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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ques of Slavoj Žiž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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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utrality of this article is disputed.
Please see the discussion on the talk page.

Slavoj Žižek's notoriety in academic circles has increased rapidly, especially since he began publishing widely in English. Many hundreds of academics have addressed aspects of Žižek's work in professional papers.[2] Inevitably, in the course of such scholarly discussion, many other thinkers differ with aspects of Žižek conceptual approach or specific arguments. While there is no indication that Žižek has received more criticism than have other continental philosophers of similar repute, this article discusses certain criticisms.

그의 영어본 출간이 시작한 이래로 학자집단에서의 슬라보예 지젝의 악명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수많은 학자들은 그들의 전문적 논문들 속에 지젝의 작업이 보여준 측면들을 언급해 왔다.
불가피하게 그러한 학술적 토론의 과정에서 많은 다른 학자들은 지젝이 가진
관점들의 개념적 접근이나 특정 논쟁들로부터 의견을 달리한다. 지젝이 다른 비슷한 평판을 가진 대륙철학자들보다 더 많은 비판을 받았다는 징후는 없지만 이 글은 그에 대한 몇몇 비판들에 대해 논할 것이다.    

 

 

 

 

Contents

[hide]

[edit] Argumentative method

Žižek's style is a matter of some debate:

Critiques include Harpham (2003)[1] and O'Neill (2001).[2] Both agree that Žižek flouts standards of reasoned argumentation. Harpham calls Žižek's style "a stream of nonconsecutive units arranged in arbitrary sequences that solicit a sporadic and discontinuous attention." O'Neill concurs: "a dizzying array of wildly entertaining and often quite maddening rhetorical strategies are deployed in order to beguile, browbeat, dumbfound, dazzle, confuse, mislead, overwhelm, and generally subdue the reader into acceptance." Supporters such as R. Butler[3] argue that such critiques miss the point and instead support Žižek's own theories: "As Žižek says, it is our very desire to look for mistakes and inconsistencies in the Other that testifies to the fact that we still transfer on to them...."[4]

 

논쟁적인 방법론

지젝의 스타일은 논쟁의 대상이다.

Harpham과 O'Neill 같은 비평가들은 지젝이 심사숙고한 논쟁의 기준들을 비웃는다는데 동의한다.
Harpham은 지젝의 스타일을 " 산발적이고 불연속적인 주의를 부추기는 자의적인 씨퀀스로 배치된
비일관된 조합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O'Neill은 " 지나치게 유쾌하기도하고 때론 꽤 화나게
만드는 어지러운 배치들로 이루어진 수사적인 전략들은 (독자들을) 기만하고,위협하고,기막히게하고
눈부시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고, 오인하게 하고,  난처하게 하고, 그리고 대개는 독자들로 하여금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활용된다"고 한다.
R. Butler와 같은 옹호자들은 그러한 비판들은 논점을 놓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대신
다음처럼 지젝의  이론을 지지한다. " 지젝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그것들로
전이transfer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타자 the Other 내에서 실수와 불일치를 발견하려고 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욕망인 것이다."

[edit] Social policy

John Holbo of the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has criticized Žižek[5] for his alleged refusal to lay out precisely what social formation he would replace the existing order with. Holbo argues that Žižek's "irrational" approach to thought disregards the ontic benefits brought about by late capital, specifically in its liberal-democratic form. A similar criticism, from a scholar more closely akin to Žižek, is made by Ernesto Laclau in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In his "Response to Žižek", Laclau claims that Žižek's political thought is dogmatically Marxist, and often out of keeping with his psychoanalytic theories. Noting that "all of Žižek's Marxist concepts come from either Marx himself or from the Russian Revolution", Laclau asserts that "Žižek uses class as a sort of deus ex machina to play the role of the good guy against the multicultural devils. Laclau concludes that Žižek's political thought suffers from "'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 and that "while his Lacanian tools, combined with his insight have allowed him to make considerable progress in the understanding of ideological processes in contemporary societies, his strictly political thought... remains fixed in traditional categories" [6].

 

사회 정책

싱가폴 국립대학교의 John Holbo는 지젝을 현존하는 질서를
정확히 어떤 사회 구성체 social formation로 대체할 수 있는지 기획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비판한다. Holbo는 지젝의 사상에 대한 불합리한 접근이 후기 자본주의, 특히 자유민주주의
형태로 출현하는 실재적인 혜택을 무시한다고 논한다.
비슷한 비판으로 지젝과 더욱 가까운 스타일의 학자이고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라는 책을 저술한 Ernesto Laclau는 이 책에서 지젝과 관련해 언급하면서 지젝의 정치사상은 도그마적인 맑스주의고 그의 정신분석이론으로부터도 종종 일탈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지젝의 맑스주의적 개념들은 맑스 자신 혹은 러시아혁명으로부터 나온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Laclau는 "지젝은 계급을 다원적문화라는 악마에 대항하는 선한 자의 역할을 하는 전능한 기계 deus ex machina의 한 종류로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젝의 정치사상은 "복합적이고 불균등한 발전"으로부터 손상을 받고 라캉주의적 도구를 사용하여 구성된 그의 통찰은 그로 하여금 현대사회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과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두드러진 진보를 가능케 한 반면, 그의 경직된 정치사상은 전통적인 범주 내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라고 결론내린다.

 

[edit] Alleged Misreading of Lacan

and Hegel

Some of Žižek's critics have accused him of misreading other philosophers and theorists, particularly Jacques Lacan and G. W. F. Hegel.

Ian Parker, a Lacanian psychoanalyst, complains that Žižek "delights in the most extreme formulations of what the end of psychoanaylsis might entail" (Ian Parker, Slavoj Žižek: A Critical Introduction, Pluto Press: London and Sterling, 2004; p. 78). For Parker, this is particularly problematic when Žižek attempts to carry over concepts from Lacan's teachings into the sphere of political and social theory. Parker notes that Lacan's seminars were originally addressed to an audience of psychoanalysts for use in their clinical practice rather than for philosophers such as Žižek to produce new theories of political action. This is particularly true, claims Parker, of Žižek's appropriation of Lacan's discussion of Antigone in his 1959-1960 seminar,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In this seminar, Lacan uses Antigone to defend the claim that "the only thing of which one can be guilty is of having given ground relative to one's desire" (Slavoj Žižek, The Metastases of Enjoyment, Verso: London, 1994; p. 69). However, as Parker notes, Antigone's act (burying her dead brother in the knowledge that she will be buried alive) was never intended to effect a revolutionary change in the political status quo; yet, despite this, Žižek frequently cites Antigone as a paradigm of ethico-political action. Parker concludes that carrying over concepts from Lacanian psychoanalysis "into other spheres requires something a little less hasty and less dramatic than what we find in Žižek" (Parker, p.80).

Noah Horwitz's essay "Contra the Slovenians: Returning to Lacan and away from Hegel" (Philosophy Today, Spring 2005, pp. 24-32) is a critique of Žižek's reading of Hegel. Horwitz claims that Žižek mistakenly conflates Lacan's unconscious with Hegel's unconscious. Horwitz notes that "the 'it' one is meant to identify with in [Lacanian] psychoanalysis is not some inert, substance irreducible to one, but rather the radically other scene where thinking occurs" (Horwitz, p. 30). According to Horwitz, the Lacanian unconscious and the Hegelian unconscious are two totally different mechanisms. If we take speech, Lacan's unconscious reveals itself to us in the slip-of-the-tongue or parapraxis we are therefore alienated from language through the revelation of our desire (even if that desire originated with the Other, as Lacan claims, it remains peculiar to us). In Hegel's unconscious, however, we are alienated from language whenever we attempt to articulate a particular and end up articulating a universal (so if I say 'the dog is with me', although I am trying to say something about this particular dog at this particular time, I actually produce the universal category 'dog').

 

라캉과 헤겔의 오독 혐의

지젝의 몇몇 비판가들은 다른 철학자들이나 이론가들, 특히 자크 라캉과 헤겔을 오독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인 Ian Parker는 지젝이 "정신분석의 종말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것들의 가장 극단적인 공식화formulation를 즐긴다"고 불평한다. (Ian Parker, Slavoj Žižek: A Critical Introduction, Pluto Press: London and Sterling, 2004; p. 78).
Parker에게 이것은 지젝이 라캉의 가르침이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이론의 국면에 이를때 특히 문제가 된다. Parker는 라캉의 세미나들은 원래 지젝처럼 새로운 정치행위이론을 만드려고 하는 철학자들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임상적인 치료행위practice를 필요로 하는 정신분석가들을 청중으로하는 강의에서 언급된 것들이라고 지적한다. Parker는 < 정신분석의 윤리>라는 라캉의 1959-1960년 세미나에서 안티고네antigone에 대한 라캉의 토론을 다루는 지젝의 도용appropriation을 이야기하면서 이 부분에서 특히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 세미나에서 라캉은  다음 주장을 방어하기 위해 안티고네를 사용한다. 그는 말하길, " 우리는 유일하게 다른 사람의 욕망과 관련한 근거를 가지는 것에 관련하여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Slavoj Žižek, The Metastases of Enjoyment, Verso: London, 1994; p. 69).
그러나 Parker는 안티고네의 행동(그녀 자신이 생매장 될줄 알면서도 그녀의 죽은 오빠를 매장한 행위)은
정치적인 현상유지를 혁명적으로 변화하는 효과를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지젝은 안티고네를 윤리-정치적 행위의 패러다임으로서 자주 인용한다.
Parker는 라캉주의 정신분석에서 차용한 개념들을 이용하여 "다른 국면에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지젝에게서 발견하는 것 보다 덜 성급하고 덜 드라마틱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짓는다.
Noah Horwitz의 논문 <슬로베니아인들에 반대하면서: 헤겔로부터 멀리하고 라캉으로 복귀하기>은 지젝의 헤겔독해에 대한 비판이다. Horwitz는 지젝이 라캉의 무의식과 헤겔의 무의식을 잘못 결합시킨다고 주장한다. Horwitz는 " 그것it은 라캉주의 정신분석에 있어서 일자one로 환원될 수없는 타율적인 실체와 동일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고thinking를 불러일으키는 다른 장면을 뜻한다."고 지적한다.
Horwitz에 따르면 라캉주의적 무의식과 헤겔주의적 무의식은 완전히 다른 두개의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고 한다. 우리가 말을 할 때, 라캉의 무의식은 말실수나 착오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욕망의 폭로를 통해 언어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라캉이 주장한 것처럼 타자the Other로부터 욕망이 기원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기묘한 것으로 남아 있다. ) 그러나 헤겔의 무의식에서는 우리가 개별적인 것a particular 을 발음articulate하려고 시도할 때 마다  보편적인 것a universal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를 두고 언어로부터 소외된다고 한다. (만일 내가 '개가 나와 같이 있다.'라고 말하면 비록 내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개에 대해 말하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나는 보편적 범주의 '개'를 생산하고있는 것이다.)
 

 

[edit] References

  1. ^ Harpham "Doing the Impossible: Slavoj Zizek and the End of Knowledge"
  2. ^ O'Neill "The Last Analysis of Slavoj Zizek"
  3. ^ Butler "Slavoj Zizek: Live Theory"
  4. ^ [1]
  5. ^ Holbo "Critical Discussion ON ZIZEK AND TRILLING"
  6. ^ Butler, Judith, Ernesto Laclau and Slavoj Žižek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Contemporary Dialogues on the Left". Verso. London, New York City 2000. pp. 20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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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진씨는 맑스주의는 그의 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1장에서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 사상 자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잘못된 독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특히 자본론에 대한 이해의 오류를 이야기하면서 크게 논리역사주의신리카도주의의 형태로 나타나는 오류를 지적한다.

먼저 논리역사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살펴 보겠다.

논리역사주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전통과 함께 오래된 그리고 '정통'으로 간주되어 온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해석"이라고 그는 말한다. 논리역사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고 보는데, 1) 자본론 제 1권 제 1편 모두 상품은 단순상품생산의 상품이다. 2) 상품가치의 실체인 추상노동은 초역사적, 생리학적 범주이다. 3)가치법칙은 단순상품생산의 법칙이며 자본주의의 잉여가치법칙과 구별된다. 4)'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논리는 단순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의 역사적 이행에 대응한다. 5) 일반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향의 논리적 전개는 현실의 역사발전에 대응한다. 로 요약될수있다고 본다. 이런 논리역사주의는 엥겔스의 자본론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됬는? 뒤이어 레닌이나 스탈린 그리고 심지어 만델이나 로스돌스키등의 트로츠키계열의 학자들 마저도 취하는 오류라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논리역사주의의 오류 중 하나는 맑스의 1편의 단순상품생산 편을 전 자본주의적이고 초 역사적인 논리적 추상으로서 간주하고 자본론의 서술이 이러한 추상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체에로 상승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논리적 전개는 현실에 있어서 역사발전에 즉 사적 유물론에 대응하는 것으로 볼수있다는 관점이다. 그런데 정성진씨는 정작 맑스자신은 이러한 논리역사주의를 주장한 적이 없다고 한다. 특히 그의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을 보면

"경제학적 범주들은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규정적이었던 순서에 따라서 차례로 배열하는 것은 실행이 불가능하며 또 오류다. 오리려 그 순서는 그것들이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상호 간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며 이 관계는 자연그대로의 순서에 따라 나타나는 것 또는 역사적 발전의 계열에 상응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와 같은 구절들에서 발견할수 있다는 것이다. 아서Arthur와 같은 학자들은 엥겔스가 <요강>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와같은 논리역사주의적 오류를 범했다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또한 <자본론>의   단순상품생산편도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상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상품이라는 것인데 정성진은 그 근거로 <자본론>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서 나타나며, 개개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구절 그대로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내의 '상품'이지 논리적이고 추상적이며 초역사적인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성진은 <자본론>의 이 '상품'이 자본주의의 특수한 상품이고 역사적인 상품분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상품으로 시작하는 <자본론>의 서술방식 자체가 논리적이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분업, 노동, 재화가 아니라, 즉 형태 규정을 무시한 초역사적 범주가 아니라 특수역사적 형태인 상품에서부터 논리적으로 상향 전개하는 방법으로 서술했다." (25쪽)

즉 그는 맑스의 <자본론>의 서술방식자체가 논리적인 체계로 추상에서 구체로 향하는 상향식 전개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만큼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가 논리역사주의와 다른 점은 바로 1편의 상품이 초역사적이지 않고 바로 자본주의적 상품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데 있다. 또 그는 자본주의의 가치법칙과 단순상품생산이 온전히 작동하려면 자본주의라고 하는 현실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한다.

"가치가 교환에 선행하여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교환형태 속에서만 또 교환형태를 통해서만 발전하는 것이라면, 가치가 형태와 내용에서 하나의 현실이 되고, 가치의 논리가 양적으로 규정적인 상품생산법칙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경제의 운동에 강제하게 되었음이 입증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할 때에만 가치는 완전히 발전할 수 있다." (아서Arthur  "Engels as Interpreter of Marx's Capital" Rethinking Marxism)

"가치법칙은 그 완전한 발전을 위해 대공업생산과 자유경쟁 사회, 즉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전제한다." (맑스,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

논리역사주의가 이처럼 초역사적 단순상품생산을 이야기하였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1권과 3권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점 ,즉 "가치론과 생산가격론의 모순 이른바 전형문제"등과 같은 모순들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가치법칙이 통용된 시대를 자본주의가 아닌 단순상품생산 단계에 한정하고, 경쟁자본주의 단계에는 생산가격론 및 잉여가치법칙,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는 독점가격론 및 최대한 이윤의 법칙 또는 독점이윤의 법칙이 지배하게 된다는 스탈린주의 경제학 체계가 성립할 수 있게 된다."고 그는 본다. 특히 가치법칙이 사회주의에서도 작동한다고 보는 스탈린주의적 시각은 "논리역사주의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논리역사주의에서처럼 가치법칙이 보편이고 초역사적인 경제법칙이 아니라 "가치법칙 자체가 잉여가치법칙"이다라고 말한다. 맑스의 다른 여러 개념들 예컨대 화폐, 가격, 이윤, 임금, 지대 및 이자 등과 같은 범주들도 이와같은 가치법칙에서 도출되는 범주라는 것이다.

또 논리역사주의는 1장에서 가치의 실체라고 규정한 추상노동도 초역사적 범주로 규정한다고 한다. 초상노동을 초역사적 범주로 생리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사실 고전 정치경제학의 특징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추상노동이 특수한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정성진은 이야기한다.

"리카도는 상품의 상대가치(혹은 교환가치)가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노동의 특징은 더 이상 검토되지 않는다. ...리카도는 형태, 다시 말해서 교환가치를 창조하는 혹은 자신을 교환가치로 드러내는 노동의 특징, 즉 노도의 성격검토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이 노동의 화폐와의 관련성 혹은 그것이 화폐의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그는 가치량에만 관심을 가진다. 즉, 상품의 가치의 양이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양에 비례한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가진다. (MEW,  vol31 강조는 맑스)

이처럼 추상노동도 초역사적 범주가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추상노동'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소외된 노동, 강제된 노동, 끝없는 노동"인 것이다.

 한편 그는 "마르크스의 가치형태 전개는 상품에 내재한 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의 '내재적 자기초월'과정으로서의 변증법적 전개"라고 말하면서 논리역사주의가 <자본론> 1권 2편에 있는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가 단순상품생산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역사적 전화라고 보는 점을 비판한다. 그는 이 부분 즉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는 "C-M-C 와 M-C-M의 형태적 및 내용적 구별"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라는 마술, M-C-M' 의 모순은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가 전제되는 것으로부터 이미 여건으로 되어있던 노동력 상품을 연구대상에 도입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말해 그것은 "우리들의 눈앞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이지, 역사적 전화같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행'은 "표면으로부터 심층으로의 이행"과같은 이론적 서술방식에 기인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마르크스는 단순유통을 부르주아적 총생산과정의 추상적 표면이며 이는 심층에 존재하는 과정인 산업자본의 단순한 현상형태"라고 설명한다. 즉 단순상품생산과 자본이전의 화폐와 같은 설정은 심층으로 이행하기 위한 표면으로 <자본론>의 1장에 서술되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실제 자본주의의 역사적 이행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에서는 유통의 자본으로의 역사적 이행을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유통은 오히려 부르주아적 총생산과정의 추상적 부면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규정에 의해 그 배후에 놓인, 즉 그것으로부터 결과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낳는 더 심층적인 과정-산업자본-의 계기, 단순한 현상형태라는 사실을 스스로 실증하는 것이다. (MECW , vol 29)"

그밖에도 그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에서 나오는 '부정의 부정'도 역사적 발전과는 무관한 이론적 서술일 뿐이라고 한다. 이처럼 그는 <자본론>이라는 저작을 "특수역사적 사회인 자본주의를 논리적으로 해명한 것이며, 그 논리 전체에 따라 자본주의의 역사성을 논증한 과학이라는 성격을 가진다"라고 본다. 또한 "자본주의의 순수한 모습을 논리적 방법으로 해명하는 것과 자본주의의 발생,발전, 소멸 과정을 연구하는 것은 서로 완전히 다른 연구방법이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자본론>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사고 속에서 재구성하는 사회경제 범주들의 체계적 전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계속해서 그는 신리카도주의를 비판한다. 신리카도주의는 보르트키에비치(L. Bortkiewicz)나 스라파 등과같은 인물들에 의한 맑스주의 해석이다. 신라카도주의는 맑스의 경제학을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의 계승으로 파악하고 맑스의 가치법칙은 "본질적으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동일하다"고 본다고 말한다. 다만 맑스주의 경제학은 잉여가치법칙의 발견 그리고 이에따른 자본주의의 비판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돕(Dobb)은  "맑스와 고전 정치경제학의 본질적 차이는...잉여가치론이다'"라는 해석이 그래서 도출된다.

이에 대해 정성진씨는 가치론에서 고전 경제학과 맑스주의 경제학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리카도주의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리카도는 교환가치가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가치의 본질에만 관심을 가졌으나 맑스는 리카도가 제가하지 않은 문제, 즉 왜 가치가 필연적으로 화폐형태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고전 경제학의 한계는 "가치를 교환가치로 나타나게 하는 가치형태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그의 가치형태론과 물신성 비판을 통해서 가치의 수량분석에만 그치는 고전경제학을 뛰어넘어서 "가치의 질적 분석"을 했다고 본다.

"나의 책에서 가장 요긴한 것은 ... ① 바로 제 1장에서 강조된, 노동이 사용가치에서 표현되느냐 가치에서 표현되느냐에 따른 노동의 이중성, ② 잉여가치를 그 특수한 형태들인 이윤, 이자, 지대 등과 독립해서 취급한 점이네 "(<자본론에 관한 서한집> 중원문화사. 160p. 강조는 맑스) 

 그런데 신리카도주의는 맑스의 가치론에서는 자본주의의 비판의 성격을 찾아볼수 없고 "노동과 노동력개념의 구별 이후에 , 즉 잉여가치 범주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은 논리역사주의와 마찬가지로 초역사적인 추상노동 규정이라는 성격을 신리카도주의도 가지고 있다고 정성진씨는 지적한다. 이처럼 신리카도주의는 노동을 초역사적 범주로 보기 때문에 "가치를 시장 범주, 분배 범주로만 간주하며, 가치를 부의 형태 자체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어 부를 창조하는 노동의 자본주의적 특수성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추상노동을 자본주의에 간접적인 것으로 신리카도주의는 보는데 이는 "맑스의 노동개념을 오해"한 것이라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즉각적으로 사회적인 성격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라고 보았고 지적한다.  드 브로이(M, De Vroey)로 대표되는 이른바 추상노동학파는 "추상노동의 간접적으로 사회적인 성격만 강조하고 추상노동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의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드 안젤리스(De Angelis)같은 학자는 비판한다고 한다.

한편 보르트키에비치가 발견한 소위 '전형문제'도 이와 동일한 문제점을 자기고 있다고 한다. '전형문제' 즉 맑스가 가치를 생산가격으로 전형하는 과정에서 산출만 전형하고 투입을 전형하지 않아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형된 후에도 가치의 총합과 가격의 총합이 같고 잉여가치의 총합과 이윤의 총합이 같아야 한다는 명제중 하나는 성립하지 않게 된다" 는 문제점을 맑스주의 경제학은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전형문제로 인해 최근 '불균형론' 이나 '시점 간 단일체계(Temporal Single System, TSS)'론이 대두되기 까지는  맑스의 가치론은 폐기되어 왔다는 것이다. 스티드만(Steedman)같은 신리카도주의학파 학자는 "생산기술조건과 실질임금이 주어지면 가치개념을 우회할 필요없이 가격과 이윤율을 직접 도출할 수 있으므로 가치에서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은 불가능할 뿐더러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리맨(A, Freeman), 카르체디(G, Carchedi), 맥글론과 클리먼(McGlone & Klimann)등과 같은 '불균형론자'들이나 '시점간 단일체계론'자들이 나오면서 "맑스에게 '전형문제'가 존재한다는 신리카도학파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투입'시점의 가격과 '산출'시점의 가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신리카도학파는 양자를 동일시하여 '생산이 시간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현실에서는 "자본가들이 먼저 투입을 구매하고 재화를 생산한 뒤 그것을 투입과는 다른 새로운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사실이며 맑스의 전형은 이러한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르트키에비치는 "하나의 경제에서 상이한 두 시점간의 가치와 가격 간의 문제"를 "동일한 시점에서 상이한 두 경제간의 가격들의 관계문제"롸 바꿔치기함으로써 존재하지도 않은 '전형문제'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투입 가치를 가격으로 전형하지 않은" 것에서 생기는 전형문제는 맑스의 방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면서 모슬리(Moseley)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맑스의 자본 일반과 경쟁 개념의 주된 목적은 경제 전체의 잉여가치 총량의 생산과 이 잉여가치 총량의 개별 자본가들로의 분배를 구별하는 것이다....잉여가치 총량은 이 잉여가치 총량의 개별 자본가들로의 분배에 선행하여 그와 독립적으로 자본 일반의 총량 분석 수준에서 결정된다." 때문에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은 총가격에서 개별가격으로의 이행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투입은 생산가격의 결정에서 가격단위로 주어여 있으므로 가치량에서 가격량으로 전형될 필요가 없다." 고 모슬리(Moseley , Marx's Method in Capital. Humanities Press)는 이야기한다.  

그런데 신리카도학파가 이와같은 오류에 빠지게 된 원인은 "바로 이 본질과 현상에의 추상수준 구별 및 이드의 변증법적 매개관계를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가치와 가격, 잉여가치와 이윤의 '전형'관계는 자본일반과 다수자본의 차별적 추상수준의 관계임과 동시에 본질과 현상형태의 매개의 변증법적 관계"라는 것이 정성진씨의 결론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본질과 현상형태의 구별이 맑스의 것이 아니라 헤겔의 잔재이므로 기각해야 한다는 알튀세르(Althusser)의 주장"도 문제가 있게 된다. 모슬리등의 비판에 의거해 정성진씨는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단절'과 관련된 주장, 예컨대 <자본론> 제 1권 제 1편은 "헤겔주의적 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시 써야한다."와 같은 주장은 맑스의 가치형태 분석의 의의를 부정하는 이론이라고 본다. 그는 알튀세르가 비록 논리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은 될 수 있지만 "스탈린주의적 문제설정에서 벋아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다음으로 사회주의론에 대한 정성진씨의 견해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맑스주의 경제학과는 본질적인 관련이 없다고 본다. 맑스주의 경제학에서는 추상노동과 가치범주가 존재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범주이므로 "그러한 범주들의 현존을 자타가 공인한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규정함으로써 패러다임의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기초는 '사적소유'가 아니라 '소외된 노동'에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사적소유는 소외된 노동의 표현이며 결과이지, 그 원인이 아니"라고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맑스는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또한 '위로부터의 계획'도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며 이와는 달리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계획'이야말로 반자본주의적 방식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총자본가(집단적 자본가)의 생산과정상의 지휘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는 생산과정이 "한편으로는 생산물의 생산을 위한 사회적 노동과정"이면서 동시에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이라는 특징을 자본주의사회는 가진다. 따라서 "소유관계의 변혁(국유제)"나 "분배관계의 변혁(계획)"만으로는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극복이라고 볼수없으며 "시장과 형태만 다른 추상노동의 강제기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구 소련의 계획경제도 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진 것이 된다.

"1935~1937년의 반혁명은 계획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 과정의 절정이었다. 계획은 노동자와 경영자를 직접 충돌시켰다. 노동조합이 국가기구 속으로 해소된 것은 계획당국과 노동자 사이의 이어질 수 없는 엄청난 간격을 상징했다....1936년 이래 러시아의 경험은 유산계급이 아닌 다른 계급에 의한 계획이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산산조각 내버렸다"(Dunayevskaya, Marxism and Freedom. 228p.  Columbia University Press)

또한 맑스는 기존의 통속적 견해처럼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즉 사회화된 생산과 사적 소유간의 모순으로 이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영역 자체의 내부모순",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과 새로운 생산양식의 가능성간의 모순"으로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을 설정하였다는 것이다.

"현실적 부의 창조는 노동시간과 고용노동량에 의해 좌우되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시간 중에 작동되는 요인들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생산과 부의 거대한 기초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수행하는 직접적 노동도 아니며 또 그가 노동하는 시간도 아니라, 그 자신의 일반적 생산력의 취득, 자연에 대한 그의 이해 및 사회유기체로서 그의 존재에 의한 자연의 지배 --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적 개인의 발전 -- 이다. ....대중의 잉여노동은 이미 일반적 부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 아니게 되며 소수자의 비노동도 인간 두뇌의 일반적인 힘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 아니게 된다. (MECW , Vol.29: 90~91p)

이러한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은 사적소유와 시장의 폐지와 같은 분배관계의 변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본 범주들의 폐지, 즉 추상노동과 가치범주의 폐지, 소외된 노동범주의 폐지를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이것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노동자체가 이론적으로 비판되고 실천적으로 전복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성진씨는 자율주의를 평하길 "사회주의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폐지가 아니라 자기 실현으로 간주한다."고 말하면서 "자율주의에서 노동은 절대적 주체로 우상화될 뿐이며 그 자체로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네그리의 경우...맑스의 잉여가치론을 특권화하고 가치 형태론을 무시하는 대목에서 기존의 맑스 경제학으로 회귀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자율주의의 소위 '노동 거부'개념과 전략과는 다소 배치되는 듯한 설명이다. 자율주의에서는 자본주의적인 노동자의 자율성이 기반이 되지 못한 소외된 노동은 거부되며 그것은 그들의 '노동거부'개념과 전술로 표현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부분은 보다 상세한 논의가 필요한 듯 하다. )

한편 맑스에게서 주체는 구체적 인간이 아니라 "대상화된 관계들"로 구성되며 특히 "추상노동 즉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매개활동을 하는 노동의 특수성"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부정은 추상노동에 의해 매개된 자본관계의 총체성의 폐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총체성의 존재를 주장"하는 루카치의 입장과 "총체성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전의 양면일 뿐이라고 본다. 맑스는 총체성 자체를 부정하지도 혹은 "초역사적 총체성의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승인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한 "고전 정치경제학이 노동의 입장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맑스의 경제학 비판은 자본주의의 노동자체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사회주의는 전자의 입장에서는 가치의 탈신비화를 통해 노동의 원리를 입증하는 것에 그치는 반면, 후자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가치의 탈신비화 예를들면 시장의 계획으로의 대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의한 인간관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가치체계의 파괴, 추상적 지배의 폐지, 생산의 내재적 요인으로서의 직접적 인간노동의 폐지"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맑스를 인용해 보자.

"이전의 모든 혁명에서는 활동양식은 언제나 변하지 않았으며 단지 노동을 새롭게 분배하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기존 활동양식의 변혁을 지향하며 노동을 폐지한다." (MECW, Vol. 5 : 52p)

이에 의하면 구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 국가주도적 자본축적양식, 즉 국가자본주의로 규정"된다고 한다. 구사회주의 국가는 상품, 화폐, 자본의 유통이 일시적으로 중지되었을 뿐 노동의 국가에 의한 통제가 여전히 이루어졌고 추상노동의 가치형태의 폐지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소련 동유럽 블록의 붕괴를 자본주의 지양 시도의 실패로 보고 이를 근거로 맑스의 패러다임 자체를 기각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맺음말"로 그는 쿤을 인용한다. 그는 하나의 패러다임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그 패러다임의 내부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현재 맑스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대체할 만한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는 한 우리는 맑스로 돌아가 그 내적인 입장이 무엇인지 다시금 재평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요약해 본 이 책 1장에서의 그의 결론이다.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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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4-26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아니라 '페이퍼'인가요?..

yoonta 2007-04-26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아직 다 읽지도 못했는데요. 걍 페이퍼죠. ^^
 



인터넷에서 발견한 조승희씨의 희곡 한 편이다..

내용은 읽어보면 알겠지만 한 stepson이 자신의 stepfather에게

반항하는 스토리인데 murder랄지 kill 이라는 단어들이 속출한다.

sexuality와 관련된 대목도 눈에 뜨인다...

정상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이 썼다고 보기 힘든 내용이다.

내면의 분노와 폭력이 위험수위로 보일 정도다..

그의 대학강사가 이 play를 보고 그를 매우 걱정하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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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서재의 로쟈님과 여러번 작가 김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과연 이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다시한번 고민해보았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걍 흔하디 흔한 우리시대의 가부장"일뿐 별다른 감흥도 감동도 주지 못하는 작가라는게 나의 결론인데..그의 짧은 수필을 하나 옮겨보면서 코멘트를 달아본다..

 

   <밥벌이의 지겨움>

     김훈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핸드폰은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죽는다. 핸드폰이 죽는 소리는 가볍고 하찮다. 핸드폰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핸드폰이 죽을 때 내는 이 꼬르륵 소리는 대선사들의 오도송(梧道頌)보다도 더 절박하게 삶의 하찮음을 일깨운다. (핸드폰 소리로 삶의 하찮음을 일깨운단다. 역시 작가답게 감수성이 무척 예민하신분이군. 하는 생각과 함께 참 삶의 즐거움을 못느끼고 사시는 분이군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계속되는 뒷부분의 내용은 다 이 런 푸념의 연장일 따름이다. ) 핸드폰이 꼬르륵 죽어 버리면 나는 이 세계와 단절된다. 거리에서, 핸드폰이 꼬르륵 죽어버리면, 나는 문득 이제 그만 살고 싶어진다.(이건 솔직히 오바다. 그가 정말 핸드폰 꺼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죽고싶었다면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했다.) 내가 이 세상과 단절되는 소리가 이처럼 사소하다니. 꼬르륵....(핸드폰이 죽었다고 세상과 단절되지 않는다 절대로..이 역시 작가적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는 문장일 뿐이다.)

모든 '먹는다'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물을 으깨서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에이프런을 두르고 거위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밥을 으깨먹는 동작은 같을수있어도 맛의 차이는 존재한다. 이것 때문에 목숨거는 사람들을 보고 미식가 Gourmet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자장면과 푸아그라(거위간요리)를 동일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 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진저라 나면 먹지 않으면 된다. 아무도 억지로 먹으라고 하는 사람 없다. 김훈은 역시 밥먹는 것도 밥을 먹게 하는 것도 일종의 의무감일 따름이다.  밥도 여러가지가 있다는 것을, 먹기 싫으면 안먹을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하나? )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도 오바다. 배고프면 속이 쓰려도 아무생각 없이 먹게 되어 있다.  역시 작가적 상상력에서 나온 표현일 뿐이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쩌면 좋은가. 대책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이게 김훈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근데 필사적?으로 밥벌이를 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자기가 그런걸 다른 사람도 그러리라고 상상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지나친 일반화라고 한다 )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저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 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다시 이야기하는데 밥먹기 싫고 밥벌어 먹이기도 싫으면 안 먹고 안 벌면 된다. 절에 들어가는 방법도 있고 죽는 방법도 있다. )

예수님이 인간의 밥벌이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

(중략한다...손가락이 아프다.-_-)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글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다. 그러니 이 글에는 결론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대는 이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자본주의라는 세계가 원래 그런것이다. 그는 반자본주의자란 이야긴가? 그도 아닌것 같다.그렇다면 증오한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나는 이른바 3D업종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간들의 저 현명한 자기방어를 사랑한다. (본인 역시 그런점에서 현명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슨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도리 없다. (위에서 이야기한것 처럼 지겨운 밥벌이를 회피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 있다. 아무리 봐도 김훈은 밥벌이를 지겨워 한다기보다는 즐기고 있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지겨워하는 척 하지만 말이다 그에게 밥벌이의 지겨움이나 그 의무감은 단지 말  뿐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그래서 그보고 평범한 인간이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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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16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잘 읽었습니다 :) 저도 김훈 작가에 대해서 뭐랄까... 너무 젠 체한다는 약간의 선입관이 있어서요,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분명 인정하지만 지나치게 무게잡는다는 듯한 느낌이랄까? 좀더 시간이 지나면 이문열처럼 되는 스타일이 아닌가 싶어 저어하는 작가 중 한 명이지요. 님의 코멘트 아주 인상적으로, 유쾌 상쾌 통쾌하게 잘 읽었습니다. :) 초면인데 실례는 아닌지 모르겠군요 ^^

yoonta 2007-04-1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2님도 저랑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나만 그런줄 알았습니다. 은근히 반갑네요..^^

비로그인 2007-04-16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아니,
저야말로 엄청 반가웠어요. 저도 로쟈님 서재에 가보았지만, 뭐랄까 내공이 없으니 감히 껴들지는 못하겠고... 근데 그냥 느낌이 그런 걸 어째요. 김훈씨 책은 딱 한권 읽었는데 그것도 그렇고 뭐랄까... 적었지요. 포스트 이문열의 느낌 그냥 그것뿐이에요. 지나치게 과대평가 받는 느낌. 아마 저희말고도 다른 분들도 분명 이런 의견 가지신 분들 있을 거예요. 아무리 소수라도요 ㅎㅎ
 

네이버에서 찾은 <요코이야기>와 관련된 신문기사내용에 대한 한 분의 반박내용이다.

<요코이야기>는 저자가 분명 초기부터 "실제 경험"이라는 것을 상당히 오랫동안 강조해왔던 것 같고

책을 읽는 독자들의 대부분도 소설로서의 가치보다는 "전쟁체험담"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논란이 붉어지면서 저자는  "소설이다"라는 식으로 회피하려는 분위기다.

그리고 <요코이야기>는 국내번역본과 영어본의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고한다.

한글 번역본의 경우 문제가된 강간등의 내용이 많이 걸러진 모양이다.

이곳 서재의 나귀님의 경우 <요코이야기>를 "행"으로서 그리고 "소설"로서 읽는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그런데 정작 저자자신이 "실제 경험"이었다는 것을 강연등을 다니면서 강조했던것 같은데

이 시점에서 헷갈리기  시작한다. 과연 <요코이야기>는 체험담인가? 단지 소설일 뿐인가?

소설이라고 한다면 "실제 경험"이었다는 이야기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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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 해 주신 것처럼, 기자님의 요코이야기의 줄거리는 맞습니다. 처음에는 부인하다, 나중에 저자도 순수한 "소설"이였다고 흐지부지하게 인정합니다. 그녀는 현재 평화주의자로 활동합니다. 어떻게요? 미국의 일본 공격에 피해 입은 한 사람으로써, 다시는 전쟁이 없도록 입니다. 일제가 한국, 중국, 동남아, 남태평양은 침략한 것은 언급하지 않은채, 미국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동기가 생겼습니다.

재미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죄 없는 남의 나라에 쳐 들어갔다, 이름까지도 빼앗아 가며, 국토의 진품들을 다 빼앗아 가고, 전쟁에 대해 모르는 청년들을 징집하고, 일본 군인들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어린 처녀와 젊은 색시들을 위안부로 끌고 가고 난 뒤, 전쟁에 지니까,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말합니다. 저자의 입장에서만 이번 일을 바라보는 기자분, 그리고 일제를 옹호하는 분들 안타깝습니다.

기자님과 일본 옹호자 분들의 딸이나 아내가 납치되어, 매춘부로 팔려 나가면, 좋아하시겠습니까? 이름을 빼았겨도 좋습니까? 님들의 아들이 전쟁터에 총알 받이로 끌려가는 것에 찬성하시겠습니까? 대대로 전해 오는 보물을 빼앗겨도, 기뻐하시겠습니까? 기자라면, 이야기 이면에 있는 이야기들을 알려고 하는 용기도 보이세요.

다음은 미국 인터넷 사이트에서 "요코 이야기"를 소개한 것들입니다.
 
1. 아마존 (세계 최대의 인터넷 책방)
 - Editorial Reviews (아마존의 리뷰)
http://www.amazon.com/Bamboo-Grove-Yoko-Kawashawa-Watkins/dp/0688131158
 - "Grade 6 - Up A true account that is filled with violence and death..."
 (6학년 이상의 책: 실제 이야기로서, 폭력과 죽음이 있는.....)

2. 미국 교과서 참고서
 http://www.glencoe.com/sec/literature/litlibrary/pdf/so_far_from_bamboo_grove.pdf
 - "Yoko Kawashima Watkins's autobiographical novel is a testament...."
 - 이 책은 (저자) 요코의 자서전으로써
3. Glencoe Literature Library (글렌코 도서)
 http://www.glencoe.com/sec/literature/litlibrary/bamboogrove.html
 - young Yoko as World War II comes to an end and Korea is engulfed in turmoil as Koreans revolt
 - 어린 요코가 제 2차 대전이 끝나면서, 한국이 한국인들의 반란으로 혼란스럽게 되는
 - 일본의 패배를 한국인들의 반란으로 소개합니다.

4. Essay Info (엣세이 정보 사이트)
 http://essayinfo.com/sample/essay/101/
 - So Far From the Bamboo Grove is a true story about Yoko Kawashima Watkins
 - 요코 이야기는 요코에 대한 실제 이야기로써

구글에 나오는 (미국의 최대의 검색 사이트)는 모든 사이트들은 요코 이야기를 실화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소설(Fiction)로 소개 하는 사이트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자서전, 수필로 소개 하는 사이트들이 대부분입니다. 저자 요코에 대한 소개를 요코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실로 이야기 합니다.

기자님이 말했듯이 요코가 살 던 북한 지방 대나무가 자라는 게 사실이라고 합니다. 요코가 이야기 했던 소련군의 전쟁참여 날짜와 폭격기도 사실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들이 읽는 것이라고요? 미국 사이트가, 요코가 책 홍보했던 것들을 그대로 미국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미국 대학에서도 똑 같은 말을 합니다.

기자님, 그리고, 요코 이야기 옹호자님들. 일일이 들어가보시고, 현실을 알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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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연합뉴스의  관련기사들이다...

 

(워싱턴=연합뉴스) 이기창 특파원 = `요코이야기(원제 far from the bamboo grove)'의 저자인 요코 가와시마 왓킨슨씨는 국내외 언론과의 인터뷰, 학교 강연 등을 통해 이 책이 실화임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영문판 원본도 뒤표지에 이 책이 '용기와 생존의 실화(a true story of courage and survival)'라고 명기 했으며, 서문에는 이 책이 요코씨의 `승리의 이야기(story of her victory)'라고 적었다.

요코씨는 최근 보스턴 글로브지와의 인터뷰(2006년 11월 19일자)에서 자신의 책이 "나에게 일어난 진짜 이야기일 뿐"이라며 "정말 심한 내용은 빼기까지 했다"고 밝혔다.

요코씨는 지난해 국내 언론에 보도된 번역가 윤현주씨와의 인터뷰에서도 이 책이 모두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요코씨는 "`요코이야기'는 실화라고 밝히셨는데, 실제와 다른 내용은 정말 하나도 없는건가요?"라는 윤씨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두 가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오빠의 목숨을 구해주고 북한에서 오빠가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 김씨 아저씨네 가족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그 가족들을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출판할 당시 소설로 분류해 달라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또 하나 실제와 다른건 오빠가 탈출하게 되는 시점을 책에서는 그 다음해로 설정했지만, 실제로는 3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요코이야기'는 모두 다 실제로 벌어진 일들입니다"(미국에서 이 책은 자전적 소설로 분류돼 있다)

요코씨는 미국 학교 중학생 등을 대상으로 20년 가까이 해온 강연에서도 이 책이 모두 사실이라며, `요코이야기'가 자신의 체험담임을 강조해왔다.

또 이 같은 요코씨의 설명에 따라 미국 내 언론들도 이 책이 "폭력과 죽음으로 가득찬 실화"(스쿨 라이브러리 저널)라고 평하는 등 작가의 체험담이라고 전해왔다.

한 한인 학부모는 `요코이야기'의 한글판 출판사가 이 책이 소설일 뿐이라고 해명하는데 대해 "저자가 20년 동안 사실이라고 밝혀온 책을 번역 출판사가 허구라고 주장하는건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lkc@yna.co.kr

 

"실화 확인"서 "소설일뿐" 말바꾸기

한인들 "거짓말도 문학인가" 소송 검토

(워싱턴=연합뉴스) 이기창 특파원 = 한국인을 가해자, 일본인을 피해자로 묘사해 파문이 일고 있는 '요코이야기(far from the bamboo grove)' 한글판이 원본의 상당부분을 왜곡해 한국 독자들이 호감을 갖도록 호도했다는 비판이 미국 내 한인교포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한글판 '요코이야기'는 특히 "이 이야기는 저자가 한국 땅에서 몸소 겪었던 실화이며, 이러한 진정성을 확인한 후 문학동네가 출간을 결정하게 됐다"(292쪽)고 밝혀놓고서도, 논란이 일자 "이 책은 소설일 뿐"이라고 말을 바꿔 교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우선 `요코이야기' 원본은 요코의 세 모녀가 총칼을 겨눈 한국인들의 위협에 떠는 모습을 표지에 실었으나 한글판은 요코로 보이는 한 소녀의 모습만을 표지그림으로 사용했다.

`요코이야기' 원본은 뒷표지에 이 책이 "용기와 생존의 실화(a true story of courage and survival)"라고 명기했지만, 한글판은 겉표지에 `장편소설'이라고 써놨다.

한글판은 뒷표지에 `1986년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 1986년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책' 선정''이라고 붉은 글씨로 선전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한글판은 저자가 "1933년 일본생"이라고 소개했으나, 원본에는 요코씨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라 일본(Japan, which I had never seen.2쪽)", "그녀의 전생애를(all her life.뒷표지)" 외국에서 살았다고 명시, 요코가 일본 태생이 아님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판은 "본적이 없는"이란 원문을 "기억에 없는"으로 번역했다.

원본에는 저자의 아버지가 6년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복역한 사실과, 일본이 2천년전부터 한국에 관심을 가지다 열강의 각축 끝에 정당하게 한국을 지배하게 됐다는 식의 한국 역사가 편집자 주의 형식으로 8쪽에 걸쳐 기술돼 있으나 한글판은 이를 모두 뺐다.

한글판은 대신에 '평화와 한국인을 사랑한다'는 요코씨의 글을 서두에 실었으며, '부친이 한국인을 옹호하다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는 믿기 힘든 주장을 말미에 다시 넣는 등 요코씨가 평화주의자이며 친한 인사인 것처럼 포장했다.

영문판에는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한 지도가 있으나 한글판은 이 역시 싣지 않았다.

한글판은 또 '요코어머니가 전쟁을 도발한 일본 정부를 비판하고, 일본 정부의 나쁜 행위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출판을 거부당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 또한 요코씨의 일방적인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재미교포 이윤경씨는 "요코의 어머니가 일본 정부를 비판한건 아들의 가미카제 지원을 만류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일본의 나쁜 행위보다는 한국인들의 악행이 훨씬 더 자세히 묘사돼 있다"며 "요코씨는 일본에서 책을 낼 경우 자신과 부친의 행적이 쉽게 드러날 것을 우려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요코이야기'를 배울 수 없다며 등교를 거부한 허보은양의 어머니 박수산나씨는 "한글판의 전반적인 번역이 영어판의 신랄한 묘사를 누그러뜨려 한국인들의 반감을 피하려 한 느낌이 있다"며 "일부 오역하거나 뺀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요코이야기의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거짓임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 한국인들의 명예가 실추됐는데도 문학의 자유 운운하는 출판사의 주장에 말문이 막힌다"고 비판했다.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인 재미 변호사 박영민씨(서울 거주)는 한글판이 "안받은 상을 받았다고 날조하고, 스토리를 잘못 전달하는 방식으로 영문판 내용을 왜곡했다"며 "이같은 왜곡에 대해서는 미국 출판사의 책임도 면제될 수 없으며 소송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요코이야기'가 청소년층을 겨냥해 출판된 책임을 지적한뒤 "미국의 경우 헌법상 표현의 자유도 아동에 대해서는 제한되며 어린이들이 폭력적, 선정적, 인종적인 출판물에 노출되지 않도록 법이 보호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lk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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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을 읽어보니 이정도면 "선정적"이고 "유치한" 선동문 수준의 기사글인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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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1-25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마음같아서는 요코이야기의 영문판과 한글판을 읽고, 당대 사료를 통해서 몇가지 지점을 나누어서 본격적인 글을 써보고 싶은데, 허락이 안되네요. 제 전공도 식민지 시기 한국문학이라서 꽤나 관심이 많이 가네요.
1. 자서전인가 소설인가의 문제
자서전이라면 '거짓 진술'임으로 당대 역사적 사료나 이의 배경에 대한 주위 환기를 위한 대처필요.
2. 소설이라고 하였을 때의 문제
소설이라고 하면, 역시 이에 대응하는 역사적 콘텍스트를 널리 알리는 일이 필요. 결국에는 '사실'문제라고도 할 수 있고, 역사를 어떻게 전유하는 투쟁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음.
3. 이 기준은 민족적이라기보다는 당연 전인류적인 가치 위에 이루어져야 함.
그 전제는 당연히 소위 '보편적 가치'에 대해 동의하는 입장임.
이런 작업을 해줄 사람이 한국에는 분명 있을 거라고, 또 누군가는 하고 있거나 이미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yoonta 2007-01-25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기인님 전공이 식민지시기 국문학이시군요. 저같은 아마추어보다는 기인님 같으신 분들이 "본격적인 글"들을 써주셔야 하는데..^^ 요코이야기라는 책은 아무래도 문제가 많은 책인것 같습니다. 아직 실체를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저렇게 저자가 말을 계속 바꾸고 있는 것을 보면 책 내용에 뭔가 문제가 있는게 분명한것 같아요. 저도 물론 어설픈 '민족주의'나 '애국주의'보다는 '반전'이라는 문제의식에 더 동의하는 사람이긴 합니다만 요코이야기나 반딧불의 묘 등과 같은 식으로 자신의 전쟁책임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피해자로서의 시각만 강조하려고 하면 과연 그것이 순수한 의미에서의 '반전 사상'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수 없네요. 문제의 책도 그런점에서 순수한 텍스트로서 소설로서만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입장입니다. 어쨋든 국내분위기는 너무 요코이야기를 비난하는 쪽으로만 달려가는 느낌이긴 합니다만(이곳 알라딘서재에서의 반응은 좀더 조심스럽긴하죠) 그렇다고 해서 문제의 책이 면죄부를 받을수는 없겠죠.

로쟈 2007-01-25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컬쳐뉴스에 방민호 교수의 리뷰가 떠 있습니다.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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