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 기고한 진중권씨의 글이다.

이곳 알라딘에서 바람구두님과도 이 문제에 대해서 댓글로 이야기한 바 있지만( http://blog.aladin.co.kr/windshoes/1786530)개인적으로는 진중권씨나 아니면 홍세화씨(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8447) 혹은 조승수나 이광일씨가 주장하는 보다 적극적인 해법에 동의한다. 최악의 경우 분당하고 당명도 개정하여 신당창당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고 본다. 현재 민노당내의 다수파는 대선의 실패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 같기는 하지만 결코 그들의 핵심인 종북노선의 폐기를 수용할 것 같지는 않다.(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8461) 민노당의 자주파 중앙위원들이 종북주의노선의 폐기를 결국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인데 이에 대해서 평등파 내부에서도 신당창당을 해야되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갈리는 것 같다.

지금까지 민노당 아니 한국진보세력들은 자주파와 어설픈 연합을 해왔다. 그러나 자주파가 계속해서 시대착오적인 종북주의 노선을 폐기하지 않는다면 좌파진영은 더 이상 이들을 진보세력의 동지로 용인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추종하는 친북노선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날 한국자본주의가 차지하는 세계적 위상을 고려했을 때 진보적인 좌파정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런데 민노당은 과거 이들의 입당을 당원늘리기 차원에서 그동안 무분별하게 수용해 왔던 것이다. 

한국에서  좌파가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려면 자주파의 종북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보다 명확히 해야만 한다 .  민노당의 쇄신에서부터 그 잘못된 운동관행과는 이제 그만 결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서 좌파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노당 쇄신, '새 진보정당' 건설이 답이다
[기고] '자주' 앞세운 당내 '종북파'와 결별하라

2007-12-30 오후 1:40:54





4년 전이던가? 언론에 '자주파'로 소개되는 종북주의자가 대거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여 조직의 신경망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이들을 무차별 입당시키는 데에 개인적으로 항의하기 위해 '탈당'을 했었다. 곪은 상처는 결국 골아터질 수밖에 없는 것. 그때 내가 탈당으로 경고, 혹은 경계했던 사태가 이제 현실로 나타난 모양이다.

종북파는 진보정당의 당원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섬기는 당은 북한의 조선노동당이고, 그들에게 민주노동당은 그저 북한 정권을 보위하는 활동의 수단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당직자 명단을 북한의 정보부에 넘겨주었다가 구속된 간첩이 아직도 당에서 생활보조금을 받는다는 얘기도 있다.

김창현 사무총장이 당에 종북파는 없다고 우기는 모양이다. 왜 그는 유권자 앞에서 거짓말을 할까? 유권자들을 향해 내가 명예를 걸고 분명히 말하는데, 민주노동당 안에 종북파는 존재하고, 그것도 상당히 많이 존재하며, 그들의 영향력은 최소한 전직 의원의 입에서 '차라리 분당을 하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는 된다.

민노총 위원장이 당을 찾아와 조승수 전 의원을 징계하라고 요구했단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에 대해 갖는 영향력을 통해 내부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 모양인데, 입은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종북은 종북이라 불러야지, 왜 호부호형조차 못하게 막으려는 걸까? 위원장님, 민주노동당 상황 전혀 모르세요? 민주노동당에 종북파 아주 많습니다.

아직도 저런 식의 거짓말이 통할 거라 믿는 모양이다. 여기서 이들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드러난다. 진보는 대중 앞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에 분명히 종북파들이 있는데, 어떻게 대중 앞에 나가서 없다고 거짓말을 하란 말인가. 그런 것은 진보가 아니라 정치적 사기일 뿐이다.

국가보안법 핑계 대지 말라. 과거에 사회주의자들은 법정에서 떳떳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당당히 구속됐었다. 자신이 가진 이념이 그렇게 밖으로 드러내기에 부끄러운가?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부끄러운 짓을 도대체 왜 하는가?

당에 종북파를 받아들인 것은 아마 그들과 '공생'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 판단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내가 읽고 보고 들어서 아는 한, 종북파는 진보가 아니라 수구 중에서도 가장 반동적인 세력이어서, 늘 그래왔듯이 민주주의의 형식에 '기생'하여 종파적, 패권적 행태를 계속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생의 꿈은 결국 기생의 현실로 나타났다. 원래 기생충은 독자적으로는 생존하지 못하는 법. 21세기 디지털시대에 어디 봉건 사회주의 따위가 정치이념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종북파들은 기생할 숙주로서 민주노동당을 선택했던 것이다. 선거 때마다 '비판적 지지' 떠들던 이들이 왜 갑자기 진보정당으로 몰려왔겠는가?

선거에 대패하고도 벌써 비례대표에 눈독 들였던 것을 생각해 보라. 국회에서 남한의 유권자를 위한 활동이 아니라, 북한의 정권을 옹호하는 활동을 하는 것. 그리고 후자가 곧 전자라고 우기는 것이 그들이다. 북한 정보부에 당직자 명단도 넘겨주는 판에, 그들이 아예 국회의원이 되어 봐라.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안 봐도 비디오다.

심상정 의원 내세워 대충 봉합하고 넘어가려는 모양이다. 위를 가득 채운 기생충들에게 잠시 대장 쪽으로 내려가 있으라 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문제는 기생충의 수가 너무 많아 숙주의 생명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다시 신뢰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당 내부에 종북파가 많다는 사실을 유권자들 앞에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유권자들을 속일 작정인가? 둘째, 그 동안 종북파들이 했던 온갖 해당행위에 대해 출당을 비롯한 엄중한 처벌조치가 있어야 한다. 셋째, 앞으로 당이 그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제도적 보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불행히도 그런 '혁신'은 불가능해 보인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그들이 과연 이깟 일로 자신들의 목표를 포기하겠는가?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은 이제 진지하게 분당의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라 부르든, '민주사회주의'라 부르든, '사회국가'의 실현을 이념으로 하는 현대적 좌파정당을 건설해야 한다.

종북파와는 애초에 만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민족자주당 만들어서 열심히 '조국통일사업'에 매진하게 내버려 두라. 이들과 정치적 목표가 다른 이들은 현대성에 부합하는 새로운 좌파정당을 건설하여, 그 길로 나아가면 된다. 뭐 하러 전혀 다른 정치적 목표를 가진 두 세력이 하나의 당에서 계파싸움이나 하면서 정력을 낭비해야 하는가?

마르크스의 말대로 "래디컬하다는 것은 사물의 뿌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태의 급진적 해결이 필요하다. 신뢰의 추락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앞길이 아득하기도 하다. 하지만 더뎌 보여도 그게 가장 빠른 길이다. 혁신적 좌파정당을 원하는 대중의 욕망은 아직도 이 사회에 충분히 뜨겁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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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문학은 글쓰는 사람이 자신이 무슨 글을 쓰는지 50%정도만 알고 쓴 행위의 결과물이다. 글쓴이도 모르는 절반에 대해서는 제3자가 아는 척 할 수 있다. 하지만 글쓴이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철학: 철학은 글쓰는 사람이 자신이 무슨 글을 쓰는지 70%정도만 알고 쓴 행위의 결과물이다. 글쓴이도 모르는 30%는 제3자가 아는 척 할 수 있다. 하지만 글쓴이가 틀렸다고 말 할 수 있다.

 

 

 

 

 

p.s. 나도  이 글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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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2-10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렵군요. -_-a

yoonta 2007-12-11 01:48   좋아요 0 | URL
제가 써놓고도 맞는 말인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람혼 2007-12-11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이 글은 문학일까요 철학일까요? ^^ 어쨌든 삼자인 저로서는 아는 척은 할 수 있겠군요!ㅎㅎ^^;;

yoonta 2007-12-11 01:52   좋아요 0 | URL
(50+70)/2, 즉 60%만 맞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이야 2007-12-20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쓴 어느 글(대부분이었지만)이 철학적이라는 말로 비평을 한 사람이 있어요.
그분이 뭘 알고 그런 말을 한 건지, 그땐 속으로 발끈했지요.
문학과 철학, 철학적인 글, 문학적인 철학?, 어느 쪽이든
글에는, 그것이 문학이든, 자신만의 철학이 담겨야한다는 생각을 하는 저로선
'철학적'이라는 말로 까려는 그분의 의도가 나쁘지 않았지요. 저만의 철학이 읽혔다는
증거니까요. 나쁘지 않아요. 문학이든 철학이든 그 '과정'에 의미가 있으니 당연히
100%도 아닐테고 100%일 수도 없겠지요. 공감하거나 안 하거나 그것으로 소통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어야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100%이어서도 안 된다는
는 말이 되나요.^^ 횡설수설 말이 길어졌네요.
윤타님이 쓰신 글에 98% 공감합니다. 나머지 2%는 그냥 남겨두기로 해요^^
남은 12월 차분히 보내시기 바랍니다.

yoonta 2007-12-21 01:05   좋아요 0 | URL
98%나 공감해주신다니..^^ 철학이라는게 원래 하나의 체계적 논리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개인의 판단일 가능성이 높죠. 때문에 서로가 그 개인적 판단의 가능성을 인정할 필요가 요청되고 그래서 칸트가 철학에 윤리를 도입하기도 했던 것이죠..그런데 그 윤리를 종종 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쓰잘데기없이 말이 또 길어지려고 하네요. 저도 이만 줄이겠습니다. 새해에도 항상 좋은 일만 생기시길 바랍니다.^^
 

요즘 박홍규전집을 읽고 있는 중이다..

박홍규전집 중 『형이상학강의1』을 읽고있는데  그 중 맨 앞부분에 나오는 글인 "고별강연'장에서 흥미로운 구절이 있었다. 인용해 보자.



 

 

 

 

 

 

 

 

 

   
  " 기하학을 가지고 얘기를 해봅시다. 예를 들어 각 변이 두 자인 이런 정사각형의 면적을 구하라는 문제가 있다고 합시다. 물론 우리는 쉽게 4평방자라고 답하겠죠. 그런데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 다시 말하면 실제 우리에게 데이터로 주어진 것은 연장성 속에 들어 있고, 물리적 세계physical world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정사각형은 흑판 위에 하얀 색깔로 그려진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실지로 잽니다. 재어서 이것의 면적은, 이 단위 면적이 네 개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겨요. 왜 정사각형의 면적을 내는 데 변을 곱한다는 법칙이 성립하느냐 하는 문제에요. 직각 사각형의 변을 곱하면 그 면적이 나온다는 것은 언제든지 되풀이 되니까 하나의 법칙으로 성립하는데. 그 근거가 어디에 있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것이 직각 사각형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물론 플라톤은 이런 말을 하지 않지만, 만약 플라톤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설명하자면 수직이라는 데에 그 요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직이란 공간에 있어서 반대되는opposite 것을 찾았을 때, 공간으 반대되는 부분으로 나누었을 때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수직하는 두 직선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그것을 곱하면은 그들이 둘러싸고 cover있는 면적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는 이론입니다.(...)요컨대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변을 곱하면 면적이 나올 수 있다는 법칙은 수직각이라는 그 도형의 형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도형의 형태가 그것을 요구한다는 겁니다. 그 도형의 형태를 우리는 형상(eidos)이라 합니다. "
 
   

(박홍규, 박홍규전집2. 형이상학강의1, 민음사, 18-19 쪽. 강조는 인용자)

이 구절에서 박홍규씨가 강조하는 것은 수직, perpendicularity이다. 가로선과 세로선이 만나서 각도가 수직이 되었을 때 "반대opposite"라는 질質적 차이를 가지게 되는데 이처럼 반대되는 특성이 만나서 하나의 새로운 형태 혹은 "형상"(eidos)를 이루게 된다는 요지의 설명이다. 그는 특히 플라톤에게서의 형상은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각각의 형상은 서로 다른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 맥락안에서 각각의 형상이 어떠한 모습을 가지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기하학에서의 수직 혹은 직각은 플라톤의 이와 같은 형상eidos 개념에서 중요한 설명도구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직각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직각과 관련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먼저 기하학에서의 원주각에 대해서 살펴보자. 원주각에 대한 설명을 인용해 보면,

" 원둘레각이라고도 한다. 원주 위의 한 점 P에서 그은 두 개의 현 PA, PB가 이루는 각 ∠APB를 P가 속하지 않는 호 AB에 대한 원주각이라고 한다. 또, 원주 위에 호 AB가 있을 때 그 호와 원의 중심 O가 만드는 각 ∠AOB를 그 호 AB 또는 현 AB에 대한 중심각이라고 한다([그림 1]).

하나의 호에 대한 원주각의 크기는 그 호에 대한 중심각의 크기의 1/2과 같다. ([그림 1])에서 ∠APB=1/2 ·∠AOB이다. 그러므로 호 AB에 대한 원주각 ∠APB는 원주 위의 점 P의 위치에 관계없이 항상 일정하다([그림 2]). 또, 켤레호에 대한 원주각은 보각()을 이룬다. ([그림 3])에서 ∠APB+∠AEB=180°이다. 지름 AB의 원주각은 직각을 이루며([그림 4]), 이것은 그리스의 수학자 탈레스(BC 640년?∼BC 546년?)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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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중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한 호에 대한 원주각의 길이는 [그림 2]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항상 일정하다. 이 말은 어떤 원에서 호의 길이가 한번 주어지면 그것의 원주각은 호가 원의 어디에 위치하던지, 원주각이 어느 곳에 위치하던지 항상 일정하다는 이야기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원주각은 [그림 4]다. [그림 4]에서는 바로 앞에서 박홍규씨가 언급한 "직각"이 등장한다. 이 때 재미있는 사실은 원주각이 직각일 때 이에 대응하는 호의 길이는 반원이 되며 현은 원의 반지름이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직각이라는 원주각은 원전체의 둘레 길이의 반에 해당하는 호의 길이와 원 전체를 가로지르는 지름의 길이를 나타내는 요소로 동시에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런데 앞에서 박홍규씨는 "직각"은 두 개의 성질이 서로 반대opposite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며 직사각형의 면적을 구하는 경우를 예를 들면서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원주각에서는 어떤 두 개의 반대되는(opposite) 성질들이 서로 결합하고 있을까?

바로 직선과 원이다. 직각인 원주각은 [그림 4]에서 보는 것처럼 원과 직선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기하학적 성질을 서로 결합하고 있다. 직각은 직선인 지름과 반원과 같은 서로 반대되는 기하학적 질들을 원주각이라는 형태로 서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직각이 가지는 특징은 사실 이것만이 아니다. 박홍규/플라톤도 언급하고 있지만 직각은 "공간의 반대되는 부분"을 서로 결합함으로써 1차원인 두 직선을 2차원의 평면으로 변화시킨다. 이런 특징때문에 직사각형의 넓이는 가로 곱하기 세로를 하면 유도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직각은 가로와 세로의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2차원 공간 뿐만 아니라 3차원 공간에서도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다음 좌표를 살펴 보자.

 Three dimensional Cartesian coordinate system with the x-axis pointing towards the observer.

위 좌표계는 x, y, z 라는 세 좌표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x, y, z 세 좌표로 표시되는 공간을 우리는 3차원 공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세 좌표들 각각이 바로 직각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2차원인 평면이 x와 y 두 좌표가 수직일 때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3차원 공간은 x, y, z라는 세 좌표가 직각을 이루자 탄생하는 공간인 것이다. 

직각은 이처럼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요소를 결합하는 측면이 있다. 그럼으로써 탄생하는 것은 새로운 질이요 새로운 차원의 공간인 것이다. 직각의 이러한 수학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또 있는데 바로 삼각함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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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삼각함수는 위 그림과 같은 원 내부에 θ  가 주어지면 그 각과 원 위의 한 점 P좌표(x,y)가 이루는 직각삼각형이 만들어 내는 함수이다. 이 삼각함수를 이용해 우리는 sin 곡선과  cos 곡선 그리고 tan 곡선을 그릴 수 있다. 이 때에도 직각은 중요하게 작용한다. 다음 그림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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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처럼 sin곡선은 일정한 주기를 가지는 주기함수이다. 그것의 주기는 라디안으로 표시하면 2π 즉 360°이다. 그런데 π 는 알다시피 60분법으로 180°이고 그것은 직각 즉 π/2 (90°)의 정수배로 표현될 수 있다. 삼각함수의 각변환도 결국 직각(π/2)의 정수배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주어진 각이 nπ/2 + θ  이면, 다시말해 90° × n ± θ  (단 n은 정수)이면 sin곡선은 cos곡선과 tan곡선으로 변환될 수 있다. cos 곡선자체가 sin곡선을 x축 위에서 음의 방향으로 π/2 만큼 움직여서 생기는 곡선인 것도 위의 [그림 2]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때문에 cos(x)을 다음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cos(x) = \sin\left(x +\frac{\pi}{2}\right)

 이처럼 sin곡선과 cos곡선 tan 곡선이 서로 변환하는데 직각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데 삼각함수는 비단 기하학과 같은 수학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계에서도 이러한 삼각함수에 의해서 나타나는 곡선과 형태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빛의 움직임을 연구할 때에도 소리의 움직임을 연구할 때도 sin곡선이나 cos곡선과 같은 삼각함수를 이용해야 한다. 그것들은 파동이라는 형태로 시공간상에서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수학에서의 특정한 형태가 자연계 내부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수학을 자연과학의 도구로 중요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직각은 수학에서 그리고 물리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 이와같은 "직각"을 박홍규/플라톤은  "공간에 있어서 반대되는opposite 것"이 만났을 때 성립하는 것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서로 반대되는 질質이 만나서 하나의 형상(eidos)를 만들게 되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의 질을 가진 유일하며 고유한 형상이라는 것이다. (박홍규, 형이상학강의1, 21-22쪽) 이와 관련해서 박홍규씨는 소위 "데이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데이터라는 것은 사물을 "재는" 행위에서 획득 할 수 있는데 직각도 결국 이러한 재는 행위에 의해서 나온 결과물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박홍규씨의 책 『형이상학강의 1』에서는 이러한 "데이터" 그리고 형상과 관련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한 논의가 언급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른 기회에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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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그들은 늘 3불정책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학생들의 선발권을 좀더 보장해줄 것을 요구해왔던 터다. 그런데 이번 김포외고 시험문제 유출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지는 모습..그리고 연세대 총장부인의 편입학 비리사건등등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만약 지금처럼 각종 비리와 뒷돈이 오가는 사학들의 행태를 묵인한채로 3불정책이 폐지되고 이명박씨의 공약처럼 외고가 수백개로 늘고한다면 그 결과는 눈에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닌가? 사학의 비리를 근절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무한한 학생선발의 자율을 보장한다면 이는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뭐가 다른 것인지.

한국처럼 입시에 목매달고 사는 사회에서 입시부정이나 비리의 발생이라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그나마 돈없고 빽없는 사람들이 공정한 경쟁의 룰을 배경으로 자신의 노력과 실력만으로 좋은 배경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대학입학에서의 경쟁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이 마저도 돈의 힘에 의해서 좌우되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는 꼴 아닌가? 3불정책의 폐지로 외고가 비약적으로 늘고, 대학은 기여입학제를 실시하고, 대학생 선발은 그들 자율에 맡기고, 또 뒷구멍으로 비리를 마음대로 저지르게 내버려 둔다면 이제 이 사회는 볼장 다 본 사회인 것이다.  

관련된 기사 하나를 퍼와 본다.

 

 

 

[ 한겨레] 성형외과 등 인기과 독차지

연세대 치의학과 교수나 동문의 자녀들이 상당수 치의학과에 편입학한 것(〈한겨레〉 10월31일치 9면)처럼 연세대 의대 교수의 자녀들도 상당수 편입학을 통해 의대에 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레〉가 1999~2006년 연세대 의대 편입학 합격자들의 신상을 확인한 결과, 부모가 의대 교수인 이들은 모두 6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98~99년 복수전공으로 의대에 들어간 의대 교수 자녀도 3명이다. 연대는 지난해까지 해마다 의대 정원의 10%인 10명 가량씩 편입생을 뽑았는데, 의대 교수 자녀들이 2000~2002년 3년을 제외하고 해마나 한두 명씩 편입학했다.

특히 한 사립대 생물과학과를 나온 편입생 ㄱ씨는 아버지가 의대 부학장으로 재직할 때 의대에 편입했다. 한 의대생은 “부학장이면 의대에선 ‘넘버3’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자리”라며 “부학장 자녀가 편입시험을 본다는 것을 채점 교수들이 모르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해당 교수는 “편입학 문제는 대학 입학관리처에서만 입장을 표명하기로 했다”며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세브란스병원장의 아들도 연세대 생물학과를 졸업한 뒤 의대에 편입학했다. 병원장은 “의대 교수 자녀 중에도 편입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내 아이는 학부에서 모두 에이(A) 학점을 받아, 편입학 과정에 내 힘이 작용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이름 밝히길 꺼린 한 의대 교수는 “편입학 때 서류와 시험으로 3배수를 뽑는데 이 과정에는 개입하기 어렵다”며 “면접 때 교수 자녀들에게 ‘인지상정’이 개입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재용 연세대 입학처장은 “입학원서에 부모 등 가족 사항을 기재하지 않고, 적법한 심사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교수 자녀가 특혜를 받아 입학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의대생들은 부모나 친인척이 의대 교수인 편입생 및 재학생들을 ‘로열 패밀리’라고 하고, 이들의 상당수가 본과 졸업 뒤 전공을 선택할 때 피부과, 성형외과 등 인기과로 가는 것을 ‘로열 코스’라고 한다.

한 의대 졸업생은 “대학 입시를 통해 의대에 들어올 실력이 안 되는 교수 자녀의 경우, 아예 편입을 염두에 두고 생물, 화학 등 기초과학 전공을 택하게 한다는 얘기도 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의대 교수 자녀인 편입생 6명 모두 학부에서 기초과학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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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브라우어(L.E.J. Brouwer)가 "직관주의(intuitionism)"으로 자신의 수학기초론을 명명한 배경에는 칸트철학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다루어보려고 한다.


브라우어는 수학의 기초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을 세우면서 칸트 철학에서 그 유사함을 본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그의 저서인 『순수이성비판』에서 수학을 "직관intui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정의하면서 그것이 "선험적 종합판단"임을 논하였다. 이러한 칸트철학을 참조하여 브라우어는  스스로를 직관주의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세희, 수학의 세계, 서울대학교출판부,312쪽. 참조) 이는 브라우어가 칸트철학을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수학을 인식주관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재로 가정하지 않고 인식주관에 의해서 구성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종래의 견해에  기초한 결과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칸트철학에 대한 오독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수학은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규정한 적이 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1, 아카넷, 225쪽 참조) 그러면서 그것이 순수논리에 의한 개념적 구성물이 아니라 왜 "직관을 보조로"한 학문인지 설명한다. 칸트의 설명을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자.

"처음에 사람들은 '7+5 =12'라는 명제는 '칠'과 '오'의 합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모순율에 따라 귀결되는 분석적인 명제라고 생각함직하기는 하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면 '7'과 '5'의 합이라는 개념은 두 수를 하나의 수로 통일한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이로부터 그 두 수를 포괄하는 이 하나의 수가 무엇인가는 전혀 생각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십이'라는 개념은 내가 순전히 칠과 오의 저 통일을 생각하는 것으로써만 이미 생각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그러한 가능한 합이라는 나의 개념을 한동안 분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해서 거기서 '십이'와 마주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두 수 중 하나에 대응하는 직관을 보조로 취해 예컨대 다섯 손가락이나 또는 (세그너가 그의 산술학에서 했던 것처럼) 다섯 개의 점을 그렇게 해서 하나씩 직관에 주어지는 다섯의 단위들을 일곱의 개념에 덧붙임으로써 사람들은 이 개념들을 넘어갈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나는 먼저 수 7을 취하고, 5라는 개념 대신에 직관으로서 내 손의 손가락들을 보조로 취함으로써, 나는 수 5를 형성하기 위해 앞으로 함께 취했던 단위들을 이제 저 나의 그림에서 하나씩 수 7에 더하고, 그렇게 해서 수 12가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되니 말이다. 5에 7이 더해져야(이 부분의 강조는 칸트가 직접 했다. 그는 5에 7을 더한다는 것이 분석적으로 유도되는 것이 아니고 직관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한다는 것을 나는 7 + 5의 합의 개념에서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 합이 수 12와 같다는 것은 거기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산술의 명제는 항상 종합적이다. " (강조는 필자)

 (칸트, 순수이성비판 1, 아카넷, 225-226쪽)

 

브라우어는 칸트의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즉 "산술의 명제는 항상 종합적이다"라는 것의 설명으로부터 자신의 구성주의적 수학을 직관주의로 호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은 칸트가 비록 산술의 명제를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자연수의 합과 같은 산술이 "직관을 보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러므로 칸트의 수학에 대한 입장을 객관적인 수학적 개념(concept)나 대상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재를 가정하지 않은 순수하게 구성적(constructive)이며 주관적인 학문이라고 규정했다고 볼수는 없다는 점이다.

 칸트철학의 본체를 보여주는 『순수이성비판』은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개별학문들 처럼 "선험적 종합판단"을 자체 내에서 수행하기 위한 작업이라기보다는 이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 즉, 그것의 토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때문에 그의 철학은 기존 형이상학과 개별 학문들의 토대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칸트는 "초월적 감성학"으로 『순수이성비판』을 시작한다. 다름아닌 바로 "직관"의 개념규정으로부터 책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수단에 의해 언제나 인식이 대상들과 관계를 맺든지 간에 그로써 인식이 직접적으로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고 모든 사고가 수단으로 목표하는 것은 직관이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1, 아카넷, 239쪽)

그리고 "직관은 오로지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졌을 때에만 생기며" 대상은 "감성을 매개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이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성에 의해 사고되며 지성으로부터 개념들이 생겨난다." (같은 책, 239쪽)

 

그런데 칸트는 시간과 공간과 같은 표상들은 "순수한 직관"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선험적(a priori)"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선험적인 것은 경험에 선행한다는 의미이므로 인식의 "주관"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특히 시공간과 같은 직관은 "신에게서나 가능함 직한 "근원적 직관"이 아니라 일종의 "파생적 직관"이라는 점에서 말이다.(칸트, 순수이성비판 1, 아카넷, 36-37쪽 참조) 그러나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비록 이 "파생적 직관"이 주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객관의 현존에 의존적이고, 그러니까 주관의 표상력이 그것에 의해 촉발됨으로써만 가능한” 직관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다시말해 시간과 공간과 같은 직관은 단순히 주관적인 파생적 직관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성을 내포한 “근원적-파생적 직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 공간(에 대한 직관)은 대상의 현존이 없이도 가능한 “상상력”이다. 그것은 “주관을 벋어나면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 감성적 직관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225쪽)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무질서하고 잡다한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용을 한다. 칸트는 그것을 “감각기능(감관)에 의한 선험적인 잡다의 일람(一覽)작용”, “상상력에 의한 이 잡다의 종합” 또는 “근원적 통각에 의한 이 종합의 통일”(같은 책 317)과 같은 말로 시공간에 대한 직관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 시공간에 대한 순수직관은 지성처럼 순수한 형태로 분석적 사고의 양식을 만들어 내는 능동성에 기반한다기보다 대상의 감관에 주어질 때에 비로소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수동적인 것이다.

시공간에의 직관은 이처럼 대상적 인식이 가능했을 때에만 주어지는 수동적 성격을 가지면서 그와 동시에 무질서하고 잡다한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능동성을 가진다. 그러면서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할수 있는 “상상력”에도 기초로서 작용한다. “양”이나 “다수성” “전체성”과 같은 범주들의 적용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대상들을 단일한 하나의 시간 혹은 공간으로 표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소위 “대상일반”의 인식도 그래서 가능해 진다. 


그런데 대상들을 통일시키고 그것의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시공간(에의 직관)은 대상들의 현존을 가능하게 하는 실재적 본질이다. 다음 설명을 들어보자. 

 “다시말해 공간, 시간은 그 자체로는 주관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관념적“인 것이지만, 현상하는 객관들과 관련해서는 실재적, 곧 객관적으로-실재적이다. 공간,시간은 그 자체만으로 볼 때나 경험적 직관 너머에 있는 어떤 대상, 가령 초험적인 사물과 관련해서 볼 때는 순전히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경험적인 직관, 곧 경험적으로 직관함과 경험적으로 직관되는 것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백종현, 같은 책, 42쪽. 강조는 필자) 


이러한 특성을 칸트는 “경험적 실재성” 혹은 “초월적 관념성”이라고 규정한다. 현상들과 관련해 그것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면에서는 “경험적 실재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인간의 주관을 벗어나서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대상 없이도 인간의 인식 내에 “상상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주관이라는 측면에서는 “초월적 관념성”을 가진다는 이야기이다. 완전히 객관적 대상에 귀속되는 실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수한 인식주관으로만 환원할 수도 없는 수동성을 가진다는 이러한 양면성. 그것이 시간, 공간에 대한 직관이다. 

칸트가 앞서서 7+5 =12 라는 수학적 결과는 두 수의 합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하나 세어보는 행위를 통해어 깨닫는 “직관”의 보조에 힘입은 바 유도되는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정수론에 심취하여 칸토어의 혁명적 업적을 부인했던 크로네커, 그리고 수학적 귀납법의 유용함을 근거로 환원공리를 비판한 푸앵카레(모리스 클라인, 수학의 확실성, 사이언스북스 참조) 그리고 자연수 내에 존재하는 “직관적”성격을 내세워 자신의 입장을 직관주의라고 명명한 브라우어 등은 모두 칸트의 수학에 대한 입장을 단순히 구성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만 간주했고 이는 칸트 철학에 대한 오독임이 분명하다. 다시말해 그들은 위에서 이야기한 직관의 초월적 성격, 객관적 실재로서의 측면은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그것의 한 측면 즉, 주관으로서의 성격만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수학론을 이처럼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비단 직관주의자들 뿐만이 아니다. 러셀과 프레게와 같은 논리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칸트가 수학을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규정한 것을 두고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수학의 수학의 경험적이고 직관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면만을 강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가 이처럼 수학을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규정한 것을 두고 철학 내에 “타자”를 도입한 “철학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평가한다.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한길사, 87쪽) 다시 말하면 칸트가 수학을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규정한 것은 바로 철학에 대한 자기반성이요 비판이라는 것이다. 고진을 인용해 보자.

“내 생각에 형식적인 공리계에 의해 수학을 기초짓는다는 몽상은 수학 고유의 것이 아니다. 그 몽상은 분석판단을 유일하게 확실한 것으로 간주하는 형이상학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칸트가 부정하려고 한 것은 그러한 사고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형이상학이 스스로 밀어붙인 수학에 의거하는 이상, 수학에서 행해져야 한다. 반대로 수학에서 행해진 것은 수학을 모범으로 삼아온 철학으로 되던져질 것이다. 괴델의 ‘초수학’적 비판은 그러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그것은 칸트의 초월론적 비판과 연결되어 있다. 지금 돌이켜 볼 때 칸트가 수학을 ‘종합판단’이라고 간주한 것은 옳았다고 해야 한다.”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한길사, 116쪽)

이처럼 고진은 칸트철학이 수학에 대해서 가지는 입장을 인식주관에 의해서만도 아니요, 혹은 객관적 실재로서만도 아닌 이율배반적인 초월성을 가진 것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한 것이다. 아카넷판 『순수이성비판』의 역자인 백종현씨도 고진의 입장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칸트에 대한 오독은 국내학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라는 책을 쓴 진은영씨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가 선천적 종합판단의 대표적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은 7+5 =12와 같은 수학적 판단이다. 칸트에 따르면 7+5=12는 우리가 사과나 돌멩이를 가지고 경험적으로 세어보았기 때문에 타당한 것이 아니다. 일일이 세어보지 않아도 우리는 이 판단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것을 세어보아야만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수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손가락, 발가락으로 세면서 수학적 판단을 배우게 된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수학적 판단의 보편성과 필연성은 경험과 무관하다. 누군가 1234+1001=2235가 맞는지 묻는데 예전에 세어보았던 경험을 돌이켜야 한다든가 세어본 경험이 없어서 1234개의 사과와 1001개의 오렌지를 창고에 넣으며 수를 센 후에만 대답할 수 있다면 수학적 판단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우리는 손가락이나 돌멩이로 세는 일 없이도 수학적 판단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확신한다. 도대체 이와 같은 보편성과 필연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해 칸트는 우리의 주관적 형식에서 온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진은영,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그린비, 66쪽. 강조는 필자)


이 구절의 앞에서 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위에서처럼 칸트가 설명한 산술명제의 예를 들고 있다. 하지만 위와같은 진은영의 설명은 선험적 종합판단의 예라기보다는 오히려 분석판단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7+5=12라는 수학적 결과는 “경험적인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판단”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앞서서 문제의 칸트의 구절을 직접 인용해 본 것처럼 칸트는 분명 7+5=12라는 결과는 단순히 개념적 수들의 합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7을 취하고 5라는 개념 대신에 직관으로서 내 손의 손가락을 보조로 취함으로써, 나는 수 5를 형성하기 위해 앞으로 함께 취했던 단위들을 이제 저 나의 그림에서 하나씩 수 7에 더하고, 그렇게 해서 수 12가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되니 말이다.(....)7+5의 합의 개념에서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 합이 수 12와 같다는 것은 거기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산술의 명제는 항상 종합적이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진은영은 칸트가 7+5=12의 예를 들면서 수학은 “선험적 종합판단”이다라고 설명한 것을 분명 오독하였고 때문에 무엇인가 어색함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물리적 판단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의 "선험적 종합판단"의 경험과의 연관성을 이야기한다. 더불어 칸트가 수학과 물리학의 경우를 “나누어 설명하려고 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마치 선험적 종합판단이 경험적이지 않은 것과 경험적인 것 두 개로 구분된다는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수학과 같은 “선험적 종합판단”도 마찬가지로 경험적 직관을 포함한다는 것이고 또 직관자체가 비록 경험을 포함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가능근거로서 직관이 작용한다는 점에서 “선험적a priori”이라는 표현을 칸트는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경험은 달리말하면 선험적이기 때문에 직관적인 것이고 직관적이기 때문에 선험적인 동시에 경험적인 것이므로. 이러한 양면성 혹은 이율배반을 이해하는 것이 칸트 철학에서 주요한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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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 2007-12-07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제가 도움이 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yoonta 2007-12-0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도움을 드린건진 모르겠지만 쓸모는 있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노을 2010-01-09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칸트를 잘못 읽은 것 같군요. 직관주의자들이 참조하는 칸트를 이해하려면 "순수이성비판" 서론의 "선천-후천", "분석-종합" 구분에만 의지해서는 곤란합니다. 수학 자체의 본성을 다루는 "감성론", 특히 시공간적 직관의 본성을 다루는 부분을 참조해야지요. 그래야 왜 직관주의자들(구성주의자들)이 칸트를 조상으로 여기는지 이해할 수 있읍니다.

yoonta 2010-01-11 01:42   좋아요 0 | URL
"직관주의자들이 참조하는 칸트"에 대해서 제가 오해하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접한 텍스트가 한정적이라서요. 기왕 댓글주신 김에 직관주의자들이 위의 저의 해석과는 다르게 칸트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저의 칸트 해석에는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디오티마여신 2012-03-18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치 선험적 종합판단이 경험적이지 않은 것과 경험적인 것 두 개로 구분된다는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수학과 같은 “선험적 종합판단”도 마찬가지로 경험적 직관을 포함한다는 것이고

가 아니라 수학과 같은 선험적 종합판단은 순수직관이 필요하며 범주에서 양질 항목인 수학적 원칙과 관계양상 항목인 역학적 원칙은 구분되는 것은 맞으며 둘다 순수직관의 선험적 구상력의 형상적 종합이 필요합니다. 수학에서는 경험적 직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경험적 직관이란 지각이라는 말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소리나 색깔 맛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칸트가 수학과 철학이 다른점에 대한 선험적 방법론 1장인 순수이성의 훈련 부분의 4항목중 첫번째 부분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칸트가 이야기한 수학적 판단의 엄밀성과 보편성은 수학적 개념이 순수직관에 의해 주어짐 즉 '구성'됨에 의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돈케빈 2015-03-22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ct.수학자 브라우어.. 부동점 정리를 만든 사람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