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올림 8
이경화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의 권위는 물리적인 힘으로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이의 아버지는 가장의 권위를 물리적인 힘과 강압으로 얻으려 했었다. 그래서 때때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고 가족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폭력의 가정에서 정현이는 우울증을 앓아야 했고 신경정신과를 아버지 모르게 쉬쉬하면서 다녀야 했다. 정현이의 부모는 결국 이혼을 했고 현이는 드디어 엄마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었다.

"학교는 어때?" 엄마는 무심한듯 묻는다. 무슨 대답을 하든 엄마의 뒷말은 똑같다. "정말?" 현이는 엄마의 끊임없는 "정말?"이라는 말에 취조를 당하는 느낌이다. 정현이는 엄마의 탐색기에 뭔가 걸릴까봐 조마조마 하다. 사실 정현이는 엄마에게 대답하듯 그렇게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 정현의 생활은 더듬이만을 길게 늘이고 은밀하게 관찰하는 외계인처럼 생활 하고 있다. 다가오는 친구들을 무심하게 대하거나 냉정하게 거절하면서 만사가 귀찮다는듯.  엄마에게 외계인 같은 자신의 학교 생활이 틀킬까봐 조마조마하다. 엄마를 걱정 시키고 싶지 않다.

엄마의 임신. 정현이는 엄마의 임신을 받아 들이고 엄마가 아이를 낳는 것에 동의를 한다. 그리고 정현인  임신한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 버린다.

어느날 엄마는 엄마의 학교에서 퇴학 당한 아이의 이야기를 한다. 선생들은 아이들을 동성애자라고 하고 애들은 상대가 절대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우기고...... 엄마가 보기에 아이들은 정말 사랑하는 동성애자 같았다고.  퇴학을 시키지 않으면 다른 애들까지 물들일 거라는 중론에 아이들은 퇴학을 당했다고. 엄마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현인 엄마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음껏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수 없다. 혹여 내 안에 있는 동성애적 기질이 엄마의 레이더에 걸려 엄마를 걱정 시킬가 겁이난다.

정현이의 레이더에 걸린 아이 상요.  나와 어딘지 닮은듯한 아이. 그리고 과거 한 싯점 내게 다가온 동성 친구. 그 친구와의 만남이 가슴 설레였던 기억. 그리고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모를 구토. 정신과를 다니면서 현이가 알게 된 자신의 성정체성.  성.적.소.수.자.   치유 될 수가 없는 병이라는 진단을 받던날 현이는 절망을 했을 것이다.  내가 왜? 왜 하필 내가 성적소수자냐고 하늘에 종주먹을 대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치유 될수 없는 병이라는 진단을 받고도 엄마가 모르게 해 달라고 의사에게 사정하는 정현이의 모습이 보인다.  성적소수자라는 사실은 감추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직감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매몰차게 가슴설레게 좋은 친구를 밀어냈다.  스스로도 자신을 인정을 못하는 비겁함을 마음 속 깊이 묻어 두어야 했다.

뚜벅뚜벅 걸오 온 상요.  본능으로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자를 알아본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정현이 자신이 성적 소수자라고 말을 하지 않았는데 상요는 대뜸 현에게 이성애자들처럼 말을한다고 한다. 현이는 비로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비겁함이란 굴레에서 벗어날 싯점임을 직감한다. 현인 상요와 장자의 사상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상요의 제안에 의하여 떠난 바다여행에서 현이는 상요를 둘러 싼 무성한 소문의 진상을 들으며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했고 결과 부모님의 반응가지 알게 된다.

상요의 죽음.  기껏 다가온 친구의 너무도 뜻밖의 죽음. 정현의 의식은 둥둥 북소리가 되어 현의 의식을 마구 헤집는다. 두통과 구통의 유발. 아프기로 작정한 사람 같은 정현의 모습. 차리리 처음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았을때 엄마에게 이야기 했으면 어땠을까?......  저항기를 지나 수용기를 거치면 편해질거라던 의사의 말이 새삼스러워지는 것은 무슨 이유지? 앓고 나서 학교에 나갔을때 여진에게 비로소 정현이는 커밍아웃을한다.  

정현이는 상요가 부모에게 자신이 게이임을 말했던 것처럼 엄마에게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말 할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해야 하나? 단 한사람이래도 네가 있어 행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상요에게도 있었다면 상요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 한사람으로 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한 상요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진성과 여진이 함께 한 그들만의 상요 장래식은 정현이와 진성이가 동성애자임을 수용하는 경건한 의식이었다. 

엄마의 출산, 해인의 탄생. 그리고 '네 장롱 서랍 속에 있었던 비닐 끈.... 엄마가 치웠어. 서랍속의 수면제도 모두 버리고...." "엄마는 우리 아기가 자라는 모습을 현이와 함께 보고 싶어. 네가 애인이 생겨서 사랑하는 모습도 보고 싶고. 늙어가는 모습도 보고 싶어. 엄마는 ....현이가 너무 좋아." "알고 있었어.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네가 말하기 까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이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상요라는 애 자살 했다는 소리를 들으니가 덜컥 겁니났어 엄마는 널 잃고 실지 않다. 널 잃지 않기 위해서 엄마는 무엇이든 할 거야.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어서 미안하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한 정현이지만  부딪히는 현실은 녹녹치 않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그렇지만 정현을 이해 해 주고 자신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해주는 엄마와 여진이 있는 한에서 정현은 어떻게든 어려움을 잘 견뎌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엄마와 해인의 보호자연 하는 정현의 의식은 정현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현아 어려운 강을 건너왔구나. 앞으로도 곳곳에 어려움은 있을 거야 하지만 너를 믿어주고 네가 지켜 주어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너는 잘 해 낼거야 정현이 화이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걱정쟁이 열세 살 사계절 아동문고 59
최나미 지음, 정문주 그림 / 사계절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걱정쟁이 열세살>은 두가지 측면에서 내게 다가왔다.

우선은 '결손가정'이라는 사회적 편견 속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마음이 다치며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문제다.                                                                                                                                                                                           정상우는 열세살이며 초등학교 6학년 남자 아이다. 상우는 엄마와누나랑 셋이서 살고 있다. 아빠는 집을 나가서 연락이되지 않은지 3년이나 된다. 상우는 아빠의 부재를 믿고 싶지 않다. 그래서 상우는 출장을 갔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겠는데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사실을 말하겠는가? 말해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아빠가 없다는 사실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때 문제아로 손가락질 당하는 요소이거나 불쌍한 아이로 취급 받기 쉽상이다. 그런데 굳이 먼저 나서서  떠벌리고 다녀야 할 이유는 없다. 학교에서도 아빠의 역할은 그렇게 크지 않기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아빠와 함께하는 야영'가 문제가 되었다. 선생님이 상우에게 거기 참여 하기를 종용하신다. 아빠의 부재, 어떻게 해야할까?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상우는 집안 제사가 있는데 아빠가 손님을 맞아야 하기때문에 어렵다고 말을 해 버린다. '거짓말, 거짓말..... 자신이 한 거짓말에 스스로도 놀란다. 졸업을 두달 앞두고 아빠의 부재를 스스로 알려 결손가정의 아이로 치부되고 싶지는 않다.  가장의 부재를 두고 엄마와 누나는 너무나도 무표정하게  잘 살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건지 상우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누나와 엄마는 아빠의 부재를 인정하고 자기들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엄마와 누난 아빠의 부재가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아니, 저들도 괴로울 것이다.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렇게 씩씩함을 가장하여 살고 있는 것일것이다. 아빠가 없는게 뭐 자랑이라고 떠벌이고 다니고 아무렇지도 않은듯 행동하는 모습이 위선인듯하여 짜증스럽다. 엄마와 누나는 정상이 아님이 틀림없다는 상우의 외침은 그대로 상우의 고통이다. 상우는 학교에서도 명랑하게 잘 지내는듯 보였다. 아무도 상우의 고통을 눈치 채지 못하게 위장을  잘 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위장일뿐  아빠의 부재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터넷에서 오폭별과의 마음나눔. 그러나 오폭별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부터는 자신이 채팅을 통하여 뱉은 말들이 부담스럽다. 가면속의 얼굴이 들킬 것 같은 불안감은 인터넷 채팅도 더 이상 상우의 피신처가 되지 못한다.     언젠가 가면속의 자신의 맨 얼굴이 드러날 것만 같고 시시때때로 손가락질을 당할 것 같아 불안하다.친구들이 쑥덕댐. 뭐지? 아빠가 없다는 사실....... 상우는 하늘이 노랬다. "오폭별 네 이놈이 기어이......" 그러나 그것은 상우의 오해였고 누나 친구가 인터넷 홈피에 남기고 간 글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곤 당황한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상처 받은 사람들을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 상우는 그동안 오폭별과 이야기가 잘통했다. 오폭별의 정체를 알게 되고는 오폭별이 부담스럽웠지만 상처받고 울부짖던 상우를 다시 이해하고 품어주고 위로 해 주었던 것도 오폭별 이었다. 곁에 자신과 닮은 친구가 있다는 것. 자신이 누군가의 위로가 될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스스로 베일을 벗은 것은 아니지만 가면속의 맨 얼굴을 인정하기로 한 이상 상우는 더이상 아이가 아니다. 이제 성숙한 인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니아 연대기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나아 이야기는 총 7편으로 구성 된 장편 서사판타지다.

내가 나나아 이야기 시리즈를 읽게 된 계기는 <해리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시리즈가 영화화 되면서 판타지가 하나의 문화 코드화 되었을 때 대체 판타지란 무엇인가 궁금하여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나니아 이야기>가 판타지의 모범이며 고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나친 친절로 인한 불편함(독자를 무시한듯한 느낌)과 반복되는 '앞에서도 말했지만~'이란 뉘앙스의 문구들과, 사전 지식으로 알게 된 기독적인 가치관과 윤리관이 자꾸 읽는데 방해가 되었었다. 그러나 내 자녀는 내가 느끼는 '읽는 내내 느꼈던 불편함과 방해'를 전혀 느끼기 못하고 책을 읽는것을 보면서 아이가 반복해서 읽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내가 놓치는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니아 이야기의 <마지막 전투>까지 본 지금은 '판타지의 모범이며 고전'이라는 말에 동의를 한다.(이후에도 많은 판타지를 보았지만 다른 작품을 보면 볼 수록 판타지의 기본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라는 생각은 더 강하다.)

나니아, 이곳은 인간들이 제멋대로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아슬란이란 절대자에 의하여 숨겨진 또하나의 세계이며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보여지고 느껴질 수 있는 세계고 믿는자들의 세계다.  나니아 세계로의 진입은 인간이 이성적인 판단으로 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에비된 자 만이 예비 된 시간에 예비 된 형식에 의하여만 출입이 가능한 공간이다. <마법사의 조카>에서는 반지를 통하여, <사자와마녀와 옷장>에서는 옷장을 통하여, <캐스피언 왕자>에서는 뿔나팔로, <새벽출정호>에서는 그림을 통하여, <은의자>에서는 숲을 통하여, <마지막 전투에>에서는 열차사고로 인간의 세계에서 판타지의 세계로 갔지만 한번도 인간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다. 모두 우연을 가장한 필연에 의하여 인간들은 판타지 세계로 진입을하였고 판타지 공간에는 이미 그들이 해결 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판타지 공간에서 인간이 상대로 하여야 할 대상은 때로는 독재자와 파도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실제 인간이 상대로 해야 할 대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 편안함과 물질적 욕구, 사회적인 야심이 빚어내는 헛되거나 지나친 욕망과 인간의 나약함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신과 거짓말이었다.

서문이나 해설에서 보면 기독교적인 가치관, 윤리관에 의하여 이 책이 씌여졌다고 하지만 나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의 굴레를 씌우고 싶지 않다. 그냥 인간이 살아가다가 부딪힐 수 있는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글로 이해하고 싶다. 

늘 자신의 욕망을 경계하고 인간이 느끼는 불안, 두려움의 정체가 불신이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 것인가 하는 답을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자와 마녀와 옷장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니아 이야기 시리즈를 읽으면서 나는 지나친 친절은 책을 읽는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정도면 그렇게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텐데 많은 부연 설명으로 참 짜증스럽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니아 이야기 시리즈를 반복해서 보았다.  시리즈 7권 중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책은 사자와 마녀와 옷장, 새벽 출정호의 항해와 마지막 전투 순이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 에드먼드와 그 형제들은 옷장을 통하여 또하나의 열린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은 하얀마녀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외부에서 네 아이들이 오면 하얀 마녀가 이룩 해 놓은 삭막한 겨울의 세계는 종말을 고하고 평화의 시기가 온다고 한다.  그런데 외부로 부터 정말 이이들이 나나니아로 들어 왔다. 하얀 마녀로서는 자기가 이룩 해 놓은 왕국이 무너질  판이니 당연히 방어를 해야만 한다.

하얀 마녀는 욕망의 터키젤리를 이용하여 에드먼드와 그의 형제들을 사로 잡을 계획이었지만 계획대로 일은 되지 않는다. 욕망의 터키젤로로 유혹을 당했던 에드먼드가 하얀 마녀와의 약속을 어기고 혼자 하얀마녀 앞에 다시 나타났고 에드먼드는 포로로 잡힌다. 포로로 잡힌 에드먼들르 구하기 위하여 나머지 형제들이 아슬란과 나타나게 되는데 하얀 마녀는 돌탁자의 맹세에 의하면 모든 반역자들은 합법적인 포로로서 황제의 사형 집행관인 자신이 죽일 권리가 있다고 말을 한다.  하얀 마녀에게 잡혀 있는 에드먼드는 분명 하얀 마녀의 입장에서 반역자다. 그리고 합법적인 포로다. 이를 부정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아슬란도 이를 인정 할 수 밖에 없는데 아슬란은 어드먼드 대신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마치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듯이.

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나니아 이야기를 보는 즐거움은  아이들이 옷장을 통하여 다른 세계로 간다는 발상과 이책에서 보여주는 많은 동물들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에드먼드가 막었던 욕망의 터키 젤리 맛도 보고 싶었다. 달콤하기만 할까? 단지 더 먹고 싶다는 욕망만이 가득할까? 김율희의 <단지 안의 꿀>처럼 나를 시험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을까? 과연 터키젤리 앞에서 나는 어떤 행동을 보일까 스스로 많이 궁금해 졌다.

비록 판타지의 고전이라고 이야기 되고 있지만  연대표와 지도를 보면서 이것이 지구상 어디쯤에서는 꼭 있을 법 한 이야기가 안니가 하는 생각도 잠시 해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모를 설명하면서 작가는 모모가 보통의 아이가 아니라 특별한 아이라고 말을 한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누군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모모는 언제나 진지하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모모의 주특기는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모모가 사는 마을에서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모모에게 가 보게!"라는 말이 일상화 되었다고 한다. 모모가 살던 마을에서 모모는 요즈음으로 치면 상담자의 역할을 담당 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모를 중심으로 모이던 사람들이 도시에 회색 신사의 숫자들이 늘어 남과 거의 동시에 모모를 더 이상 찾지 않는다. 모모는 왜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는지 궁금했다.

 회색 신사들, 그들은 지칠 줄 모르고 무슨 일인가 열심히 하고 있는듯 보였다. 그들의 수는 날로 늘어 났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늘 거기에 있지만 내가 인식하지 못한 모든 것을 우리는 알아 챌 수가 없다. 회색 신사들의 존재도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회색 신사들은 도시를 돌아 다니며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면서 인간에게서 '더 빨리, 더 많이'은 성공을 빌미로 욕망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인간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갔다.

표면적으로 회색 신사들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겨 인간을 욕망의 노예로 전락 시키면서 자신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던 인간다운 본성을 좀먹으며 살고 있었다. 요즈음 모든 것을 경쟁의 원리에 입각하여 보고 성공만이 최상인냥하는 오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성공이란게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인지는 모으겠지만 과연 나는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접하게 되었다. 문득 조화로운 삶을 꿈꾸던 헨리 니어링이 생각났다.  조화로운 삶이라...... 과연 그런 삶을 실천 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