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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ㅣ 문학동네 시집 43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소를 웃긴 꽃』의 윤희상 시인의 첫 시집이다.
『소를 웃긴 꽃』은 연초에, 기축년 소띠의 해에 무척 잘 어울리는 시집이라고 여기저기에 추천을 했을 만큼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집 중 한 권이 되었는데, 시인의 다른 시들은 어떨까 궁금해져서, 거의 10년 전에 나온 이 시집을 만나보게 되었다.
시인의 외가가 밀양인가? 무척 반가운 시를 만났다.
아빠가 나주 사람이라서 / 너는 좋겠구나 / 엄마가 밀양 사람이라서 / 너는 좋겠구나 //
나주 배와 밀양 감을 함께 먹을 수 있으니 / 너는 좋겠구나 //
나주 할아버지가 / 너를 만나러 오시면서 / 나주 배를 가지고 오셨구나 / 밀양 외할아버지가 / 너를 만나러 오시면서 / 밀양 감을 가지고 오셨구나 //
나주 배와 / 밀양 감을 먹고 / 예쁜 똥을 싸면 / 먼 뒷날 똥 끝에서 자운영 꽃이 핀단다 //
너는 좋겠구나 / 자운영 꽃을 볼 수 있어서 //
온 들판에 / 자운영 꽃이 피면 / 너는 좋겠구나
('너는 좋겠구나')
친가가 밀양이고, 청소년기를 밀양에서 보낸지라, 지나가다 '밀양'이란 글자만 봐도 반갑다. 그러니 이 시를 읽다가 급 반색을 하며 얼마나 좋아했던지. 밀양 감, 참 맛있었는데. 얼음골 사과도. 나주 배와 밀양 감을 먹고 '예쁜' 똥을 싸면 자운영 꽃이 핀다니! 올 봄 마당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자운영 꽃이 떠오르며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내년에 그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자운영 꽃을 보면, 나는 이 시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나주 배'와 '밀양 감'이 떠오르면 다행(?)이겠지만, 왠지 '예쁜 똥'이 먼저 떠올라 재밌어 할 것 같다. 그래서 이 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10여 년 전에 읽었던 책을 / 다시 읽다가 그때 내가 / 밑줄을 그어놓은 글을 우연히 본다 / 그런데, 내가 왜 / 그 글 밑에 줄을 그어놓았는지 / 모르겠다 ('세월도, 마음도 흐른다')
10년은 커녕 지난해, 아니 몇 달 전에 읽은 책만 뒤적여봐도 세월이, 내 마음이 흐른 게 느껴지는 문장들이 많다. 한 자 한 자 공책에 정성스레 옮겨 적었던 글을 보면서, 그땐 무슨 마음으로 이 글을 이리 정성스럽게 적어 놨던가 의아하기도 하고, 반대로 아무 흔적도 남겨져 있지 않은, 하지만 지금 내 마음에 파바박 와 닿는 글귀를 보며 그때는 어찌 이런 글을 그냥 지나쳤을까, 놓칠새라 얼른 밑줄을 그어놓기도 하고. 이 시집을 나중에 다시 들춰보면 또 세월의 흐름을, 마음의 흐름을 느끼게 되겠지? 하지만 10년 뒤에 봐도 이 시에는 여전히 밑줄을 그을 것 같다.
처음도 끝도 / 길 위에 있으니, / 처음도 끝도 길이다 //
길 위의 코스모스 / 길 위의 사루비아 / 길 위의 맨드라미 //
그러니, / '길을 놓치지 말 것' ('길에서, 아들에게')
길을 놓치려 하고 있는 내 마음에 조용히 던져주는 조언. 어떤 글인가를 만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게,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래서 이 시집도 나의 스승으로, 이 시집과의 만남도 소중한 인연으로 가슴 속에 간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