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 전쟁 시소 18
야엘 아쌍 지음, 윤미연 옮김 / 시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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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끔은 우리가 누리는 것에 눈을 두어볼 필요가 있다.

늘 거기 있는 것, 그것에 특별히 눈을 두어 본적도 없었고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 해 본 적도 없다. 그것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고 언제까지 그곳에 있을 것인지 궁금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존재하는 것뿐이었다. 공기가 그랬고, 물이 그랬고, 햇볕이 그랬다. 부모가 그랬고, 자유 또한 그랬다. 그것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그것들은 거기 존재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러다가 어떤 문제가 발생하여 이제까지 우리 주변에 늘 있어왔고 우리가 항상 누리던 것을 더 이상 누릴 수 없을 때야 비로소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막스가 사는 사회에서는 학생들을 색깔교복으로 등급을 구분한다. 현재 막스가 입고 있는 갈색 교복은 막스가 사는 사회에서 그리 내세울만한 등급이 아니다. 막스가 전에 입었던 빨간색 교복만 해도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질만한 등급의 옷 색깔이었다. 등급이 좋은 색깔의 교복을 입은 사람들은 자신보다 등급이 낮은 색깔 등급의 옷을 입은 사람의 명령에 복종을 해야만 한다. 과거 빨간색 교복을 입었을 때의 막스는 자신보다 낮은 등급의 색깔 교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같은 등급의 아이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렸었고 자신보다 등급이 낳은 등급의 색깔 옷을 입은 아이들에게 유세를 부려 본 기억은 없다. 단 한 번도 옷 색깔로 인간의 등급을 매긴다는 사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빨간 교복을 입었을 때의 막스나 갈색 교복을 입었을 때의 막스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아니다. 단지 교복의 색깔이 바뀌었을 뿐인데 사람들의 시선은 너무나 다르다. 지금 빨간 색의 교복을 입고 있고 있거나 과거 막스가 빨간색 교복을 입었을 때의 친구는 막스를 하찮게 대한다. 현재 갈색 교복을 입은 아이들 또한 과거에 빨간색 교복을 입었던 막스를 백안시 한다. 사람들의 시선쯤은 힘들지만 참을 수 있다. 갈색 교복을 입은 채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면 직업을 얻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러나 막스는 대학을 가고 싶다. 대학을 졸업하고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 갈색 교복을 입은 채 졸업한다면 대학을 진학 할 수가 없다. 반드시 빨간색 등급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빨간 교복을 입었던 막스가 갈색 교복을 입기까지 막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출발은 이웃집 골동품가게 펠릭스 할아버지가 도움을 청하던 날부터 이야기는 시작 된다. 막스가 사는 사회에서는 남에게 도움을 요청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의 일은 스스로 처리해야 하며 부모 자식 간이래도 신체적 접촉을 통한 애정을 표시해서도 안 되었다. 사람들의 생각을 자유스럽게 표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시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펠릭스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막스에게 소포로 온 물건을 좀 옮겨 줄 수 없느냐는 부탁을 한다. 펠릭스 할아버지의 부탁을 기점으로 막스는 정부가 금지하고 있는 책, 다큐멘터리, 영화 등을 보게 된다. 막스는 자기 속한 이전의 세계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체제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막스가 엄마 몰래 새로운 지식에 탐닉하는 동안 막스는 늘 피곤해 절어있었고 성적은 곤두박질 쳤다. 막스를 미행한 막스의 엄마가 이성을 잃어 소리치고 누군가 당국에 신고를 해 펠릭스는 당국에 체포 된다. 그리고 막스도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로 인하여 막스는 엄마를 믿지 않는다. 과거 친구였던 아이들도 막스를 경계하고 같은 교복을 입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는 막스의 학교생활은 만만치 않다. 교장인 푸아사르는 건건이 막스를 괴롭힌다. 수시로 감시자의 눈길을 느낀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당국에서 통제와 감시를 한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의 자유를 향한 열망은 억누를 수 없다.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지하에 숨어들었다. 펠릭스도 그런 사람들의 중 하나였고 펠리스 아빠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동안 막스가 펠릭스네 집에서  읽은 책, 본 다큐멘터리와 영화는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지키고 싶어 하는 소중한 문화적, 지적 자산이었다. 막스는 통제와 감시 속에서도 은밀하게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들을 보게 되었다. 지금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막스는 알고 있다. 그리고 펠릭스를 통하여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자유롭게 표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세상을 위하여 막스 또한 지하조직의 일원이 된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누군가 땀 흘려 이룩해 놓은 결과임을 막스는 알고 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애써 획득한 것이지만 제대로 쓰고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그 누군가의 목숨과 땀은 의미가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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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감동시킨 위대한 글벌레들 - 명문장가들의 놀라운 글쓰기 비법을 공개한다 세상을 바꾼 벌레들 1
김문태 지음, 이상미 그림 / 뜨인돌어린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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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감동시킨 위대한 글벌레들>을 보면서 생각을 한다. 우리는 흔히 '글벌레'라면 책을 많이 읽고 책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책 제목으로 선택한 '글벌레들'이란 표현이 적확한지 잠시 생각 해 보았다.

'명문장 가들의 놀라운 글쓰기 비법을 공개한다.'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보면서 정약용, 박지원, 이순신, 밀턴, 고흐, 다윈, 레에첼 카슨이 세상을 대하고 사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지 볼 수 있었다. 또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어떻게 전달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약용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핵심적인 내용을 콕 집어 내야한다고 한다. 자신의 눈에는 약한 자의 아픔이 많이 보였다면서 그들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어 시를 쓰게 되었다고 말을 한다. 박지원의 눈에도 세상의 위선이 많이 보였다. 그릇된 세상을 바라보면서 침묵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릇 된 것은 그릇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고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다고 모두 정치를 할 수도 없는 상황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알맞은 재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던 그는 풍자 소설을 썼다. 이순신의 삶 또한 편온 하지만은 않았다. 격동의 시기를 지나온 그는 매일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자신 안에 이는 생각들을 가다듬었다. 정약용, 박지원, 이순신은 글을 쓰는 형태는 각기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엄격했고 세상과 자신이 바로세기를 바랬다. 글의 형식보다도 그들은 글에 담고 있는 정신을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밀턴은 교훈이 없는 재미는 한갓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말을 한다. 밀턴은 교훈을 훈계라고 보지 않는다. 강제로 무엇을 주입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교훈을 감동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밀턴은  서사시라는 장르를 선택했다. 고흐는 화가다. 화가와 글, 얼핏 보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흐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그릴 때의 상황과 심정을 동생에게 편지를 써왔다고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편지는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그림 외에 또 하나의 표현 양식이었다. 그는 편지를 씀에도 형식보다는 겸손한 마음, 순수하고 뜨거운 마음, 희망적인 마음을 담아야 한다고 말을 한다. 그의 편지는 그가 아직 그리지 못한 또 하나의 그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찰스 다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글은 어떤 관점, 목적으로 기록 되었느냐에 전혀 다른 글이 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자신은 과학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을 적는 과정에서 과학적 접근을 꾀한다고 한다. 글을 쓸 때는 치밀하게 관찰하고 사실을 확인하고 정리하면서 실험하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적는다고 한다. 단순한 기록은 현상에 대한 보고일 뿐이지만 자신과 생각을 덧붙이는 일은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보고 느꼈는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고 말을 하고 있다.  레이첼 카슨은 그는 환경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자는 게 아니라며 모든 생물들이 제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자연의 일부인 우리 인간들도 잘 살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에 대하여 아는 것보다 자연에 대한 놀라움 신비로움과 기쁨을 느끼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레이첼 카슨은 호소문을 썼다.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는 자연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조사하고 통계 냈다.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하여 생물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또 과학적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문학적 상상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것은 보물을 홀로정글을 개척하며 나가는 탐험과 같다고 말하며 자신의 글은 끊임없는 퇴고로 완성 된다고 말을 한다.

이글을 읽으면서 자기 분야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무언가 자기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각자의 분야에 다른 이름이 주어질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은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글이 담고 있는 정신이 문제라는 것을 더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자기 스타일에 맞게 담아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추신: 단순히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과 독서록을 작성하고 느끼는 것은 또 다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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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휴가 알맹이 그림책 6
구스티 글 그림, 최윤정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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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에게 휴가는 의미가 없다.

열심히 일을 하던 사람이 잠시의 휴식, 그것이  휴가다. 따라서 파리가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는 일이 전제 되어야 한다.

파리는 어떤 직종의 일을 할까? 

쉼 없는 날갯짓으로 인간에게 부채질?  음식의 간 대신 봐주기? 
아니, 어쩜 오너일지 몰라. 누군가를 대신하여 다신 사과하는 직종의 사업체를 가진 오너.
아무튼 파리는 열심히 일을 한 후에 드디어 휴가다. 

오늘은 수영하러 가기로 한다. 

수영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을 다 가지고 나왔다. 

그가 챙긴 물건을 보면  물품가방, 선크림, 수건, 물놀이용 공. 인간들이 수영을 하는데 필요한 물건과 다름이 없다.

먼저 한발 담가보고, 다음에 또 한발을 담가보고....

준비운동도 착실하게 했을 것 같다.  파리의 준비운동이라...... 날개도 파닥여보고 폴짝폴짝 뛰어도 보고.... 또 어떤 동작이 있을까?

그리고 다이빙으로 입수!

룰루랄라~ 룰루랄라~ .  이 밀려오는 행복감!!

과하면 모자람만 못 하나니......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뭐야? 뭐지? 
아이 참,  우산을 가지고 오는 건데 그랬어. 나 왜 이렇게 준비성이 없는거야! 속상해 죽겠어.

그런데 저 높은데서 내려오는 것은? 뭐~지? 
 "첨벙!"

몰려오는 파도.

'이대로 끝이구나, 이렇게 죽는 구나.' 이내 들려오는 소리.

'엄마 나  다 했어!"

뭐야? 뭘 다했다는 거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다. 서둘러 뒤로 책장을 넘긴다. 아~ 반전의 기막힘. 왜 이걸 못 봤지? 너무 글에만 집중을 했구나. 너무 파리에만 집중을 했구나. 다시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응, 그런 거구나.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는 주변을 한 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혹 알아요?

파리가 다시 수영을 하고 있을지. 만일 파리가 수영을 하거들랑 함께 공놀이도 해 보아요. 물장구도 같이 치고요. 수영을 하고는 싶은데 지난번에 끔직한 기억 때문에 수영은 차마 못하고 화장실을 빙빙 돌고 있는 파리를 만나더라도 반갑게 인사정도는 해줄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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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신이 내게 왔다
백승남 지음 / 예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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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아니 이 책에 대한 소개 글을 보면서 일본 만화 <데스노트>를 연상 했었다. 때문에 좀 더 일찍 살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지 않고 있다가 세 군데나 서점을 돈 끝에 샀다. 읽어보니 <데스노트>와 도입부분은 같은데 이야기가 전개 되는 면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현재 중학교 2학년인 주인공은 걸핏하면 생활지도부장에게 불려가 꼴통 취급을 받는다. 꼴통 취급을 받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 나가는 가운데 자신에게 일어 난 일-수첩을 주우면서 흑문도령을 만나고 그날 이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자신-을 이야기함으로 작품은 시작된다.

주인공 나는 자기세계(게임과 무협지의 세게)에서 몰입한 아이이다.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잦은 출장과 새 여자가 있는 상황이고 엄마는 알콜중독이다.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이 없고 이해하려들려 하지 않는 선생님과 감옥과도 같은 학교...... 주인공이 처한 현실이다.

수첩을 주운 후 주인공의 내부에는 무언가(여기서는 덩어리로 표현된다) 들어 와 이야기를 한다.-이건 일본 만화 <기생수> 같은 느낌이 든다. <기생수>에서는 어쩔 수 없는 외계생물과 인간과의 기막힌 동거를 하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며 폭력성을 부추기는 이야기다. 폭력성을 부추기면서 덩어리는 자신들의 행위를 '선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선을 위한 폭력이라고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사람들은 '선을 위한 폭력'이란 말을 믿지도 생각지도 않는다. 아니 선을 보다는 먼저 폭력이 눈에 들어 올 뿐이다. 자신이 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고맙다는 말 대신 두려움을 먼저 느낀다. 자신이 베푼 선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주인공은 선을 지키기 위한 폭력이라는 부분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심을 한다. 폭력이 난무를 할 때 마다 주인공 내부에서 덩어리의 기운은 커가는 듯하다. 시시때때로 덩어리에 휘둘리는 주인공. 덩어리의 힘은 주인공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마구잡이로 폭력성은 드러나더니 결국은 칼부림 끝에 주인공을 정신과 치료를 받게 만든다.

정신병동에서 주인공은 완수라는 형을 만나게 된다. 주인공은 완수 형이 하는 이야기를 온전하게 이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완수 형 또한 자신처럼 수첩을 주웠고 자기 안에 자기가 받아들인 덩어리와 비슷한 기운을 받아들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자기 만이 완수를 도울 수 있다고 주인공은 생각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퇴원 할 무렵 인사라도 나눌 겸해서 완수를 찾았을 때 서류상 어디에도 완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완수에 관한 모든 것이 환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던 주인공이 병원에서 나와서의 생활은 이전의 생활과 많이 다르다. 다시는 검은 수첩과 흑문 도령에 의지 않고 살려는 주인공의 몸짓, 자신의 나약함을 틈타 덩어리에게 휘둘릴까 노심초사하는 모습.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자 하는 모습에  한 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갈까 아슬아슬함을 느끼게 된다. 불안하긴 해도 누군가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판단으로 살아가려는 모습은 아름답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한국적 이미지의 신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지만 한국적 이미지의 신들을 끌어 들인다면 흑문도령을 훨씬 구체화 해야지 엄마를 원천강이니 뭐니 묘사하는 부분은 많이 생뚱맞다. 작가가 의도 했던 한국적 이미지가 무엇이며 어디를 그렇게 표현하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엄마를 묘사하는 부분이 작가의 의도와 맞닿은 부분이라면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보여 진다.

주인공(작품에 주인공의 이름은 없다)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나약함을 볼 수 있었고 본인이 의도한 바가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느냐는 더 중요하다는 것도 동시에 느낀다. 본인은 선을 위한 응징차원에서 폭력을 사용 했지만 사람들은 주인공의 의도(선)보다 먼저 폭력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주인공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것을 볼 때 본뜻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뜻을 펼치는 수단, 과정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본뜻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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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창의력을 깨우는 일곱가지 법칙
켄 로빈슨 지음, 유소영 옮김, 백령 감수 / 한길아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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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이라고 하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무엇'을 먼저 떠올린다. <내 안의 창의력을 깨우는 일곱 가지 법칙>을 보면서 창의력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시대에나 창의성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요즈음처럼 창의성이 요구되는 때도 없을 것이다. 창의성이 더 요구되는 이유는 과거에 비하여 과학 기술은 발전하였고 발전된 과학 기술에 기대어 사회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히 혁명의 소용돌이라고 할 정도의 대 변혁기를 맞고 있고 때문이다. 대 변혁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의 사고방식으로 사회의 제 현상을 대하려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지적은 뼈아픈 충고였다.

기술의 변화 속에 새로운 전혀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라는 인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학력의 인력만이 넘쳐나고 있으며 산업현장에서는 인력의 부족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슷비슷한 조건에서 다른 사람과의 변별력은 바로 창의력이라 한다.

저자 켄 로스는 창의력도 지능의 한 가지라고 보았다. 또 특정한 사람만 창의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능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창의력은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 사람들에게 창의성이 발휘되는 것은 그 사람이 지니고, 누리고, 만나고, 배우는 모든 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따라서 창의성이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무엇일수 없다.

창의력은 개인이 속하고 있는 문화에서 양분을 얻으며 다시 그 문화 속으로 개인의 창의력을 환원한다는데 동의한다. 다만 개인이 창의력을 발현하는데 있어 자신에게 맞는 매체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에게 맞는 매체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또 내 아이들을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창의력이 무엇이며 어떻게 내안의 창의력을 깨울까 배우려고 했다가 더 많은 고민을 안게 되었지만 '패러다임에 맞는 사고의 전환'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창의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란 말은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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