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미술
신라의 건국과 발전
한반도 동남단의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 신라(BC57~AD668)는 6세기 이후
점점 강성해져서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고, 우리 나라의 미술문화 발전에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고 있는 신라는 본래 여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합체 또는 성읍국가에서 본격적인 중앙집권적 왕국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의 나라 이름도 신로, 사라, 서라, 서야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으나 이것들은 모두 읍리를 뜻하는 사로와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여진다. 신라 초기에는 박․석․김의 3성이 임금을 배출하다가 4세기 중엽에 이르러 김씨 왕조의 전통이 확립되고 국호도 신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신라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고 본격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었다.
신라는 17대 왕인 내물마립간(356~401)부터 22대 지증왕(500~513)까지의 사이에 국가다운 면모를 일신하였는데 왕의 칭호가 사용된 것도 이 때부터이다. 즉 지증왕때 마립간을 왕으로 바꿔 처음으로 호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라가 왕권을 굳건히 하고 다방면에 걸쳐 융성하게 된 것은 23대 법흥왕(514~539), 24대 진흥왕(539~575)을 거쳐 29대 무열왕(654~661)에 이르는 시기였다. 법흥왕 때 금관가야를 멸망시키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528년), 연호를 건원으로 정하였다. 또한 율령을 공포하였고,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함으로써(527년)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될 바탕을 마련하였다. 이 밖에도 백제의 사신을 따라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521), 중국 남조와의 교섭을 도모한 것도 대외교섭의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신라 24대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획기적으로 확장시키고 국기를 튼튼히 함으로써 훗날 통일을 도모하는 기반을 다졌다. 진흥왕은 가야를 통합하고 동남해상의 해상권을 장악,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에 진출한 뒤 훗날 그 지역을 독식하였다. 한 걸음 나아가 황해를 장악하고 확장시킨 영토 곳곳에 순수비를 세웠으며 불교의 진흥, 화랑도 편제(576), 거칠부의 국사 편찬(545), 등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졌던 것이 그의 주요 업적들로 꼽힌다.
신라 미술 개관
힘차고 동적인 고구려의 미술, 부드럽고 인간미 넘치는 백제의 미술과는 달리 신라의 미술은 토속성이 강하고 사변(思辨)적인 성격이 현저하다. 또한 부장품들 중에는 로마나 이란 계통의 유리그릇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전래된 것이 분명한 것들도 꽤 포함되어 있어서 신라문화의 활발했던 국제적 교섭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이러한 외래문화 유물들은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단에 치우쳐 있었던 관계로 외국과의 문화적 교섭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종래의 막연한 통념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명백하게 밝혀준다. 또한 경주 등 중심지역과는 달리 순흥 등 신라의 외곽지역에서는 적석목곽분이 아닌 석실봉토분을 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벽화를 그려 넣었던 사실이 밝혀져 중앙과 변방의 문화적 차이를 여실히 드러내기도 하였다.
고구려, 백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미술 역시 고분미술과 불교미술로 대별할 수 있다. 경주를 비롯한 신라 중심지의 평야지대에는 왕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규모의 고분들이 산재해 있는 바 이들 고분들은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들임이 몇 차례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목곽을 설치하고 시신을 목관에 넣어 안치한 후에 그 목곽을 수많은 돌과 점토로 쌓아 덮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다져 올려서 동산처럼 만든 무덤이 곧 적석목곽분이다. 이러한 묘제는 석실로 되어 있는 고구려나 백제의 대부분의 왕릉들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목곽이 썩으면 그 위에 쌓여 있던 돌과 흙이 무너져 내려 시신과 부장품을 완전히 덮어 버리기 때문에 방으로 되어 있는 무덤들과는 달리 도굴이 매우 어렵다. 신라 고분의 이러한 구조적 특성으로 인하여 무덤 안에 부장되었던 많은 유물들이 도굴되지 않은 채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은 지금까지 발굴된 신라의 대표적 적석목곽분들이다.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화려함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을 비롯하여 각종 목걸이, 귀걸
이, 팔찌, 반지 등의 장신구들, 무기, 금․은제 그릇, 토기류, 유리 그릇류, 공예품에 그려진 그림 등 종류가 다양하고 그 양도 풍부하다.
한편 신라는 6세기에 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꾸고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미술문화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종래의 신라 고유의 토속적 특성에 국제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가미되면서 더욱 세련되고 조화로우며 국제적인 성향의 미술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은 특히 신라의 불교미술문화에서 더욱 뚜렷하게 간파할 수 있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눌지왕(417~457) 통치 시기였으며, 이차돈의 순교를 겪고 공식적으로 승인된 것은 법흥왕 14년(527)이었다. 이로써 종래 신라 사회를 지배했던 무속신앙, 자연숭배, 조상숭배 등 토속적인 원시신앙 이외에 외래의 국제적 신앙인 불교가 신라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하는 등 보수적 색이 짙었던 신라에서 가장 찬란한 불교미술문화가 이룩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인의 잠재력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신라는 불교를 공인한 후 머지않아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등의 대찰들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흥륜사는 법흥왕 21년(533)에 착공하여 10여 년 뒤인 진흥왕 5년(544)에 완공되었다. 사원의 남쪽에 연못과 남문이 있었고 그 뒤에 금당과 회랑이 있었는데 금당 안에는 벽화와 고승의 소조상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이로써 당시의 절은 후대와 마찬가지로 불교회화, 조각, 공예, 건축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회화는 경주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발굴되기까지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 고분에서 출토된 천마도(天馬圖), 기마인물도, 서조도(瑞鳥圖), 우마도(牛馬圖) 등을 통하여 신라회화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그림들은 모두 화원의 작품이기보다는 공장에 의한 일종의 공예화이다. 고신라 말기에 왕실의 회화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던 채전(彩典)이 설치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회화 수준은 고분에서 출토된 공예화보다 훨씬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 중 공예품을 가장 많이 남겨놓은 것은 신라이다. 그 이유는 상기한 바와 같이 고분의 구조가
도굴하기 어려운 구덩식 돌무지 덧널무덤[竪穴式積石木槨墳]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벽과 천장이 없기 때문에 고구려 무덤에서 볼 수 있는 벽화 등의 회화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공예품들은 금관․금띠․금귀고리․금팔찌․금가락지․목걸이 등 순금제품과 유리잔․유리병․숟가락․구리솥․은제 합(盒)․ 방울․순금제 고배(高杯) 등으로 매우 다양하고 화려하다. 이 들 대부분은 금관총․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등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신라의 공예품들은 신라인의 호화로운 사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미적인 우수함과 함께 왕권의 상징물로서 더 큰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신라 미술의 사변적인 특성은 고분에서 쏟아져 나온 금관을 비롯한 금속공예품과 토기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금속 공예품들은 매우 정교하고 호화로우며 간혹 현대적인 미감각을 풍겨주기도 한다. 특히 신라의 금관은 하늘숭배사상을 바탕으로 토템과 수목 숭배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당시 신라인들의 내세관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유리공예는 당시 고구려․백제는 물론 중국에서조차 볼 수 없었던 신라만의 산물로서 멀리 유라시아 서단지역과의 동서교류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 밖에도 신라 토기는 다소 조방하고 거칠며 문양은 기하학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기마 인물형 토기에서 볼 수 있듯이 조형성이 뛰어난 특성도 보여준다. 또한 무덤에 발견된 각종의 토우들은 당시 신라인의 생활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각광받고 있다.
천마도 - 천마를 타고 온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천마도(국보 207호)는 말이 진흙길을 달려 갈 때 말에 탄 사람의 발 부분에 진흙이 튀지 않도록 말의 배 부분에 대는 말다래 또는 '障泥'라는 마구에 그려진 그림을 말한다. 가로 75cm, 세로 53cm 크기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어진 말다래에 채색을 사용하여 천마를 그린 것이다. 그림은 마치 이 말다래를 사용한 말이 천마처럼 하늘에 훨훨 날아오를 정도로 잘 달려주기를 바라는 원력을 엿볼 수 있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 그림은 신라시대 회화 작품으로 몇 안돼는 귀중한 예이다. 이 그림이 출토됨으로서 후에 황남동 155호분은 천마총이라 명명하여지게 되었다. 천마 그림은 이후 여러 곳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장례와 관련된 곳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곧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실어 나른다는 신라인의 내세관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1973년 경주에서는 우리나라 고고학사상 최초로 대규모의 신라고분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미추왕릉 지구의 155호 고분은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도굴되지 않았던 까닭으로 출토유물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기대에 부흥이라도 하듯이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금관과 관모, 관장식, 허리띠, 귀걸이 등의 찬란한 금제 장신구를 비롯하여 무려 1만 2천여 점에 달하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던 것이다.
천마도는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회화작품으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2장의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이다. 말갈기와 꼬리를 곧추세우고 마치 구름 위를 달리는 듯한 백마는 힘찬 기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당시 신라에서 말의 역할은 매우 커서 보화와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로부터 말을 들여오는 대가로 황금과 구슬, 명주 등을 보냈다는 내용에서 잘 알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말은 누구나 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지배계급의 특별한 교통수단이자 권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처럼 소중한 말의 말다래에 천마를 그린다는 것은 곧 강력한 지배력의 표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욱이 그 말이 소수의 특권층만이 탈 수 있었던 백마라는 사실은 곧 절대권력의 상징임을 쉽게 느끼게 해준다.
삼국유사에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B.C.57~A.D.4)는 한 마리 백마가 가져온 알에서 탄생했는데 그 백마는 하늘로 날아갔다고 기록되고 있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임금이 모여 회맹단(會盟壇)을 쌓고 하늘에 고하여 두 나라간 평화의 서약을 했을 때에도 백마를 제물로 삼았다는 내용도 전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백마가 하늘의 사자이었음을 의미하며 고대 신라 사회에서 왕은 곧 하늘의 자손이었음을 천명한 것이었다.
천마도는 이처럼 신라인의 사상과 사회 발전상을 잘 느끼게 해주는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신라의 높은 회화수준을 보여주는 유일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구름 위를 질주하는 천마를 활달한 필치로 그려낸 신라화가의 솜씨에서 그 유명한 솔거로 대표되는 찬란했던 신라회화의 전통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2천년 전 유라시아대륙 동서 교류의 산물 신라 유리병
경주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고분군에서 각종 장신구와 다양한 형태의 그릇 등 유리제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유리 제품들은 당시 신라문화의 국제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출토된 유리제품들은 당시 신라인들이 제작한 것들도 있지만 외국에서 수입된 것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른바 '로만글라스(Roman glass)'라 불리는 이 유리제품들의 수입은 로마에서부터 근동지방과 중아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이르는 저 유명한 실크로드를 통하여 전래된 것들이었다.
서봉총에서는 유리로 된 길다란 끈이 그릇 표면에 덧붙여져 간단한 장식효과를 낸 유리 그릇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표형분인 황남대총의 남쪽무덤에서는 유리끈을 망처럼 엮어 그물무늬를 연출한 유리잔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끈무늬장식 유리그릇들은 기원전 5세기경 남부 독일이나 시리아 지방에서 만들어진 로마계 유리제품의 특징으로 밝혀졌다.
또한 동일무덤에서 출토된 봉수형(鳳首形)유리병의 조형은 그리스의 '오이노코에(oinochoe)'라 불리우는 화병형태의 유리제품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이 병은 포도주를 따르는 주전자인데 '대롱불기기법'으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대롱불기기법은 로마에서 처음 발생하여 기원후 1세기경에는 전 로마제국으로 확산되어 로만글라스의 탄생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유리의 종류→● 나트륨 = 소다유리 ● 칼륨 = 포타쉬유리 ● 납 = 납유리
황남대총구슬유리→Si + 나트륨 + 석회 = 소다석회유리<오늘날 대부분의 유리성분으로 로만글라스와 같은 것임>
황남대총의 북쪽무덤에서 발견된 갈색의 나무결무늬 유리잔 역시 남부 독일 쾰른에서 출토된 로마계 유리잔을 방불케 한다. 황남대총의 북쪽무덤과 천마총에서 출토된 거북등무늬 유리잔도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그릇 표면을 커트하여 만든 거북등무늬 유리그릇과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커트형 글라스는 실제로 유리를 커트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커트글라스형의 틀 속에 녹인 유리를 부어 넣어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천마총 커트글라스와 유사한 유리잔이 남부 독일 쾰른에서 출현되고 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푸른반점무늬 유리그릇은 유리 표면에 푸른색의 유리 알갱이를 덧붙인 것으로, 같은 수법의 그릇들이 남부 러시아, 남부 독일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미추왕릉지구 고분에서는 인물이 象嵌된 유리구슬이 발견되었다. 지름이 1.5cm로 아주 작은 감청색 구슬 표면에 색색가지 유리를 삽입하여 그림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구슬에 묘사된 인물들이 서방인의 용모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묘사된 두 사람의 얼굴모습은 좌우가 연결된 눈썹에 눈이 크며, 입술을 붉은 색으로 표현한 서구적인 인상이다. 머리에는 마치 관을 쓴 것처럼 색색의 유리로 장식하였고, 인물상의 상부에는 부리와 발이 적색과 황색으로 표현되어 마치 오리 같은 흰 새 세 마리 묘사되었다. 또한 그 옆으로 꽃나무 가지가 장식된 모습이다. 이와 같이 인물상을 장식한 유리구슬은 1~2세기경 이집트나 시리아 연안 지방에서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따라서 신라의 인물상감구슬도 그러한 기법으로 제작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이 구슬의 출처 역시 이집트나 시리아 지방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해준다.
이렇게 신라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리 제품들은 2000여 년 전 유라시아대륙의 서단 로마지역에서 동단의 신라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설사 신라의 유리 제품들이 신라고유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 기법의 전래는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 유리 제품들은 신라문화의 국제성과 개방성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토우로 보는 신라인의 생활상
천년왕국 신라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화유산을 남겨 놓았다. 특히 8세기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그들의 역동문화와 화려문화를 고스란히 넘겨받아 통일신라의 황금기를 꽃피웠다. 그러나 그 이전 삼국기의 고신라는 힘차고 대륙적 기상이 넘치는 고구려나, 해양문화의 꽃을 피운 나무와 기와의 나라 백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거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소박하면서도 투박하고 작은 나라였다. 그 신라인들의 흙으로 빚어낸 것이 바로 신라토우이다.
‘토우’란 글자 그대로 흙으로 빛은 인형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토우는 사람의 형상뿐만 아니라 각종의 동물, 생활용구, 집, 배 등의 ‘이형토기’라 불리는 것을 망라한다. 따라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하여 당시 고구려 풍속을 알 수 있듯이 다종다양한 신라의 토우에서 신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토우의 기원과 용도
신라토우는 5~6세기경에만 성행했고 물론 고구려나 백제에는 없다. 토우는 대부분이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원래 토우는 사후의 세계를 믿었던 신라인들이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아울러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에 받치는 희생물의 대용이나, 숭배의 대상(불상), 장난감 등 여러 이유로 만들어졌다.
토우의 종류
토우는 인물이나 동물 등 독립된 형태와 고배의 뚜껑이나 항아리의 주둥이 부분에 부착되어 조형된 것의 두 종류가 있다. 토우의 크기는 대략 5~10㎝정도로 작다. 「주검 앞에서 슬퍼하는 여인」처럼 3.2㎝짜리이거나 커봐야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신라인은 흙으로 온갖 모습을 빚어냈다.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는 남녀상」은 남자 8.4㎝ 여자 8.6㎝의 크기인데 신라의 현악기 중 하나로 추정되는 악기를 타는 남자와 이에 맞춰 가슴에 손을 모아 노래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남자의 표정은 즐거움에 겨운 밝고 건강한 모습이라서 '신라인의 미소'의 전형으로 손꼽히며 전체적으로 풍기는 해학과 풍류도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 「아이를 낳고 있는 여인」과 같은 작품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인물상을 그려내고 있으며 호랑이 ․ 원숭이 등 동물과 전투용품 ․ 생활용구 등도 포괄하여 만들어졌다.
그밖에도 지게를 진 모습, 장군(항아리)을 짊어진 모습, 보따리를 말잔등에 묶은 나그네, 두 발이 묶인 멧돼지를 말에 실은 사냥꾼, 무릎을 꿇은 모습, 배를 타고 노를 젖는 모습, 괭이를 어깨에 메고 절하는 모습, 칼을 차고 말을 탄 모습, 물구나무 선 모습, 상체를 심하게 구부린 형상, 두 손을 목뒤로 돌려 잡고 몸을 힘껏 구부린 자세(요가 모습), 학가면을 쓰고 학춤을 추는 사람, 가무상, 잡기상, 거문고 ․ 피리 ․ 비파 ․ 가야금 ․ 제금 ․ 장구 등의 주악상, 여인상, 노인상, 남성상, 동자상, 노골적인 성애장면(남녀 교합상), 가슴과 둔부가 강조된 풍만한 여성상, 과장된 남녀의 성기, 기마인물상, 애교 있는 오리형상, 각종 희노애락의 얼굴표정 등.
토우에서 나타나는 신라인의 기예
신라토우는 토기와 더불어 신라인의 흙 다루는 솜씨를 다분히 느낄 수 있는 조형예술의 장르다. 이러한 신라인의 기예는 신라말기를 거쳐 고려초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한국도자예술의 밑거름이 되었다. 토우를 빛은 솜씨가 서툴다거나 단순해 보인다고 해서 천박하다거나 예술미가 배제된 것은 결코 아니다. 신라토우는 과감한 생략과 왜곡을 통하여 주제를 강렬하게 표현함으로서, 결코 화려하지 않은 소박함과 순수미를 자아낸다. 단순하게 표현되거나 아예 추상화된 토우의 얼굴표정 하나하나에서 극도로 정제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세련된 절제미와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중시했다. 또한 여기에다 질박한 신라인의 마음가짐과 여유를 그려냈고 더러는 익살과 해학도 엿보인다. 신라토우는 신라인이 몇 줌 안 되는 흙으로 빚어 낸 삶의 미학이자 신라만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독창적인 예술장르인 것이다.
신라 금관 - 사후세계를 위하여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신라에서만 사용했던 독특한 모양의 금관. 그 안에는 신라 왕족, 나아가 그 사회 전체의 신앙과 체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들어 있다. 그 주인공에 따라 기본 형태와 단수, 장식을 달리한 금관의 특성을 통해 5~6세기 신라인의 사고체계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품인 금관은 왜 그런 모양으로 조형되었을까? 고구려나 백제의 왕보다 유독 신라의 왕이 극도로 화려한 금관을 사용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신라 땅에서 금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라 사람들이 금에 특별한 애정을 가져서이었을까? 나뭇잎 모양의 장식과 푸른색 곡옥이 어느 것은 무려 100개도 넘게 달려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금관, 금동관, 은관에서 보이는 재료의 차이는 주인의 재력의 차이일까, 신분의 차이일까? 신라금관에 대한 이런 몇 가지 의문을 풀어보기로 하자.
신라금관은 경주 시내에 있는 적석묘라는, 강돌을 수북하게 쌓아 만든 특수한 고분에서만 발견된다. 적석묘는 신라 왕족만의 묘제이다. 따라서 금관은 신라의 왕이나 왕족의 것이다. 반면 금동관은 적석묘 뿐만 아니라 왕족보다 신분이 낮은 귀족의 묘제인 석실묘에서도 여러 개 발견되었다. 따라서 순금관은 왕, 혹은 왕에 버금가는 신분의 인물이 사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또 금관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만 발견되는데 비해 금동관은 신라의 영향력이 미친 경상남도로부터 경기도 파주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금, 은, 동의 차이는 분명히 그 주인공의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주 호우총에서 금동관과 함께 발견된 호우는 고구려가 광개토왕비 축조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신라의 어느 왕족에게 선물로 건네진 이 항아리에는 서기 415년에 해당하는 ‘乙卯年’이란 글자가 명기되어 있다. 또 쌍분인 경주 황남대총의 북분에서는 금관과 함께 ‘夫人帶’란 글자가 새겨진 은제 허리띠와 ‘辛卯年(511년)’이란 명문이 새겨진 은합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금관은 5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 유행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기간의 신라왕은 모두 김씨족이다. 그리고 이들 내물(奈勿), 눌지(訥祗), 자비(慈悲), 소지(炤知), 지증(智證) 다섯 사람의 칭호는 ‘왕’이 아니라 ‘今’ 또는 ‘干’이었다. 이는 북아시아 퉁구스어를 사용하던 유목민족의 수장을 일컫는 말로, 지증의 아들 법흥이 선대의 전통신앙인 시베리아계 샤머니즘을 포기하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를 공인하면서부터 이런 칭호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법흥왕 자신의 주검도 매장하지 않고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였으며, 따라서 금관을 사용하던 선대의 전통도 단절되게 된 것이다.
순금관이 발견된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은 모두 단분이다. 각각의 무덤의 주인공은 일단 위의 다섯 왕 가운데 한 명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쌍분인 서봉총과 황남대총의 금관은 모두 북분에서만 발견되었다. 황남대총의 북분은 ‘부인대’라는 명문으로 보아 그 주인공이 여자였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신라의 여자 왕족은 쌍분의 북분에 매장되는 특수한 풍속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남자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단분에서는 머리 위에 살짝 올려놓는 마늘 모양의 금제 모자가 발견되고, 여자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서봉총의 북분에서는 최근까지도 내려오는 ‘굴레’라는 여자아이의 삼각형 모자가 발견되었다. 금관의 모양만으로는 주인공의 성별을 알 수 없지만 모자의 모양으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5~6세기의 신라에는 여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관을 사용한 여인이 두 사람이나 있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왕이 아닌 여인들도 금관을 부장품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왕의 전유물로 각인되었던 금관의 용도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이 절박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울러 신라사회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한편, 고대사회의 남녀평등사상까지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고신라의 실존인물 가운데 ‘鳥生夫人’이라는 흥미로운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있다. 이는 곧 ‘새가 낳은 여자’라는 뜻으로, 자비 마립간의 여동생이자 지증 마립간의 친어머니였다. 그런데 서봉총에서 발견된 금관의 뒷부분에는 나뭇가지에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새는 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조상신으로 여기는 토템이다. 이런 전통은 고고학 유물로도 남아 있는바 유목민의 오래된 신앙임을 증명한다. 또한 기원전 8~3세기 스키타이, 북아시아 흉노족의 모자에 달린 금제 鳥形장식은 신라 서봉총의 금제 모자에 달린 새와 일맥상통하는 조형양식인 것이다.
지금도 북아시아인 사회에서는 영특한 인물을 낳고자 하는 여인이 높은 나무 밑에서 祈子 행위를 할 때 나무 위에 새가 날아와 앉으면 아이를 잉태한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태어난 인물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며, 그가 죽으면 그 생명을 하늘나라로 돌려보내는 존재 또한 새라는 것이다. 새장식은 이런 사유체계가 조형예술로 표출된 것으로 사료된다.
한편 금관 전면의 出자형 장식에 이어 양 옆 뒤로 솟아난 듯이 장식된 條形장식에 대하여 동물의 뿔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중앙아시아 북부지역의 유목민족은 식량감으로 기르던 사슴을 잡은 후에는 그 머리의 뿔을 뒤집어쓰고 영혼 천도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즉,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한 사슴의 영혼을 위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슴뿔을 조형한 금동관은 이를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 또한 오늘날 러시아 바이칼호 주변 타이가지역에서 목축으로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사슴고기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 이들 역시 사슴을 잡은 후에는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역시 사슴머리에 돋아난 뿔을 머리에 착용하는 풍습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신라금관에 조형된 條形장식은 짐승의 뿔을 표현한 것으로 유목민족의 四有체제가 반영된 신라 특유의 조형예술임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