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미술


백제의 건국과 발전

백제는 온조왕(溫祚王)을 시조로 하여 BC 18년 현재의 한강 북쪽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한 고대 삼국 중의 하나이다. 온조왕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朱蒙)의 셋째 아들이다. 온조는 동명성왕의 전처 소생인 유리(琉璃)가 북부여로부터 졸본부여(고구려)로 들어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종전에는 인천으로 비정하였으나, 최근에는 충남 아산시 인주면 지방이라는 설이 유력)로 가고,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경기 광주로 비정하였으나 최근에는 충남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라는 설이 제기됨)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라 칭하였다.

얼마 뒤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어 국호를 백제로 고치고 동명왕묘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이상은 모두 BC 18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BC 5년(온조왕 14)에는 남한산에 천도하고 9년에는 마한을 멸망시켰으며, 10년에는 아들 다루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백제가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실질적인 시조로 등장한 것은 고이왕 때부터이다. 또한 근초고왕 대에는 마한 전역을 통합한 뒤 크게 발전하여 역대 31왕으로 이어지면서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할 때까지 고대국가로서 큰 축을 형성하였다.

유리한 자연환경과, 지배층이 북방 유이민을 모체로 한 단일체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등의 이점으로 일찍부터 정치 ․문화적 선진성을 과시하고, 4세기 중엽에는 일본, 중국 랴오시[遼西] 지방 ․산둥반도[山東半島] 등지와 연결되는 고대의 해외 상업세력을 형성하였으며, 특히 일본 고대문화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백제 미술 개관

백제는 마한의 한 국읍세력의 일파로써 백제국(伯濟國)이 성장, 발전하여 이룩된 국가이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북방 이주민으로, 종족적으로는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백제미술의 근간은 고구려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가 국가로 성립, 거듭 발전하면서 각국간에 정치․경제․지역적인 환경의 차이, 대외관계 등에 따라 상호 견제와 영향으로 독자적인 미적 특성이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원래 북방적인 성격을 가진 백제의 미술은 해상교통이 발달되어 점차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불교미술과 중국의 남조 문화를 수용하여 온화하고 우아하며 향토적인 색채의 미적 특성을 발전시켰다. 백제의 미술은 부드럽고 모나지 않으며 인간미가 넘치고 세련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특색은 5세기부터 7세기 중엽까지의 고분벽화, 불상, 와당을 비롯한 공예품, 탑 등의 미술 전반에 걸쳐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가장 큰 사상적인 변화는 무엇보다도 대륙에서 전래된 불교사상과 그 영향을 받은 미술품이다. 불교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수용한 고구려보다 12년 후인 침류왕 2년(384년)에 중국의 남조에 해당되는 동진으로부터의 전래되었다. 이전에도 외국의 문물이 직접 교류되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문화적 접촉이 있었음을 고분의 축조나 출토유물의 성격에서 알 수 있다. 불교의 영향으로 한성시대부터 사찰의 건축과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불교 용구의 생산 역시 한성시대부터 사비시대까지 이어져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백제미술의 발전 단계는 정치적인 변천과 맥락을 같이하여 한성시대(BC 18~475년), 웅진시대(475~538년), 사신시대(538~663년) 등 왕도의 천도와 같이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한성시대는 초기의 약 500년간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현존하는 미술품은 거의 전무하며,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의해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마한이 3세기 후반부터 진나라에 조공무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계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인 경기 양평, 문호리, 삼곶리, 가락동, 석촌동, 연천 등에서 토기, 대롱옥[管玉], 널무덤[土壙墓]출토 흑유거치무늬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중국 동진에서 수입된 4~5세기 미술품은 청자 도연편(陶硯片), 흑갈유 전문편(錢文片), 청자 사이호(四耳壺), 법천리 청자 양형기(羊形器), 화성군 천계호(天鷄壺) 등이 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한산에 절을 세우고 승려를 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웅진시대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백제세력이 위축되면서 64년간 천도했던 시기였다. 초기에는 지방호족과의 충돌로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곧 국내를 정비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고, 불교를 발전시키는 한편, 중국 양과의 문화적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6세기 전반에 축조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속공예품을 위시하여, 새로운 전축분 축조, 대통사 창건, 수원사 등과 같이 불교중흥의 바탕을 이룩하였다. 불교에서 외래양식 수용은 북위와 동시에 동․서위 양식을 받아들여 강건한 기상이 보이는 한편, 백제적인 우아함과 세련된 기법으로 승화시켰다.

백제의 웅비시기라할 수 있는 사비시대는 부여로 천도된 123년 동안을 말한다. 백제 중흥의 깃발을 펄럭이었던 성왕(523~554)은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 양나라와 교류을 통해 새로운 선진 문물을 수용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미륵사, 왕흥사와 같은 대찰이 창건되었는데 사료에 ꡒ사찰과 탑이 매우 많다ꡓ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흥하였다. 중국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남조 문화뿐만 아니라, 북조와의 연관성을 미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백제미술은 국제적이고, 개방적이면서 백제적인 특징을 찬란하게 승화시킨 절정기의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제의 회화는 능산리고분의 비운문과 연화문에서 볼 수 있듯이 부드럽고 완만한 움직임의 느낌을 자아낸다. 또, 부여 능산리 고분의 사신도는 매우 세련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제의 회화는 6세기에 일본으로 수출되어 일본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597년 일본에 건너간 아좌태자는 일본 성덕태자의 초상을 그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드럽고 인간미가 넘치는 백제 미술의 특징은 불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양식적인 면에서 외래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들의 얼굴은 복스럽고 밝은 웃음으로 가득 차 있어 '백제의 미소'라 불린다. 밝은 웃음이 가득한 복스러운 얼굴에서 백제의 특유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과 말기의 대표작 금동관세음보살상은 그 기법이 고졸한 것으로 백제의 온화함에 중국 남북조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이러한 불상은 일본에 전해져서

아스카 시대 조각의 터전을 이룩하였는데, 나라 법륭사 백제관음과 광륭사의 목조반가사유상 등 훌륭한 불상 조각품을 탄생케 하였다.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은 무령왕에 대한 기록인 지석과 함께 금제 관식, 무기, 그릇, 구리 거울 등 많은 껴묻거리가 발견되어 당시의 발전된 공예 미술을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에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도교와 불교의 상징성이 동시에 반영된 훌륭한 공예품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한 산수문전은 산수화의 본고장인 중국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백제인의 수준 높은 기예를 시사해 주는 중요한 예술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전하는 백제의 건축물은 없다. 그러나 문헌사료에 백제의 공장들이 신라의 황룡사 9층탑과

일본의 법륭사, 사천왕사, 법륜사등을 건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건축에서 백제시대 건축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석탑으로는 목조탑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초기 양식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균형이 잡힌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다. 미륵사지 탑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석탑으로서 9층이며, 우리 나라 탑 건축의 원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그 구조가 목조 건축의 양식을 번안한 백제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 탑은 각층의 체감률이 심하여 안정감이 강조되면서도 단순하고 명쾌한 균형미를 잘 나타내고 있어 전체적으로 내강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무녕왕릉과 백제의 영화

무녕왕릉은 백제 제25대 무녕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해 있다.


무녕왕릉의 발견

1971년 문화재관리국에서 공주의 한 고분에 물이 스며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뒤쪽에 도랑을 파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 인부의 괭이 끝에 벽돌이 걸렸는데 그것이 바로 무녕왕릉 앞면 벽의 윗 모서리였다. 이어서 계속 파고 내려가 보니 벽돌로 막고 강회를 발라 단단하게 막은 입구가 나왔다. 무덤이 틀림없었으나 당시에 누구도 그 무덤이 무녕왕의 것이었다는 것을 몰랐으며, 또한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신라고분과는 달리 백제고분은 도굴 당하기 아주 쉬운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까지 백제고분은 처녀분으로 발굴된 것이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발견한 이 고분은 처녀분임과 동시에 무덤 안에 무덤주인의 이름을 알려주는 지석까지 매장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한국고고미술사계의 일대 쾌거라 할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64년 동안 백제의 수도이었던 공주는 잃어버린 백제의 옛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무녕왕릉을 지켜오다가 1,300년만에 비로소 세상에 내놓게 되었던 것이다.

출토현황

능은 경사면의 풍화암반층을 굴착하고 벽돌로 연도와 현실, 배수구를 만들고 그 위에 분구를 조성

한 아치형 전축분이다. 원형인 분구의 지름은 약 20m이며, 현실의 바닥에서 분구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는 7.7m이었는데 토압이 현실에 적게 미치도록 분구의 중심을 현실의 중심보다 5.8m 위쪽에 조성, 축조하였다. 봉토는 현실 주위의 풍화암반을 평평하게 깎아낸 후 석회를 섞은 흙으로 쌓아 원형을 만들었다. 현실은 장방형의 단실분으로 남북 4.2m, 동서 2.72m이며 높이는 3.14m에 이른다. 현실의 내부는 남쪽의 벽면에서 1.09m를 제외하고 모두 바닥보다 21cm 높게 하여 왕과 왕비의 합장관대로 하였다. 네 벽 가운데 남․북벽면은 밑에서 천장부까지 수직으로 올라갔고, 동․서벽은 벽면의 상부에서 차츰 안으로 기울어지는 아치형 천장을 구성하였다. 벽면의 벽돌을 쌓은 방법은 길이모쌓기와 작은모쌓기를 반복하였는데, 길이모쌓기는 4개의 벽돌을 누여 포갰고, 작은모쌓기는 1개의 벽돌을 세워서 배열하였으며, 공적법(空積法)을 사용하였으나 벽돌과 벽돌 사이에 간간이 석회나 진흙이 끼어있다. 아치형 천장의 구성은 남북의 수직 벽 최상부의 좁아진 부분에서 작은모쌓기를 생략하여 벽면을 좁혔으며, 동서의 벽은 7단, 8단에서 작은모쌓기에 키가 작은 사다리꼴의 벽돌을 사용하거나, 길이모쌓기도 벽돌을 3개로 줄이고, 그 중 1개는 횡단면이 사다리꼴로 된 것을 사용하여 점차 만곡도(彎曲度)를 증감시켜 완성하였고 천장에서 벽돌의 이음새에는 석회를 발라 견고하게 하였다.

현실을 구축한 벽돌에는 사격자(斜格子)의 망상문(網狀紋)에 6~8엽의 연화문, 그리고 인동문(忍冬紋)이 장식되어 있는데, 길이모쌓기의 벽돌과 작은모쌓기의 벽돌에 시문된 형태가 다르다. 길이모쌓기의 벽돌에는 망상문과 연화문을 1개의 벽돌 안에 시문하였지만, 작은모쌓기의 벽돌은 연화문 반절과 인동문을 배치하며 2개의 벽돌을 맞대어 문양이 완성되도록 하였다. 현실의 벽면에는 5개의 보주형 등감(燈龕)이 설치되었는데 북면에 1개, 동․서면에 각각 2개씩이 있으며, 보주형의 윤곽을 따라 화염문이 채색되었고, 주위에는 등잔불에 그을은 흔적이 남아 있다. 현실의 바닥과 관대는 벽돌을 이중으로 깔았으며 밖으로 드러나는 윗면의 벽돌을 삿자리모양으로 배열하였고, 밑부분의 벽돌은 석회를 발라 암반에 고정시켰다. 관대는 암반층인 지반 자체를 높게 깎고 벽돌을 깐 것이다. 연도는 현실의 남벽 중앙에 설치되었는데 길이 2.9m, 너비 1.04m, 높이 1.45m로 현실과 같은 아치형이며, 바닥에는 삿자리모양으로 벽돌을 깔았는데 현실의 바닥보다 높아 관대와 동일한 면을 이루었다. 연도 입구의 좌우에는 塼壁을 수직으로 쌓았는데 그 높이는 3.04m이다. 연도의 전축방법은 현실과 동일하나 문양을 구성하는데 있어 8엽 연화문을 구성하는 전을 사용하지 않았다. 배수구는 현실과 연도의 경계부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가운데 바닥 밑으로 설치되었으며, 남북으로 19.7m의 길이에 이르게끔 벽돌을 사용하여 구축하였다.

연도 입구에 놓여 있던 지석에서 보면 무녕왕은 523년 5월에 사망,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 529년 2월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왕릉은 왕이 죽기 11년 전인 512년에 이미 축조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고 있다. 중요한 것으로는 연도 입구에 동발 , 청자 육이호 등이 쓰러져 있었고, 바로 그 뒤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오수전(五銖錢)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으며 지석 뒤에는 석수(石獸)가 남쪽을 향하여 지켜서 있었다. 현실의 남쪽에도 동발과 청자 사이호 등이 쓰러져 있었으며, 현실의 관대 위에는 원래 왕의 목관은 동쪽에, 왕비의 목관은 서쪽에 놓여 있었던 것이 썩으면서 쓰러져 서로 겹쳐져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들과 몇 점의 부장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중요장신구로는 왕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 1쌍, 금제뒤꽂이 1개, 금귀걸이 1쌍, 은제과대와 요패 1벌, 금동신 1쌍, 단룡환두대도와 金銀裝刀子 각 1개 등과 왕비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 1쌍, 금제귀걸이 2쌍, 금목걸이 2개, 은팔찌 1쌍, 금팔찌 1쌍, 금은장도자 2개, 금동신 1쌍 등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왕과 왕비의 두침(頭枕)과 족좌(足座)가 관 안에 놓여 있었고, 중요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개, 금팔찌 1쌍, 은팔찌 3쌍, 청동용기, 은제탁잔(銀製托盞)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발견된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서는 최초로 피장자와 축조연대를 확실히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 있으며, 왕과 왕비의 관식 등도 백제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무녕왕릉의 역사적 의의

71년 7월 충남 공주 웅진동 송산리 고분군서 발견된 무령왕릉은 한일역사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그후 30년. 무령왕릉의 발굴에 따른 연구성과는 어떤 것이며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공주대 부설 백제문화연구소(당시 소장 朴秉國)는 1991년 10월 18,19일 이틀간 공주시 문화회관 소강당에서 {무령왕릉의 연구현황과 제 문제}란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고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점검하는 한편, 백제사 연구의 진로를 모색했다. 참가학자들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을 비롯,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는 유물의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에 대해 논의하고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왜, 양과와의 관계, 백제를 둘러싼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해 진단했다. 학술회의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재의 나무 종류를 농학자가 분석, 백제와 왜의 관계를 규명하는 논문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박상진교수(경북대)는 {백제 무령왕릉 출토관재의 수종}이란 발표에서 {무령왕릉에서 사용하고 있는 관의 목재는 일본열도 남부지방에만 분포하는 금송(金松)임을 각종 검사를 통해 확인했다}며 따라서 이 관재는 당시 倭서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박교수는 {이 원목은 가공 전 직경 1백30cm, 길이 3m, 무게 3.6t이며 수령은 3백년이상으로 추정되는 거목으로 당시 두 지역간의 엄청난 교역규모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관계연구에도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석(매지권 국보 제163호)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일종의 묘지매입문서를 말한다. 무녕왕릉 연도중간 석수 앞에 나란히 놓여졌던 2개의 지석은 각각 왕과 왕비의 것이다. 이 지석에는 왕의 출생연도나 경력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고 장례에 필요한 기사만 명기하였다. 왕비지석의 뒷면에 묘지매매계약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지권임이 분명하다.

지석에는 모두 53자가 새겨져 있다.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사마왕은 무령왕 생전의 칭호이고, 무령왕은 돌아간 뒤에 붙인 이름이다)이 62세가 되는 계유년(523) 5월 7일에 돌아가시니 을사년(525) 8월 12일에 장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문서를 작성한다"는 내용이다. 그 문서란 바로 다른 돌인 매지권을 말하는데, 토지신으로부터 땅을 샀음을 밝힌 것이다. 거기에는 돈 일만문(文)과 은 일건을 주고 토왕, 토백, 토부모와 상하 지방관의 지신들에게 보고하여 (왕궁의) 서서남방의 땅을 사서 묘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왕의 매지권은 너비 41.2cm, 길이 약 35.1cm,두께 약 4.5cm, 왕비의 매지권은 너비 약 42.4cm, 길이 약 54.5cm,두께 약 4.3-6cm 로서, 장방형 판석 앞뒤면에 행선을 긋고, 육조체의 영향을 받은'해

서'로 음각하였다. 왕의 매지권 앞 면은 무녕왕이 양나라로부터 받은 작호, 무녕왕의 사망시 나이와 시신을 능묘에 안장한 시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주요부장품

진묘수(국보 제162호)는 무덤을 지키는 짐승을 말한다. 무령왕릉 진묘수는 뭉툭한 코에 툭 튀어나온 눈을 하고 입을 벌린 채로 지석 뒤쪽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양쪽 옆구리에 날개 같은 것이 조각되어 있고 머리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철제 뿔을 달고 있어 현실적인 동물 모양이라기보다는 상상의 동물이라고 보아야 옳을 듯하다. 입술에 붉은 칠이 있고 몸에도 칠을 했던 흔적이 있어, 붉은 색으로 잡귀를 쫓는 전통을 따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돌짐승은 악귀를 막고 사자를 보호하려는 뜻에서 놓은 것으로 중국 한대 이래의 풍습을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것은 대개 흙으로 조성하는 것에 견주어 돌로 만든 것은 역시 뛰어난 문화적 소화력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겠다.


금제경식 (국보 제158호/ 한 쌍. 길이 각 14cm, 16cm/ 국립공주박물관)

왕비 쪽에서 출토된 목걸이로 아홉 마디로 된 것과 일곱 마디로 된 것 두 종류이다. 이 중 일곱 마디 목걸이는 발굴 당시 아홉 마디 목걸이의 밑에서 겹쳐 나와 먼저 착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일정한 간격으로 활처럼 휘어진 육각의 금봉을 각 마디의중간부는 굵게 하고 끝은 차츰 가늘게 하여 고리를 만들어 다른 것과 연결시킨 다음, 남은 부분을 세몸에 감아서 풀리지 않도록 하였다. 1개의 금봉에 고리와 매듭을 겸한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두 목걸이 모두 한 끝에 목에 걸기 위한 세환이 끼워져 있을 뿐 매우 간단한 구조를 하고 있지만, 미적 감각과 함께 세련되어 보인다.


금제뒤꽃이 (국보 제159호/ 길이 18.4cm/ 국립공주박물관)

위가 넓고 밑으로 긴 역삼각형이며, 밑은 세 가닥의 긴 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윗면 중앙에는 보주형 돌기가 있어서 마치 새의 머리 같이 보이고, 좌우는 호형을 그리면서 굴곡 진 형태로 날개처럼 보인다. 좌우의 측선은 안으로 차츰 좁혀져 있는데 윤곽을 따라서 융기선이 한 줄 찍혀 있다. 삼각형부는 아래위로 구분하여 그 구획선과 상단 윤곽에는 점렬문을 찍었다. 그 가운데 상부에는 좌우에 팔화형을, 그사이 아래․위로는 원점을 두드러지게 찍었으며, 구획의 아랫부분에는 S자형의 쌍선을 대칭으로 그린 다음 그 여백에 꽃무늬를 찍었다. 왕의 머리위치에서 발견되었고, 끝이 새줄로 갈라진 점으로 보아 머리에 꽂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제수식부이식 (국보 제157호/ 길이 11.8cm, 8.8cm/ 국립공주박물관)

왕비의 크고 작은 두상의 세환식 귀걸이다. 한 쌍은 복잡한 형식의 길고 짧은 두 줄의 수식에 달려 있고, 또 다른 한 쌍은 한 줄로만 되어 있다. 앞의 귀걸이 중 긴 가닥에는 4 개씩의 원형 영락이 금사슬에 7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맨 끝에는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여덟 개의 원형 영락을 단 아래에 탄환모양의 수하식이 매달려 있다. 이러한 탄환모양의 수하식은 고구려의 유적에서는 발견된 일이 있으나 신라 유적에서 는 그 예를 볼 수 없다. 짧은 줄의 수식은 다른 한 쌍의 것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긴 가닥에서의 탄환모양 장식이 없고, 잎사귀모 양의 영락과 담록색의 둥근 옥이 달려 있다. 잎사귀형 영락 아래에는 사익형의 초실형 수식이 있고, 맨 끝에는 작은 돌기가 달려 있다.


금동용봉대향로와 백제의 위대한 예술성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의 백제시대 집터를 발굴하던 중에 거대한 향로가 출토되었다. 「금동용봉대향로」,「금동용봉봉래산대향로」라 불리게된 이 향로의 출현은 백제 공예사 뿐만 아니라 , 나아가 삼국시대 우리 나라의 미술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제작하였던 공방터의 바닥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체로 출토된 이 향로는 공기가 통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거의 녹이 슬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고 64cm 나 되는 이 거대한 향로는 아주 섬세한 조각과 화려한 장식들로 장엄되었다. 하부 받침은 머리를 들어올린 용의 입에 마치 큰 연꽃을 물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조각되었으며, 연꽃 위에는 여러 개의 산들이 중첩되어 솟아오르고 있다. 그리고 맨 꼭대기에는 한 마리의 봉황이 날개를 활짝 젖힌 체로 사뿐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향로의 뚜껑부분은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중국 동쪽 바다 가운데 봉래산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의 봉황 역시 봉래산에 살고 있다는 상서로운 전설 속의 새로 보이는데 천하가 태평할 때 세상에 나타난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봉황은 음악이 있는 곳에서 저절로 노래하고 춤추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예로부터 춤과 음악이 있는 곳에 흔히 동반되었다. 봉황의 모습은 깃털과 벼슬, 부리, 발가락 4개 등 세밀한 표현으로 꼬리를 길게 날리고 양 날개를 퍼득이며 막 비상하려는 듯 조형되었다. 눈은 아래의 산을 내려다 보는 듯 하고 날개와 뒷 꽁지에는 화염문이 장식되어 있다. 머리부위와 몸통은 둥근 구슬로 연결되었고, 보주 바로 밑 목덜미에는 향연구멍이 두 개 있고 양다리를 밟고 있는 형상이다.

봉황은 고대로부터 신성시 여긴 상상의 새이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그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형체가 닭과 비슷하고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한다. 또한 <설문해자>에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 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으며 오색을 갖추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악집도>에는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동물로 봉황의 모양을 묘사 하고 있다.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의 밖을 날아 곤륜을 날아 지나 지주 의 물울 마시고 약수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에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다고 한다. <산해경>에서도 “이 새는 먹고 마시며 절도에 맞고 절로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봉황은 갑골문에서 상제의 사자, 또는 천자의 상징으로서 인식되기도 하였다.

74개나 되는 산봉우리 사이사이에는 온갖 진기한 영물들이 피어나듯 장식되었다. 호랑이, 코끼리, 원숭이, 사슴, 멧돼지, 등 실존하는 짐승들 39마리가 16명의 인물상과 함께 조각된 모습이다. 정상부 봉황의 바로 밑에는 5인의 악사가 빙 둘러앉아 마치 천상계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으며, 악사들 바로 뒤에 작은 구멍을 뚫어 향의 연기가 피어 나오도록 장치했다. 또한 산골마다 자리한 각 인물들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낚시를 하는가 하면 머리를 감고 말을 타고 달리거나 사냥을 하는 등 다양한 모습이다.

몸체는 만개한 연꽃으로 사이사이에 두 신선과 날개 달린 물고기를 비롯한 수중생물 총 26마리가 조각되었다. 이러한 몸체를  한 마리의 용이 세 발을 이용하여 바닥에 안정케 하고 머리를 처 들어 받쳐 물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 발을 허공에 힘차게 쳐들고 있는 모습은 용의 기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요소이다. 하부의 연꽃은 만물의 생명이 연꽃에서 탄생한다는 연화화생관(蓮華化生觀)을 표현한 것이다.

이 향로의 전체구조는 음양의 체계를 적용하여 하나의 우주를 완성하고 있다. 하부 수중계는 음(陰)의 대표 격인 용을 등장시키고, 그 위 몸체에는 수중 또는 물가와 관련된 동물과 연꽃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지상계를 상징하는 뚜껑에는 산악과 선인들과 짐승을 배치하였으며, 천상계인 정상에는 양(陽)을 상징하는 봉황과 원앙을 장엄한 것이다.

이 향로는 일찍이 봉래산 향로가 유행하였던 중국 한나라의 유물과는 도저히 비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봉래산 신앙의 원조인 중국에서조차 최고수준의 청동기 제작기술로도 실현하지 못하였던 백제의 용봉향로는 전 세계인이 또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위대한 예술품으로 홀연히 우리 곁에 돌아온 것이다.


산수문전으로 보는 백제 회화의 경지

‘산수화'란 말 그대로 산과 물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즉 자연을 그린 풍경화의 일종인 것이다. 산수화는 혼란기이었던 중국의 육조시대(六朝時代, A.D. 265~581)부터 시작되었다. 극심한 정치적 격정을 겪었던 당시 지식인들은 세속을 떠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이른바 호복한상(濠僕閒想)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이상적인 삶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으므로 그 대신 환상적인 절경의 산수화를 그림으로 제작하여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는 기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바로 거기에서 “산수화의 태동"이라는 인류예술사의 큰 발자취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당시의 그림은 단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다.

1937년 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 위치한 백제의 옛 절터에서 문화재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출토된 150여 개의 벽돌 속에서 산수무늬벽돌이 발견되었다. 물론 산수문전은 중국에서조차 전무한 것으로 매우 진귀한 것이다. 백제의 산수화 역시 단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화상전의 출현은 우리 나라 산수화의 시작이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벽돌에 부조된 산수문전(山水紋塼)의 그림은 매우 도식적이긴 하나 백제 산수화의 발달 정도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걸작이다.

화면의 하부에는 흐르는 강물이 도식적으로 표현되었고 그 위로 기암절벽과 산들이 중첩되어 자리하였다. 세 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들의 정상에는 저마다 송림(松林)으로 우거진 형상이며, 하늘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배치되어 조화로운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기암과 봉우리형 산들이 겹겹이 중첩되어 서로 견주듯 조화를 이루고 은연중에 원근감을 보여준다. 중앙의 절벽 뒤에는 기와집 한 채가 소담스럽게 표현되었고 오른쪽 기암 사이에는 승려로 보이는 인물이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인물상은 그 동안 탁본으로 닳아져 모습이 많이 희미해졌다. 둥글둥글한 산 모양이 더없이 부드러워 백제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는 듯하다. 또한 살짝 도드라진 양각에 한 겹 얇은 테두리를 넣어 현대적인 미감을 연출하고 있다. 마치 신선경 또는 무릉도원을 꿈꾸었던 백제인의 산수사상을 한껏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산수문전은 전체적으로 백제 특유의 유연하고 부드러운 양식으로 한 폭의 산수화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더욱이 이것이 벽돌에 부조로 표현되어 구워진 것으로 장인(匠人)의 솜씨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화가들의 작품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있었다는 추측을 쉽게 해 본다. 나아가 이 산수문전은 백제뿐만 아니라 중국에조차 남아있지 않은 육조시대 산수화의 양상까지도 짐작케 하는 소중한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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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09-1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송한 말씀입니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관심이 가다보니 알게되고 알다보니 가르치게 되나봅니다. 더욱이 백제 역사재현단지의 단청자문건으로 백제의 문양을 깊이있게 연구해야할 필요성 역시 간과할 수 없었구요~~~퍼가시어서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