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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말했다 : 우리를 닮은 그녀의 이야기
김성원 지음, 김효정 사진 / 인디고(글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오랫동안 잊고 지냈지만, 한밤의 라디오는 한 때 내게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라디오를 켜둔 채 취침예약을 해놓고 자리에 누우면 까만 밤을 헤치고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더없이 차분하고 더없이 아늑했던 그 밤들에, 내 마음은 까닭모를 설레임과 눈물로 가득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건 감미로운 음악을 배경으로 DJ가 나긋나긋 읽어주던 생활에 관한 단상들. 때로는 사랑을, 때로는 삶의 힘겨움을, 때로는 인생의 환희를 읊어주던 목소리가 방안에 가득 퍼지면, 그것은 곧 다른 누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으므로.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라디오를 가까이 하지 않던 시간, 아련했던 감성들이 희미해졌다고 느낀 순간, 라디오는 다시 내 곁에 와있다.
[그녀가 말했다] 는 KBS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에 방송된 '그녀가 말했다' 코너를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런던, 도쿄, 파리의 풍경을 담은 사진으로 그 매력을 더했다. 이 책은 한 번에 죽 읽어내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무언가를 얻고자 읽는 책이 아니라 쓱 지나가버리는 일상생활을 다른 이의 목소리를 빌려 조금 천천히 들여다보기 위한 책이니까. 그래서 나는 하루에 몇 편씩만, 그리고 새벽 시간에 야금야금 읽었다. 좋은 문장은 곱씹어보고, 나도 이랬던 적이 있는데 하며 공감도 하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작가의 생각에 감탄도 하면서. 꼭 내가 에피소드들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아서 색다른 기분이었다고 할까.
'소심한 사람들이 연애하기 힘든 이유는 이 세상에 소심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를 보며 나는 소심한가 아닌가 가늠해보고, '그러니까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너의 가치를 생각해보라는 거지. 지금 네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건, 네가 가격표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야' 를 보면서는 나의 가치도 생각해보고, 나를 즐겁게 했던 것, 나를 힘들게 했던 것, 앞으로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피곤에 지쳐 금방 잠이 들어버리는 평소에 비하면, 지금의 이런 시간들은 보석같다, 나에게는.
생활속에서 얼굴을 가린 채 우리에게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내서, 생각하고 그 의미를 가늠하는 일에도 재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들은 늘, 언제나, 무언가에 쫓겨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니까. 자신에 대해, 사랑과 삶과 소중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단 5분이라도 낼 수 있다면 조금은 따뜻한 마음으로 이 겨울도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살아있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 목소리는 이미 나의 목소리다.
나는 요즘, 라디오를 듣는다. 가장 좋아하는 건 자정에 시작되는 정엽의 푸른밤. (유희열팀, 미안합니다;;) 까만 어둠 속에 이어폰을 꽂고 자리에 누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아는 사이같은 친근함이 느껴져 마음이 포근해진다. TV도 책도 줄 수 없는 라디오만의 힘이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지, 나도 생활 속에서 보석같은 생각들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