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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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선 작가의 이름 Amelie Nothomb를 어떤 번역서는 아멜리 노통 이라고 했고 어떤 책은 아멜리 노통브 라고 하고 있다.

불어에서의 마지막 자음은 흔히 발음되지 않는 다. 그런데 불어 발음의 일반적인 규칙들은 고유명사, 즉, 인명이나 지명에서는 여지 없이 예외가 존재한다.

최근에 번역된 작품에 노통브라고 한것을 보면 노통브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일단 이 책의 번역서에는  노통이라고 써있으므로 그대로 쓴다.

제목 자체도 참 번역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살인자의 건강법'이라고 했으나. 도대체 Hygiene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책의 중반을 지날때 까지 왜 이 제목인지 알수 없었으나 결국에 나도  이유를 알고 나서도 더 이상 좋은 제목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나라면 genocide 에 인종청소라는 번역이 적절하듯이 여기서의 건강법은 사실 '위생법'이 조금더 낫지 않았을 까. 그도 뭐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살인자의 건강법이라면 살인자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자신에게 하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드는 반면에 위생법이라고 한다면 살인자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자신의 주위를 어떻게 정리하는 가에,  즉 조치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이 된다.

그리고는 책을 들고 앞의 한 1/3은 즐거웠다.  위트가 철철 넘친다. 그러다 중간 1/3은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다. 온갖 프랑스 문학에 중요한 인물들과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열심히 외우던 온갖 수사법의 인용과 설명이라니. 이 쯤에서는 이 책을 원서로 하나쯤 갖고 있으면 참고서적으로 참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1/3은 비장하고(이말이 적절한지는 나도 모르겠다.), 한마디도 구토가 나며, 기분 상당히 나빠지고, 무언가 모르게 속이 부글 부글 메스꺼워진다. 머리는 복잡해지고, 그래서 결코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개운치 않은 그런 찜찜함이 남는 다.

책을 읽는 내내 인용문을 굳이 메모하지 않다도 될만큼 처음 부터 끝까지가 다 메모할 만하다. 그러니 내가 참고서로 하나 가지고 있을 만하다고 하지 않던가.

번역자는 이 책인 문학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적어도 2/3은 그렇다. 글을 쓰는 작가와 비평가와 독자라는 서로 다른 집단의 인식의 차이나 괴리를 언제나 궁금하게 생각했던 나에게 내가 평소 생각하던 아마 작가는.... 이라던 생각에 일치하는 이야기를 내 뱉는 작가를 만나서 반가웠다. 그리고 동시에 많은 동질감을 느꼈는 데.

그런데 나머지 1/3은 앞서 말한대로 혼란스럽다.

한가지 말할수 있은 것은 이 책이 작가가 25세에 쓰여진 책이라는 데 위안을 받는 다. 이 책의 전체적 구성이나 모든 것은 많이 설익어있다. 여기 저기서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하지만 이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어보고 싶은 궁금증은 충분히 이끌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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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ry Potter and the Order of the Phoenix (Paperback) Harry Potter 미국판-페이퍼백 5
조앤 K. 롤링 지음 / Scholastic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책을 보니 두께가 장난이 아니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안나더라 그러다 어느 날 서점에서 해리포터의 다른 시리즈 원서들을 봤는 데. 이거 뭐야, 다른 책들은 보통인데, 이 불사조 기사단이 제일 두꺼웠다.

그래도 지루하거나 보다가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사실 볼드모트나 해리의 싸움이나, 마법의 세계, 특이한 모습의 캐랙터에 관심이 있어서 보다는 그 아이들의 성장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해리는 여전히 불쌍해 죽겠다. 하지만 해리가 단순히 영웅적이고 훌륭한 인물로 그려지지 않아서 좋다. 그는 아직 15살의 어린아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너무 가혹하다.

다른 시리즈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는 처음 부터 끝까지 해리는 언제나 화가 나있다. 무섭다거나 두렵다거나 걱정이라거나 기쁘다거나 그 모든 감정을 떠나서 해리는 언제가 화가나 있다.

해리는 자신이  고아라는 것이 화가나고, 자신이 원치도 않는 운명의 소유자라는 것이 화가나고, 놀림을 받아서도 화가나고, 자신이 때로는 경솔해서 일어난 일들에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다 자신의 탓인것 같아서 화가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가장 불행한것 같아서 화가나고, 사람들이 위로를 해도 화가 난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그를 도와주고 마음으로 아껴주는 론과 헤르미온에게 언제나 소리지르고 화를 낸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많은 부분에서 론과 헤르미온이 자주 말한다.

"혹시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우리는 너의 편이란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니가 힘든 것을 이해하지만 그렇게 우리 한테 소리치지 않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다 하는 실수들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더 못하는 것.

헤르미온은 단순히 공부를 잘할 뿐 아니라. 다른 두 친구에 비해서 현실적이고 현명하고 논리적이다. 거의 많은 경우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그렇듯이. 

남자들이 그런말 하는 것을 자주 듣는 다. '마누라가 하는 데로만 하면 별로 문제가 없다'고, '나이들 수록 아내가 하는 말을 듣게된다'고, 그리고 '내가 한참만에 깨달은 것은 애 엄마는 벌써 다 알고 있더라'고.

그리고 마지막에 덤블도어가 하는 말. 자신이 저지를 가장 큰 실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바가 많았다.

한때는 현명하였으나 나이가 듦에 따라서 하게되는 가장 큰 실수는

"내가 너를 너무 아꼈다는 거지. 너의 행복이 진실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너의 안녕이 내가 세운 계획을 실행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거지. 너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다른  더 많은 사람들의 희생보다 더 중요했다는 거야. 다시 말하면 나는 볼드모트가 바라는 데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그대로 저질렀다는 거다.

I cared about you too much. I cared more for your happiness than your knowing the truth, more for your peace of mind than my plan, more for your life than the lives that might be lost if the plan failed. In other words, I acted exactly as Voldemort expects we fools who love to act."

정말 주옥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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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한가지


".......It contains a force at once more wonderful and more terrible than death, than human intelligence, than forces of nature. It is also, perhaps, the most mysterious of the many subjects for study that reside there.

거기 있는것은 죽음이나 인간의 지성이나 천제지변  보다 더 경의로우며 더 끔직한 거란다. 아마 인간이 탐구하는 어떤 학문보다도 더 신비로운 것인지도 모르지

It is the power held within that room that you possess in such quantities and which Voldermort has not at all. That power took you to save Sirius tonight. That power also saved you from possession by Voldemort, becasue  he could not bear to reside in a body so full of the force he detests. In the end, it mattered not that you could not close you mind.

그 안에 있는 만큼의 그 힘이 너에게는 있단다. 반면에 볼트모트는 가지고 있지 않은 거지. 그 힘 때문에 너는 오늘밤 시리우스를 구하러 갔던 거야. 또 그 힘 때문에 결국 볼드모트는 네 안에 들어올수 없었던 거란다. 볼드모트 자신이 그리도 혐호하는 그 힘으로 가득찬 몸안에 들어갈수는 없었던 거지. 결국 네 정신을 차단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였다는 거다.

 It was your heart that saved you.
 너를 구한건 바로 너의 마음이란다."

그냥 아이들의 환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 데 읽어보니 그게 아니다. 작가 롤링 내공이 깊다. 절대 아이들이 이해할수 없는 그런것들이 있다. 지나고 보니 알것 같은........ 그래서 재미있다.

작가 롤링이 아이들이 다 자라서 어른이 되어서 까지 살아가는 이야기를 쓸수 있는 역량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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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양장)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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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측천무후則天武后, 원제는 그냥 여황이라고 되어있다.

중국 역사에 그리 밝지도 않고, 측천무후라고는 중국에서 들어온 TV 시리즈가 있었던 것도 같다.

샨사의 '바둑 두는 여자'의 역사적 맥락은 우리와 그리 멀지 않은 그리고 그리 연관이 없지도 않은 비극적인(?) 현대사의 시작이므로 그리 탐탁치 않았다.

측천무후의 이야기는 당대의 중반을 가로지르는 이야기로 너무나 머나먼 이야기이다. 여인천하나 많은 사극을 보아온 대한민국의 사람이 프랑스 사람보다는 가까이있으나 그래도 객관적으로 그냥 문학작품으로, 마치 역사를 모르고 그냥 지어낸 이야기로 보면 어떨까?

아주 재미 있었다. 역사나 대하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소설은 굳이 역사물이라 한것도 없다. 이 소설의 큰 흐름은 역사책도 실록도 황제의 이야기도 아닌 그냥 한 여자의 일생이다.

내가 아닌 한 여자의 일생. 그러면서 많은 부분 공감이 가는 한 여자의 일생.


삼국지 같은 역사물은 허풍과 과장과 내가 말하는 후까시로 점철된 도색된 역사가 있다. 명분과 도의라는 것 뒤로 숨겨진 비겁함이.

일인칭 소설로 쓰여진 측천무후의 이야기는 샨사가 시공을 초월해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한 시도였다고 보여진다. 남들에게 읽힐 글을 쓸수 있는 역량을 가진 한 여인이 이제는 가고 없는 그리고 도대체 진실은 무엇인지 알수 없는 그 시대의 그 한 여인이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 않았을 까? 하는 것에서 이 모든 것이 시작된것은 아닐지. 그러면서 내가 그녀라면 아마 이런 마음이 아닐까하는 동감이 있지 않았을 까.

그래서 이 이야기는 7세기를 살았던 한 여인이 21세기의 여인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기도 했지만 21세기의 여인이 7세기의 여인의 삶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도 있다. 그래서 극히 현대적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디서 이런 글을 봤더라 싶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 .

김훈의 "칼의 노래"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보여지고 보고 싶은 이순신이 아닌, 내가 그 였다면....그 진솔함이 그 솔직함이 한 인간의 이야기가 마치 샨사가 측천무후를 써내려간 스타일과 흡사하게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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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전2권 세트
에쿠니 가오리.쓰지 히토나리 지음, 김난주.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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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냉정와 열정사이'라는 제목을 어느 유럽어로 번역을 해도 같은 한자 문화권의 우리가 느끼는 그 언어에서 오는 느낌을 전달할수 있을 까. 마치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우리의 사우나 처럼.

이 유명한(?) 소설을 내가 이름을 들었으나 거의 눈길도 주지 않았던 이유는 많이 있었지만. 하자만 어떻하랴 세상의 어떤 것들은 아마 평생 내 관심을 지나쳐 갈수도 있을 것이다.

며칠전 새로운 컴퓨터를 들려놓은 친구의 집에서 그 친구가 그 컴퓨터의 성능을 보여주려고 공짜 영화를 틀었는 데. 이게 바로 그 영화였다. "냉정과 열정 사이."

몸이 안좋아서는 집에 와서는 한가한 오후에 나머지를 봤다. 그 친구 말이 "극장에서 보면 시시하고 잘못 만들었다 싶은 것도 집에서 공짜로 보면 꽤 괜찮다고 느낄때가 있는 데 이게 그렇다."는 것이 었다.

극장에서 보지 못한 나는, 이 영화 자체가 그리 삼박하고 신선하지는 않으나 스토리의 전개는 무리없이 진행되었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그 소설로 봐 주기로 했다.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는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경우는 영화를 미리 봤기에 그나마 소설을 끝까지 보지 않았을 까.

거의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 소설은 같은 스토리의 두 주인공이 각자 화자가 되어서 쓴 두 편의 서로 다른 버전으로 되어있다.

기획의 의도는 신선한데. 이 소설을 통틀어 이 두사람은 마지막에서야 해후를 하게된다. 물론 지나간 추억을 기억하는 부분들은 있으나. 두 사람이 동시에 관계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나타나지 않는 다.

8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지루하리 만치 각자 상대방을 잊지 못한다는 설정이 조금은 나의 이해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만나거나 연락을 할 시도를 안한다는 것은 비겁하기 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누구 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그리고 각자의 현재의 파트너들에게, 현실적이지 않을 만큼 사랑받고 이해 받지 못한다는 것을 다소간 자각하면서도 주인공들에게 헌신적이거나 매달리는, 대한 그들의 태도는 공평하지 조차 않다.

결론적으로 이 두 사람은 모두 다 비겁하다. 그게 내가 머리속에 떠오르는 한 단어이다.

누구나 오랫동안 마음에 기억이 나는 사람은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에 방해를 받을 만큼 절실하다면 무슨 일이던지 저질러 봤어야 한다.

그리고 확인하고 다시 싸우고 지긋 지긋해 졌다면 자신이 품었던 것은 단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환상에 지나지 않았슴을 깨닳게 되었을 것이다.

둘다 그런 현실을 회피하면서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멍청하게 8년 동안이다.
이 소설이 내가 처음 부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같은 이유로 나는 결코 이 소설을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소설이 왜 그리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의미 있게 다가왔는 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두편의 서로 다른 버전중에 아오이의 불루는 단순히 소설로써도 전개가 너무 평이하다. 이 소설만 본다면 마지막에 준세이와의 갑작스런 재회는 이해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준세이의 버젼인 로소에는 그나마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조금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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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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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72년 북경 출신의 여자가 어려서 부터 시를 짓고 글을 쓰고 신동 소리를 듣다가 프랑스 정부 장학금으로 프랑스에 가서 공부한지 7년 만인 1997년 첫 소설 '천안문'을 펴내고 그 이후에 세번째 소설이 "바둑을 두는 여자"이다.

관심이 가는 프로필이 아닐수 없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만으로는 따라 잡을 수 없는 '천재'라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이런 부류의 사람중에 하나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소설은 두 사람의 화자가 등장한다. 배경은 1930년대의 만주.

한사람은 10대의 바둑을 두는 여자. 다른 사람은 만주벌판의 전쟁터에 젊은 일본인 군인 장교. 각장은 이 두 화자가 쓰는 장이 교차되어 있다. 

책이 정확히 중간까지 갈때 까지 이 두사람은 만나지 않는 다. 그리고 정확히 중간에서 만난다. 공원에서 바둑을 두는 두사람의 이방인으로. 그리고 그들의 만남은 바둑을 두는 몇시간을 제외하면 아무런 연관도 없다. 그리고 그 둘의 각자 인생은 또 나름대로 진행된다.

그러나 바둑을 두면서 나누는 무언의 교감이 결국은 우연치 않는 재회로 이어지고 그 재회는 거기서 바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사람사는 이야기가 다 거기서 거기라면 이 소설의 소재는 다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의 재판이다. 거기에 역사적 맥락이 있다. 우리가 흔히 보아온 그 역사적 맥락과 그리 다르지 않는 역사적 맥락이다.

이야기의 구조는 구성은 조금은 신선하다. 서로가 다른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그렇고, 그 둘은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부분에서 그렇다.

무엇보다 두사람이 만나서 서로 바둑을 두는 몇장은 그렇다. 왜냐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기대는 기쁘게 의외의 상황을 맞이한다. 마치 남녀가 등장하면 꼭 한번쯤은 같이 자주는 장면이 들어가기를 기대하는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다.

하지만 바둑을 두는 두사람이 서로 교감을 가지게 되는 상황은 신선하게 마치 다른 형태의 성교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형태의 그리고 그 점에서 '몽환적'이라거나 '동양적'이라는 subtlety(How do I love this word!)를 선사한다. 

샨사의 문장은 간결하다. 각장은 아주 짧게 구성되어있다. 전체가 92장이나 된다. 각장은 2-3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다.

이 샨사가 프랑스에서 그리도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는 지는 나로써는 전혀 이해 할수 없다. 그건 내가 프랑스사람이 아니기에 그 사회를 모르기에 전혀 이해 할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이 작가의 모국어인 중국어로 중국에서 출판되었어도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 지 의문이다.

이런 소설에 대한 절대적인 경의와 지지를 보내면서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문화적 포용력을 억지로 과시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수 없다.

이 소설이나 작가의 능력을 폄하라려는 생각은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까지 센세이션을 읽으킬 정도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1972년 생의 여자가 1930년대의 만주 벌판의 이야기를 써야만 했다는 것이 슬프다. 하지만 그 전세대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책의 절반을 일본인의 시각으로 쓸수 있었다는 것은 작가의 역량이며 그리고 세월의 지남이 가져다준 혜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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