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는 조금 낯설었다.

박범신 작가도, 고산자 김정호도, 오랜만에 읽는 '역사 소설'도.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그 모두가 내 가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두 번의 만남을 가졌던 박범신 작가도, 소설로 되살아나 여러날 내 곁에 함께했던 고산자 김정호도, 그가 전 생애를 바쳐 그린 지도도.

 

 

_ 문장이야 이미 준비되어 있다. 반백 년을 흐르면서 한 땀 한 땀 꿰매어온 문장이다. 들숨과 날숨이 가지런하게 저울추를 맞추자 이윽고 무명지 손톱 끝이 떨림 없이 올곧게 붓대에 닿는다. 손바닥 안에 허공이 고요히 들어차는 느낌도 좋다. 그는 마침내 번쩍 눈을 뜬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붓 끝이 곧 활공으로 한지 한가운데를 향해 곧바로 나아간다.(13)

 

초반부터 이런 문장들에 매료되어 이 책을 대하는 마음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찼다. 대동지지를 편찬하는 김정호의 이런 모습은, 고산자를 집필하는 박범신 작가 그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그 웅숭깊은 문장과 문장의 골짜기로 한없이 빠져들었다.

 

제대로 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역사 속의 한 인물을 소설을 통해 만난다는 건, 어느 만남보다 더 독자의 상상력을 맘껏 발휘하도록 해주는 것 같다. 고산자가 첩자로 몰려 옥사했을지, 그 당시로는 최장수 기록을 세우며 100세가 넘도록 천수를 누렸을지, 어떻게 그처럼 위대한 지도를 그려낼 수 있었는지,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는지, 우리는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소설 속에 그려 낸 고산자의 이야기를 밑그림으로, 나도 나만의 고산자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 세상 누군가는 그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듯한, 마치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의 이야기에 마음이 애잔해지기도.

 

고산자 김정호의 삶과 사랑과 애환이 담긴 이 책을 만나면서 참 행복했고, 때로는 경건해졌으며, 혹은 아픔에 혹은 기쁨에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기왕이면 기쁨으로 흘렀던 잔잔한 눈물을 하나 남기고 싶다. 작가님이 가장 행복한 마음으로 쓴 장면이라고 낭독해 주셨던 부분을,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만났다. 고산자의 아픔과 힘듦을 저 뒤로 밀어내고 투명하고 희디흰 햇빛 아래 눈부셨던 장면.

 

_ 마포나루의 새벽은 부산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바우의 말에 어물쩍, 고개를 끄덕거려주고 나루터의 사람들을 본다. 어부들은 그물을 올리고, 지게꾼들은 뱌비쳐 고샅을 오고가고, 어물전 호객꾼은 박수를 치며 손님을 부른다. 새벽부터 어디론가 뛰어가는 포졸 놈도 있고, 사람 사이로 우차를 모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마부도 있고, 물 좋은 생선을 잔뜩 짊어진 행상들도 있다. 사람과 지게와 우차와 가마와 기마꾼이 뒤섞인 부둣가는 이제 막 해가 떴는데도 뒤죽박죽, 하나같이 모두 활달하고 생생하다. 물이 좋은 것은 생선만이 아니라 마포나루의 사람들이다.(346~347)

 

물이 좋은 것은 생선만이 아니라 마포나루의 사람들이다. 물이 좋은 것은 마포나루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렇게 힘차게 하루를 열고 있는 이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다, 라고 집에 오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했다. 아침부터 '지옥철'에 몸을 싣고 하루를 시작하는 그들에게 나는 마음속으로 힘차게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왠지 이 글 뒤에 이렇게 한 마디 덧붙여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힘차게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햇빛이 투명하고 한없이 희'니까. 그러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