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신기해했던 점 중의 하나는 내가 씩씩거리는 모습이었다. 나는 잘 씩씩거린다. 밥을 먹다가도, 빨래를 개다가도, 괘씸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쁜 X 같으니라구... 문득문득 혼자 중얼거리곤 한다. 이미 왜 내가 그토록 열이 심하게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남편한테 백만스물두번 쯤 이야기 한 다음이기에 그의 반응은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으로 그냥 웃거나, 한숨 한번 내쉬거나, 빨리 잊어버려야 할 텐데, 하는 정도이다.
한창 까칠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이다. 직장생활에 치이고 아내, 며느리, 시누이 등등 수식어가 붙으면서 순간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살기 어려워졌다. 물론 말로는 어려워졌다고 하면서도 지금도 그다지 참하거나 예의 바른 편은 못된다. 더욱이 나는 오래 참는 성격도 아니다. 꾹꾹 누르고 있다가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싶으면 용이 불을 뿜듯 담아두었던 것을 폭발해 낸다.
작가 김홍신이 작품 구상을 위해 역술 공부를 좀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백이면 백, 다 적용되는 한 마디가 있다고 한다. 누군가 의논을 해올 때 “그 성질 좀 죽이고 살어.” 이 한 마디면 “어떻게 아셨어요?” 라는 대답이 되돌아온단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성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신동엽이 “어릴 때 크게 아팠던 적 있죠?” 이 말이면 다 통한다더니 그에 버금가는 한 마디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성질을 부려야 할 때, 부리지 말아야 할 때를 잘 가릴 수만 있어도 삶 곳곳에서 맞닥뜨리는 시비나 갈등을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시의 적절하게 성질부리는 일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배려 차원에서, 또는 체면을 생각해 무리하게 참다 보면 이기적이고 아둔한 상대의 발톱만 길러주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그 미련한 상대가 뭉툭한 발톱을 세우고 미련을 떠는 꼴을 봐야 한다. 그 추악한 꼴을 보고 있자면 그 동안 마음을 갈무리하며 수양했던 시간들이 아깝고 억울해서 애초에 부릴 성질, 몇 배는 더 부리게 된다.
반면에 한 성격 하는데, 의 그 성격이 아니라 어디서 감히 성질을 부리는 게야, 의 못난 성질도 있다. 보통 자기 분에 못 이겨 똥인지 된장인지 못 가리고 울고불고하는 상황에서의 성질을 가리킨다. 이것은 앞서 말한 미련한 발톱의 소유자와 중첩된다. 내가 하는 것에 비해서 상대가 더 배려를 해줄 때는 정신을 더더욱 바짝 차려야 하는데 그럴수록 곰처럼 게으르게 늘어지는 부류가 있다. 감수성이 부족하거나 매우 오만한 타입의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게으른데다 미련하기까지 하면 결국 주변에 아무도 안 남는다.
한편, 위험한 성질의 성질도 있다. 잔인한 구석이 있거나 승부욕이 강한 사람들 중에 상대방의 성질을 돋우느라고 그의 아킬레스건을 부러 건드릴 때도 있다. 상대방을 완전히 다운시켜야 한다고 결심했거나, 아예 다시는 안 볼 것을 각오하고 부리는 성질이라고 볼 수 있다. 지능적이긴 하지만 저급하고, 막장이기는 하지만 효과 만점인 성질 돋우기인 셈. 이런 상황에서 당하는 사람은 짐짓 피해자인 것인 양 하지만 당해도 싸다 싶은 경우도 종종 있다. 변하지 않을 테지만 열이라도 받게 하자, 는 의지는 먼저 상처 입은 자의 절절한 포효일 수도 있다.
Anger management라는 영화도 있지만 내 성질을 내가 살리고, 죽이고 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 더군다나 사람 사이에서 갈등과 다툼은 피할 수 없다. 때로 관계의 성장을 위한 필요악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이니 포용이니 하는 말들은 얼마나 듣기 훈훈한가. 나를 낳아주신 엄마나 좋든 싫든 나를 인정해야 하는 남편에게서 그런 미덕을 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내 기대 이상으로 누군가 나를 용인하고 배려할 때는 잘난 척 하지 말고 더욱 긴장해야 할 것이다. 겉으로 아무리 점잖아 보여도 대한(大恨)민국 사람 중에 성질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말이다. 트러블이 잦을 수밖에 없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런 마음을 갖고 긴장한다면 미련하게 발톱 기를 틈이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