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미술


통일신라의 건국과 발전

삼국 중에서 가장 작았던 신라가 꾸준히 국력을 키운 끝에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660년에는 백제를 무너뜨리고 다시 8년 뒤인 668년에는 최대 강국이었던 고구려마저 멸망시킴으로써 드디어 숙원인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제29대왕인 태종무열왕(재위654~660)과 문무왕(재위661~680), 그리고 김유신 장군은 삼국통일대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신라인들의 강력한 정신력이 통일대업의 원동력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신라를 삼국시대의 고신라와 구분하여 통일신라라고 부른다.

통일신라는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통일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고토에서 각기 국권 회복을 위한 저항운동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통일을 도운 당나라가 승리에 따른 지분을 차지하기 위하여 도호부를 설치하는 등 적지 않은 갈등과 어려움도 뒤따랐으나 차차 평정되었다. 대동강과 원산 이남의 땅을 확보하는 것으로 자족해야 했던 통일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광대한 영토의 상당부분을 잃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엄청난 의의를 지닌다. 세 나라로 나뉘어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같은

한민족이 이제 하나의 나라 안에서 공존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데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이다.


통일신라미술 개관

통일신라시대의 미술은 삼국 시대에 비해 보다 화려하고 원숙하며 또한 국제성을 강하게 띄고 있다. 이 시대의 미술은 삼국시대의 지역적 한계를 탈피하여 높은 미적 감각을 보여준다. 조형적으로 사실적인 기법을 구사하고 있지만, 그것을 실물 그대로를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미의 세계를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즉 통일된 조화로써 이상적 세계관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층 무르익은 기예로써 이상적인 조화의 미를 연출하였던 것이 곧 통일신라시대 미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미술은 다방면에 걸쳐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다. 먼저 회화에서는 솔거(率居), 홍계(弘繼), 정화(靖和), 김충의(金忠義) 등의 훌륭한 화가들이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아

회화가 크게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솔거(率居)가 그린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에 얽힌 전설, 당나라에서 활약한 김충의(金忠義)에 관한 기록, 당의 대표적 인물 화가였던 주방(周昉)의 그림들을 이 시대 신라인들이 대량 수입하였던 일 등을 고려하면 통일신라의 회화에서는 청록산수 계통의 사실적이면서도 기운 생동하는 산수화와 아름답고 요염한 미인들을 즐겨 다루는 궁정 취향의 인물화가 유행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통일신라의 유일한 회화인 화엄경변상도는 이 시대의 세련되고 균형잡힌 불교회화의 성격과 수준을 잘 말해 준다. 또한 전반적으로 동시대의 불상 양식과 궤를 같이 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미술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역시 불상과 탑 등 불교 미술 분야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이 시대의 불교조각은 삼국시대의 전통을 바탕으로 일종의 국제양식인 당나라 불상의 영향을 수용하여 한국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하겠다. <군위삼존석불>, 감산사지에서 출토된 <석조아미타여래입상>과 <석조미륵보살입상>, <굴불사지사면석불>, <석굴암 본존불> 등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보면 그 점이 쉽게 확인될 뿐만 아니라 통일 초기부터 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의 변천 양상이 잘 드러난다. 넓고 당당한 어깨, 가는 허리, 몸에 달라붙은 옷자락, 3곡(三曲)을 이룬 자세, 몸에 비하여 큰 머리, 뚜렷한 이목구비 등이 다소간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특징으로 돋보인다. 삼국시대의 고졸한 양식과 구분지어 신양식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특징들은 석불만이 아니라 금동불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난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세계가 이러한 불상들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미의 특성이 비단 불상에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며 회화, 각종 공예, 건축 등 다방면에서 간취되고 있어서 하나의 시대양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미술이 이룩한 최고의 업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석굴암의 조각, 성덕대왕신종, 다보탑이 우선적으로 고려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석굴암의 본존불과 보살상 등의 조각들을 보면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극치가 느껴진다. 미려한 용모, 당당하고 균형 잡힌 몸매,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부드러운 옷자락 등의

탁월한 외면적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얼굴 가득히 배어 나오는 해탈과 법열의 내면적 정신세계가 너무도 그윽하고 신비스럽게 표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차가운 돌에 새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움직이는 듯, 따뜻한 피가 흐르는 듯 느껴지는 것은 비단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이 석굴암의 조각들을 만들어 낸 작가는 돌을 떡 주무르듯 마음대로 다룰 능력과 돌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 정도의 신통력을 갖춘,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고 믿어진다. 이러한 절정을 고비로 통일신라의 조각이 차차 격을 잃고 쇠퇴하게 된 것은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필연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자위하면서도 아쉬움을 떨쳐 내기 어렵다.

석굴암 못지 않게 통일신라 미술의 수준과 성격을 잘 말해 주는 것은 속칭 '에밀레종'이라고 일컬어지는 성덕대왕신종이다. 빼어난 조형성,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소리, 우람한 크기 등 모든 면에서 단연 세계 제일의 종이라 하겠다. 높이 3.78m, 밑의 지름 2.27m, 아랫부분의 두께가 23cm나 되는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종은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경덕왕 때 시작하여 혜공왕 때에서야 어렵게 완성되었다. 펄펄 끓는 용광로에 아기를 집어넣었으므로 종을 칠 때마다 '에밀레~에밀레'하는 소리가 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이 종이 얼마나 어렵게 주조되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대규모의 용광로나 그것을 옮기고 들어올릴 대형의 기중기가 없었던 시절에 이처럼 엄청난 종을 주조해 냈다는 것은 비단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사적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종은 미술과 과학기술의 발전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임을 새삼 일깨워 주기도 한다.

통일신라의 건축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주목을 끄는 것은 단연 불국사의 다보탑이다. 우아하고 안정감 있는 당당한 형태, 각 부분들이 이루는 균형잡힌 조화와 비례, 밑으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4각→8각→원→8각으로 거듭되는 변화, 목조탑처럼 다듬어지고 짜여진 세련된 구조 등이 어우러져 석탑인지 목탑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이채롭고 아름다운 보배를 탄생시켰다.

이상의 몇 가지 예들만 보아도 통일신라의 미술이나 문화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던 것이었으며 또 얼마나 창의성이 뛰어났던 것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통일신라의 미술은 중국 수당대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국제적 보편성 이상으로 세련미와 독창성을 유감없이 발현하여 그야말로 금자탑을 이루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이 시대의 미술이 고려에 전해져 그 바탕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두고두고 우리 모두에게 참고가 되고 있음도 유념해야 할 사항이라 하겠다.

서예의 경우에는 초기에는 진나라의 왕희지체, 후기에는 당나라의 구양순체가 유행하였고, 김인문, 김생 등이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각체에 능하여 서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생이 유명한데 고려시대에 그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집자 비문(集子碑文)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 시대의 말기에 이르면 불교 의식을 중히 여기지 않는 선종이 유행하고 정치적 혼란이 겹쳐 불상을 위시한 여러 분야의 조형 미술이 경직되고 쇠퇴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석굴암

경북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 소재한 국보 제24호 석굴암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서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이다.

석굴사원이 처음 조성된 곳은 인도였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자이나교를 비롯한 각 종교의 수행자들이 굴속에 들어가 수행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것은 곧 척박한 땅과 기후조건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구도자로서의 수행이 가져온 자연극복의 방편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자이나(Jaina)는 '승리자'라는 뜻으로 인도에서 기원전 6세기경에 시작된 비(非) 브라만(Brahman) 계통의 종교이다. 이 종파는 엄격한 계율 생활과 고행의 실천을 통한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설파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전통에 따라 석굴이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곧 이어 불교가 성립된 후로는 석굴내부를 온갖 조각과 회화로 장식한 석굴사원이 조성되었는데 아잔타(BC 2세기~AD 7세기)석굴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러한 관습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래되어 돈황(4세기 중엽)․ 운강(460년대 초)․ 용문(494~)석굴이 개착되었다. 석굴암은 이러한 석굴사원의 흐름을 이어받아 아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에서 그 화려한 클라이막스를 이룬 곳이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김대성(700~774)에 의해 창건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상세한 내용은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가난한 대성이 다음 생에서 복을 받기를 바라며 머슴살이로 장만한 밭을 부처님께 받치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접었다. 대성이 죽은 그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良) [?~711]의 집에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모량리의 대성이라는 아이가 너의 집에 환생하리라"는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왔던 것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김문량의 아내가 임신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손바닥에 '대성'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쇠붙이를 쥐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대성이라 하고 모량리에 사는 전생의 가난한 어머니를 시중의 집으로 모셔와 편히 살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재상의 집에서 환생한 김대성이 장성하여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을 사냥하였는데, 꿈에 곰이 나타나 "어찌 네가 나를 죽였더냐"고 원망하였다. 대상이 두려워 용서를 빌자 곰은 자신을 위하여 절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대성은 크게 뉘우치고 이 후 사냥을 그만 두었으며, 곰을 잡았던 자리에 장수사(長壽寺)를 지었다. 또한 사람으로 살면서 영(靈)을 등한히 하였음을 깨닫고 현세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모량리의 전생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석굴암)을 세웠다고 전한다.

상기의 내용은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다. 그러나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성덕왕(재위 702~737) 때의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대성과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원을 세웠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생애를 마감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후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한 석굴암의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추정케 한다. 그것은 특히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이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와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인 효성왕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바로 이 동해구이었음으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의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강한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로써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인도와 중국에는 석굴암보다 더 큰 석굴들과 큰 불상들이 무수히 많지만 이처럼 짜임새 있고 체계적이며 기하학적으로 치밀하게 계획되어 조성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석굴암 창건 이후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전래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조선시대의 화가인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이 그린 산수화 속의 석굴암으로 보아 적어도 2~3백년 전까지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인들이 보수를 하면서 당시 신소재로 각광받던 시멘트로 석굴암 돔을 싸 막았는데 결국 이는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차는 원인이 되었다. 광복 이후 1961년부터 전면적으로 다시 중수했으나 내부 벽면에 물방울이 생기는 등 문제가 생기자 석굴암 내부에 인위적으로 환기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또한 석굴암에 외부 자연환경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목조전실을 설치하고 목조 전실과 석굴암 사이를 유리벽으로 막았다. 따라서 일반 관람객들은 안타깝게도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본존불을 친견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석굴암의 조형성

석굴암의 구조적 특색은 무엇보다 화강암(花崗岩)의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적으로 축조한 석굴사찰이라는 점이다. 즉, 인도 ․중국 등의 경우와 같이 천연의 암벽을 뚫고 조성한 천연석굴이 아니다. 이와 같은 토목기술을 바탕으로 이룩된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를 취하면서 네모진 공간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다. 주실에는 단독의 원각(圓刻) 본존상(本尊像)을 비롯하여 보살과 제자상 등이 있으며, 전실에는 인왕상(仁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부조(浮彫)하여 배치하였다.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이다. 천장은 궁륭형(穹챘形)의 둥근 양식이며, 그 위에 연화문(蓮花紋)의 원판을 두어 천개(天蓋)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 8구, 인왕(仁王)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

部) 2구, 보살(菩薩) 3구, 나한(羅漢) 10구, 감불(龕佛)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봉안되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대 조형미술의 기본원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석굴의 안정감을 일층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이다.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큰 불상이다. 예배의 주대상이 곧 이 본존상임은 물론, 중앙에 자리잡아 석굴의 내부공간을 구획한 신라 조각미술의 결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뛰어난 작품이다. 본존상은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석굴 후벽의 천장 밀에 둥근 연화판석(蓮花瓣石) 1매로 조성하였다. 이는 전실의 법당에서 본존상에 예배할 때, 동일시각 위에 놓여지는 치밀한 계산에 따라 처음부터 마련된 것이다. 본존상의 양식적 특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7세기 후반부터 유행하여 고려 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래좌상의 기본양식이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왼쪽 어깨에 가사(袈裟)를 걸친 우견편단(右肩遍袒) 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수인(手印)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結)하고 있으며, 머리는 육계와 나발(螺髮)로 조형되었다. 상호(相好)는 원만한 모습에 자비(慈悲)로운 미소를 보여주고 있으며, 신부(身部)는 매우 당당할 정도의 거구로서 장부의 상으로 묘사되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을 다음 손가락 위에 겹쳐 운동감을 나타낸다. 왼손은 두 발 위에 놓아 편안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어떻든 본존상의 신앙적인 의미와 조형적인 가치가 훌륭히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부드러운 자태와 인자한 표정에서 고도의 조각술을 살필 수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상(久遠像)을 형상화한 것이다.

본존불의 명호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ꡐ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ꡑ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한편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석굴암은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라종 그 위대한 탄생(가나아트 2000년 여름호 게재/곽동해)

1.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한국종의 신비한 조형에 관한 수수께끼는 이 땅에서 미술사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세기 초반부터 국내외 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그 조형의 상징성은 신비에 쌓인 채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이유인즉 동서고금을 통하여 한국종만큼 독특하고도 신비로운 조형적 창의성을 발휘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한국종만이 가지고 있는 음통의 비밀이 중국 고동기 용종(甬鍾)을 모방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황수영 박사의『삼국유사․만파식적』설화 상징설이 발표되면서 한국종의 조형적 탄생문제가 한층 더 큰 이슈로 쟁점화 되었다. 황 박사의 논리는 조형의 유사성을 비교한 <용종기원설>과는 달리 사료의 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차츰 그 타당성에 무게가 실려졌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종의 조형적 탄생에 대하여 정설로 굳어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용종기원설>을 주장하거나 <만파식적상징설>을 부정하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 잇달아 발표된 종관련 저서와 논고에는 분명 <만파식적상징설>을 아예 언급조차 않거나 부정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종의 신비로운 탄생에 대한 수수께끼는 풀릴 수 있을까?

2. 신라종의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

오늘에 전하는 가장 오랜 한국종은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의 신라종(725년)이다. 따라서 한국종의 기원은 곧 신라종의 태생과 맞물려 있다. 오늘날까지 추론된 신라종의 조형적 탄생에 대한 일반적인 가설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이른바 외국 유입설과 신라 고유의 창출설이다. 그 중 외국 유입설은 기원전 중국 주대(周代)에 유행한 고동기 용종(甬鍾)을 모방했다는 주장이며, 신라창출설은

북모방설, 만파식적설, 솟대기원설 등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기원문제에 대하여 그토록 다양한 주

장이 제기된 것을 보면 한국종의 조형성은 분명 신비에 쌓인 트러블메이커인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 <용종기원설>과 <만파식적상징설>이다. 최근 경주박물관의 강우방 관장이 발표한 내용은 중국종에서 영향받은 7세기 풍탁형 소종에서 발전한 신라종의 새로운 창출을 주장하지만, 결론적으로 중국종 모방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⑴ 중국 고동기의 용종 기원설

용종(甬鍾)은 중국 서주시대(B.C. 1111~770)에 출현하여 전국시대(B.C. 480~259)까지 유행하였던 고동기(古銅器) 악종(樂鍾)의 하나이다. 광복이후 주로 선진시대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는 용종은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한 후에는 다른 악종들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한 용종을 모방하여 신라종의 조형적 창출이 이루어 졌다는 주장이다. 용종기원설은 일찍이 미술사 선구자인 고유섭 선생이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그 후 김원룡 박사 등 많은 후학들에 의하여 추종된 논고이다. 그러나 우현 선생의 견해에는 인접국의 종에 비하여 신라종의 탁월함을 설하기 위한 목적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종에 비하여 신라종이 가장 고식(古式)이다"라는 글에서 느낄 수 있다. 즉 신라종이 가장 전통적인 양식을 갖추었다는 주장이다.

한국종의 조형이 용종을 모방하였다는 논리는 외형상 특징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몇 가지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용종기원설은 상호간의 조형을 조목조목 비교 열거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논고가 제기된 초기에는 상당한 설득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 주장은 양자간의 단순한 형태의 유사점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조형의 상징성을 밝히지 못한 맹점이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점이 따른다.

첫째, 용종과 신라종은 약 1천여 년 정도의 시대 차이가 있다. 즉 악기의 용도로서, 묘의 부장품으로 매장되어 진시황 통치 이후에는 중국에서조차 자취를 감춘 용종을 신라종이 어떻게 모방할 수 있었을까?

둘째, 용종의 '간(幹)ꡑ부분인 수두문이 발달하여 신라종의 용두(龍頭)로 변화하였다는 주장도 무리가 있다. 원래 '간ꡑ의 기능은 종을 매달기 위한 장치로서 용종의 출현 초기인 기원전 10~9세기경에는 수두문이 조형되지 않았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그 고리에 수면(獸面)이 부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형상이 지극히 미약하여, 신라종의 극사실적인 용뉴(龍 )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지나친 비약이라는 지적이다. 차라리 신라종의 용뉴는 같은 시기의 중국과 일본종을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라종의 용뉴에서 음통을 제거하고 용만을 역방향으로 대칭 시키면 당시 중국종이나 일본종의 쌍용뉴와 방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용종의 '용(甬)'자는 문자 그대로 솟아오른 조형을 의미한다. 원래 용종은 은대(殷代)의 요(鐃)를 거꾸로 한 형태에서 발전하였다. 즉 용은 요의 손잡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용'에는 음통의 기능성이나 <만파식적>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가 결여되었다. 더욱이 연꽃 위에 안치되어 소중한 신격까지 부여받은 성덕대왕신종의 음통을 보더라도 양자간의 조형의도는 분명 다르다. 단순히 형태가 비슷하다해서 상호간의 상관성을 논한다는 것은 무모함이 있다.

넷째, 용종의 용은 무(舞)위의 중앙에 위치하여 대칭의 중심을 이루었다. 신라종과 같은 시기의 중국과 일본종의 용뉴도 좌․우 대칭을 이룬 모습이다. 그러나 유독 신라종의 음통은 천판의 중심에서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 나아가 동서고금을 통하여 대칭성을 탈피하여 조형된 종고리 형상이 신라종 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신라종의 용뉴는 세계 최초로 대칭미학의 고정관념을 탈피한 엄청난 파격의 조형물인 셈이다. 

⑵ 만파식적 상징설

삼국통일의 영주 문무대왕이 승하한 후 유언에 따라 불교식으로 장례를 집행하였다. 그리고 동해구 큰 바위에 장골하니 오늘의 대왕암을 말한다. 이와 함께 대왕께서 왜군을 물리치고자 창건한 감은사, 아들 신문왕이 조성한 이견대와 더불어 이른바 동해구 3대 유적이 완성되었다. 그러한 대규모 왕실사업과 더불어 발생된 기사가 바로 만파식적설화이다. 그 내용인즉 "동해에서 용이 가져다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으니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낮고, 가뭄에 비가 내리고, 장마와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이라 칭하고 신라의 국보로 삼았다"는 것이다.

설화의 내용대로 만파식적은 대나무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그 형세가 둥근 원통형이며 마디가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신라종 정상에 조형된 수수께끼의 원통을 만파식적의 상징으로 보고자 한 것이다.

또한 신라종의 용 모습은 두 발을 앞․뒤로 벌려 몸통 뒤에 밀착된 음통을 짊어지고 힘차게 기어오르는 모습인데, 이것 또한 설화의 내용 중에 용이 대나무를 등에 짊어지고 바다에서 육지로 힘차게 기어 나오는 장면으로 보고자하였다.

내용과 같이 만파식적 상징설은 신라종의 신비한 조형을 당시 신라의 정세와 관련되어 파생된 정신적 상징에서 찾고자 하였다. 따라서 내용 면에서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으나 그 조형이 분명하지 않다면 자칫 부정될 수 있는 단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종의 원통유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여기에 한층 더하여 성덕대왕신종의 음통은 천판에서 수직을 이루지 못하고 한쪽으로 약간 기운 모습이다. 종 전체 또한 음통이 설치된 방향으로 기우러 걸린 모습이 최근의 종합조사에서 밝혀졌다. 그러한 현상은 음통의 하중에서 비롯되었다. 즉 음통을 설치하였는바 그 하중으로 인하여 전체균형이 상실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몸체의 균형이 훼손될 정도로 무리하게 음통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3. 만파와 대나무

⑴ 대나무를 조형한 신라종의 음통

만일 신라종의 음통이 만파식적을 표현한 것이라면 내용 그대로 대나무형상 이어야 한다. 그리고 형세가 둥근 원통이며, 속이 비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에는 마디도 있어야할 것이다. 따라서 만일 한국종의 음통이 대나무를 조형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만파식적상징설>이 보다 설득력을 얻게됨은 당연한 일이다.

가장 오래된 상원사종의 음통은 연판문과 당초문 등 각종의 문양으로 장식되었으나 분명 마디가 확인된다. 그러나 그것을 대나무라고 보기에는 다소 억지일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의 음통 역시 연판문으로 장식하였지만 보다 분명한 마디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대나무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죽절의 조형은 천흥사명 고려종(1010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2개의 융기선을 돌려 전체를 5마디로 구성하고 마디의 내부에는 당초문을 장식하였다. 그런데 천흥사종의 음통에서 문양을 삭제한다면 대나무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형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음통의 대나무형상은 계속해서 대부분의 고려후기종에서도 재현되었다. 그리고 한국종에서 조형되고 있는 음통의 죽절형상은 계속해서 고려후기를 거쳐 조선중기 범종까지도 명확한 모습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혹자는 음통에 문양이 장식되었기 때문에 대나무가 확실치 않다는 주장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나무를 그대로 묘사한 것은 없을까? 만일 그러한 조형이 있다면 한국종의 음통이 만파식적을 상징한다는 주장이 보다 확실한 근거를 얻게되는 셈이다.

그런데 현재 전남 구례 화엄사에 소장되고 있는 강희61년 (1722년) 유마사명종에서 대나무 형상이

확인되었다. 종의 전체적인 모습은 조선중기 이후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중형종이다. 주조기술의 쇠퇴로 인하여 세부표현이 도식적이며 문양 또한 섬세하지 못하다. 그러나 용뉴는 한 마리의 용이 몸통으로 대나무를 휘감은 모습처럼 조각되었다. 마치 세 마디로 구성된 대나무를 천판 위에 그대로 밖아 놓은 듯한 모습인 것이다. 바로 이 종은 신라종의 음통이 곧 대나무로 만든 만파식적을 상징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셈이다.

⑵ 만파(萬波)를 조형한 고려종

앞서 한국종의 음통이 만파식적을 상징하는 대나무라는 사실이 조형을 통하여 밝혀졌다. 그런데 설화의 내용과 같이 용이 대나무를 등에 지고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을 묘사하였다면 천판은 곧 수면을 의미하게 된다. 이 점에 단서가 될 수 있는 고려종 2구가 있다. 13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연천출토고려종 용뉴에는 한 마리 용이 죽절을 등에 지고 힘차게 상승하는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었다. 그런데 용의 몸통이 밀착된 천판 주위에 희귀하게 조형된 파도형상을 확인 할 수 있다. 현재 중앙국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종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것이 마치 파도인지 구름인지 식별하기 애매하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만파(萬波)라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와 유사한 또 하나의 고려종이 발견되었다. 현재 일본 후쿠오카시 시립박물관에 소장된 고려종은 앞서 소개한 연천출토 유물과 매우 닳은 꼴이다. 용뉴 또한 거의 비슷한 형상인데 그 종에도 파도가 조형되었다. 그것은 마치 수면위로 거칠게 일어난 파도가 역연한 형태이다. 한 마리 용이 대나무를 짊어지고 수면위로 힘차게 솟구쳐 오른 순간 수면에서 거친 파도가 일어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죽절과 더불어 한국종의 음통이 만파식적설화를 바탕으로 창출된 조형임을 확인시켜주는 결정적 단서가 되는 것이다.

3. 동서화합, 남북화합을 위하여

지금까지 신라종의 음통에 관한 기능성 및 상징성에 관한 연구나 용의 조형적 연구는 많았으나 용의 상징성 연구는 아직껏 한차례도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신라종의 한 마리 용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과연 신라종의 단용이 의미하는 상징성은 달리 어떻게 해석되어야할 것인가? 

우리 나라 역사의 개설서 격인 『문헌비고』에 보면 신라 시조 원년에서부터 조선조 1714년(숙종

40년) 사이에 무려 29차례나 용의 출현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은 모두 왕과 관련이 있다.

예로부터 용은 임금이나 제왕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용의 장엄하고 화려한 성격 때문에 흔히 위인과 같이 위대하고 훌륭한 존재로 비유되면서 왕권이나 왕위의 상징으로 비유된 것이다. 왕의 얼굴을 <용안>, 의복을 <용포>, 지위를 <용위>, 덕을 <용덕>이라 칭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임금의 평상을 <용상>, 수레를 <용가․용거>, 임금이 타는 배를 <용선>이라 불렀다. 이처럼 임금과 관계되는 것에는 거의 빠짐없이 <용>이라는 접두어를 붙여 호칭하였던 것이다. 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용의 무한하고 경이로운 조화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용=군왕=하늘'이라는 절대적인 상징의 연결관으로 발전하여 마침내는 국가보위를 위한 호국룡사상을 탄생케 한 것이다. 특히 신라의 용은 곧 호법용이요 호국용이었다. 신라의 영원한 왕권과 호국을 기원하는데 용이 이용되었는바, 황룡사구층탑이라든가, 삼국통일대업을 이룬 문무왕이 죽어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겠다고 한 내용도 임금은 곧 '호국용'이라는 등식의 성립을 말해준다.

만파식적설화도 신라임금을 상징하는 호국룡을 주연으로 등장시킨 역사적 드라마의 한 테마로 해석되어야 한다. 설화가 성립된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의 일이다. 당시 구 백제인와 고구려인들은 통일국가라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채 수구주의적 자세를 취하였다. 게다가 대외적으로 왜구 침범까지 빈번하여, 왕실의 앞날은 지극히 혼미한 정세에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즉 무엇인가 호국적인 차원에서 통일신라의 백성이 하나가 되는 정신적 합일점을 찾아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위기국면을 돌파하려는 목적으로 형성된 설화가 곧 만파식적설화이다.

설화가 완성된 후 성덕왕이 즉위하였다. 왕은 35년간 재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나라의 기반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신라는 8세기 전반의 성덕왕(702~737) 말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정되고 태평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8세기를 전후하여 당시에 중국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종들의 용뉴는 모두 두 마리의 용이 조형되고 있다. 만일 그러한 종이 신라에도 있었다면 당시 백제나 고구려 출신의 망국인들에게 그것이 곧 두 임금의 상징으로 비춰지지 않았을까?

나라를 잃은 구 백제인과 고구려인 들에게 두 마리 용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곧 자신들의 망국 왕과 새로운 통일국가 왕이라는 두 임금의 상징을 느끼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 점을 간파한 신라왕실에서 통일국가의 유일한 임금을 상징하는 한 마리 용을 신라종에 조형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라 최고종인 상원사종(725년)이 성덕왕 24년에 만들어졌으며 그 이전의 종은 현재 단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는 6세기 중반에 이미 범종이 주성되었음이 기록을 통하여 밝혀졌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과 일본에는 신라종보다 앞선 6~7세기 종들이 상당수 전해진다. 유독 한국종만은 오늘날까지 상원사종 이전의 것이 한 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상원사종의 주조기술은 동일한 합금재료를 사용한다면 새 천년을 맞이한 오늘날 첨단과학시대의 주조기술로도 재현하기가 쉽지 않다. 즉 상원사종은 그 이전에 많은 주종경험과 주조기술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얻어진 기술력의 산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단 한 점도 발견되고 있지 않은 상원사종 이전에 주성된 범종들의 행방이 사뭇 묘연해진다. 그 종들은 모조리 어디로 갔을까? "통일신라에는 오로지 한 임금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의미를 표방하기 위해서 한 마리의 용뉴를 창안하였고, 그 이전의 쌍용뉴종들은 혹시 에밀레종과 같은 새로운 거종을 만드는 데에 재활용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또 다른 설화를 꾸미자는 것이 아니다. 구리의 채광이 여의치 못했던 당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그러한 발상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를 종합하면 신라종은 백제와 신라, 또는 고구려와 신라의 화합을 상징하는 우리 나라 최초의 동서화합, 납북화합의 상징조형물임이 분명하다.

당시 신라의 정세는 지금의 한반도가 직면한 정신적, 이념적 장벽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유사한 판국이다. 지금 우리 민족이 1천 200여 년 전에 울렸던 화합의 종소리를 다시 한번 울려야 하는 실정에 있다하면 지나친 기우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eylontea 2004-09-22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글을 잘 읽고.. 퍼갑니다...
즐겁다고 일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시고... 건강하셔야 해요..

수련 2004-09-23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사실은 일....재미있기도 하고 재미 없을때도 많아요. 하지만 하기 싫어도 해야할때가 있기에....
스스로에게 재밌다고 최면을 걸어두고 한답니다.
두리만 아는비밀 이예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