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공예


금속공예

생활용품 -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에서 나타나는 풍부함이 고려시대에 이르면 더욱 양적으로 팽창되고 器形에서도 다채로움을 보여주기 시작함. 은입사기법의 성행. 완, 접시, 합, 병, 항아리, 잔, 반(盤), 세(洗), 주전자, 바리, 향로, 수저, 고려경 등

불교공예 - 불교금속공예 역시 이전 시대에 비하여 다양한 종류와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옴. 범종, 반자(금고), 향로(향완), 요령, 정병, 금동탑, 청동용두보당, 동호 등  

도자기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의 토기를 바탕으로 남북국시대의 발달된 토기를 거쳐 도자기로 발달되는 기반이 확립됨 - 순청자, 상감청자, 철회청자, 진사청자, 화금청자, 철채청자, 퇴화문청자, 연리문청자 등의 다양한 기법과 문양, 기형, 종류 등 각종의 아름다운 청자가 제작됨.

(고려비색청자는 중국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 칭송을 받았는데 송나라 태평노인의 <수중금(袖中錦)>에는,"건주의 차, 촉 지방의 비단, 정요(定窯)백자, 절강의 차, 고려비색(高麗翡色)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 하여, 천하의 명품들 가운데 고려청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목칠공예



고려경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사용된 청동거울 이외에 고려시대부터 성행되던 청동거울을 이름하야 ‘고려경’이라 부른다. 그만큼 고려경은 다양한 종류와 다량의 유물이 전해진다. 고려경은 그 계통과 제작과정이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우선 고려경은 그 출토지나 출토상태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따라서 반출유물에 의한 연대 추정도 매우 곤란한 실정이다. 대체로 고려경은 고려 이전에 전래했다가 고려의 고분에서 출토했다고 해석되는 당경(唐鏡)이 있고, 그 밖에 한경(漢鏡), 수경(隋鏡), 송 ․ 원경(宋 ․ 元鏡), 요 ․ 금경(遼 ․ 金鏡) 등 중국의 각 시대에 걸친 동경과 그것들을 모방한 방제경(倣製鏡)이나 재주경(再鑄鏡)도 나타난다. 즉 고려경은 중국에서 제작되어 한반도에 유입 사용된 것과, 고려시대에 중국 것의 도안이나 의장을 본떠 고려에서 주성한 방제경(倣製鏡), 수입품을 그대로 거푸집 틀에 떠내서 다시 주물을 부어 만든 재주경(再鑄鏡) 등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방제경은 원경(原鏡)의 문양을 그대로 모방하기도 하고, 일부 또는 2개의 무늬를 결합하거나 일부 도안의 변화를 통하여 제작하였다. 재주경은 떼어낸 틀에서 몇 차례 거듭하기도 하고 처음 부어낸 것에서 2차로 다시 부어내는 방법을 통하여 동일문양의 청동거울을 다량으로 주성하였다. 그런데 재차 틀을 떠서 주성한 재주경의 경우 문양이 무디어지고 거울의 크기나 무게가 조금씩 적어지기도 하며, 때로는 무늬가 거의 소멸되다시피 하는 사례도 발견되고 있다.

고려경에서 나타나는 주요 문양의 종류는 화조문계(花鳥紋系) · 서수문계(瑞獸紋系) · 용어문계(龍魚紋系) · 인물고사화상문계(人物故事書像紋系) · 봉황앵무문계(鳳凰鸚鵡紋系) · 보화당초문계(寶華唐草紋系) · 문자소문계(文字素紋系) 등이다. 또 그 형태는 대체로 둥근 모양 · 꽃 모양 · 직사각형 모양과 그밖에 특이한 형태가 나타나며 꽃 모양과 마름모 모양은 다시 그 가장자리가 다섯 · 여섯 · 여덟 등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고려경은 북쪽으로는 요(遼) · 금(金)의 땅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쓰시마[對馬島] · 일본 본토에서도 발달되어 넓은 유통범위를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며 이에 따라 공예의장이 떨어지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전형적인 고려경의 조형적 특징은 두껍고 무늬가 크게 도드라지는 양상을 보여준다.


향로


향로는 향을 사르는 공양용구로서 향불 연기를 쏘이게 함으로 훈로(薰爐)라고도 부른다. 향을 사용하는 방법에는 도향(塗香)과 소향(燒香)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향을 가루로 만들어 깨끗한 물과 혼합한 다음 몸에 바르거나 뿌려 향내가 나게 하는 방법이며, 후자는 향을 피워 연기를 쏘임으로서 향내가 몸에 베이게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향을 사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을 그릇이 필요한 법, 바로 이런 용도로 사용되는 모든 그릇이 곧 향로인 것이다.

불교에서 불․보살께 올리는 공양으로는 소향(燒香)․헌화(獻花)․등화(燈火)의 세 가지가 중요한 의식이다. 따라서 이것들을 담아 공양하는 향로․화병․촛대는 부처님의 공양용구로서 없어서는 안될 것들인데, 특히 향로 하나에 화병 둘, 촛대 둘을 합한 다섯 가지를 일컬어 불단에 반드시 갖추어야할 다섯 가지, 즉 오구족(五具足)으로 섬기고 있다. 오늘날에는 여기에다 다(茶)․과(菓)․미(米)의 3종을 추가하여 모두 여섯 가지를 부처님께 올리지만 그 중에서도 시공에 그윽한 법연을 의미하는 분향공양이 단연 으뜸이다. 

예로부터 향은 악취를 제거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특히 열대우림의 습한 기후조건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인도사람들은 몸에서 나는 여러 가지 냄새, 즉 구취나 체취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향을 사용하였으며, 나아가 대중이 모이는 곳에서 나는 갖가지 악취를 없애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경전 『대지도론大智度論』권93, 석정(釋淨)불국토품82에 “천축(天竺)은 나라가 뜨거워서 냄새가 많은 까닭으로 몸에 향을 바르고서 제불(諸佛)과 사문들을 공양하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당시 인도의 기후와 관련된 상기의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밖에도 전통적으로 악취를 제거하고 부정(不淨)을 없애기 위하여 향을 피우는 풍습은 지구촌의 여러 곳에서 행하여졌다. 고대의 유대인들이 신전에서 향로를 사용하였고, 솔로몬왕(Solomon/?~BC 912?)이 향로를 만들었다는 전설은 구약성서에도 기록되고 있는바, 카톨릭교회에서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전통의 향연이 시연된다. 

이와 같이 온갖 불결한 냄새를 없애주는 향의 기능성이 확대되어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어준다는 사유로 발현되었고, 마침내 불교에서는 청정무구를 희구하는 마음으로 부처님께 향을 사르는 의식으로 피어나게 된 것이다.  


향로의 발달사


향로는 쓰임에 따라 손에 들고 다니는 병향로(柄香盧)와 단상에 안치되는 거향로(居香盧), 벽이나 천장에 매다는 현향로(懸香盧) 등으로 구분된다. 또한 재료에 따라 토제, 도제, 금속제로 구분되며, 그 형태에 따라 박산형(博山形), 정형(鼎形), 삼족형(三足形), 화사형(火舍形), 고배형(高杯形), 완형(埦形) 등으로 구분된다.  

일찍이 도교․유교의 발달과 함께 제사와 제천의식이 성행하였던 중국에서는 전국시대에서부터 진․한대에 걸쳐 청동제․도제의 박산향로가 사용되었다. 또한 남북조시대로 내려오면서 도학(道學)의 행도(行道)에 쓰이는 자루 달린 병향로(柄香爐)가 유행하였다. 수 ․ 당대에는 고동기의 형태를 모방한 방형향로와 솥 모양의 정형향로, 다리가 셋 달린 삼족형향로, 화로 위에 지붕모양을 조형한 화사형향로 등이 다양하게 제작되어 송 ․ 원 ․ 명 ․ 청대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 불교의 유입과 더불어 분향의식이 행하여졌는데, 『삼국유사』제3권, 아도기라(阿道基羅)편에는 다음과 같이 향과 관련된 일화가 기록되고 있다.     


“제19대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이르자 그 마을 사람 모례(혹은 모록)가 집안에다 굴을 파 숨겨주었다. 그 때 양나라가 사신을 통해 의복과 향물을 보내왔는데, 군신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쓰임을 몰라 사람들에게 향을 주어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용도를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그걸 보고서 말하기를 <이는 향이라 부르며, 태우면 향기가 아름답게 풍기어 그것이 신성에게 정성을 알리는데, 신성은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이것을 태워 발원하면 반드시 응험이 있게 됩니다.>하였다. 이 때 왕녀가 병으로 위독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사르고 기도하게 하니 왕녀의 병이 곧 씻은듯이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예물을 후히 내렸는데, 얼마 후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三國遺事』「券第3」 阿道基羅 [一作我道. 又阿頭.]

新羅本記第四云. 第十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麗至一善郡. 郡人毛禮.[或作毛祿.] 於家中作堀室安置. 時梁遺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云. 梁遺使僧曰元表. 宣送溟檀及經像.]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遍問國中. 墨胡子見之曰. 此之謂香也. 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神聖未有過於三寶. 若燒此發願. 則必靈應.[訥祗在晉宋之世.而云梁遣使. 恐誤.] 時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喜, 厚加賚貺. 俄而不知所歸.


이와 같이 기사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까지 전해지는 6세기 이전의 향로는 단 한 점도 없다. 다만 고구려 고분벽화가운데 연대를 알 수 있는 안악3호분(357년)의 향로그림과, 5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장천리1호분 예불도의 향로그림, 쌍영총 인물행렬도의 향로그림 등을 통하여 고구려 향로의 양태를 가늠할 수 있을 따름이다.

1994년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는 향로조형의 진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일찍이 봉래산을 상징하는 박산향로가 크게 유행되었던 중국 한나라의 유물들은 도저히 비견될 수 없는 조형미를 보여준다. 기원전 2천여 년 전부터 다양한 청동기를 만들어 낸 청동기의 나라 중국조차도 이토록 환상적이고 빼어난 자태를 풍미하는 향로를 제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백제의 금동용봉대향로는 일찍이 인류가 만들어낸 청동제품 가운데 조형적으로 가장 뛰어난 예술적 신기의 발로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신라시대에도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 가운데 공양상과 성덕대왕신종 비천상이 들고 있든 병향로 등을 통하여 당시 소향 공양의식이 크게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각종의 동물과 꽃, 칠보, 길상문 등을 소재로 조형한 청자향로가 다수 제작되었다. 한껏 멋을 부린 듯 느껴지는 청아함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비색의 단아한 기품은 보는 이의 넋을 빼앗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늘에 전하는 유물가운데 청자사자유개향로(국보 제60호/국립박물관),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65호/간송미술관) 청자칠보투각향로(국보 제95호/국립박물관), 청자귀룡형삼족향로(보물 제1072호/호암미술관) 등이 유명하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주발 모양의 노신(爐身)과 통형(筒形) 받침대가 연결된 이른바 고배형 향로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를 다른 말로 향완(香埦)이라고도 부른다. 청동주조로 제작된 이 향로에는 은상감기법을 이용하여 온갖 문양을 장식하고 있다. 법연에 회자됨을 희구하는 정성으로 백색 은실을 검푸른 청동 표면에 한 올 한 올 정성껏 수놓아 완성된 청동은입사향완의 정제된 조형미는 선조 장인들의 예술혼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걸작이다.


정병


정병이란 부처님 앞에 깨끗한 물을 넣어 올리는 공양구이다. 범어로는 ‘쿤디카(Kuwdika)’라 하는데 이를 ‘군지(軍持)’․‘군치가(君雉迦)’라 한역하였으며, 물을 담기 때문에 수병으로도 불린다. ≪법화경≫에는 스님들이 반드시 지녀야할 18가지 지물을 소개하고 있는데 삼의, 버들가지, 세숫대야, 병, 밥그릇, 깔개, 지팡이, 향로, 물주머니, 수건, 칼, 거울, 족집게, 의자, 경전, 율, 불․보살상 등이다. 여기에서 병이 곧 정병의 기원으로 추정되며, 훗날 청정수를 담아 불전에 올린다 하여 정병으로 부르게 되었다.


정병이 본격적으로 불교에서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한 관욕(灌浴) 의식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이와 관련하여 ≪선화봉사고려도경≫기명2, 정병편에는“정병의 형상은 긴 목과 넓은 배의 곁에 부리가 하나 있고 중간은 두 마디로 되어있으며, 테가 있다. 뚜껑과 목 중간에는 턱이 있고, 그 턱 위에 다시 목이 있는데, 귀인, 국관, 사찰, 민사에서 두루 저수용으로 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은 고려시대에 정병이 사찰뿐만 아니라 왕실과 민간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특히 관세음보살이 정병을 손에 들거나 지니고 있는 고려불화가 오늘날에 상당 수 전해진다. 이러한 관세음보살의 정병에는 감로수가 담겨 있어 감로병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이 물은 중생의 고통과 갈증을 제거해주고 무주고혼을 떠도는 중생의 영혼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정병은 이 외에도 대세지보살의 화관에 새겨지며, 미륵보살, 제석천, 범천 등의 지물로서도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융성과 함께 많은 정병이 제작되었는바, 만든 재료에 따라 토제, 도제, 청동제 유물이 오늘에 전해진다. 또한 정병의 형상은 목이 길고 주둥이가 나팔형으로 뻗어진 병 모양과 긴 목에 뚜껑이 높게 솟아 닫혀 있고 몸체 상부에 짧은 주구가 달려 있는 모양의 두 형태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후자의 조형이 우리나라 청동제 정병의 정교함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은상감기법으로 장식된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92호/국립박물관)은 정병 조형의 진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동체에는 늪가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수양버들과 갈대밭을 배경으로 한 3인의 인물, 유유자적하게 흘러가는 3척의 편주, 무리지어 나는 물새와 헤엄치는 오리들을 모두 청동바탕에 모두 은실로 하나하나 새겨졌다. 이러한 풍경표현은 근경에 그치지 않고 먼 육지와 하늘을 나는 오리와 기러기무리를 원경과 중경으로 구분하여 표현하였는바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 하다. 또한 동체의 어깨와 하부에는 여의두문이 상감되었고, 주구(注口)에는 당초문이 장식되었다. 주구의 뚜껑에는 투조로 음각문을 넣은 은판을 씌웠으며, 굽 역시 은으로 돌려서 검푸르게 녹이 쓴 바탕과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금고


금고(金鼓)는 글자 그대로 쇠북을 가리키는 것으로 다른 말로 ‘금구(禁口)’․‘반자(飯子/半子)’ 등으로도 불린다. 범종 ․ 법고 ․ 목어 ․ 운판 등의 불전사물이 아침, 저녁의 예불 시나 중요한 법회의식 때 사용되는 반면에 금고는 공양시간이나 대중의 집회를 알릴 때에 주로 사용되는 신호도구이다. 금고는 법당 내 ․ 외부에 간단한 현가(懸架)를 설치하고 매달거나, 간혹 처마 끝에 매달아놓고 나무망치모양의 당목으로 쳐서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범종만큼 장중하지는 못하지만 제법 크고 울림이 있는 맑은 소리로서 법당의 예불 시에 법음구로도 이용된다.

중국 위나라 때에 완성된 불경 『현우경(賢愚經)』권10에는 금고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사위국(舍衛國)에는 십팔억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북을 쳐서 대중을 모으는 것이 국법으로 정해졌다. 동고(銅鼓)를 치면 팔억이 모이고 은고(銀鼓)를 치면 십사억이 모이며, 금고(金鼓)를 치면 모든 사람이 모인다.”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기록은 원래 금고가 의식법구로 사용된 범종과는 달리 대중을 모으는데 주로 사용된 것임을 시사해준다.       

금고는 둥글고 납작한 외형으로 마치 징과 같은 생김새가 특징이다. 평면원형으로 전면은 막히고 배면은 터진 상태로 막힌 쪽을 쳐서 소리를 낸다. 옆면 상부에는 매달 수 있도록 2~3개의 고리가 부착되어있다. 반자의 전면에는 대체로 동심원 융기선을 2~3조 돌리고 중심에는 평연화문이나 당초문을 장식한다. 또한 전면의 주연부에도 당초문을 장식한 경우가 있으며, 옆면에는 기년(紀年), 시납사원, 발원문, 중량, 제작자와 시납자 등의 명문을 새기거나 도드라지게 주조한다.

금고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한 정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 서한시대부터 이미 금고가 사용되었던 것이 유물을 통하여 확인된다. 그 형태가 사찰의 금고와는 약간 다르지만 양자간에 유사성이 풍부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금고 역시 범종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서 불교사찰의 의식법구로 전용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금고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중앙박물관의 함통6년(865년) 시공사(時供寺)명 금고이다. 또한 고려시대로 내려오면서 그 수가 점차 증가되고 조선시대에는 더욱 많은 금고가 주조되어 전국 유명사찰에 전해지고 있다.  



청자(靑磁) - 전중앙국립박물관장 정양모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白土)로 만든 형태 위에 철분이 1∼3% 정도 들어 있는 장석질(長石質) 유약(釉藥)을 입혀 1,250∼1,300℃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의 일종. 이 때 유약의 색은 초록이 섞인 푸른색으로 비취색(翡翠色)과 흡사하고 투명에 가까우며 태토(胎土)의 색은 흐린 회색이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이 바탕이 된 녹청색이 되며 고려사람들은 이를 비색(翡色)이라 하였다.


청자의 태토와 유약은 청자를 만든 나라와 지방, 그것을 만든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고 굽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따라서도 태토와 유약의 색이 조금씩 다르다. 우리나라 청자도 신라 · 고려 시대에는 앞에 설명한 것과 같으나 조선 시대에는 태토가 백색인 백태(白胎)청자도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월주요청자(越州窯靑磁), 북송(北宋)의 여관요청자(汝官窯靑磁), 남송(南宋)의 관요청자(官窯靑磁), 용천요청자(龍泉窯靑磁)와 북방청자라 불리는 요주청자(耀州靑磁), 임여요청자(臨汝窯靑磁)가 모두 조금씩 다르며, 같은 용천요청자와 남송 관요청자 중에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청자와 흡사한 중국 청자는 월주요와 여관요청자인데 월주청자는 유약의 투명도가 약하고 갈색을 약간 머금은 올리브그린(olive green)색을 띠며 여관요청자도 유약의 투명도가 낮다. 남송 관요청자는 유약과 태토가 우리 청자와 비슷한 것도 있으나 태토가 흑색이며 청자색은 아주 흐리고 유약이 두껍고 불투명한 것이 있다. 용천청자는 유약이 두껍고 불투명하며 청자색이 아주 진한데 태토가 백색인 백태청자도 있다. 요주 · 임여요 청자계통은 유약이 갈색을 머금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주로 태토와 유약 속에 섞여 있는 철분의 함유량과 환원염이냐 산화염이냐에 따라 나타난다.


최성기 우리나라 청자는 환원 번조로 고운 비취빛의 아름다운 비색 청자이지만 불길이 잘못되어(산화염) 황색이나 갈색을 머금고 있는 것이 있으며, 같은 그릇인데 어느 부위는 비취색이고 다른 부위는 갈색을 머금은 예도 상당량에 달한다.


중국 만당(晩唐) · 오대(五代)의 월주청자와 북송 여관요청자, 남송 관요청자 · 용천요청자도 어떠한 일정한 시기 중에서 제한된 수량만이 명품이고, 모두가 비색(翡色)의 아름다움을 지닌 청자는 아니다. 그 시대가 지향하는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운 청자는 최고의 정점에 도달한 일정한 시기와 특정한 지역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청자의 발생]


⑴ 회유토기(灰釉土器)와 중국 청자의 발생


청자는 토기에서 발전한 것이다. 토기가 발전하여 고화도환원번조(高火度還元燔造)의 석기(庠器) 단계에 이르면 가마에서 자연히 생겨나는 재티가 고온의 토기 표면에 내려앉아 태토에 들어 있는 규사질(硅砂質)과 합하여져 녹아 붙어 자연유가 되는데 이런 경우 재티를 많이 날게 하여 인위적으로 자연유를 입히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유의 성분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을 잿물 또는 회유(灰釉)라 한다. 이 잿물을 토기 표면에 바르고 고온으로 구워내면 회유토기 (灰釉土器, 또는 灰釉庠器)가 되고 이 회유토기가 청자 발생의 시초이다.


중국 회유토기의 시원은 은대(殷代)이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 연유(鉛釉)가 발달하였지만 동양에서 유약의 기본은 회유였다. 이 회유는 한대(漢代)에 들어오면서 전 시대보다 유약 표면이 매끄럽게 되는데, 이러한 단계를 시원적 또는 초기적 청자라고 할 수 있다. 육조시대(六朝時代)에는 태토도 점차 양질이 되고 유약도 장석유(長石釉)에 가깝게 발전하여 질적으로 청자에 한 발 다가서게 되고 당대(唐代)에 이르러 청자가 세련되기 시작하여 만당 · 오대에는 질적으로 완벽한 청자가 되었다.


화남(華南)과 화북(華北)지방에서 다 같이 청자를 만들었지만, 화북지방의 것은 조질(粗質)이었으며, 오대까지 중국청자를 대표하는 것은 양쯔강 남쪽 하류에서 널리 생산되던 청자 중에서도 저장성(浙江省) 동북쪽 상린호반(上林湖畔) 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던 가마에서 만들어낸 월주청자였다. 이 밖의 중국 청자는 이른바 북방 청자라고도 불리는 요주요 계통의 청자와 북송 여관요청자(河南省 寶豊縣 淸凉寺), 남송 용천청자 · 관요청자 등이다. 이 중에서도 중국 도자사상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11세기 말∼12세기 초 북송대에 만들어진 여관요청자이며, 남송대의 관요와 용천요의 명품도 높이 평가된다.


⑵ 시유토기(施釉土器)와 우리나라 청자의 발생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에 고화도로 환원 번조한 토기를 만들었다. 삼국 토기 중에서도 신라 · 가야토기는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것이어서 1,200℃ 이상이나 올라가는 고화도 환원 번조로 표면색은 회청흑색이고 무쇠같이 단단한 것이었다. 삼국 시대의 토기를 거쳐 통일 신라 시대에 이르러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 토기는 부장용(副葬用)보다는 주로 실생활용으로 안정된 것이었다. 이때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된 토기 표면에 유약을 입힌 연유계(鉛釉系)인 녹유토기(錄釉土器)와 갈유토기(褐釉土器)가 발달하여 세련되고, 8세기경부터는 회유토기가 발달하여 시유토기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있어서,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자기에 대한 지식은 삼국시대부터 중국 육조청자(六朝靑磁)의 유입이 상당량에 달하고 있고(일부 백자 · 흑유자의 유입도 있음.), 8세기부터 성당(盛唐)의 도자기가 들어왔으며, 특히 9세기경부터는 월주지방의 만당도자기(주로 청자와 일부 다른 지방 백자)와 그 기술이 해로(海路)를 통하여 활발하게 우리나라 서해안과 일부 남해안에 많이 유입되어 초기 청자인 이른바 일훈문굽계청자(日暈文─系靑磁 : 햇무리굽청자)와 소량이지만 백자도 만들기에 이르렀으며 뒤이어 녹청자(綠靑磁)도 만들었다.


중국 저장성 월주청자의 영향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이 청자는 9세기 후반 경부터 비롯되어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되며, 일훈문굽계 청자요지는 주로 경주지방과는 멀리 떨어지고 중국과 가까운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곳만 하여도 8, 9개소에 이르고 있으며, 그중에서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와 계율리 일대에 집중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첫째, 통일신라 말기가 되면 수도인 경주의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호족들의 세력은 확장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 대표적 호족세력인 장보고(張保皐) 등에 의한 중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하여 서남 해안 지역이 중국 도자문화의 영향을 가장 일찍 받게 되었다. 또한 풍부한 이 지역 물산과 함께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등으로 이 지방의 사회 · 문화 · 경제적 요건이 경주 등 타 지역보다 앞섰다. 따라서 새로운 도자기 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태세가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9세기 전반 동북아 해상 무역의 왕자였던 장보고 등의 해상 활동에 의하여 중국 청자(백자 · 흑유자도 포함)가 수입되고 청자 번조 기술이 도입 전파됨으로써 이 일대는 이미 토기를 사용하는 생활 문화권에서 벗어나 자기를 사용하는 문화권으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서남 해안의 가마에서는 석기에서 청자로 이행되는 초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환원 번조가 잘되고 갑발(匣鉢 : 도자기를 구울 때 재티 등이 자기 표면에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자기를 넣는 개비)을 사용한 본격적인 청자를 번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백자와 흑유자도 번조하였다.


그 뒤 강진과 부안은 중앙인 개경과 연결되어 관요로 이어져서 이곳 가마가 집중적으로 운영되어 발전하게 되고, 중국 남북방요의 영향을 체계적으로 정리, 이용함으로써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⑶ 초기 청자와 녹청자


햇무리굽청자는 양질이었기 때문에 생산비가 높아서 그 소비계층도 지방호족 등 부유한 계층이나 상류계층이었을 것이다. 9세기 무렵 햇무리굽 양질 청자의 수요가 늘어나자 서남해안 일대에는 수많은 가마가 생겼다. 이제까지 발견된 가마만 보아도 북쪽으로부터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주촌리와 봉천군 원산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용인시 이동면 서리,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강진군 대구면 일대와 칠량면,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등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들 가마는 규모가 방대하고 모두 갑발을 사용하여 값이 비싼 양질의 청자를 생산하려고 노력한 가마들이다.


청자문화가 이같이 급속히 퍼져나가게 되자 자연히 질이 떨어지는 조질의 값싼 청자가 역시 서남해안 일대에서 생산되어 일반 백성들의 수요에 충당하게 되었다. 이 조질청자는 태토에 모래 등 잡물이 섞이고 번조한 뒤에도 기공(氣孔)이 많은 등 치밀하지 못하고, 유약도 회유와 흡사하여 그 색이 녹갈색을 머금고 있으며 유면(釉面)도 고르지 못하다.


이러한 청자를 녹청자라고 하는데, 이 녹청자요지는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 영광군 염산면 오동리, 해남군 산이면 일대 등지에 있으며, 해남군 산이면에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도 50개가 넘어 이 시기 청자문화의 급속한 발달을 엿볼 수 있다.


녹청자의 발생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햇무리굽청자가 발달 보급되는 시점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보다 앞서 신라 회유토기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더 확실한 자료가 없다.


[고려청자의 발달 및 쇠퇴]


⑴ 시대구분과 각 시대 개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통일 신라 말기에 청자를 만들고 일부 백자와 흑유자도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고려에 와서 청자는 더욱 많이 만들어지고 발전, 세련되어 고려청자의 이름이 높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시기를 구분하여 고려청자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기 : 고려 초기에 강진의 햇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확산되었으나 다른 지방의 햇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없어지거나 지방의 조질청자가마가 되고 녹청자가마도 생겨나게 된다. 강진가마에서는 청자의 질과 형태와 문양이 안정되고, 중국의 제반 양식과 번조수법이 고려적으로 변모해 나가 16대 예종연간까지는 그 질과 양식에서 중국적인 것을 거의 청산한 단계에 이른다. 그러므로 고려초에서 16대 예종(1122)까지를 전기로 한다.


중기 : 17대 인종 때부터 고려자기가 고려적으로 아름답게 세련되어 독창적 기형과 독특한 비색청자를 완성하고, 18대 의종 때에는 상감기법과 문양구성이 가장 뛰어났으며, 청자 · 청자상감(靑磁象嵌) · 철채(鐵彩) · 동화(銅畵) · 동채(銅彩, 또는 辰彩) · 연리문(練理文) · 철채상감 · 화금자기(畵金磁器) 등 다종다양한 청자가 만들어졌고 청자기와도 만들었다. 인종대에 이미 귀족간의 알력이 심화되어 의종 때 무신의 난이 일어났는데, 무신이 집권한 시대의 고려자기는 질과 양식이 퇴보하였지만 고려자기의 모습에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몽고군이 침입하면서부터 급격히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123년(인종 1)부터 몽고가 대군으로 침입하기 직전인 1230년(고종 17)까지를 중기로 한다.


후기 : 몽고 침입 이후에 원종대와 충렬왕 초까지 소수의 상품(上品)을 제외하고는 고려자기가 많이 퇴보하였으나 중기의 모습은 아직 남아 있고 충렬왕대부터 화금과 진사설채가 다시 나타나며 새로운 기형과 문양이 생기고 청자의 질이 좋아지는 등 일시적 성황을 보이다가 다시 퇴보하는 고려말까지를 후기로 한다.


⑵ 전기(발전기)


9, 10세기는 청자가 발생하고 백자도 일부 만들어 그 질이 자질(磁質)로서 완성되는 시기이다. 이때의 청자와 백자는 현대에서 말하는 완전한 자기는 아니며 완전한 자기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이 때 청자 · 백자 이외에 흑유자도 일부 특수한 지역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에서 약간 만들었으며, 점차 고려 도자기가 다양화되는 시기였다. 청자에는 청자의 기면(器面)을 파내어 상대적으로 파내지 않은 면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대담하고 크게 나타낸 이형연판무늬가 등장하고, 오목새김문양(거친 국당초문 등)과 철화문(鐵畵文) 및 퇴화문(堆花文)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11세기 말∼12세기 초에는 중국의 산시성(陜西省) 요주요, 광저우(廣州) 서촌요 · 정요 · 자주요 · 수무요 등과도 교류가 있어 음각(오목새김) · 양각(돋을새김) · 양인각(압출양각)문과 철화문 · 퇴화문이 발전하는 등, 청자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기형 · 문양 · 번조수법 등이 고려적으로 세련되어 갔다. 강진의 가마는 점차 확대되어 대구면의 용운리 · 계율리 일부, 사당리와 칠량면 삼흥리 일대에서 사당리 전면과 수동리 일대로 확산된다. 그리고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과 진서면 일대에도 청자가마가 생기고, 그 뒤 가마도 관요 형태의 대규모의 청자요로 발전하였다.


⑶ 중기(성기)


① 청자의 세련 : 12세기 전반기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순청자가 가장 세련되는 시기였다. 청자의 색은 처음부터 환원번조로 시작되었으며, 이미 11세기에는 완벽한 환원번조로 독특한 청자색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2세기 전반기는 그 절정기로서 이 때 청자의 모습은 17대 인종왕릉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청자과형화병(靑磁瓜形花甁) 등 일괄유물로 대표된다.


1123년(인종 1) 북송 휘종의 사행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 “근년 이래 제작이 공교(工巧)하며 색택(色澤)이 더욱 아름답다.”라고 한 것이나, 북송말경으로 생각되는 태평노인(太平老人)의 기록인 ≪수중금 袖中錦≫에 “고려청자의 비색이 천하제일”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반실투성(半失透性)의 빙렬(氷裂)이 거의 없는 우수한 비색 유약을 완성하였다(1차비색 완성).


비색 유약의 완성과 더불어 기형 · 문양 · 번조수법 등에 남아 있던 중국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자연에서 소재를 얻은 독창적인 형태와 문양이 고려적으로 변형, 발전되며 독특한 세련을 보인다. 이와 같은 청자의 세련은 12세기 중엽까지는 또 다른 의미의 진전을 보여 유약은 반실투성에서 조금씩 더 밝아지고(2차비색 완성), 새롭게 구상된 음각 · 양각 · 투각문양 등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고려사≫ 세가 의종 11년(1157)조에 보이는 청자와(靑磁瓦)의 기록과,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에 산재한 청자와편(靑磁瓦片)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증명이 된다. 이 당전마을의 청자와편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출토되는 파편의 유약은 인종릉에서 출토되는 일괄유물인 1차비색 완성기(12세기 전반)의 것보다 유색이 조금 더 밝아졌으며 기형과 문양이 고려적으로 좀더 완숙한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또 획기적인 시문방법으로 고려자기에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였다. 상감 완성과 때를 맞추어 상감을 여러 가지로 응용한 것, 또는 상감기법 외의 다른 여러 방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철채상감 · 철채백퇴화 · 철유 · 철유상감 · 철유백퇴화문 등)이 싹텄을 뿐 아니라 이러한 여러 가지 기법이 완숙한 상태에 도달하였다.


1159년(의종 13)에 죽은 문공유(文公裕)의 지석(誌石)과 함께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靑磁象嵌寶相唐草文燔)은 유약이 맑고 투명하며, 상감의 기법과 문양의 포치(布置) 등이 매우 발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공유묘 출토 대접을 만든 시기는 유약 · 기형 · 문양과 문양의 포치 · 번조수법 등이 가장 아름답고, 고려자기의 기준이 되는 그릇들을 만든 때였다. 청자유약은 기포가 적고 비색이 밝아져서 문양이 잘 보이게 되고 빙렬이 있는 것이 많아진다. 기형은 선이 더욱 유려해지면서도 유연하여 그 시대양식을 확실하게 지니게 된다.


문양은 사실적 문양을 약간 도식화(圖式化)하고 양식화(樣式化)하였지만, 자연의 향기를 지녔으며, 그 시대양식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있고, 부위마다 적합한 문양을 개발하였다. 대접의 경우 각 문양의 포치 · 구성은 먼저 주문양(主文樣)과 종속문양(從屬文樣)이 있어 그릇의 넓은 중앙 · 중심부위에 주문양을 배치하고 구연부(口緣部)나 안쪽바닥 굽언저리 등 주문양 상하에 종속문양을 배치한다. 주문양은 사실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공예의장의 성격으로 양식화되지만, 회화적이고 여백을 많이 살려 자연이 지니는 맛을 잃지 않는다.


종속문양은 동일 패턴이 반복되는 공예의장이지만, 주문양에 비하여 매우 좁은 공간에 시문되어 주문양의 상하여백을 마무리해 주고 안정감을 주는 구실을 하여, 전반적인 문양은 회화성을 갖춘 공예의장이나 그릇과 일체가 되어 상호 보완하는 입장에 있다. 이 시대는 문화적으로 매우 세련된 시기여서 비색 · 기형 · 문양뿐 아니라 그릇의 굽다리를 어떻게 깎느냐, 또 구울 때 굽다리에 어떻게 하여 눈 자국이 작게 남느냐 하는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예의 검토, 실험되고 있다.


따라서 굽다리는 대체로 작게 하고, 매병류 등의 큰 그릇은 안다리굽이 많고, 보통 병류나 주전자 등의 그릇은 굽이 조그마하고 낮으며 큰 것은 내화토(耐火土) 모래비짐눈으로 번조하고, 일반 그릇(작은 것)은 규사(硅砂)눈을 받쳐 구워 굽이 작고 예쁘며 규사눈 자국이 작고 희게 보여 그릇의 바닥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제작하고 있음을 본다.


자기 자체를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물론 청자(백자도 같음)의 비색을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이미 9세기부터 사용하던 갑(匣·匣鉢 : 개비)을 발전시켜 갑발의 내화도를 훨씬 높여 갑이 일그러지는 것 등을 방지하고 갑도 만드는 등 크게 발전하였다.


② 상감문양의 발생과 발달 : 12세기 전반 상감 발생기의 청자요지(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의 청자기와를 반출하는 요지)에서의 상감문양은 기명(器皿)의 일부에만 사실적인 문양으로 나타나며, 상감이 시문된 위치는 11세기 후반경이나 12세기초경의 기명에 음 · 양각으로 시문하던 자리의 일부 또는 전면에 나타난다. 이 경우 내외면 중 일면시문으로 문양도 음 · 양각문과 흡사하다.


이러한 초기 상감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12세기 중엽인 상감 최성기에 이른다. 처음의 상감문양은 기명의 내측이나, 외측의 일부에 나타나다가 점차 전면에 나타나며 좀더 발전되면 내외면에까지 시문이 확대된다. 문양은 상감 발생 초기의 사실적인 문양에서 도식화되기 시작한다. 그릇의 면을 분할하여 구도를 잡아 주문과 종속문을 구분, 시문하여 상감되는 부위에 따라 새롭게 고안된 여러 가지 문양이 적절히 포치되어, 하나의 일정하고 통일된 구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문공유의 묘에서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은 바로 상감 최성기의 작품으로, 이러한 완숙한 경지까지 도달하려면 상감 발생기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상감의 발생시기는 12세기 전반인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상감 발생기는 상감이 여러 가마에서 고안되어 일반화되는 처음 시기를 말하는 것이며, 특수한 지역 또는 특정한 기형에 예외적 또는 우발적으로 상감이 시문된 예는 12세기 초는 물론이고 11세기 또는 10세기에도 가능할 수 있다.


실제로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백자 · 청자가마 발굴 때 10세기를 내려오지 않는 층위에서 서툴지만 특이한 상감을 한 파편이 발견되었고,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에서도 10세기경 청자가마에서 흑상감 파편이 발견되었다. 그 밖에 11세기로 추정되는 청자에 상감이 들어간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


③ 기타 청자문양 : 상감기법과 문양이 가장 세련된 12세기 중엽에는 상감기법 이외에 10세기경부터 나타난 화청자·퇴화문청자와 그 밖에 철채 · 철채백퇴화 · 철채백상감 · 화금청자 · 청자동화〔銅畵=辰砂〕설채 · 연리문〔絞胎〕자기 등이 함께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특히 산화동 안료로 환원번조상태에서 선홍의 발색을 성공시킨 진사설채는 중국보다도 2세기 이상 앞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사용하였지만, 절대로 붉은색을 자기 표면에 남용하지 않았다.


⑷ 후기(쇠퇴기)


무신 집권 이후 점차 그 폐단이 쌓이더니, 13세기 초부터는 고려자기에도 변화를 보여 기형이 조금 둔해지고 굽도 조금씩 커지고 밝은 유약의 비색이 조금 어두워지면서 문양도 조금씩 퇴보해 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몽고의 침입으로 가속화되어 원종대와 충렬왕 초에 매우 타락한 청자로 전락된다. 이 때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1269년(원종 10)부터 1287년(충렬왕 13)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간기(干記 : 己巳·庚午·壬申·癸酉·甲戊·壬午·丁亥)가 들어 있는 청자상감 그릇들이다.


이들 청자기명들은 암녹색이 비낀 흐린 유약과 뿌연 빛, 둔해진 곡선의 그릇으로 문양도 12세기 이래의 상감문양이 계속되고, 일부 새로운 당초계 문양도 나타나고 있지만 퇴화된 상태로 거칠고 생략되었으며, 굽도 둔하고 모래받침이 조금씩 나타난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조와 ≪고려사≫ 열전 조인규전에는 고려에서 원나라 세조에게 화금청자(畵金靑磁)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화금청자는 12세기 전반부터 극소수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양식적으로 보아 충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청자상감화금원숭이토끼당초문편호 · 청자상감화금당초모란문대접)을 통하여 상감청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충렬왕 즉위 중반 이후에 일시적인 안정으로 청자의 유약이 약간 불투명하지만 비색유약이 그전보다 아름다워졌고, 문양도 그 이전부터 시문하던 문양과 새로운 문양이 등장한다. 그전부터 사용하던 문양은 원형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상태였으며, 새로운 문양은 사실적으로 안정되었다.


주문양에 조그만 이파리가 많이 달린 새로운 당초문과 봉황문 · 용문양이 간혹 보이며 학의 몸에 봉황의 꼬리가 달린 기형이 나타나기도 하며, 종속문양이 여러 단으로 구성되기도 하며, 기형에도 양면을 두드려 편평하게 만든 항아리〔扁壺〕 등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충렬왕대부터 원나라를 통한 중동지방과 서방문화의 유입으로 일부 기형과 문양 · 번조수법 등에 조금씩의 변화를 보인 것 중 일부분이다. 그 밖에 번조 때에도 변화가 있어 상품은 환원번조하였으나 하품에는 산화번조가 있으며,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차 환원이 보장되지 않아 청자의 색에 황색과 갈색을 머금게 되었다.


충렬왕 · 충선왕 이후 잠시의 안정이 다시 끊어지고 사회가 불안해져서 14세기 초를 조금 지나서부터는 주로 청자상감과 순청자기류만이 생산되었고, 14세기 중엽부터 질과 기형 · 문양 · 번조수법이 극도로 타락하고 퇴보된 상태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상품 청자가 일시 그 질이 향상되었으나 다시 타락하며, 이러한 타락한 상태가 조선 왕조로 넘어와 분청사기의 모체가 된다.


⑸ 고려청자의 특색


우리나라 청자는 12세기 전반에 비색 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냈고, 12세기 중엽 유약을 맑고 밝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자기 중에서는 청자가 특히 세련되고 많이 생산되었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발전이행은 인류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고려 시대의 청자는 그 자연과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더욱 많이 생산되고 가장 세련되었다.


중국 청자가 색이 진하고 유약이 불투명하며 예리하면서 장중한 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 유려한 선의 흐름과 탄력이 있고 생동감 있는 형태, 조각도의 힘찬 선, 기물과 일체가 된 회화적이며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등에 특색이 있으며 또한 세계에서 최초로 자기에 붉은색을 내는 구리의 발색기법을 창안해냈으면서도 한두 점 악센트로만 강한 색 [銅彩發色] 을 쓰면서 모든 색을 담담하게 구사하는 등 언제나 자연과 같이 호흡하고 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 그 특색이다.


[조선청자]


고려 말의 타락한 청자는 조선조로 들어오면서 큰 줄기는 분청사기로 이행되고 다른 한 줄기는 조선청자로 그 맥락이 이어진다. 고려청자를 계승한 조선 초기 청자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려 말 퇴락한 재래의 청자를 계승하였으나 그 질과 기형 · 문양 등이 조선조의 특질을 조금씩 나타내면서 발전하는 청자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백자가마에서 새로 만들어내는 청자이다. 재래식 청자는 고려청자의 퇴락한 상태의 말기적 조질청자에서 약간 발전, 변형되어 질이 향상되고 기형에 생동감이 있으며 문양이 활달해져 초기 분청사기상감과 기형·문양이 거의 같다.


새로운 청자는 백자가마에서 같이 생산되며 백자태토에 청자유약을 입혔고, 기형도 고려청자 기형에서 발달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백자와 거의 같고 음각문양이 있는 것도 있다. 광주 중앙관요 중에 조선 전기의 초기가마는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와 도마리, 중부면 번천리·오전리, 초월면 무갑리 등에 있으며, 전기의 중엽가마는 퇴촌면 정지리와 관음리 등에 있고, 전기의 말엽가마는 광주읍 탄벌리, 도척면 상림리, 초월면 선동리 등에 있다.


조선 청자는 15세기 중엽까지는 두 가지 계통 모두 질이 양호하고 기형과 문양이 생동감 있고 활달하였으나 15세기 후반부터 고려청자를 계승한 청자는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조선조 청자만이 백자 가마에서 소량 생산되었으며 17세기 중엽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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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모>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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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09-23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원 선생님은 월북작가라서 한국미술을 "민족미술" 이라 표현하셨을 겁니다. 물론 한국미술사가 민족미술사이니 무어라 표현해도 좋을듯 하군요.
저도 미술을 하면서 미술사를 해서 그런지 관심이 많답니다. 제가 하는 미술이 전통미술쪽이다보니 더욱 그런것 같습니다. 제가 올리는 글들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