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스며드는 아침 - 제139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양이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문학 스타 번역가 김난주 님의 번역, 유서 깊은 아쿠타가와상 139회 수상작. 이 두 가지를 빼고는 이 소설은 '중국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 양이는 중국 하얼빈 출신으로, 아버지가 문화 대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된 아픈 과거가 있으며, 후에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 중국인이다. 일본어로 소설을 써서 일본 문학 작가로 데뷔했지만, 그가 쓴 이 소설은 다만 일본어로 씌여졌다 뿐, 중국인이 중국의 아픈 과거를 떠올리며 쓴 중국 소설인 것이다.

 

올해는 '톈안먼 사건(천안문 사건)'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끌렸다.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바로 천안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서평을 통해 민주화 운동에 대해 논할 깜냥이 내게는 없다. 그러므로 민주화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얼마 전 공선옥 작가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었을 때의 슬픔이 떠올랐고,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비슷한 사건을 소설로 어떻게 풀어내었는지 궁금했다.

 

한 마을의 절친한 친구 씨에 즈챵과 량 하오위엔은 나란히 친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고, 꿈으로 가득 찬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생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민주화가 뭔데?" 또는 "난 자본주의가 뭔지, 민주주의와 제국주의는 또 뭔지 전혀 모르겠는데." 모든 게 희미하기만 하던 그들의 가슴에도 민주화를 향한 불길이 일어나게 된다. "반부패, 반부정!"을 부르짖으며 언젠가 역사 교과서에 실릴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한다는 것에 가슴 깊이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인 5월 말 이들은 천안문 광장에서 전국 각지의 학생들과 모여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여기까지 읽고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5월 말이다. 곧 6월이 올 것이고, 곧 그 현장이 재현될 것이다. 책장을 계속 넘기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의외였다. 한껏 긴장감을 고조시킨 뒤, 소설은 예기치 못하게 그 '역사적인 현장'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들은 베이징을 떠나 자신들의 학교로 돌아갔고, 한창 잠에 취해있던 새벽녘에 그들을 흔들어 깨우는 교수에게서 이 한 마디를 들을 뿐이다. "장갑 부대가 천안문 광장을 장악했다."

 

그날 천안문 광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 소설은 더 이상 들려주지 않는다. 혹시나 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책을 끝까지 읽어나갔지만 역시 거기까지였다. 처음에는 황당했다. 왜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고 갑자기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말을 하는 건지 당황스러우면서 그만 김이 새버렸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멍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며칠 후(며칠 씩이나 걸려서야!)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그만 가슴이 서늘해졌다. 천안문 광장,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고 해서 누가 감히 그들을 방관자 혹은 제3자 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들 모두 어떤 입장에서건 모두 그 역사를 함께 겪은 '주인공'이고 모두가 '피해자'일 것을.

 

학교로 돌아온 그들은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한다. 하지만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마시러 갔다가, 그들과 합석한 어른들이 학생 운동 때문에 생업에 지장이 많았다며 푸념하는 소리를 듣고는 그만 울분이 치밀어 올라 싸움판을 벌이고 만다. 그 일로 둘은 퇴학 처분을 받고, 량 하오위엔은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고, 씨에 즈챵은 공방을 차린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는 씨에 즈챵과 달리 량 하오위엔은 일본에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 조국을 위한 '운동'을 하지만, 그의 '동지'들 마음속에는 '조국'이 아니라 다른 '속셈'이 있음을 알고 크게 실망한다. 누구는 비자를 얻기 위해, 누구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그들은 애국심을 이용할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바친 일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이후 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릴 큰 일이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먹고 사는 데 방해가 되는 일, 또는 훗날 개인의 영리를 위해 이용되는 일 정도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 책을 보며 절실히 깨달았다. 그들에게 왜 조국의 민주화 앞에서 사사로이 생업 따위나 운운하느냐고, 어째서 조국을 위한 일에 자신의 사업 따위나 끌어들이느냐고 뭐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역사 교과서에 실릴 역사적인 장면'이었을 뿐임을 부정할 수없는 것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1989년 6월 4일, 뜨거웠던 그날의 천안문 광장이 아니라, 그 역사가 지난간 후의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볼 따름이다. 가슴 깊이 조국을 향한 짝사랑을, 아픈 상처를 입고 사는 사람들. 반면에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사람들도. 그 뜨거웠던 순간이 역사가 되어버린 뒤,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 책 내용과 상관없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책값이 영 비싼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하겠다. 쪽수에 비례해서 가격을 매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170쪽의 얇은 책에 12,000원은 어쩐지 좀 비싼 느낌이다. (몸값 높은)스타 번역가의 번역이어서 그런가? 그렇다면 옮긴이의 말이 없는 게 더더욱 아쉬워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