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잡상인 - 2009 제3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우승미 지음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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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다. 역대 수상작 중에서는 읽어 본 작품이 거의 없고 그나마 '최근'에 읽은 거라고는 『걸프렌즈』 한 권 뿐이라, 내게 익숙한 상은 아니지만 요즘엔 각종 타이틀의 수상작에 끌리는 편이다.

 

제목과 표지 그림에서부터 이 글의 분위기가 조금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나는 '수상작'이라는 단어를 보고(아마도 내가 '수상작'들을 오해하고 있어서) 뭔가 조금은 묵직한 글을 생각하며 책을 펴든 터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문장들의 달음질에 조금 당황하기도. 그래도 이내 표지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요즘 지하철을 타면 잡화점을 떠올릴 정도로 다양한 상품을 파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최근에는 자외선 차단 팔토시와 (사그라들 줄 모르는 열기의) 금나노 칫솔, 모기 퇴치 스티커, 튼튼한 우비 등을 여러 번 본 기억이 있고, 지금까지 내가 구입한 품목만도 일회용 밴드, 옷 먼지 제거 솔, 오이써는 칼(오이 마사지용), 팝송 씨디(이건 좀 고가다), 밤 깎는 칼 등(이 외에도 다수이지만 다 기억은 못 한다)이 있다.

 

언젠가 하루는 수첩을 꺼내서 그날 만나게 되는 물건들의 목록을 적어본 적이 있다. 이런 걸 소설 소재로 써봐도 재밌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물론 내가 되지도 않게 뭘 쓰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소설가 흉내'로 메모만 해 본 거다). 그런데 이 책이 바로 '지하철 잡상인'을 소재로 쓴 글이라는 소개를 보고 두 눈이 번쩍, 당연히 읽고 싶어졌다. 내가 재밌겠다,라고 생각했던 그 이야기가 소설가의 손끝에서 어떤 글로 탄생했을지 무척 궁금했다.

 

얼굴이 너무 잘생겨 멜로 배우에 적합하나 본인은 곧 죽어도 개그맨을 하고 싶어하는 철이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토록 바라던 개그계에서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퇴출 당한 '철이'에게 지하철 내 판매를 가르쳐 주는 스승 미스터 리, 말도 못 하고 귀도 들리지 않는 몸으로 지하철에서 구걸을 하는 수지, 들리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는 (수지의 남동생)효철과 그의 신체 건강한 약혼녀 지효, 철이의 할머니이자 한 외모 하시는 왕년의 배우 조지아 킴 여사. 저마다 톡톡 튀는 '이력'들을 가지고 있는 이 등장인물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는 잠시 쉬어가거나 지루해 할 틈 없이 술술 흘러간다. 각 인물들의 속사정을 캐는(?) 이야기도 재미있긴 했지만, 뭐니뭐니해도 내가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지하철 잡상인들의 일과랄까 시스템이랄까 뭐 그런 거였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조직'이 있으며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등, 지하철 판매의 뒷이야기에 귀가 솔깃. 그러나 조금 아쉽게도 이야기 중반부터는 예상치 못한 러브 라인이 형성되면서 '신종 날잡 바이러스' 이야기는 주춤한다.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것처럼 조금 더 다양하고 조금 더 많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그 욕구는 충족되지 않았다.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고 언뜻 가벼워보이지만, 슬쩍 읽고 그냥 덮어버리기에는 자꾸만 가슴 한 구석에 매달리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기에는 자꾸만 수지와 효철 남매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빛을 파는 '미스터 리'의 모습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효철을 사랑하는 지효의 모습이, 그리고 지하철에서 물건을 파는 현실 속의 수많은 '철이'의 모습이 자꾸자꾸 내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들이 자꾸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알랑햔 위선을 들추어내는 것 같아서, 반성하는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함께 일었다. 비뚤어진 마음은 버리고, 그들이 팔고자 하는 '빛'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마음부터 키워야겠다.

 

지하철 안에 얼마나 많은 '철이'가 있으며, 얼마나 많은 종류의 물건이 팔리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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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문학동네 시집 43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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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웃긴 꽃』의 윤희상 시인의 첫 시집이다.

『소를 웃긴 꽃』은 연초에, 기축년 소띠의 해에 무척 잘 어울리는 시집이라고 여기저기에 추천을 했을 만큼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집 중 한 권이 되었는데, 시인의 다른 시들은 어떨까 궁금해져서, 거의 10년 전에 나온 이 시집을 만나보게 되었다.

 

시인의 외가가 밀양인가? 무척 반가운 시를 만났다.

 

아빠가 나주 사람이라서 / 너는 좋겠구나 / 엄마가 밀양 사람이라서 / 너는 좋겠구나 //

나주 배와 밀양 감을 함께 먹을 수 있으니 / 너는 좋겠구나 //

나주 할아버지가 / 너를 만나러 오시면서 / 나주 배를 가지고 오셨구나 / 밀양 외할아버지가 / 너를 만나러 오시면서 / 밀양 감을 가지고 오셨구나 //

나주 배와 / 밀양 감을 먹고 / 예쁜 똥을 싸면 / 먼 뒷날 똥 끝에서 자운영 꽃이 핀단다 //

너는 좋겠구나 / 자운영 꽃을 볼 수 있어서 //

온 들판에 / 자운영 꽃이 피면 / 너는 좋겠구나

('너는 좋겠구나')

 

친가가 밀양이고, 청소년기를 밀양에서 보낸지라, 지나가다 '밀양'이란 글자만 봐도 반갑다. 그러니 이 시를 읽다가 급 반색을 하며 얼마나 좋아했던지. 밀양 감, 참 맛있었는데. 얼음골 사과도. 나주 배와 밀양 감을 먹고 '예쁜' 똥을 싸면 자운영 꽃이 핀다니! 올 봄 마당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자운영 꽃이 떠오르며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내년에 그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자운영 꽃을 보면, 나는 이 시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나주 배'와 '밀양 감'이 떠오르면 다행(?)이겠지만, 왠지 '예쁜 똥'이 먼저 떠올라 재밌어 할 것 같다. 그래서 이 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10여 년 전에 읽었던 책을 / 다시 읽다가 그때 내가 / 밑줄을 그어놓은 글을 우연히 본다 / 그런데, 내가 왜 / 그 글 밑에 줄을 그어놓았는지 / 모르겠다 ('세월도, 마음도 흐른다')

 

10년은 커녕 지난해, 아니 몇 달 전에 읽은 책만 뒤적여봐도 세월이, 내 마음이 흐른 게 느껴지는 문장들이 많다. 한 자 한 자 공책에 정성스레 옮겨 적었던 글을 보면서, 그땐 무슨 마음으로 이 글을 이리 정성스럽게 적어 놨던가 의아하기도 하고, 반대로 아무 흔적도 남겨져 있지 않은, 하지만 지금 내 마음에 파바박 와 닿는 글귀를 보며 그때는 어찌 이런 글을 그냥 지나쳤을까, 놓칠새라 얼른 밑줄을 그어놓기도 하고. 이 시집을 나중에 다시 들춰보면 또 세월의 흐름을, 마음의 흐름을 느끼게 되겠지? 하지만 10년 뒤에 봐도 이 시에는 여전히 밑줄을 그을 것 같다.

 

처음도 끝도 / 길 위에 있으니, / 처음도 끝도 길이다 //

길 위의 코스모스 / 길 위의 사루비아 / 길 위의 맨드라미 //

그러니, / '길을 놓치지 말 것' ('길에서, 아들에게')

 

길을 놓치려 하고 있는 내 마음에 조용히 던져주는 조언. 어떤 글인가를 만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게,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래서 이 시집도 나의 스승으로, 이 시집과의 만남도 소중한 인연으로 가슴 속에 간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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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스며드는 아침 - 제139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양이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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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학 스타 번역가 김난주 님의 번역, 유서 깊은 아쿠타가와상 139회 수상작. 이 두 가지를 빼고는 이 소설은 '중국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 양이는 중국 하얼빈 출신으로, 아버지가 문화 대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된 아픈 과거가 있으며, 후에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 중국인이다. 일본어로 소설을 써서 일본 문학 작가로 데뷔했지만, 그가 쓴 이 소설은 다만 일본어로 씌여졌다 뿐, 중국인이 중국의 아픈 과거를 떠올리며 쓴 중국 소설인 것이다.

 

올해는 '톈안먼 사건(천안문 사건)'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끌렸다.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바로 천안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서평을 통해 민주화 운동에 대해 논할 깜냥이 내게는 없다. 그러므로 민주화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얼마 전 공선옥 작가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었을 때의 슬픔이 떠올랐고,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비슷한 사건을 소설로 어떻게 풀어내었는지 궁금했다.

 

한 마을의 절친한 친구 씨에 즈챵과 량 하오위엔은 나란히 친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고, 꿈으로 가득 찬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생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민주화가 뭔데?" 또는 "난 자본주의가 뭔지, 민주주의와 제국주의는 또 뭔지 전혀 모르겠는데." 모든 게 희미하기만 하던 그들의 가슴에도 민주화를 향한 불길이 일어나게 된다. "반부패, 반부정!"을 부르짖으며 언젠가 역사 교과서에 실릴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한다는 것에 가슴 깊이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인 5월 말 이들은 천안문 광장에서 전국 각지의 학생들과 모여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여기까지 읽고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5월 말이다. 곧 6월이 올 것이고, 곧 그 현장이 재현될 것이다. 책장을 계속 넘기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의외였다. 한껏 긴장감을 고조시킨 뒤, 소설은 예기치 못하게 그 '역사적인 현장'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들은 베이징을 떠나 자신들의 학교로 돌아갔고, 한창 잠에 취해있던 새벽녘에 그들을 흔들어 깨우는 교수에게서 이 한 마디를 들을 뿐이다. "장갑 부대가 천안문 광장을 장악했다."

 

그날 천안문 광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 소설은 더 이상 들려주지 않는다. 혹시나 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책을 끝까지 읽어나갔지만 역시 거기까지였다. 처음에는 황당했다. 왜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고 갑자기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말을 하는 건지 당황스러우면서 그만 김이 새버렸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멍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며칠 후(며칠 씩이나 걸려서야!)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그만 가슴이 서늘해졌다. 천안문 광장,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고 해서 누가 감히 그들을 방관자 혹은 제3자 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들 모두 어떤 입장에서건 모두 그 역사를 함께 겪은 '주인공'이고 모두가 '피해자'일 것을.

 

학교로 돌아온 그들은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한다. 하지만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마시러 갔다가, 그들과 합석한 어른들이 학생 운동 때문에 생업에 지장이 많았다며 푸념하는 소리를 듣고는 그만 울분이 치밀어 올라 싸움판을 벌이고 만다. 그 일로 둘은 퇴학 처분을 받고, 량 하오위엔은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고, 씨에 즈챵은 공방을 차린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는 씨에 즈챵과 달리 량 하오위엔은 일본에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 조국을 위한 '운동'을 하지만, 그의 '동지'들 마음속에는 '조국'이 아니라 다른 '속셈'이 있음을 알고 크게 실망한다. 누구는 비자를 얻기 위해, 누구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그들은 애국심을 이용할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바친 일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이후 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릴 큰 일이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먹고 사는 데 방해가 되는 일, 또는 훗날 개인의 영리를 위해 이용되는 일 정도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 책을 보며 절실히 깨달았다. 그들에게 왜 조국의 민주화 앞에서 사사로이 생업 따위나 운운하느냐고, 어째서 조국을 위한 일에 자신의 사업 따위나 끌어들이느냐고 뭐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역사 교과서에 실릴 역사적인 장면'이었을 뿐임을 부정할 수없는 것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1989년 6월 4일, 뜨거웠던 그날의 천안문 광장이 아니라, 그 역사가 지난간 후의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볼 따름이다. 가슴 깊이 조국을 향한 짝사랑을, 아픈 상처를 입고 사는 사람들. 반면에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사람들도. 그 뜨거웠던 순간이 역사가 되어버린 뒤,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 책 내용과 상관없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책값이 영 비싼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하겠다. 쪽수에 비례해서 가격을 매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170쪽의 얇은 책에 12,000원은 어쩐지 좀 비싼 느낌이다. (몸값 높은)스타 번역가의 번역이어서 그런가? 그렇다면 옮긴이의 말이 없는 게 더더욱 아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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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밍쯔 - 산양은 천당풀을 먹지 않는다
차오원쉬엔 지음, 김지연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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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국을 대표하는 아동문학작가 차오원쉬엔의 작품이다. 이 책은 나와 차오원쉬엔 작가와의 세 번째(네 번째?) 만남이다. 늘 가슴 따뜻하게 다가오는 그의 소설들이 참 좋다.

 

이 책의 주인공은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로 와 스승에게 목공일을 배우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열일곱 살 소년 밍쯔이다.

 

열일곱은 나도 지나온 나이이지만, 밍쯔의 열일곱과 나의 열일곱은 전혀 다르다. '17세 원주'는 산중턱에 자리잡은 학교에서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게 가장 재미있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같은 책 제목에 공감하며 '시험 없는 세상'을 유토피아로 꿈꾸던 철부지 소녀였다. 그때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라면 요즘의 주가 하락 비슷하게 떨어지던 성적과 어떻게 하면 H.O.T.의 공연을 한번 볼 수 있을까 정도였을 것이다.

 

'17세 밍쯔'의 삶에는 시험이나 연예인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밍쯔의 하루 일과는 길거리에 나가 일감을 잡아오거나 스승과 사형과 함께 목공 일을 하는 것이다. 밍쯔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돈'이다. 산양 키우기에 실패해서 큰 빚을 진 부모님은 이 어리디어린 열일곱 소년 밍쯔에게 집안의 경제를 부탁한다. 집안 경제에 대한 부담감에다 악랄한 스승과의 신경전으로 밍쯔의 도시 생활은 너무나 힘겹기만 하다.

 

그런 그에게 그나마 힘이 되어 주는 건, 이 도시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다. 도시로 나와 고아가 된 야쯔와 휠체어를 탄 아름다운 소녀 쯔웨이가 그 주인공. 야쯔와 친형제 같은 정을 나누며, 쯔웨이에게 풋풋하고 상큼한 첫사랑의 감정이 싹트며, 밍쯔는 힘든 도시 생활을 이겨나간다.

 

밍쯔처럼 궁벽한 시골에서 올라온 이들을 '바퀴벌레'같이 여기는 도시에서, 돈 때문에 고민하고 돈 때문에 악의 구렁텅이에 빠질 뻔한 위기에 처할 뻔도 하면서 밍쯔의 자의식은 조금씩 성장한다. 그 나이의 나와 달리 밍쯔는 이미 '홀로서기'를 할 줄 알게 되고, 세상을 대하는 자기만의 태도를 지닌다. 안타까운 점은 '결국은 돈이 최고'라는 생각이 이 소년의 머릿속에 수시로 들어온다는 것인데, 물질 만능주의의 한 단면을 이 소설을 통해 가슴 아프게 느낄 수 있었다. 밍쯔가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삶 속에서 돈보다 더 귀중한 것들을 찾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본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뭉치 앞에서 결국은 유혹을 물리치고 양심을 지켰던 그 밍쯔의 모습을 간직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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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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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는 조금 낯설었다.

박범신 작가도, 고산자 김정호도, 오랜만에 읽는 '역사 소설'도.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그 모두가 내 가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두 번의 만남을 가졌던 박범신 작가도, 소설로 되살아나 여러날 내 곁에 함께했던 고산자 김정호도, 그가 전 생애를 바쳐 그린 지도도.

 

 

_ 문장이야 이미 준비되어 있다. 반백 년을 흐르면서 한 땀 한 땀 꿰매어온 문장이다. 들숨과 날숨이 가지런하게 저울추를 맞추자 이윽고 무명지 손톱 끝이 떨림 없이 올곧게 붓대에 닿는다. 손바닥 안에 허공이 고요히 들어차는 느낌도 좋다. 그는 마침내 번쩍 눈을 뜬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붓 끝이 곧 활공으로 한지 한가운데를 향해 곧바로 나아간다.(13)

 

초반부터 이런 문장들에 매료되어 이 책을 대하는 마음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찼다. 대동지지를 편찬하는 김정호의 이런 모습은, 고산자를 집필하는 박범신 작가 그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그 웅숭깊은 문장과 문장의 골짜기로 한없이 빠져들었다.

 

제대로 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역사 속의 한 인물을 소설을 통해 만난다는 건, 어느 만남보다 더 독자의 상상력을 맘껏 발휘하도록 해주는 것 같다. 고산자가 첩자로 몰려 옥사했을지, 그 당시로는 최장수 기록을 세우며 100세가 넘도록 천수를 누렸을지, 어떻게 그처럼 위대한 지도를 그려낼 수 있었는지,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는지, 우리는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소설 속에 그려 낸 고산자의 이야기를 밑그림으로, 나도 나만의 고산자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 세상 누군가는 그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듯한, 마치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의 이야기에 마음이 애잔해지기도.

 

고산자 김정호의 삶과 사랑과 애환이 담긴 이 책을 만나면서 참 행복했고, 때로는 경건해졌으며, 혹은 아픔에 혹은 기쁨에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기왕이면 기쁨으로 흘렀던 잔잔한 눈물을 하나 남기고 싶다. 작가님이 가장 행복한 마음으로 쓴 장면이라고 낭독해 주셨던 부분을,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만났다. 고산자의 아픔과 힘듦을 저 뒤로 밀어내고 투명하고 희디흰 햇빛 아래 눈부셨던 장면.

 

_ 마포나루의 새벽은 부산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바우의 말에 어물쩍, 고개를 끄덕거려주고 나루터의 사람들을 본다. 어부들은 그물을 올리고, 지게꾼들은 뱌비쳐 고샅을 오고가고, 어물전 호객꾼은 박수를 치며 손님을 부른다. 새벽부터 어디론가 뛰어가는 포졸 놈도 있고, 사람 사이로 우차를 모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마부도 있고, 물 좋은 생선을 잔뜩 짊어진 행상들도 있다. 사람과 지게와 우차와 가마와 기마꾼이 뒤섞인 부둣가는 이제 막 해가 떴는데도 뒤죽박죽, 하나같이 모두 활달하고 생생하다. 물이 좋은 것은 생선만이 아니라 마포나루의 사람들이다.(346~347)

 

물이 좋은 것은 생선만이 아니라 마포나루의 사람들이다. 물이 좋은 것은 마포나루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렇게 힘차게 하루를 열고 있는 이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다, 라고 집에 오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했다. 아침부터 '지옥철'에 몸을 싣고 하루를 시작하는 그들에게 나는 마음속으로 힘차게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왠지 이 글 뒤에 이렇게 한 마디 덧붙여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힘차게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햇빛이 투명하고 한없이 희'니까.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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