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산행 테마 소설집
박성원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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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와 바나나]가 역사 속 인물을 소재로 했다면, [한밤의 산행]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소재로 한 테마 소설집이다. 역시 각각 13명의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키스와 바나나]보다 분위기 전체가 조금 어둡다 느껴졌다. 소재 면에서는 비슷한데 한 두편의 이야기가 유독 어둡게 느껴졌던 탓이었을까. [한밤의 산행] 속에는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세상 밖으로 걸어나가지 못했던 군인이 몇 십년만에 조국으로 돌아갔으며, 김광석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의 사연이 펼쳐지기도 한다. 사회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혹은 이유있는 불신이 존재했던 시간들이 흘러가고 오싹한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도 여럿이다.

[잘 가, 언니]는 주인공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보내는 연가다. 몸이 약한 동생에게 온 가족의 신경이 쏠리고 치료비로 인해 넉넉하지 않았던 집안형편. 그 때문에 하고싶은 미술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떠나버리듯 누군가와 결혼한 언니. 주인공은 언니가 죽은 나이를 뛰어넘은 나이에 언니의 흔적을 좇는다. 어디선가 본 듯한 소재와 내용임에도 굉장히 애틋한 무언가가 느껴져 생각보다 곱씹어 읽고 말았다. 한국적인 정서를 약간 멀리했음에도 곳곳에서 보이는 -내가 생각하는-한국적인 정서에 스며들었던 것 같다.

정용준의 [아무도 잊지 않았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 혼자만의 전쟁을 계속해왔던 오노다의 이야기다. 예전 재연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나의 눈에 오노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일본에 충성하는 무서운 군인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의 끝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지 못했던 사람. 하지만 작가 정용준은 그런 비이성적인 면보다 그가 지니고 있던 인간적인 면모에 좀 더 집중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한밤의 산행]보다는 [키스와 바나나]에 실린 작품들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누군가는 나와 같을 수도, 누군가는 나와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좋게 느껴졌든 풍부한 단편들을 만나볼 수 있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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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와 바나나 테마 소설집
하성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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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 작품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인정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느끼고 있는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나라 작품의 무거움이 별로 와닿지 않았더랬다. 간결하게 느껴지지 않는 표현들도, 간단히 파악할 수 없는 메시지들도 그저 작가들의 멋부리기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번역문학, 특히 일본문학의 문체들에 길들여졌기 때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작품들에서는 느껴지는, 이를테면 한(恨)의 정서라든가 질척거리는 듯한 감정들의 표현에 질렸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 [키스와 바나나], [한밤의 산행]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만같은 것, 뭔가 만족되지 못하고 있던 부분들이 조금 채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책을 읽어도 얻게 되는 감상과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르므로 어디까지나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한국 ‘단편’문학이었다.

 

[키스와 바나나]는 역사 속 인물을 소재로 한 테마 소설집이다. 각각 13명의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어 조금 짧은 듯한 느낌도 있지만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읽는 내내 –이런 작품을 쓸 수도 있구나-라고 감탄했고, 그 동안 내가 우리나라 문학을 너무 읽지 않고 있었다는 것, 그러면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어쩌면 역사와 기억을 소재로 한 작품의 취지가 나의 취향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대체 역사 픽션, 논픽션과 픽션, 판타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는 작품들이 글을 읽는 내내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유명 작가인 남편의 그늘에 가려 답답함을 느꼈던 아내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였던 젤다 세이어와 오버랩되고, 역사 속 강자들의 뒤에 서 있었던 약자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역사가 쓰인다. 작품을 쓰던 작가는 작품 속에서 빠져나와 후대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아내기도 하고, 한 인물의 일대기가 덤덤하게 재조명되기도 하고 일본인인 줄 알았던 조선인 선생님을 짝사랑했다가 그가 조선인임을 알고 야유하는 친구들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소녀는 순수를 잃는다.,

[소년 7의 고백]은 진실이 강압에 의해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가, 폭력에 의해 진실 아닌 진실이 얼마나 많이 난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그저 그렇게 태어나 그저 그렇게 자랐고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짓궂은 장난을 치며 살아왔던 소년은 자신의 동네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 잠을 재우지 않고 진행되는 취조에 소년은 겁을 먹었고 잘 말하기만 하면 집에 보내주겠다는 형사의 강압에 있지도 않은 일을 있었다고 대답하게 되는 그. 발악하고 소리 지르고 그런 일은 없었다고 도리질도 쳐보지만 소년은 어렸고, 권력은 너무나 강했다. 소년의 입에서 나온 진실의 껍데기를 쓴 거짓이 세상 밖으로 알려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자명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결국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었던 안보윤의 작품. 

 

대구 지하철 사건 속에서 살아남은 그는 사고 때 겪은 일을 소재로 작품을 쓰고 문단의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친구 윤기의 장례식 장에서 그의 기억을 떠올리는 준석은 윤기가 항상 가지고 다녔던 만년필에 주목하고 어째서인지 그 만년필의 소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윤기의 부인으로부터 USB를 받게 된 준석은 미발표된 원고 속에서 그 날 윤기에게 있었던 일과 만년필의 소재를 알게 된다. 순간의 선택이 그 후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지배하고 결국 그 선택의 무게가 삶 전체를 내리누를 수 있다는, 조금은 잔혹한 조영아의 [만년필]이다.

 

많은 작품들이 모두 인상적이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것도 있고, 어떤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가 곱씹게 만드는 것도 있으며, 가슴이 먹먹해져 다시 읽게 되는 작품들도 있었다. 단편에 대한 기대도 없었고,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의 작품이라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그래서인지 더 깊게 다가왔던 것 같다. 역사와 시간을 소재로 한 테마 소설집.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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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 2014 서점 대상 2위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3
기자라 이즈미 지음, 이수미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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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실려 있는 <무무무> 파트를 읽을 때는 조금 싱겁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남편 가즈키를 병으로 잃은 데쓰코는 처음 결혼했을 때와 변함없이 시아버지인 ‘시부’와 함께 살고 있어요. <무무무>에서는 데쓰코의 그런 사정, 그리고 남자친구 이와이로부터 청혼스럽지도 않은 청혼을 받지만 거절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나와있지 않지만 친정과도 사이가 별로인 데다 가즈키를 잃은 상처가 깊은 탓인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런 내면의 상처들로 인한 고통이나 아픔들도 7년이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담담하게 흘러갑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내심 뭔가 좀 더 애틋하고 아련한 에피소드들을 기대했던 탓인지 <무무무>를 읽고는 ‘에잉’ 했지만,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들을 읽을수록 점점 빠져드는 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 작품은, 떠난 사람이 남기고 간 자리를 추억하는 남은 사람들의 추모를 소재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총 8명이 서로 다른 시각으로 가즈키를 생각합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어쩐지 가족을 만드는 것이 무섭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가 어려운 데쓰코, 어린 시절 친구이자 <무무무>에도 잠깐 등장하는 다카라, 등산을 하면서 생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부, 가즈키의 사촌동생인 도라오는 가즈키의 언행과 가즈키의 차를 통해 그를 생각합니다. 여기에 데쓰코와 그녀의 남자친구인 이와이의 소소한 이야기, 가즈키의 어머니 유코의 시부와 결혼 전 이야기, 어쩌다보니 이와이와 결탁하게 된 시부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즈키가 <어젯밤 카레>를 발견하게 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마지막에 가즈키의 이야기가 등장했을 때는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기분이 이상했어요.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즈키가 발견한 <어젯밤 카레> 소녀가 데쓰코인지는 명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분명 데쓰코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일본소설 특유의 담담한 문체가 오히려 더 와닿는 경우가 있어요. 감정을 마구 분출하지 않고 그저, 아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럴 수도 있지 넘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단련시켜준다는 느낌이랄까요. 분명 슬픔과 고통, 애정과 기쁨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알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줘요.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은 사실 무슨 빵과 관련된 따뜻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론 빵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빵이 주된 소재는 아니고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슬픔을 치유하면서 절대 잊지는 않는, 그러면서 한발한발 내딛으며 또 다른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를 통해, 무엇을 통해 -나는 살아있구나!-를 느끼는 사람들의 이야기요.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한숨 돌리고 싶을 때 편안한 마음으로 읽기 좋은 작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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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오키나와 여행 - 오키나와에서 꼭 가보고 싶은 특별한 공간 45곳 새로운 여행 시리즈
세소코 마사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꿈의지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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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여름의 기운을 느끼기 시작하게 되니 여행을 가고 싶어 몸과 마음이 들썩들썩한 요즘입니다. 7월 말, 혹은 8월 초에 떠나려고 했던 오키나와 여행을 눈물을 삼키며 힘겹게 접은 후유증 탓인지 신나게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동생에게 괜히 심술이 나기도 해요. 사실 떠나려면 얼마든지 훌쩍 떠날 수 있지만 내년이 아부지 환갑이셔서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이 큰 탓에 올해는 과감하게(?) 여행을 접었습니다. 작년 이맘 때 홋카이도 여행을 준비하면서 활기차게 하루하루를 보냈던 걸 생각하면, 여행이란 하는 도중도 즐겁지만 준비할 때, 돌아와서 추억할 때 모두 생활에 활력을 주는 요소가 아닌가 싶어요. 올해 조금 더 열심히 자금을 끌어모아서 내년 부모님 여행도 보내드리고, 저도 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대지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일본여행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래서 저도 차마 도쿄 근교에는 가지는 못하지만 일본은 지역에 따라 각각의 매력이 풍부한 곳인 것 같아요. 그래서 목표로 했던 곳을 다녀오면 또 다른 목적지가 생기고, 그 곳을 다녀오면 또 다른 목적지가 생기는 듯 합니다. 작년에 홋카이도를 다녀오고 나서는 이제는 일본에 그만 가도 되겠지 했는데, 올 상반기부터 오키나와가 자꾸 저의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일본 본토와는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덕분인지 우리나라 사람들도 오키나와는 꾸준히 찾고 있는 것 같아요. S본부에서 방영되는 예능 프로그램에 이 오키나와에 있는 추라우미 수족관이 등장해서 그 인기가 더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들리고요. 본래 류큐왕국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미국에 점령당했다가 일본의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귀속된 오키나와. 때문에 아직도 오키나와 사람들 중에는 -우리는 일본인이 아닌 류큐왕국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지닌 사람들이 꽤 존재한다고 합니다. 일본 패전 시 강제로 죽음을 강요당한 사람들도 많았다네요. 오키나와 출신인 일본의 국민가수 아무로 나미에가 천황 생일파티에 초대받았는데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죠.

그런 오키나와의 가장 큰 매력은 아무래도 푸른 하늘과 바다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아서, 어쩐지 이곳에 가서는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지 않고 바닷가 근처에 앉아있기만 해도 힐링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을 읽어야지’라고 생각했던 때는 아직 오키나와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렌터카 부분이 가장 궁금했었어요. 보통은 자동차를 이용해서 관광을 한다고 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운전하는 걸 두려워하는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 [새로운 오키나와 여행]은 제목 그대로 ‘새롭게’ 오키나와를 여행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적인 여행안내 책들과는 달리, 이 책에는 숙소, 관광지 등이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아요.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오키나와에 와서 어떻게 자신의 꿈을 이루었는가-에 관한 부분입니다. 공방을 운영하는 사람, 맛있는 빵을 만드는 사람, 향기로운 커피를 내리는 사람, 신간도서와 중고서적을 같이 다루고 낭독회를 여는 사람들이 등장해요. 그 중에는 대지진을 겪고 난 뒤 오키나와로 이주해온 사람도 있고, 고향이 오키나와였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키나와로 이주한 이유, 각각의 취향은 모두 다르지만 제가 그들을 ‘하나’처럼 느끼게 된 것은 그들 모두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일, 중요하죠. 하지만 그 일을 생활 속에 어우러지게 만든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책에 등장한 사진이나 이야기만 들어서는 무척 손쉽고 간단하게 이루어진 생활같지만 분명 그들에게도 나름의 고민과 어려움이 존재했었겠죠. 그런 시간들을 뛰어넘어 자신이 원하던 삶을 손에 넣은 사람들.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오키나와로 이주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일과 삶이 서로 나눠진 게 아니라 하루하루 삶이 곧 일이고, 일이 다시 나다운 삶이 되는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오키나와에서라면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여러 가게들을 소개해놓은 책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지만, 저는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오키나와에 가고 싶어졌어요. 혹시 아나요? 오키나와에 여행 갔다가 저도 그 곳에서 눌러살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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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담은 배 - 제129회 나오키상 수상작
무라야마 유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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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번역되었던 책이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면, 그 책에 대한 번역가의 애정이 남달라서일까요, 그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찬사와 사랑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일까요. 한 쪽에만 해당될 수도, 양쪽 모두의 이유일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작품이 재번역된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것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갔을테니까요. [별을 담은 배]는 129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그것이 2003년이니 벌써 11년도 더 전의 일이네요. 좋은 작품은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죠. 이 작품도 부디 그렇게 되길 바라봅니다. 가족들의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다루고 있는 일본인의 눈으로 본 전쟁과 위안부 소재는 하나의 살아있는 역사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총 여섯 편의 연작 단편집입니다. 각각의 주인공은 한 가족이에요. 의붓동생인 줄 알았다가 사랑에 빠진 사에가 사실은 이복동생이라는 충격에 집을 나간 아키라, 집안의 막내로서 힘겨움을 감내하고 명랑한 척 지내온 미키가 감추고 있던 어둠, 한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아키라를 마음에서 지우지 못한 사에, 집안의 장남으로서 살아왔고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50대를 맞이한 미쓰구가 겪는 고뇌, 그의 딸인 사토미가 맛보는 청춘의 쌉싸름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일이 일어난 시작을 만들어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 시게유키가 노년을 맞이하여 과거를 되돌아보는 감회가 그려져 있어요. 그 때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고통들-10대인 사토미가 느끼는 친구에 대한 동경과 약간의 질투, 30대를 갓 넘긴 미키가 겪는 삶에 대한 불안함 등-이 마치 작가가 한 명 한 명의 캐릭터 안에 녹아있는 듯 그들의 입을 빌어 저마다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키라와 사에의 사랑도 가슴 아팠고, 미쓰구가 느끼는 허무함도 안쓰러웠지만 역시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아버지 시게유키가 등장하는 파트인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전쟁에 참가했던 시게유키는 그 곳에서 인간이 인간답지 못할 수 있다는 것,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몸으로 겪게 됩니다. 그 곳에서 만난 조선인 위안부 야에코, 한국이름 강미주.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이 조선인임을 잊지 않고 정체성을 지켜나가려했던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그녀를 사랑하게 된 시게유키는 참혹하게 그녀를 잃었고 현재에서는 그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로 비춰지죠. 겪어보지 못한 전쟁을 젊은 사람들이 뭘 알고 떠드는가 우습기만 하고, 그렇다고 전우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 때를 미화시키는 것도 고통스럽기만 한 시게유키. 작가는 전쟁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해버린 시게유키라는 인물을 통해 전쟁 그 자체의 참혹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일본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할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합니다. 일본 정부에 대해 우리국민의 불신이 깊어지는 요즘, 일본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라고 외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시게유키의 두 번째 부인 시즈코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을 듯 합니다. 지주막하출혈로 이미 작품의 처음부터 죽음을 맞은 그녀는 미쓰구와 아키라를 키워내고, 사에와 미키를 낳은 후처입니다. 미쓰구와 아키라의 어머니였던 하루요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시게유키와 관계를 맺어왔고 그로 인해 사에를 덜컥 갖게 된 그녀는, 작품 안에서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가족들에게 그 누구보다 강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어요. 아키라가 사에와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토록 분노하고 절망했던 이유는 사에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하루요보다 키워준 어머니 시즈코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몇 십년의 세월을 자신의 죄를 비는 마음으로 인내하고 한 가정을 이끌어온 그녀. 그녀의 부재는 가슴 아프지만 그 부재가 오히려 가족들이 서로를 살피고 보듬으며 앞으로 한 발 내딛을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연작단편집이지만 작품이 가진 서사의 매력이 대단합니다. 작가의 냉철한 시각은 물론 마음을 울리는 감성이 공존하고 한 인간의 삶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나오키상을 받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전달하려는 메시지, 모두 훌륭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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