 알았으나, 용기라고 하는 건 비겁이냐 무모함이냐 하는 두 극단적인 악덕 사이에서 구한 높은 덕을 말하지요. 그러다 용기 있는 자에겐 비겁이라는 상황에 다다를 만큼 내려가는 것보다는 무모함의 경지까지라도 올라가는 게 그래도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겁니다.   -p116

이런저런 문구들을 읽다보면 [돈 키호테]는 단순히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무모함과 어리석음으로 가득찬 한 남자의 표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우리 생에서 반드시 깨달아야만 하는 진리를 그린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있는 자리에서 만족하는 마을 사람들과 돈 키호테의 친구 신부 등은 더 높은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없는, 일반 소시민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전쟁에서 팔을 잃고, 타국에서 노예가 되어 극한 체험을 했고, 매인 데 없이 전국을 유랑하며 드라마 같은 분방한 생활을 했던 시절이 있었나 하면, 유부녀와의 불 같은 사랑 이후 피폐한 마음을 추스리려고 애쓰는 작가(p138)-가 생의 휴식처로 여겼음직한 에스키비아스라는 마을의 평화로움을 오히려 위기로 감지한, 작가의 마음이 녹아들어 있다.

 

초반에도 나의 마음을 강렬하게 뒤흔 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돈 키호테가 객줏집을 성곽이라고, 객줏집 주인을 성주라 여겨 그에게 기사 서품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처음 객줏집 주인은 그런 돈 키호테를 우스꽝스럽게 여기고 그를 놀리고자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는데, 그를 비롯하여 귀부인이라 여겨진 창녀와 주위 사람들도 처음에는 돈 키호테를 깔보고 비웃지만 차츰 그의 요청 아닌 요청에 따라 그 역할에 맞는 말투와 태도를 갖추게 된다. 그만큼 돈 키호테의 기사에 대한 마음이 깊고 강하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도 깨닫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비록 어리석고 우스워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열망은 주위 사람들도 감화시키는 법이니까.

 

작가와 Y, 그리고 J의 여정은 돈 키호테가 로신안테를 타고 산초와 동행했던 바로 그 길이다. 신실한 신자에 워낙 [돈 키호테]를 사랑하는 작가에게 그 두 사람 역시, 특히 Y가 시간이 지날수록 [돈 키호테]에 깊이 빠져드는 모습은 뭐랄까,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 신기하다고 해야 하나. 작가 역시 이 여행에서 또 다른 돈 키호테였으니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악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아름답다. 언젠가 스페인에 가게 된다면, 그저 관광지를 기웃기웃하는 그런 단순한 여행이 아닌, 서영은 작가님처럼 의미있는 무언가를 해내야겠다. 어쩌면 그것이 돈 키호테의 길이어도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Q&A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몰입해서 읽은 온다 여사의 작품입니다. 온다 여사와 저를 처음 만나게 해 준 [밤의 피크닉]을 읽고나서 전 완전히 그녀의 팬이 되어버렸어요. 우리나라 작품과는 뭔가 다른, 제가 일본이라는 나라, 그리고 일본의 학생들에게 갖는 막연한 동경같은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가끔 정말 좋은 작품을 만나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감정들이 가슴에서 요동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자꾸 집 안을, 때로는 집 밖을 서성이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들. 그 당시의 저에게 [밤의 피크닉]은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이라면 일단 사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북홀릭이었던 저의, 북콜렉터라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 거죠. 으힛.

 

그런데 언제부턴가 익숙해져버린 그녀의 방식에 더 이상은 익숙해지기 싫은 거에요. 읽어도 새로운 것이 없다-는, 어쩌면 독자가 작가에게 갖지 말아야 할 가장 최악의 생각이 제 머리에 스며든 거죠. 그런데그런데. 오랜만에 읽은 온다 여사의 이 [Q&A]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녀가 이런 작품도 쓸 수 있구나, 그래 그녀는 여전히 온다 리쿠구나-라는, 그녀의 작가로서의 새로운 입지가 보였다고 할까요. 사실 이 작품은 일본에서는 출간된 지 꽤 오래된 작품입니다. 2005년 제5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니, 벌써 8년 전이네요. 8년 전이면 제 나이가..흠흠. 제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즐겁게 뛰어다니던 때에 온다 여사는 이런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니 새삼 감동이랄지, 존경심이랄지 그런 감정들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네요.

 

1. '질문'과 '대답'만으로 구성된 소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가 오직 '질문'과 '대답'만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M이라는 쇼핑센터에서 벌어진 의문의 사건들을 둘러싸고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진술되는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요. 정체불명의 물질이 든 봉투를 바닥에 던진 의문의 남자, 그 장면을 보고 동시에 도망치기 시작한 사람들, 그 사건이 벌어질 때 다른 층에서 '회개하세요!!'라고 말한 이상한 남자, 그리고 역시 다른 층에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 사람들의 모습이 생존자들의 증언만으로 되살아납니다. 어떻게 보면 내용을 전개시켜 나가기에 편한 구성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단편이 아닌 장편을 이끌어나가기에는 적잖이 힘이 드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챕터마다 새로운 증언과 사건을 계속 도입해야 하니까요.

 

2. '사실'은 무엇인가

 

 사실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란 걸 인식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람 눈의 수만큼 사실이 존재하는 거야. -p151

얼마 전 케이블 방송에서 한 연예인이 게스트로 출연한 토크쇼에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사건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것과 그가 기억하는 것이 전혀 달랐다-라는. 이 작품에서도 그런 현상이 드러납니다. M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고 결국 자신의 관점에서 사건을 기억하죠. 자신이 인상깊게 본 것, 주목했던 것이 현실에 반영되면서 전혀 새로운 기억들이 구성되는 겁니다. 진짜 범인을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가진 가치관, 선입견의 영향으로 그 범인조차 기억 속에 묻혀버릴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사실'이란 무엇일까요. '진실'이란 또 무엇일까요. 생각할수록 어렵고 오묘한 우리 사는 세상입니다.

 

3.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는 목적

M에서는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작품의 마지막에는 그 사건에 대한 '사실'같은 대목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진실'일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인위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분명 어떤 목적 아래 행해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길 뿐이죠. 또한 이 '목적'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사건을 발판 삼아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도요. 이야기에 등장하는 '기적의 소녀'는 마치 계속 증식하는 세포들처럼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목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온다 여사 작품스러운 듯, 혹은 그렇지 않은 듯.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등장하는 '기적의 소녀'에 관한 진실은, 으아. 읽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고 할까요. 자극적이지 않은, 은근한 미스터리의 여왕이었던 온다 여사가 어쩐지 어둠 한 구석에서 이런 제 모습을 보고 씨익 웃는 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로 예상 못한 '반전'이었습니다.

 

Q : 저처럼 그 동안의 온다 여사 스타일에 잠시 지쳐있던 분이라도 부디 이 작품만은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A : (당신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