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것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 통화 중에 오늘 당장 만나자고 했고 그러자고 했다. 뭔가 갑갑한 모양이었다. 지하주차장에 삐딱하게 주차를 해놓고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근처 고기 집으로 향했다. 사람들 왁자지껄한 식당도 오랜만이었다. 옆에는 통신회사 직원들이 단체회식을 하고 있었고 칸막이 하나로 그들을 방음한 채 주문을 했다. 갈매기살이 지방이 적대. 그래? 그거 시키자. 아가씨나 임신부나 먹으면서 몸매 걱정하는 건 매한가지다.

  올해로 2년차 교사, 대학 동기이자 십년지기 친구인 E는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숙한 분위기를 하고 있어서 처음엔 선배인 줄 알고 인사까지 할 뻔 했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생일도 늦은 동갑내기였다는. 친구가 될 인연이었는지 흡사 은하철도 999의 철이 같던 나와 통하는 데가 많았다. 지난 십년 동안 우리에게도 사소한 오해와 공백기가 있었지만 오래 갈 인연이었는지 지금껏 이런저런 속내를 많이 털어놓는 사이다. 

  고기를 먹고 나서 근처 도넛 가게로 자리를 이동했다. 나는 망고주스, E는 카페라떼. 고기에 밥까지 먹고 도넛까지 먹었다. 그녀는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고민하면서도 노란봉지 인스턴트커피와 종종 시켜먹는 피자를 끊기가 힘들다고 했다. 커피는 정말 그렇다. 수업 마치고 나와서 목이 아플 때, 스트레스와 공복감을 해소시키는 데에는 뜨겁고 진한 인스턴트커피만한 게 없다.

  늘 하는 고민이지만 직장생활에서는 역시 인간관계가 가장 속을 썩인다. E는 올해 담임이 없다보니 아이들과의 관계는 오히려 더 좋아졌단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요즘 젊은 사람’ 축에 끼어버려 마음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더욱이 또래 동료 중에 남달리 싹싹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매번 비교되기 십상이다. 어느 날, 옆자리 선생님이 E에게 그러더란다. 일 년 넘게 생활해도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나도 선생님처럼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E 자신은 그저 말수가 적고 자기 일 이외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인데 동료나 선배가 보기에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도 학기 초에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새 학교로 와서 적응하기도 바쁜데 일거리까지 많다보니 내심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문을 열고 먼저 들어오려고 했다는 이유로 고령의 선생님께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어르신이 나가시는데 양보는커녕 먼저 문을 밀고 들어왔다는 이유였다. 처음에 잠깐 보자고 하실 때는 왜 그런지 영문을 몰랐는데 이유를 듣고 보니 맥이 빠졌다. 컨디션이 엉망이었고 이래저래 분주한 아침부터 그런 일로 훈계를 듣는 일이 마뜩치 않았다. 결국 공손히 듣고 있지를 못하고 반발을 했다.

  저는 바쁜 아침에 문 맞은편에 누가 서 있는지 미리 예상하거나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양보해 주실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결국 간단한 잔소리 몇 마디로 그칠 수도 있는 일을 크게 벌인 셈이었다. 갑자기 흥분한 선생님은 몇 호봉이냐, 몇 살이냐 부터 시작해서 우리 부모님까지 욕 먹일 셈이었다. 아이들을 지도할 때도 누구한테 그렇게 배웠느냐, 집에서 그렇게 가르쳤느냐, 는 말은 반드시 피하곤 하는데 그런 말을 내가 듣고 있자니 팽- 돌더라는. 여러 가지 대꾸를 했지만 내 말의 핵심은, 나이를 허투루 먹었냐는 반응이었고 선생님은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이런 일은 항상 뒷수습이 문제인데 사태를 아신 교장 선생님은 그냥 웃어 넘기셨지만 그 선생님과 비슷한 또래의 선생님들이 나를 좋게 볼 리 만무했다. 급식실에 내려갔더니 벌써 대놓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그러던 말던 밥을 푹푹 퍼 넣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과를 마쳤다. 그래도 어르신한테 그런 식으로 반응한 것은 분명 내 잘못이었다. 학년부장 선생님이 나를 부르셔서 젊은 사람이니 먼저 사과드리는 게 좋겠다고 하셨고 당일에는 차마 내키지 않았지만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자마자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이후 선생님은 웬일인지 눈에 띌 정도로 나와 우리 반 아이들을 잘 챙겨주셨다. 나 역시 전보다 더욱 공손하게 행동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생님께 혼이 난 젊은 선생님들이 한 둘이 아니었던 모양인데 나처럼 눈에 뵈는 거 없이 행동한 경우는 없었는가 보다. 선생님으로서는 아마도 일생의 봉변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 나도 사고 칠 컨디션이었고 선생님도 망신살 뻗친 날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친구인지는 몰라도 E도 감정 처리가 영 서툴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공문처리를 하다보면 인상이 저절로 일그러지고 쌍욕이 마구 튀어나온다고. 자기는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하는데 한가하게 관찰만 하다가 한 마디씩 하는 사람들 보면 울화가 치민단다. 회식자리에서라도 마음 편하게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싶은데 그조차도 허락이 안 될 때는 정말 참기 힘들단다. 원래 피로에 장사 없는 법이다. 심신이 극도의 스트레스로 예민해지다보면 사소한 말 한 마디도 귀에 걸리기 마련이다. 더욱이 나나 E처럼 남의 일에 무심한 타입들은 더욱 그렇다.

  이럴 때 연애라도 하면 좋으련만 어째 남자를 만나도 별 느낌이 없단다. 소개팅도 지겹고 만나러 가는 일도 귀찮다고. 남들은 뭐든지 잘하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뭐든지 잘 못하고 느린 건지 모르겠어. 주차할 때부터 툴툴거리더니 어느 새 열패감 덩어리다. 남보다 좀 더 일찍 이룬다고 마냥 좋을 것 같으냐. 그 사람들은 더, 더, 더 하고 있을 거다. 주변에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보았다.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데 행복하지는 않다. 부족한 것 천지인데 자족하며 즐거워한다. 언젠가부터 그렇듯 소박한 마음가짐보다 위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그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동갑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능글능글해진 친구도 있는데 E는 새내기 시절이나 지금이나 참 그대로다. 나는 좀 어정쩡한 상태여서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 별로 노련하지도, 세련되지도 못한 것으로 치자면 E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대화는 뚜렷한 결론 없이 맺을 때가 많다. 누구 한쪽에서 단호하게 이렇게 해봐, 하면 좋을 텐데 스스로에게도 확신이 없다보니 나도 그래! 라는 공감에서 그칠 때가 더 많다.

  E를 보내고 집에 들어오니 남편이 앉아 있다 반짝 일어난다. 아직도 이런 풍경이 낯설다. 웬 남자? 아주 잠깐, 그런 느낌이 들 정도이니. 인생을 늘 소풍 온 것처럼 사는 그에 비하면 나는 인생을 늘 부담스럽게 사는 것 같다. 어차피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마찬가지인 것을. 어깨에 힘만 주면 대수냐고. 당장 절실해 보이는 고민이나 문제들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경험을 많이 했다. E가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시간 또한 나중에 웃기 위한 당연한 과정일 지도 모른다. 다만 스스로에 대해 낙관하는 자세는 필요한 것 같다. 그것이 지나쳐 게으름이나 뻔뻔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조금 늦게, 더디 깨친다고 해서 자학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직 때 묻지 않아 서투른 E, 어여 자신감을 되찾기를. 우리는 서로의 능수능란하지 못함 때문에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서로를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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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06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E라는 분은 답답한 심정을 들어 줄 임신이라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같이 얼굴보고 대화를 해줄 수 있는 깐따삐야님 같은 분이 곁에 있어 행복할꺼에요..

웽스북스 2009-12-06 21:30   좋아요 0 | URL
메피님 댓글에 추천을 날리고 싶은 웬디씨 ㅋㅋ

깐따삐야 2009-12-07 10:21   좋아요 0 | URL
E한테도 그렇게 말해줄래요. 넌 내가 있어 행복한 거냐(?) ㅋㅋ

웽스북스 2009-12-06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요즘 깐따삐야님 글이 많아서 괜시리 좋아요. 헤헷. 글로 태교를?
E랑 저랑 비슷한 점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무슨 생각 하면서 사는지 모르겠다는 말 주변 사람들한테 좀 듣는 스타일이라서 말이죠.

참, 예정일은 언제에요?

깐따삐야 2009-12-07 10:27   좋아요 0 | URL
여기 와서 좋은 글 읽고, 웬디양님 사진도 보고, 나도 뭔가 끄적이고. 이만한 태교도 없죠.^^
E나 웬디양님이나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은 타입인 것 같은데 혼자 생각이 많다보면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가 봐요.

예정일은 확실치 않다고들 하던데 내년 4월 초순 쯤이에요.

레와 2009-12-0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깐따삐야님 글이 많아서 좋아요!^^


얼굴에 그때그때의 감정이 바로 들어나는 저 같은 사람은 때론 무심함이 필요한데
타고난 성격은 참.. 안 변해요.
딴엔 노력했는데 '넌 하나도 안변했어!' 이런말 들으면 또 좌절하고..^^;

살면 살 수록 어려워요. 으흐~

깐따삐야 2009-12-08 12:1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감정 덩어리죠.ㅋ 그저 주변에 무심한 편일 뿐. 제 일에는 도끼눈 뜨고 아우성입니다.
정말 살면 살수록 어렵죠? ^^
 

  쉬게 되면서 자주 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EBS에서 하는 ‘60분 부모’라는 프로그램이다. 아침 먹고 집안일 좀 하고나서 10시쯤 되면 한가해지는데 그때부터 약 한 시간가량 진행된다. 처음엔 개그맨 이혁재가 MC인 것이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차분하고 재미있게 진행을 잘한다.

  영유아부터 어린이까지, 식이장애부터 학습장애 등등 다루는 소재도 폭넓다. 예비 엄마가 아니라 교사의 입장에서 시청을 해도 건질 것이 많은 방송이다.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은, 아이의 잘못은 대개 부모의 양육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 어떤 엄마들은 아이한테 너무 미안해서 방송 중에 펑펑 울기도 한다. 얼마 전 방송에서 할머니 손에 키워진 아이가 퇴근한 엄마에게, “엄마, 빨리 가. 집에 오지 마.” 하는 것을 보고 괜히 뜨끔했었다. 하루 종일 안 보이다가 저녁때만 되면 나타나서 이거 하지 마, 저거 하지 마, 하는 엄마를 반길 리가 있겠는가. 머잖아 내 모습인 것 같아 한숨만 나왔다.

  매주 목요일에는 부부심리탐구 코너가 진행된다. SOS에 출연할 정도로 심각한 수위가 아니라 적어도 겉만 봐선 멀쩡한 부부들이 출연한다. 대개 신청자는 아내이고 처음에 남편들은 아내의 고민을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또한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래서 더욱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부부 문제는 서로를 너무 모르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 연애기간이 길고 짧고 와는 무관하다. 전문가들은 관찰카메라를 통해 평소 사는 모습을 꼼꼼히 관찰하고 상담을 통해 부부의 어린 시절 내상까지 끄집어낸다.

  상담 과정을 보고 있자면 부부란 것이 참말이지, 배우자의 과거까지 뭉뚱그려서 짊어지고 가야 하는 힘든 인연이구나 싶어진다. 인디언들이 친구를 가리켜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자’라고 한다더니 부부도 별반 다르지 않더라는. 출연자들은 그 동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하거나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배우자의 내밀한 아픔, 극복되지 못한 열등감,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지켜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렇듯 같은 인간으로서의 공감과 연민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올케언니가 오빠에게 연민을 좀 가져봤으면, 할 때가 있었다. 오빠가 남자고, 남편이라고 해서 의지만 할 것이 아니라 크게 품어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었다. 언니의 불만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오빠를 지극히 잘 아는 시누이로서의 욕심이었다. 나도 누군가의 올케가 되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동생으로서 오빠를 안쓰러워하는 시누이의 한 마디 안에 한때 내가 느꼈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우고 아는 것과 실제로 삶을 사는 것은 역시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중에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a small, good thing)’이라는 단편이 있다. 상심한 부부에게 제과점 주인이 줄 수 있는 것이란 갓 구워낸 따끈한 빵 뿐이지만 부부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을 얻는다. 주인의 말처럼 ‘그렇게 고급스런 빵은 아니지만’ 슬픔으로 축축해진 가슴을 다시 덥힐 수 있는 빵. 학교에서, 책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고급스런 것들을 많이 듣고 배웠지만 그것들이 누군가 꼭 필요할 때 내미는 빵 한 덩어리만 할까 싶다.  

  ‘60분 부모’에서 전문가들이 내리는 처방도 결코 거창하지 않다. 사사건건 말이 많은 부모에게는 불필요한 말을 줄이세요, 정서불안의 아이를 염려하는 부모에게는 주변 환경부터 깨끗이 정돈하세요, 서로에 대해 아쉽고 서운한 점을 토로하는 부부들에게는 알고 보면 각자가 다 힘든 겁니다... TV라는 매체가 시청하는 그 순간만으로 그칠 때가 많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은 자기 몫의 삶과 역할부터 돌아보고 반성하는, 기초적인 삶의 태도를 날마다 되새길 수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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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04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로 타인의 필터 하나를 거치고 나면, 뿌옇던 것이 명확할 때가 있지요. 저도 종종 즐겨봤더랬습니다.

깐따삐야 2009-12-06 19: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는 모양은 다들 비슷비슷한데 의외의 힌트를 얻기도 합니다. Jude님도 애청자셨군요.^^

Mephistopheles 2009-12-04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뭔가 말하고 싶은데 그냥 꼭꼭 참고 있을래요...^^

깐따삐야 2009-12-06 19:46   좋아요 0 | URL
으흐흐...?
이런 걸 보고 달으나마나, 달지 않느니만도 못한 댓글이라고 하던가요.-_-

Mephistopheles 2009-12-06 19:50   좋아요 0 | URL
사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도 다른 사람의 시선에선 또 다르고 새롭게 보여지기도 한다잖아요. 그나저나 임신 중 날고기.그러니까 회...말고 간장게장이나 그런 것도 피해야 하는 건가요???

깐따삐야 2009-12-07 10:30   좋아요 0 | URL
아니 머 그 말씀을 그렇게 꼭꼭 참으시기까지 하셨어요. ㅋㅋ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된다고 먹고 싶은 건 다 먹는다는 임신부들도 있다던데 저는 안 좋다는 건 그래도 피하는 쪽이에요. 근데 왜요? 간장게장 사주시게요? 헤헤~
 

  초임 발령지에서 함께 근무했던 Y선생님이 결혼소식을 전해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배우자도 같은 종교를 가진 남자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신랑감이 기독교 신자인데다 치과의사라고. 나는 엄친아(엄마 친구 아줌마)처럼 호들갑을 떨며 참 잘됐다고 축하해주었다. 결혼을 코앞에 앞둔 예비신부의 마음이 다 그렇듯 그녀는 이것저것 물어왔다. 나는 너무 큰 환상이나 기대만 갖지 않으면 괜찮다고 세상 다 산 아줌마처럼 말했다. 결혼식 치르는 일도 체력이 중요하니 건강 잘 챙기라는 말과 함께. Y선생님은 내가 결혼을 해서 그런 말을 하고, 아기를 갖고,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Y선생님은 내가 발령을 받은 이듬해에 초임 발령을 받았다. 첫인상은 밝고, 영리해 보였다. 같은 학년을 맡은 적은 없는데 비슷한 또래인데다 규모가 작은 학교이다 보니 함께 어울릴 일이 많았다. 가까이서 보니 직선적으로 할 말은 다 하면서도 애교가 있어 나이와 직책을 불문하고 융화가 잘 되는 편이었다. 직선적으로 할 말은 다 하면서도 뒷수습이 안 되어서 엉망진창이던 나와는 영 대조적이었다. 그런데도 젊은 선생님들끼리 모이면 Y선생님과 나는 이야기를 참 많이 했다. 둘 다 호오가 뚜렷한 성격답게 면전에서 각자의 흉을 보기도 했다. 방송용어 같은 말만 주고받으며 심심한 거리에 머무는 관계가 있는 반면, 서로가 서로를 날카롭게 간파해가며 가까워지는 관계도 있다. 그녀는 특히 우리 엄마를 좋아했다.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어간 후로는 수학여행 가서 엄마를 드린다고 미역도 사오고, 싹싹한 사람이었다.

  그때 그녀는 항상 내게 K선생님은 결혼도 안 할 것 같고, 혼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잘 살 것 같다고 말했었다. 발령 후 3년 즈음 슬럼프를 겪다가 대학원으로 내뺐을 때도 내가 거기서 뼈를 묻을 줄 알았는가 보다. 너도 여기 와봐라, 되게 좋다고 했더니 어느새 박차를 가해 내가 졸업하던 해에 그녀가 입학을 했다. 이야기 도중에 내게 공부를 더 하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오는데 문득 힘이 빠져, 이제 곧 애 엄마가 될 텐데, 여기서 더 하면 허영심이 생겨서 안 된다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고루한 대답을 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이렇게 변하다니, 탄식으로 응대했다.

  나는 변했을까. 지금 돌아보면 Y선생님과 함께 근무하던 당시의 내 모습은, 용감했다기보다 뭘 잘 모르니까 겁도 없었던 것 같다. 인생 초반에 큰 실패란 것을 겪어보지 않은 범생이들의 행로가 대개 그러하듯 마음먹으면 다 될 것 같고 잘 안 될 것 같은 일도 일단 저지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막가다보면 맛 가는 수가 있는 정신상태. 그만큼 주변과의 충돌이 잦았고 나 자신과의 불화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위험한 연애, 어려운 책, 까칠한 인간 등등에 매혹되던 시절이었으니 뒤늦은 사춘기를 사회에 나와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당시 동료들은 뒤에서는 욕을 했을지언정 앞에서는 독특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즐거워했다. 다시 돌아봐도 너무 솔직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좀 피곤하기는 해도 신기했을 수는 있겠다.

  세월이 흐른다고 근본이 바뀔까. 별로 그렇지는 않다. 그 모습 그대로 갖고 가는 부분이 더 많고 이따금 죽지 않은 열정이 슬근슬근 가슴을 간질일 때도 있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 시절, 여기저기 부딪치고 신혼 초에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며 깨달았다. 나와 상대의 바닥을 보았다 싶을 만큼 치열하게 다투면서 건진 한 가지.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는 거구나. 기껏해야 자장면과 짬뽕, 순대국밥과 곱창전골 사이에서 고민하며 사람이 다 먹을 수는 없는 거야, 아쉬워하던 나였는데 장족의 발전이라면 발전이었다. 특히 남편과 나는 연애 때부터 지금껏 서로에게 허용적인 편인데도, 그런데도, 깨달음은 꽤 징하다.

  Y선생님의 결혼식은 교회에서 치러질 예정이란다. 아줌마가 다 된 것 같은 말투에 놀라워했는데 배부른 모습까지 보면 앉아있다 벌떡 일어서지 않을까 모르겠다. 내내 논문 주제 걱정을 하는 그녀에게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에 더 신경 쓰라고, 논문은 열 달 채우면 다 나오게 되어 있다고 정말 임신부다운 조언을 했다. 생각해보니, 작년에 대학원 선배가 내게 했던 조언이었다. 살면서 가끔 인생의 언니, 오빠들로부터 주워들었던 말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는 와 닿지 않아 흘려들었던 것들도 어느 순간 과연 그렇구나, 싶어질 때가 온다. 진즉에 말 좀 잘 들어가며 살걸, 하다가도 진즉에 그렇게 살았으면 내가 내가 아닌 게 되어버리니. 역시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는가 보다. 그래도 어찌어찌 버티어 스스로 망가지거나 자폭하지 않고 이만큼 온 것도 다행이라는 위안.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면 언제나 화끈화끈. -_- 내가 기억하는 Y선생님은 인생 늦둥이인 나보다 더 의연하고 똑똑한 사람이다. 그녀의 행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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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02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노래가
'내겐 더 많은 꿈이 있어 어떤 꿈일까??" 일까요..
아니면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일까요..
아니면 '슬퍼도 울지 않을꺼야 난 웃으며 달릴 꺼야~~ 일까요..

그나저나 깐따삐야님도 이제 내 누님같은 꽃이 다 되었습니다 그려....^^

깐따삐야 2009-12-03 12:08   좋아요 0 | URL
뭐든 봄여름가을겨울 노래면 다 좋아요! 김종진 목소리를 부르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요.

늙었다는 말씀? 아주 순간이더라구요.ㅠ

레와 2009-12-02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과거에 비추어 미래의 내 모습.. 상상이 안되요.
그 과거에 지금 내 모습이 이럴꺼란 상상을 못했거든요..^^;

깐따삐야 2009-12-03 12:10   좋아요 0 | URL
그 노래가 라디오에서 한창 흘러나오던 때가 있었죠.^^

레와님은 구체적인 나이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항상 소녀 같으셔요. 저도 제 나이 서른에 이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답니다.
 

  제목을 써놓고 보니 뭐 요리랄 것까지야... 하는 생각. 예전에 레토르트 식품 광고를 보며 달랑 3분 요리 해주고 요리사 소리 듣는 엄마가 참 한심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결혼 이후의 내 식생활을 보면 엄마가 만드신 완제품을 가스 불에 데우는 정도이니 광고 속 주부와 다를 것이 없다. 요즘은 임신을 핑계로 만둣국에 얹을 파와 계란 지단까지 엄마가 썰어다 주시니 참 한가한 손모가지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남편도 엄마 손맛에 길이 들어서인지 늘 소식을 주장해오던 사람인데 먹는 양이 많이 늘었다. 결혼 전에 자취를 하면서는 주로 밖에서 먹고 들어오거나 혼자 먹을 분량만큼만 만들어서 먹곤 했다고 한다. 그는 마음먹으면 음식을 잘하는 편이다. 내가 입덧이 심해 주방 근처에도 못 갈 때는 손수 볶음밥도 해주고, 김밥도 싸주고, 특히 김치나 부추를 넣고 만드는 부침개는 나보다 보기 좋게 잘 부친다. 언제 김치 한 번 담가보시지, 했더니 장모님이 하시는 거 옆에서 한번 보면 담글 수 있을 것 같다며 자신만만하다. 엄마도 이제는 음식을 건네시면서 남편한테 당부를 한다. 이거는 가자마자 냉장고에 넣고, 생선 구울 때는 얘가 둔해져서 혹시 모르니까 자네가 하고... 가스불 앞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프라이팬 손잡이를 건드려서 몇 번 뒤집은 적이 있는 나를 못 미더워하시는 거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장을 봐서 뭘 좀 해볼까 싶다가도 왠지 재료만 낭비하는 것 같아서 관둘 때가 많다. 엄마는 알뜰하게 장을 봐서 혹시 부족한 재료가 있어도 맛있게 만드는데 나는 그럴 자신이 없는데다 혹시 실패하면? 남는 재료들은? 괜히 쓰레기만 만드는 거 아냐? 그러저러한 노파심에 에잇, 그냥 얻어다 먹자, 마음을 접는다. 엄마는 먹어본 게 있으면 나중에 다 잘할 수 있다고, 자꾸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솜씨는 는다고, 걱정 말라고 하시는데 나는 이러다 3분 요리 광고 속 그 엄마가 될까봐 좀 불안하다.

  그래도 남편은 내가 뭔가를 만들면 항상 맛있다고 한다. 김치는 물론이고 매일 먹는 국과 밑반찬까지 몽땅 얻어다 먹고는 있지만 그래도 나도 음식을 하기는 한다. 엄마가 소고기로 육수를 내주시면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그것으로 미역국도 끓이고 무국도 끓인다. 사골 육수로는 만둣국이나 떡국을 끓인다. 어설프긴 하지만 본 건 있어가지고 김 가루도 고명으로 올리고 지단도 부쳐 올린다. 혹시 사골 육수가 남으면 김치찌개 끓일 때 사용한다. 돼지고기, 적당히 시금시금해진 김치, 사골 육수, 세 가지면 다른 것을 넣지 않아도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멸치 육수로는 된장찌개나 청국장을 끓인다. 된장찌개에는 주로 두부, 버섯, 감자 등을 넣고 청국장에는 두부하고 김치만 넣는다. 여름에는 호박 넣고 끓여야 맛있던데 요즘은 감자가 별미더라. 특히 나는 청양고추를 꼭 썰어 넣어서 약간 칼칼한 맛을 즐긴다. 그런데 다른 재료 다 좋아도 된장이 맛없으면 된장요리는 말짱 맹탕. 반드시 집된장이거나 시판되는 된장 중에서도 집된장 맛이 나는 된장이어야 한다. 어쨌든 몇 가지 국물 요리를 해본 결과 육수가 맛있으면 절반의 성공은 장담할 수 있다.  

  그밖에도 가끔 카레도 끓이고, 불고기도 하고, 기본적인 것들은 어느 정도 하는데 자신이 없는 것은 밑반찬과 나물 종류다. 우리 집에 꾸준히 있는 반찬이 멸치, 새우, 오징어채 볶음인데 내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음식들이다. 엄마가 하시는 것을 구경은 많이 했는데 빛깔 내는 것도 그렇고, 보아하니 마늘, 대추 같은 것도 저며 넣어야 하고, 의외로 귀찮더라는. 시금치나 고사리 같은 나물류도 그렇다. 얼마나 데쳐야 하는지, 들기름과 마늘 다진 것은 언제,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 쉽다는 콩나물 무침도 아직 안 해봤다. 레시피만 알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직은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 

  상태가 이런데도 생각은 야무지다. 앞으로 시어머니 생신이 한 달 남짓 남았는데 이번에 생신 상을 한번 차려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작년에 아버님 생신상은 어머님이 차리셨고 어머님 생신상은 시누이가 대접했다. 그때 나는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다음 생신 때는 제가... -_-;; 나는 빈말을 하거나 공수표 날리는 일을 스스로 금하는 편인데 그만큼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거나 잊어버리는 일에도 능숙하지를 못하다. 아직 만삭인 것도 아닌데 결혼해서 처음 생신상 한번 차려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 엄마처럼 입맛 까다로운 분은 자신이 없지만 다행히 시부모님들은 내가 미역국에 계란을 풀어도 아마 잘했다고 하실 거다.

  엄마한테 이 사태를 고했더니 도와주시겠단다. 도와주는 게 아니라 다 하는 게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는데 이번에 불고기와 잡채 정도는 완전히 마스터 해야지. 굴비나 조기 같은 생선을 굽는 것만 하지 찌는 것은 잘 못하는데 그것도 제대로 배워야겠다. 아, 나는 음식을 정말 잘하고 싶다. 입덧할 때 밥맛이 없어서 외식을 연달아 한 적이 있는데 계속 그렇게는 못 살겠더라는. 나처럼 집밥에 인이 박힌 사람은 시대가 변해도 어쩔 수가 없다.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내 입의 즐거움, 내 몸의 건강을 위해 기본 음식들을 배워놓아야만 한다. 친구들이 온다고 해도 겁내지 않고, 친척들이 온다고 해도 두렵지 않고, 엄마한테 전화하지 않고도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음식을 그 날로 바로 해먹을 수 있는! 상상만 해도 뿌듯하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는 음식을 잘하는 것도 자신감, 또는 행복의 한 요소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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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0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님 역시 음식엔 거의 문외한 잼뱅이 수준이었는데...
이젠 무침류나 밑반찬류는 꽤 완성도가 높게 결과물이 나온다죠.
특히 윤기 좔좔 흐르는 연근 조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만....
아직도 국물내는 요리는 제가 한 수 위........에요..호호

깐따삐야 2009-12-02 12:25   좋아요 0 | URL
아, 저 연근조림도 좋아하고 우엉조림도 좋아하고 장조림도 좋아하는데! 만들지는 못한다는.-_-
메피님은 역시 마당쇠다운 실력을 뽐내시는군요. 이제 냄비요리의 계절이 왔으니 마님을 위한 밥상을 준비해 보시와요.^^

레와 2009-12-0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콩나물 무침,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 (^^;;)

독립을 하고 내 손으로 매끼를 챙기다 보니, 한그릇 음식이 편해졌어요.
뭐든 30분이내에 만들 수 있는 것으로 하고,
입맛 없을때는 무조건 상추쌈! ㅎ

언제였는지.. 제가 꿈이 현모양처였는데 말입니다.(풉~)
현실은.. (먼산____________________ ( ")

깐따삐야 2009-12-02 12:30   좋아요 0 | URL
험... 전 콩나물국도 어렵더라구요. 먹을만 하긴 한데 집에서 먹던 그 맛은 아니에요. 뚜껑을 계속 열거나 닫아놓고 끓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도 뭔가 미진한.ㅠ

저도 자취할 땐 빨리 해서 빨리 먹고 치우고 그랬던 것 같아요. 상추쌈도 편하고. 요즘엔 구운김에 달래간장이 맛나더라구요.

현모양처, 아예 꿈도 꾸지 않기를 잘한 것 같아요. 레와님은 결혼하면 아주 재미나게 사실 것 같은데.^^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신기해했던 점 중의 하나는 내가 씩씩거리는 모습이었다. 나는 잘 씩씩거린다. 밥을 먹다가도, 빨래를 개다가도, 괘씸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쁜 X 같으니라구... 문득문득 혼자 중얼거리곤 한다. 이미 왜 내가 그토록 열이 심하게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남편한테 백만스물두번 쯤 이야기 한 다음이기에 그의 반응은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으로 그냥 웃거나, 한숨 한번 내쉬거나, 빨리 잊어버려야 할 텐데, 하는 정도이다.

  한창 까칠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이다. 직장생활에 치이고 아내, 며느리, 시누이 등등 수식어가 붙으면서 순간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살기 어려워졌다. 물론 말로는 어려워졌다고 하면서도 지금도 그다지 참하거나 예의 바른 편은 못된다. 더욱이 나는 오래 참는 성격도 아니다. 꾹꾹 누르고 있다가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싶으면 용이 불을 뿜듯 담아두었던 것을 폭발해 낸다.

  작가 김홍신이 작품 구상을 위해 역술 공부를 좀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백이면 백, 다 적용되는 한 마디가 있다고 한다. 누군가 의논을 해올 때 “그 성질 좀 죽이고 살어.” 이 한 마디면 “어떻게 아셨어요?” 라는 대답이 되돌아온단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성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신동엽이 “어릴 때 크게 아팠던 적 있죠?” 이 말이면 다 통한다더니 그에 버금가는 한 마디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성질을 부려야 할 때, 부리지 말아야 할 때를 잘 가릴 수만 있어도 삶 곳곳에서 맞닥뜨리는 시비나 갈등을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시의 적절하게 성질부리는 일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배려 차원에서, 또는 체면을 생각해 무리하게 참다 보면 이기적이고 아둔한 상대의 발톱만 길러주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그 미련한 상대가 뭉툭한 발톱을 세우고 미련을 떠는 꼴을 봐야 한다. 그 추악한 꼴을 보고 있자면 그 동안 마음을 갈무리하며 수양했던 시간들이 아깝고 억울해서 애초에 부릴 성질, 몇 배는 더 부리게 된다.

  반면에 한 성격 하는데, 의 그 성격이 아니라 어디서 감히 성질을 부리는 게야, 의 못난 성질도 있다. 보통 자기 분에 못 이겨 똥인지 된장인지 못 가리고 울고불고하는 상황에서의 성질을 가리킨다. 이것은 앞서 말한 미련한 발톱의 소유자와 중첩된다. 내가 하는 것에 비해서 상대가 더 배려를 해줄 때는 정신을 더더욱 바짝 차려야 하는데 그럴수록 곰처럼 게으르게 늘어지는 부류가 있다. 감수성이 부족하거나 매우 오만한 타입의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게으른데다 미련하기까지 하면 결국 주변에 아무도 안 남는다.

  한편, 위험한 성질의 성질도 있다. 잔인한 구석이 있거나 승부욕이 강한 사람들 중에 상대방의 성질을 돋우느라고 그의 아킬레스건을 부러 건드릴 때도 있다. 상대방을 완전히 다운시켜야 한다고 결심했거나, 아예 다시는 안 볼 것을 각오하고 부리는 성질이라고 볼 수 있다. 지능적이긴 하지만 저급하고, 막장이기는 하지만 효과 만점인 성질 돋우기인 셈. 이런 상황에서 당하는 사람은 짐짓 피해자인 것인 양 하지만 당해도 싸다 싶은 경우도 종종 있다. 변하지 않을 테지만 열이라도 받게 하자, 는 의지는 먼저 상처 입은 자의 절절한 포효일 수도 있다.

  Anger management라는 영화도 있지만 내 성질을 내가 살리고, 죽이고 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 더군다나 사람 사이에서 갈등과 다툼은 피할 수 없다. 때로 관계의 성장을 위한 필요악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이니 포용이니 하는 말들은 얼마나 듣기 훈훈한가. 나를 낳아주신 엄마나 좋든 싫든 나를 인정해야 하는 남편에게서 그런 미덕을 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내 기대 이상으로 누군가 나를 용인하고 배려할 때는 잘난 척 하지 말고 더욱 긴장해야 할 것이다. 겉으로 아무리 점잖아 보여도 대한(大恨)민국 사람 중에 성질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말이다. 트러블이 잦을 수밖에 없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런 마음을 갖고 긴장한다면 미련하게 발톱 기를 틈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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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9-11-30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같이 다혈질인 인간한테는 요 성질 죽이는 일이 힘들때가 다반사입니다.
어떻게 수양해야 약발이 오래갈지..


어제 오늘 비가와서 기분이 다운되는걸 가까스로 잡고 있어요.
저녁에 맛있는 밥먹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업업 되겠죠?^^;
깐따삐야님 댁, 오늘 저녁 메뉴는 모예요?! (컨닝원츄!ㅎ)

깐따삐야 2009-12-01 09:39   좋아요 1 | URL
저 역시 그래요. 좀 참아보려고 해도 눈빛은 이글이글. ㅋㅋ

요즘 날씨가 그렇죠. 북반구에 사는 것 같아요. 어제 저녁엔 무 넣은 꽁치조림. 오늘 아침은 황태국 먹었습니다. 레와님은 맛난 거 드셨나요? 매일 뭘 먹나도 고민이에요.

Mephistopheles 2009-11-30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일 있었답니까..??
그나저나...어쩌면 전 막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호홋

깐따삐야 2009-12-01 09:44   좋아요 1 | URL
어쩌면 사람을 막장까지 몰아치는 상대방이 미련한 건지도 몰라요.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메피님은 성질 안 부려가면서 사람 약올리는 거 잘하실 것 같아요.^^

다락방 2009-12-01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대뜸 보면 성격 같은거 없게 생긴 저같은 인간에게도 성질이 있으니, 정말 대한민국에 성질 없는 사람이 어디있을까 싶네요. 게다가 우리들은 홧병이란것도 있잖습니까..
삶이..쉽질 않아요.....

저 위에 댓글 보고나니 저도 묻고 싶네요.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은 맛있게 드셨어요,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09-12-01 14:4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은 순한 인상이신가 봐요.^^ 홧병, 무섭죠. 혈압 오르면 추운 줄도 모르잖아요.

밤사이 공복 때문인지 아침이 가장 맛있어요. 그나저나 별로 입맛은 없는데 몸무게는 자꾸 늘고. 그래도 먹기는 먹어야 하고. 임신부의 삶이 그렇답니다. 다락방님 페이퍼에서는 소주와 안주 냄새가 솔솔 나서 부럽기 그지없어요.ㅠ

레와 2009-12-01 16:00   좋아요 1 | URL
저는 입맛 없을때 풋고추와 상추쌈 먹어요!
( 아 생각만 해도 군침..;; )

그런데 입맛 없을때가 거의 없어요. ㅎㅎㅎㅎㅎㅎ

깐따삐야 2009-12-02 12:21   좋아요 1 | URL
레와님, 저도 풋고추하고 상추쌈 좋아해요. 맛난 고추장하고 쌈장만 있으면 웰빙 식탁으로 꾸밀 수 있죠!

저도 그랬었는데.ㅠ 입맛은 없는데 살은 찌니 이젠 억울하기까지 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