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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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을 별로 땡기지 않아 한다고 늘 말하던 나였는 데. 이 소설이 그중 가장 마음에 든다. 아니 아주 좋다.

각 장마다 등장인물 5인이 각자 화자가 되어 시점은 바뀌지만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런 방법도 참신하고, 한 밤중에 허를 찌르는 위트에 한참을 웃기도 하고, 그러면서 무언가 비장함도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일본 사회가 우리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앞서가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지만 이 소설처럼 일본인들이 이렇게나 진보한 인간관계를 가지게 됐나 싶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한 아파트에 사는 5인의 동거인들인데, 그들은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주고 도와주고 좋은 친구들 같지만 동시에 자신을 전부 내 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제 갑자기 누군가 그 집을 나가도 '이만, 안녕.' 이면 끝이다.

서양 사람들의 사교 생활이라는 것이, 쉽게 친해지지만 그리고 친절하지만, 그 밑에 지속되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공허함이 동양인인 나로서는 느껴지는 데. 이 곳의 동거인들의 관계가 그렇다.


평범하고 평이한 것에 조금은 심심해 하는 나에게 큰 재미를 선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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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세트 - 전3권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고정아 옮김 / 효형출판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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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올리비에라는 남자가 오랜 기자 생활을 퇴직하고 60의 나이에 실크로드를 걸어서 갈 계획을 세운다. 그는 그 계획을 추진할 힘을 얻기 위해서 출판사를 찾아간다. 그는 자신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출판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을 제안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의지를 지탱해줄 출판사와의 약속이 필요한 것이었다.

터키의 이스탐불 부터 중국의 시안까지 12,000킬로미터, 1,099일을 4년에 걸쳐서 주파한다. 그리고 300에서 4000페이지에 달하는 아나톨리아 횡단(Longue Marche), 머나먼 사마르칸트(Vers Samarcande), 스텝에 부는 바람(Le vent des steppes)세권의 책을 출판 했다.

사진이라고는 표지에 한두장이 전부이다. 이 길을 간 사람에 비할것은 못되지만 이 책을 다 읽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의 일상은 너무나 단조롭고 그에게 벌어지는 일들도 대동소이 했다. 간간히 나오는 지역의 역사는 대부분 나중에 편집해 넣었을 것이 너무나 확연한 것들이었고. 사실 그런 역사적 배경이 이 책을 읽는 목적은 절대아니었다.

저자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 성가한 사람이 가지는 아집과 추진력이 있었고, 그런들이 이 과정을 마치게 한 결정적인 원동력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서구인들이 가지는 동양인에 대한 생각과 기대 또는 실망감을 표현한 것들을 보면서 이 두 세계가 결국은 한 점에서 만날수 없다는 생각이 몹시도 들었다. 사해동포주의를 표방하는 나는 아니지만, 점점 세계인이라는 것은 존재할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전기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반대의 사람이다. 나는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에서 교훈이나 나의 역할 모델을 찾기 보다는 나 자신으로 살고 그 것을 합리화 하는 것을 더 편안해 하는 사람이다.

이 책을 읽어며서 나는 이 거대한 일을 해낸 그 사람의 의지를 존경하기는 하지만 그를 존경하지는 않는 다.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원동력은 훌륭한 일을 해냈어도 어차파 나와 같은 많은 모순과 불합리성, 부족함을 가진 한 인간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실크로드를 꿈꾸는 사람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나의 실크로드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그 실크로드를 한발자욱씩 땅으로 디딘 사람에게도 실크로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길이 있어서 걸어갔을 뿐. 그리고 그 여행을 하기전의 그와 그 여행을 마친후의 그가 달라진 사람이라고는 생각 할수 없었다.

그는 다른 어떤 종류의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대상이 달랐을 뿐이었다.

다르다는 것이 주는 몰상식과 몰지각함이 독학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한 이 똑똑한 인간에게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결코 실크로드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그 길을 다닌 상인의 정신을 따라 간것고 아니었다. 그는 지구상에서 이름지어진 가장 긴 길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 길을 다 걸었다는 만족감을 가지고 싶었을 때문이었다.

그의 여행은 편안하지 않았을 뿐이지 정해진 일정에 따라 깃발만 보고 쫓아가는 패케지 여행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하루 하루 싸웠고 그것이 그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 길위의 풍경은 때로 묘사되지만 그것들은 부수적인 것이 었다. 그는 만남의 즐거움 보다, 관료주의의 불합리성을 꼬집는 데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싫었던 그의 태도는 '부'와 '위생'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부와 위생이라는 개념조차 상대적인데 그 걸 넘을 만큼 그는 열린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래도 때때로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 볼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내 여행들의 추억을 되새김 해 볼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나처럼 말 많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에게 언어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 지도 새삼느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마지막 두 여정은 물론 사막지역을 지나가가기 때문에도 한권에 묶일 분량밖에 안되었지만 또한 그가 중국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에도 크게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실크로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현 중국의 영토를 지나가기 위해서라도 중국어는 필수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중국어 책을 손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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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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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사람이 했을 많은 자료 조사에 일단은 박수를 보낼수 밖에 없다. 책의 앞장에 이 책이 묘사된 예술작품, 교회, 성당, 책들이 모두 실제하는 것임을 자신있게 밝힐수 있다는 것은 정말 배경조사를 철저히 했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의 문학성에 대해서 평가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전혀 아니지만 이야기의 짜임새나 구성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았다. 지나간 무수한 베스트 셀러에서 볼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 꾼이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조각들을 끼워 맞추기가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꽤나 복잡하고 다양한 조각들을 끼워 맞추기 위해서 작가가 얼마나 많은 밤낮을 고민했을 까를 생각해 보면 정말 또 한번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왜 이 책이 그리도 세간의 주목을 끌었는 지를 알게 됐다. 이 이야기는 재미 있다기 보다는 흥미로왔고, 논쟁의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 었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예수 이전과 이후라고 불리울 만큼 지난 2천년는, 적어도 서구 사회에 있어서는 그리고 그 서구 사회가 세계사의 주인공(승자)가 된 지난 수세기의 업적에 고무되어서 서구화 되버린 대부분의 지구의 문명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세기 였다.

여기서 혹시 있을 수 있는 반감들에 한마디 하자면, 이슬람과 힌두교 불교가 융성해 왔고 지금고 그렇지만 우리 생활에 서구화가 또는 산업화의 이름으로 스며든 기독교의 영향은 지대하다. 작게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통용되는 달력법이 그렇다. (이슬람 세계에서 아직도 이슬람력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고무적이 이야기다) -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나는 '대부분'이라고 했지 전부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 책의 기본 아이디어가 기독교의 믿음의 기본적인 전제들을 모두 부인하고 있다는것은 재미있고 흥미롭다. 모든 점에서 동의 하지는 않지만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근본적인 의문들과 서로 통하는 점들이 많아서 적어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에서 개인적으로 고무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기에서 주어진 이야기들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다.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진 한 인간이 수 많은 서적과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의 가정을 바탕으로 이와 같은 하나의 또 다른 가설을 세워보았다는 것에는 또한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이 책의 끝에 가서 나는 모든 사람이 수긍할수 있는, 적어도 내가 수긍할수 있는 해답을 찾았다. -물론 이건 정답은 아니다 정답이라는 것이 이런 문제에 존재할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존재해서는 안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서로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흐렸는 지. 모두가 자신의 해답에만 만족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세상에 모든 믿음은 허구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그것이 믿음의 정의 요. 우리가 증명할수는 없지만 진실이라고 상상하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오. 모든 종교에서 신은 은유와 암시, 과장을 통해서 묘사해요. 초기 이집트인 부터 시작해서 현대의 일요 예배학교까지 말이오. 은유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우리의 마음이 받아들이도록 돕는 수단이오. 문제는 우리 자신의 은유를 말 그대로 믿기 시작할때 발생하는 거요."


"......종교적 암시는 현실을 이루는 일부가 되어 왔소. 그리고 현실에서 살아 숨쉬며,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이겨내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왔어요
."

나는 올바른 종교인들을 존중하며 심지어는 그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그들은 믿음으로써 자신의 종교안에서 평화를 찾았거나 적어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들은 인간의 모순을 넘어서 완벽한 인간일 수는 결코 없지만 적어도 보다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들은 남들 앞에서 자신을 종교인으로 드러남으로써 상대방의 반감을 사지도 않으면 그들은 적어도 그들의 종교안에서 충만해 보인다.

그들에게 허구가 아닌 현실을 보라고 소리친다면 - 이 책에서 비밀의 문을 열어 밝히는 것이 - 혼란 이외에 무엇을 가져다 줄수 있을 지 회의적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드러난 작가의 기본 생각에 동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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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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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목이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이 됐을 까? 원작은 간단히 Kiss & Tell 인데. 게다다 아무리 출판사가 어떤 이유에서 인지 이렇게 복잡한 이름을 주어 주려면 사실 '키스한 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 되야하는 것이 아닌가.

알랭 드 보통의 이전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 가?'도 마찬가지다. 원제가 Essays in Love 던데. 이런 단순한 제목으로는 'Dynamic Korea'의 독자들의 관심을 끌수 없다고 생각했을 까?

사실 전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 가?'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지부진한 연애 이야기를 상큼하게 처리한 면도 없지 않았고........

방대한 독서량과 박학한 지식으로 독자를 감탄하게 하는 작가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작가들의 작품은 회를 거듭할수록 무언가 부족함이 느껴진다. 말하자면 사람을 끄는 창작성일까 아니면 예술성일까?

적절한 비교가 될지는 모르지만 사주팔자를 풀이하는 사람들 중에 주역등의 책보고 푸는 사람들이있고, 무당처럼 신이 내려서 섬뜻하게 무언가를 집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데. 책보고 사주 풀이하는 사람이 가지는 한계를 느낀다.

이 작품은 어느 날 책방에 쌓인 전기들을 읽다가 전기라는 문학의 한 형태에 관심이 간 작자가, 유명한 사람도 아닌 일반인을 하나 집어서 그 여자의 전기문 집필에 들어간다. 물론 대상이 되는 인물 몰래. 작자는 이사벨의 전기를 쓰는 작가이면서 이사벨과 친구 내지는 남자친구가 되는 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수많은 인용에 철학적인 혹은 심리학적인 접근 방법을 접목하고 그러면서 관계, 즉 연애관계에 대해서 새로운 형태의 소설을 쓰려는 것이 그의 의도 였는 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의도는 적어도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심지어는 그가 한번도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라고는 거의 없어 보이는 이 나라에서도 팔리고 있다.

그점에 있어서는 박수를 보낼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여행의 기술을 보나서 현관에서 신발끈을 묶었던 나는 그 문간에서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어주고 이제는 문밖으로 나가 버려야 겠다.

"안녕,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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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박범준.장길연 지음, 서원 사진 / 정신세계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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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 이 부부가 나올때 나는 본방을 보지 못했다. 누군가 극구 권유에 의해서 재방을 일부  보고는 흥미있는 부부라고 생각했다. 무었보다 서로 존대말을 쓴다는 것이다. 내가 언젠가 해보고 싶은 일이지만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에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이 책을 읽어보고는 TV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그들의 삶에 대해서 알게되어서 반가왔다. 어찌보면 더 현실적인 그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TV가 시청률이라는 것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감추었던것이 있었던 것 처럼, 글에서 조차 그들의 모든 것이 알려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그리 훌륭한 글쟁이라고는 아직 보기 힘든 저자들의 글이 지루해서 슬쩍 슬쩍 넘어가면서 보았지만, 마음에 남아있는 것들도 많이 있었다.

같이 살아가기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렇다. 절대로 안싸우고 살것 같은 이 부부들이 남들과 같은 이유로 싸운다는 것을 보기도 다행스러웠고, 그러면서도 서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서로 독립적으로 남을 이해하면서 살아가기에 대한 생각도 들어볼수 있었다.

마치 신들린 사람같은 두 사람의 연애이야기이며,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태도들도 있다. 너무나 순진한 그들의 삶의 방식도 놀라울 정도 였다. 어쩌면 그다지도 무모할수 있는 지.

그들은 용감해서 무식했고, 무식해서 용감할수 있었다고 했다. 세상은 대부분은 이렇게 몰라서 용감했던 사람들이 바꾸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알면 결코 갈수 없는 길들이 있다.

인생의 깊이란 단지 시간이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닌줄 알지만 아직은 설익은 두 사람의 인생이야기가 중년을 지나고 아이들의 서넛키운 인생보다 깊이 있게 느껴지지는 않는 다.

아직은 나처럼 좌충우돌하면서 살고 있는 내 또래의 젊은이들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들이 TV에 모습을 비취고, 책을 출판했다고 해서 더 깊이있다는 생각은 안든다. 옆에 또 다른 친구들을 보는 느낌이다. 그리고 나보다는 분명히 순수한 그들이 그리고 동반자가 있는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은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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