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발령지에서 함께 근무했던 Y선생님이 결혼소식을 전해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배우자도 같은 종교를 가진 남자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신랑감이 기독교 신자인데다 치과의사라고. 나는 엄친아(엄마 친구 아줌마)처럼 호들갑을 떨며 참 잘됐다고 축하해주었다. 결혼을 코앞에 앞둔 예비신부의 마음이 다 그렇듯 그녀는 이것저것 물어왔다. 나는 너무 큰 환상이나 기대만 갖지 않으면 괜찮다고 세상 다 산 아줌마처럼 말했다. 결혼식 치르는 일도 체력이 중요하니 건강 잘 챙기라는 말과 함께. Y선생님은 내가 결혼을 해서 그런 말을 하고, 아기를 갖고,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Y선생님은 내가 발령을 받은 이듬해에 초임 발령을 받았다. 첫인상은 밝고, 영리해 보였다. 같은 학년을 맡은 적은 없는데 비슷한 또래인데다 규모가 작은 학교이다 보니 함께 어울릴 일이 많았다. 가까이서 보니 직선적으로 할 말은 다 하면서도 애교가 있어 나이와 직책을 불문하고 융화가 잘 되는 편이었다. 직선적으로 할 말은 다 하면서도 뒷수습이 안 되어서 엉망진창이던 나와는 영 대조적이었다. 그런데도 젊은 선생님들끼리 모이면 Y선생님과 나는 이야기를 참 많이 했다. 둘 다 호오가 뚜렷한 성격답게 면전에서 각자의 흉을 보기도 했다. 방송용어 같은 말만 주고받으며 심심한 거리에 머무는 관계가 있는 반면, 서로가 서로를 날카롭게 간파해가며 가까워지는 관계도 있다. 그녀는 특히 우리 엄마를 좋아했다.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어간 후로는 수학여행 가서 엄마를 드린다고 미역도 사오고, 싹싹한 사람이었다.

  그때 그녀는 항상 내게 K선생님은 결혼도 안 할 것 같고, 혼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잘 살 것 같다고 말했었다. 발령 후 3년 즈음 슬럼프를 겪다가 대학원으로 내뺐을 때도 내가 거기서 뼈를 묻을 줄 알았는가 보다. 너도 여기 와봐라, 되게 좋다고 했더니 어느새 박차를 가해 내가 졸업하던 해에 그녀가 입학을 했다. 이야기 도중에 내게 공부를 더 하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오는데 문득 힘이 빠져, 이제 곧 애 엄마가 될 텐데, 여기서 더 하면 허영심이 생겨서 안 된다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고루한 대답을 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이렇게 변하다니, 탄식으로 응대했다.

  나는 변했을까. 지금 돌아보면 Y선생님과 함께 근무하던 당시의 내 모습은, 용감했다기보다 뭘 잘 모르니까 겁도 없었던 것 같다. 인생 초반에 큰 실패란 것을 겪어보지 않은 범생이들의 행로가 대개 그러하듯 마음먹으면 다 될 것 같고 잘 안 될 것 같은 일도 일단 저지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막가다보면 맛 가는 수가 있는 정신상태. 그만큼 주변과의 충돌이 잦았고 나 자신과의 불화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위험한 연애, 어려운 책, 까칠한 인간 등등에 매혹되던 시절이었으니 뒤늦은 사춘기를 사회에 나와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당시 동료들은 뒤에서는 욕을 했을지언정 앞에서는 독특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즐거워했다. 다시 돌아봐도 너무 솔직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좀 피곤하기는 해도 신기했을 수는 있겠다.

  세월이 흐른다고 근본이 바뀔까. 별로 그렇지는 않다. 그 모습 그대로 갖고 가는 부분이 더 많고 이따금 죽지 않은 열정이 슬근슬근 가슴을 간질일 때도 있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 시절, 여기저기 부딪치고 신혼 초에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며 깨달았다. 나와 상대의 바닥을 보았다 싶을 만큼 치열하게 다투면서 건진 한 가지.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는 거구나. 기껏해야 자장면과 짬뽕, 순대국밥과 곱창전골 사이에서 고민하며 사람이 다 먹을 수는 없는 거야, 아쉬워하던 나였는데 장족의 발전이라면 발전이었다. 특히 남편과 나는 연애 때부터 지금껏 서로에게 허용적인 편인데도, 그런데도, 깨달음은 꽤 징하다.

  Y선생님의 결혼식은 교회에서 치러질 예정이란다. 아줌마가 다 된 것 같은 말투에 놀라워했는데 배부른 모습까지 보면 앉아있다 벌떡 일어서지 않을까 모르겠다. 내내 논문 주제 걱정을 하는 그녀에게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에 더 신경 쓰라고, 논문은 열 달 채우면 다 나오게 되어 있다고 정말 임신부다운 조언을 했다. 생각해보니, 작년에 대학원 선배가 내게 했던 조언이었다. 살면서 가끔 인생의 언니, 오빠들로부터 주워들었던 말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는 와 닿지 않아 흘려들었던 것들도 어느 순간 과연 그렇구나, 싶어질 때가 온다. 진즉에 말 좀 잘 들어가며 살걸, 하다가도 진즉에 그렇게 살았으면 내가 내가 아닌 게 되어버리니. 역시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는가 보다. 그래도 어찌어찌 버티어 스스로 망가지거나 자폭하지 않고 이만큼 온 것도 다행이라는 위안.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면 언제나 화끈화끈. -_- 내가 기억하는 Y선생님은 인생 늦둥이인 나보다 더 의연하고 똑똑한 사람이다. 그녀의 행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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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02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노래가
'내겐 더 많은 꿈이 있어 어떤 꿈일까??" 일까요..
아니면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일까요..
아니면 '슬퍼도 울지 않을꺼야 난 웃으며 달릴 꺼야~~ 일까요..

그나저나 깐따삐야님도 이제 내 누님같은 꽃이 다 되었습니다 그려....^^

깐따삐야 2009-12-03 12:08   좋아요 0 | URL
뭐든 봄여름가을겨울 노래면 다 좋아요! 김종진 목소리를 부르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요.

늙었다는 말씀? 아주 순간이더라구요.ㅠ

레와 2009-12-02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과거에 비추어 미래의 내 모습.. 상상이 안되요.
그 과거에 지금 내 모습이 이럴꺼란 상상을 못했거든요..^^;

깐따삐야 2009-12-03 12:10   좋아요 0 | URL
그 노래가 라디오에서 한창 흘러나오던 때가 있었죠.^^

레와님은 구체적인 나이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항상 소녀 같으셔요. 저도 제 나이 서른에 이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