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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와 바나나 ㅣ 테마 소설집
하성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4월
평점 :
나는 우리나라 작품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인정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느끼고 있는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나라 작품의 무거움이 별로 와닿지 않았더랬다. 간결하게 느껴지지 않는 표현들도, 간단히 파악할 수 없는 메시지들도 그저 작가들의 멋부리기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번역문학, 특히 일본문학의 문체들에 길들여졌기 때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작품들에서는 느껴지는, 이를테면 한(恨)의 정서라든가 질척거리는 듯한 감정들의 표현에 질렸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 [키스와 바나나], [한밤의 산행]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만같은 것, 뭔가 만족되지 못하고 있던 부분들이 조금 채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책을 읽어도 얻게 되는 감상과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르므로 어디까지나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한국 ‘단편’문학이었다.
[키스와 바나나]는 역사 속 인물을 소재로 한 테마 소설집이다. 각각 13명의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어 조금 짧은 듯한 느낌도 있지만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읽는 내내 –이런 작품을 쓸 수도 있구나-라고 감탄했고, 그 동안 내가 우리나라 문학을 너무 읽지 않고 있었다는 것, 그러면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어쩌면 역사와 기억을 소재로 한 작품의 취지가 나의 취향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대체 역사 픽션, 논픽션과 픽션, 판타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는 작품들이 글을 읽는 내내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유명 작가인 남편의 그늘에 가려 답답함을 느꼈던 아내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였던 젤다 세이어와 오버랩되고, 역사 속 강자들의 뒤에 서 있었던 약자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역사가 쓰인다. 작품을 쓰던 작가는 작품 속에서 빠져나와 후대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아내기도 하고, 한 인물의 일대기가 덤덤하게 재조명되기도 하고 일본인인 줄 알았던 조선인 선생님을 짝사랑했다가 그가 조선인임을 알고 야유하는 친구들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소녀는 순수를 잃는다.,
[소년 7의 고백]은 진실이 강압에 의해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가, 폭력에 의해 진실 아닌 진실이 얼마나 많이 난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그저 그렇게 태어나 그저 그렇게 자랐고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짓궂은 장난을 치며 살아왔던 소년은 자신의 동네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 잠을 재우지 않고 진행되는 취조에 소년은 겁을 먹었고 잘 말하기만 하면 집에 보내주겠다는 형사의 강압에 있지도 않은 일을 있었다고 대답하게 되는 그. 발악하고 소리 지르고 그런 일은 없었다고 도리질도 쳐보지만 소년은 어렸고, 권력은 너무나 강했다. 소년의 입에서 나온 진실의 껍데기를 쓴 거짓이 세상 밖으로 알려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자명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결국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었던 안보윤의 작품.
대구 지하철 사건 속에서 살아남은 그는 사고 때 겪은 일을 소재로 작품을 쓰고 문단의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친구 윤기의 장례식 장에서 그의 기억을 떠올리는 준석은 윤기가 항상 가지고 다녔던 만년필에 주목하고 어째서인지 그 만년필의 소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윤기의 부인으로부터 USB를 받게 된 준석은 미발표된 원고 속에서 그 날 윤기에게 있었던 일과 만년필의 소재를 알게 된다. 순간의 선택이 그 후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지배하고 결국 그 선택의 무게가 삶 전체를 내리누를 수 있다는, 조금은 잔혹한 조영아의 [만년필]이다.
많은 작품들이 모두 인상적이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것도 있고, 어떤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가 곱씹게 만드는 것도 있으며, 가슴이 먹먹해져 다시 읽게 되는 작품들도 있었다. 단편에 대한 기대도 없었고,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의 작품이라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그래서인지 더 깊게 다가왔던 것 같다. 역사와 시간을 소재로 한 테마 소설집.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