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도 있잖아. 특출하지는 않은데 꾸준한 선수들. 어느 경기에서든 몇 퍼센트 이상 자기 역할 성실히 해내는 선수들. 난 그런 선수가 되고 싶어요. 어느 날은 골대를 잡아먹을 듯이 현란하게 뛰고 다른 어느 날은 모니터 속으로 돌을 던지고 싶을 만큼 형편없고... 나는 그렇게 기복이 심한, 믿을 수 없는 선수 같아요.”

  남편의 깊어진 눈동자와 마주하는 날이 있다. 내가 동굴로 숨어드는 날. 아침을 잘 차려먹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서 그러다 문득, “나 밖에 좀 나갔다 올게요.” 남편은 어디를 가냐고 했고 나는 친정에를 간다고 했다. 가는 도중에 서점에 들러 최승자의 새로 나온 시집을 샀고 무슨 변덕인지 초콜릿이 가득 묻은 아이스크림도 샀다. 다 도착했을 즈음, 공중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 목소리. 엄마가 베란다에 나와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 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응, 빨래 널다가 본거야.”

  그 날 하루 종일 엄마와 수다를 떨고 고기도 구워먹고 잔치국수도 끓여먹고 엄마가 대추와 마른고추를 채 썰어 너는 모습도 지켜보며, 그렇게 빈둥빈둥,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고 나는 좀 더 이따가 데리러 오면 좋겠다고 했다. “실은 아침에 전화 왔었어.” “뭐라고?” 남편은 내가 친정에 간다고, 무척 우울해 하는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고, 장모님이 잘 좀 보살펴 달라고 했단다.

  얼마 후, 나를 데리러 온 남편의 얼굴이 아침보다 한 뼘은 더 핼쑥해진 것 같았다. 엄마는 내게 그만 좀 징징거리라고 했고 나는 순순히 남편을 따라 나섰다. 집에 가는 동안 그는 별 말이 없었고 나는 집에 도착해 엄마가 해주신 음식들을 풀어놓으며 저녁부터 차렸다. “얼굴이 왜 그래요? 갑자기 눈이 더 처진 것 같애.” “아까 낮잠을 자서 그런가.” 그는 묵묵히, 맛있게 밥 한 그릇을 비웠다. 나도 없는데 이것저것 반찬을 꺼내놓고 제대로 점심을 차려 먹었을 리 만무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빛은 밥을 먹는 동안에도 여전했다.

  다음 날, 연수원에서 시험을 마치고 온 그가 모처럼 저녁을 밖에 나가서 먹자고 했다. “그래요. 시험 끝났다고 술도 못 사주는데 간만에 외식할까.” 장소는 파마산 돈까스로 유명한 모교 중문의 레스토랑. 주차할 곳을 궁리하다가 여름에 연수 받을 때 들고 다니던 가방을 뒤져보니 옳거니, 주차권이 한 장 나온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단과대 뒤편에 차를 세워놓고 보송보송한 후배들을 지나치며 조금 걸었다. 학부 시절의 몇 가지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신축된 강의동, 못 보던 술집들을 힐끔거리며.

  그는 돈까스를, 나는 스파게티를 시켰다. 샐러드 바가 생기면서 본 메뉴가 시원찮아졌고 리모델링을 했다는데 스파게티 전문점인 쏘렌토와 거의 다를 바가 없더라는. 그나저나 하루가 지났는데도 남편의 깊고 처진 눈은 그대로였고 나는 그의 눈초리가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하며 오버를 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둘을 엮어준 장본인인 J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그가 정말 잘되기를 바랐다.

  밖으로 나오니 저녁 바람이 꽤 찼다. 주차장까지 걸어가던 길, 잘 안 벌어지는 입을 옹송거리며 위의 운동선수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진심인지, 위로인지,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자신처럼 사시사철 잔잔한 것보다는 나처럼 다채로운 감정을 가진 엄마가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글쎄, 엄마는 모름지기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할 때가 있으니.” “당신은 아직 젊어서 그런 거예요.” 그는 금세 나이 들어 버린 노인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래 전부터 꾸준한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사람들이 행여 나를 그런 사람으로 착각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자괴감 때문에 부끄러운 적도 많았다. 나는 미련할 정도로 고집스러운 사람이기는 해도 매사 한결같은 꾸준한 사람은 못 된다. 고집은 그저 그 사람만의 성미에 불과하지만 꾸준함은 다르다. 인내와 약속, 책임 등 많은 것들이 뒤따르는 고급한 미덕이다. 그저 고집스러울 뿐인 나는 주변의 꾸준한 사람들의 덕을 보며 산다. 그들은 고집과 변덕으로 시시때때로 생떼를 부리는 나를 큰 산과 같은 묵직한 꾸준함으로 받아준다. 아무리 잘난 척을 해봤자 그들의 수고로움 앞에서는 나는 그저 아직 어리거나 젊은, 어떤 상황에서는 결국 자기 하나밖에 볼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다.

  학창시절에는 공부하는 테크닉을 익히고, 사회에 나와서는 능력 있는 교사가 되기 위해 새로운 테크닉을 궁리하고, 결혼해서는 갖가지 살림 테크닉을 배우고... 언뜻 보면 상당히 부지런히 살아온 것 같지만 그러한 자잘한 테크닉을 넘어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여전히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문득 스쳐 지나는 잔상에 몰입한다든지, 감정의 결을 건드리는 사소한 자극에 휘둘린다든지, 과거나 미래의 시간에 스스로를 두고 온다든지, 그럴 때마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주변 사람을 미궁에 빠뜨리는 안하무인의 습성. 그런 나를 마주하는 날이면 스스로가 가증스럽다.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좀 전까지 꾸준함을 가장한 채 연극이라도 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엄마 말씀처럼 잠깐인 듯싶다가도 멀미날 듯 긴 것이 삶이다. 별로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꾸준함 밖에는 삶과 대적할 뾰족한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반짝이는 매력들에 눈과 마음을 뺏기느라 그 묵묵한 미덕을 닦는 데에 너무 소홀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남편과 나는 우리 주변의 한결같은 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때는 말이지," 하고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네가 누리고 있는 만큼 그렇게 유리한 처지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위대한 개츠비』中 그처럼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나를 향해 한결 같은 마음을 보여주곤 했다. 나는 다른 그 어떤 테크닉보다도 그 인정과 여유를 배워야 한다. 위대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 조금 덜 미안해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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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1-2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군요.(닥쵸!)=3=3=3=3

깐따삐야 2010-01-29 10:10   좋아요 0 | URL
앗, 그런가요? 꾸준히 약올리기의 달인.ㅋㅋ ^^

Mephistopheles 2010-01-29 10:22   좋아요 0 | URL
그것도 정말 힘든 일입니다..으쓱!=3=3=3=3

레와 2010-01-28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

깐따삐야 2010-01-29 10:10   좋아요 0 | URL
^^

2010-02-02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3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창비세계문학세트>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어느 사랑의 실험 - 독일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알렉산더 클루게 외 지음, 임홍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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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이야기를 읽은 지 오래되었다. 옛날에 어느 마을에 욕심 많은 장사꾼이 살았는데, 멀고 먼 옛날 어느 고을에 마음씨 착한 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그렇듯 향수 어린 동화 말이다. 이 책에 실린 열일곱 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오래되고 슬픈 동화를 읽는 기분이었다. 촌철살인의 재기발랄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한 권의 작품집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애수’였다. 또한 이 타국의 옛날이야기들은 학창시절 밤을 지새워가며 한국 근현대 단편들을 읽던 추억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현진건의 ‘빈처’, 김유정의 ‘떡’, 전영택의 ‘화수분’ 등 내가 그 시대를 살아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잊지 못할 아프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했다.

  작품집에는 괴테, 토마스 만, 헤쎄, 카프카 등 낯익은 거장들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주로 장편으로 주목받은 작가들이지만 새롭게 소개되는 흥미로운 단편들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토마스 만의 ‘루이스헨’은 그간에 보아왔던 토마스 만의 작품과 완전히 달랐다. 미모의 젊은 아내가 소심한 뚱보 남편을 파티 석상에서 쇼크사 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인데 만은 이야기 서두에 이렇게 쓰고 있다. 세상에는 아무리 대담한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도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결혼사례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경우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다. 마치 연극에서 얼간이 노인네와 생기발랄한 미인이 사랑의 모험으로 결합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듯이. 스물두 살에 쓴 작품이라기엔 다소 벤자민 버튼스럽다. 오히려 나중에 발표한 ‘트리스탄’이나 ‘토니오 크뢰거’가 더 젊은 작품이란 생각이 들 정도.

  그밖에 좋았던 작품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그리고 알렉산더 크루게의 ‘어느 사랑의 실험’이었다. 심리소설의 대가라고 일컬어지는 슈니츨러는 그 명성답게 그리 대단하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은 죄책감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묘하게 얽어놓은 수작이다. 슈니츨러의 심리학은 참으로 명석하고 현실적이면서도 감동을 준다. 한편, 크루게의 ‘어느 사랑의 실험’은 독자에게 ‘불행이 일정한 도를 넘으면 더 이상 사랑을 작동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던진다. 나치 치하에서 자행되었던 잔인한 생체실험 과정을 보여주는데 연출된 극본, 무미건조한 보고서와 같은 문장이 다소 충격적이다.

  나머지 모든 작품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 보다는 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재미있는 옛날이야기에 목마른 독자들이라면 직접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특별히 독문학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거나 흥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 사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읽힐 만큼 재미와 가치가 있다. 또한 전집 중에서 단 한권의 책만 받아보았지만 매우 정성껏 엮었다는 느낌이 든다. 깔끔한 장정에 오자, 탈자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더러 번역체의 어색한 문장 때문에 외국 소설을 꺼려하는 독자들도 많은데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주로 숨겨진 단편들을 발굴하여 싣다 보니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깊이 있게 탐색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학전집은 아니지만 거장의 싹을 품고 있는 새롭고 흥미로운 작품들과 조우할 수 있는 즐거운 책읽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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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3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5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방학을 하면 동기들끼리 시간을 맞춰 얼굴을 보곤 했었는데 누군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연애를 하고, 먼 도시로 학교를 옮기고, 그러다보니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하루 종일 자리를 옮겨가며 논다던가, 밤늦게 술을 한잔 한다던가, 하는 일이 드물어지면서 서너 명 쯤 단출하게 모이는 풍경이 더 잦아졌다. 그래도 말로 벌어먹고 사는 직업인지라 서너 명이 모여도 군부대 하나 지나가는 것만큼 천정이 흔들흔들, 방구들이 들썩들썩 한다.

  어제는 보충수업을 끝낸 K와 유럽에 다녀온 S가 놀러 왔었다. 임신한 친구가 입에 거미줄 칠까봐 걱정됐는지 오후 내내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번에는 남편도 연수를 가고 김밥을 쌀 여력이 못 되어서 엄마가 빚어주신 만두로 만둣국을 끓였다. 마침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참 맛있게도 먹었다. 원래 결혼하면 누가 차려준 밥상이 가장 맛있는 법이다.

  K는 친한 동기들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을 했다. 나는 K의 남편한테 끝내주는 곱창을 얻어먹고는 무한지지를 보냈었지만 그녀가 청첩장을 주었을 때 아주 잠깐, 울적한 기분이 들었었다. 이것저것 잘 챙겨주던 언니가 나를 떼어놓고 시집가는 느낌. K는 그 같은 성품답게 성실한 아내, 수더분한 며느리, 씩씩한 엄마로 잘 살고 있다. 느지막이 종손을 안아보는 기쁨이 컸는지 도우미 할머니가 있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시부모님들 때문에 처음에는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고. 출산 후에 부지런히 관리를 잘했는지 피부나 몸매도 거의 그대로였다. 다만 건강에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별 것 아니겠지만 나 같으면 이 사람 저 사람 들볶으며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을 텐데 워낙에 느긋한 성격이라 그런지 정밀검사 받아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웃으며 한다. 그런 의젓함이 놀라우면서도 안타까웠다.

  S는 동갑내기 남자와 연애 중이다. 낌새는 있었지만 긴가민가했었는데 전화 받는 폼을 보니 연애 기류가 짜릿짜릿. 남자는 S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을 다하고 있었고 S는 엄마가 반대하면 안 만나, 원칙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본인은 극구 부인하지만 국내 최고학부를 나온 데다 자상하기까지 한 오빠와 형부가 있다 보니 웬만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S의 자신감이나 신중함은 거북스러운 그 무엇이 아니라 그녀의 순진한 귀여움과 잘 맞물려 기분 좋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때가 많다. 나는 내가 말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말 많은 남자는 질색인데 얘는 말이 없는데도 재밌어서 좋아. 이 대목에서 딱이구나, 싶었다. 동갑이니까 친구처럼 편하게 만나보면 되겠다고 했는데, 모르겠다. 남자 성품을 보아하니 깨나 진득해서 어쩌면 올 가을 쯤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K는 그밖에도 담임 학급에 한부모 가정이 삼분의 일이나 된다며 생활지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본인이 엄마가 되고 나서 그 아이들이 보이는 특이행동을 더욱 눈여겨보게 되었을 것이다. 나도 임신 소식을 듣고 학교에 나갔을 때는 아이들 눈 두 개, 손가락 다섯 개까지 모두 소중하고 다르게 보였는데 어느 엄마가 그렇지 않으랴마는 팍팍한 세상에서 가정을 지키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가 보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모성이나 부성이 언젠가부터 시대착오적인 고루한 심성처럼 인식되면서 부모들이 각자 ‘나’를 주장하게 된 사이, 아이들이 내팽개쳐진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무리 훌륭한 양육자라고 하더라도, 부모의 자리를 완벽히 대체하기는 힘들다. 어른들 말씀대로 요즘은 가족 구성원이 있을 자리에 온전히 다 있는 것도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애를 아무리 오래 해도 막상 그 남자가 남편이 되고 가족이 되면 다른 느낌 같은 게 있어. 임신 기간 동안 정말 좋았다는 말에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이 대목은 알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아침에 나갔던 남편이 오후에 삐비비빅, 자기 마음대로 비밀번호를 누르며 불쑥 들어온다던가, 하루 종일 집안 여기저기 나와 같은 공간을 쓴다던가, 하는 일이 낯설 때가 많다. 이렇게 평생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런 것도 예상을 못하고 결혼하다니, 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질 때도 있다. K는 객지생활에 물려 있었고 결혼과 동시에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자리를 잡은 경우이지만 나는 타향이긴 해도 부모님이 곁에 계셨기에 오히려 결혼 전이 생활면에서는 더 편리한 점이 많았더랬다. 하지만 뭔가 나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결혼이란 걸 했고 만나고 싶을 때만 만나던 연인이 남편이 되고 보니 어디서 내 인생 속으로 뚝, 떨어진 것 같은 이 남자와 어느새 남매나 오누이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알고 보면 생판 남남이지만 함께 걷는 동지애로 뭉친 사이. ‘나’를 위해 ‘너’를 돌볼 수밖에 없는 기묘한 관계. 이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영상은 대형 스크린의 로맨틱 무비라기보다는 8미리의 홈 무비에 더 가깝다.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툴툴거리는 K와 나를, 미혼인 S는 부러워도 했다가, 도리도리 했다가, 마구 헷갈려 하다가 돌아갔다. 결혼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도우미 할머니를 집에 보내드려야 하는 K와 퇴근할 남편이 있는 나 때문에 이번 만남이 너무 짧고 아쉬운 듯해서 조만간 누구도 부르고, 누구도 불러서 다함께 보자고 기약했다. 몸이고 마음이고 부디 아프지 말아야 할 텐데. K가 얼른 회복하고 S도 연애 전선 이상 없기를. 날씨도 꿀꿀했는데 친구들 덕분에 좋은 에너지를 많이 얻었다. 매사 칭얼대는 일 없이 듬직한 K, 사랑스러운 언어와 밝은 기운으로 주변에 빛을 주는 S, 벌써 함께 한 세월이 십년이 넘었지만 변함없는 그 다정함이 새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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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0-01-2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기운이 여기까지 전해집니다~


급작스럽게 유쾌하지 않은 동행으로 퇴근길이 걱정되어 다운되었는데,
깐따삐야님 페이퍼를 읽고 기분이 나아졌어요.
응, 괜찮을거예요. ^^


깐따삐야 2010-01-22 19:41   좋아요 0 | URL
레와님, 괜찮으신 거죠? 날씨가 다시 또 추워졌어요.
훈훈한 생각으로 항상 따순 마음 유지하시길.^^

2010-01-21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2 1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22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님의 친구분들은 깐따님을 닮아 다들 미모가 출중한가봐요.
(적절한 아부는 출산에 크나 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깐따삐야 2010-01-23 11:38   좋아요 0 | URL
요즘은 다들 워낙에 관리들을 잘해서 아기를 낳고 오히려 더 예뻐지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자극 받습니다. 벌써부터.ㅠ
(우리 남편한테 좀 알려주세요.)
 

  날씨가 풀린 주말 오후, 친구들이 다녀갔다. 밖에서 만나기에는 무거운 내 몸이 민폐인지라 집으로 오라고 했다. 김밥도 싸고 찐빵도 찌고. 자취하는 친구가 오기에 뭘 시켜먹기도 그래서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목하 열애 중인 H는 어째 더 앙상해진 것 같았고 귀차니즘을 달고 사는 E는 차를 뽑은 후 세차는 한 번도 안했으면서 앞머리를 내리고 매니큐어도 하고 나름 더 어려졌다.

  H는 첫사랑과 연애하는 요즘이 꿈만 같다고 했다. 판도라의 아바타처럼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나는 먼저 시집 간 언니가 노파심을 부리듯 몇 가지 우려를 드러내면서도 사랑에 빠진 H의 눈빛을 보니 입을 다물게 되었다. 과거를 확인하는 그 남자는 교활했지만 H는 이미 판단력을 잃은 상태였다. 그래, 나중에 잘 살면 되니까. 나로서는 모든 것을 천천히 생각하기를, 몸이 안 좋아진 것 같단 이야기에 짬을 내서 병원에 꼭 가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H는 가족과 떨어져 오랫동안 자취를 해왔고 그만큼 혼자 사는 일에 지쳤거나 물려버린 것 같았다. 결혼하면 아이도 셋이나 낳을 거란다. H는 본래 성품도 그렇지만 오랜 외로움 때문에라도 웬만큼 괜찮은 시집을 만나면 정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착한 며느리가 될 것 같다.

  E는 요즘 아버지로부터 하숙생이라고 불린다고. 집안에서 마주치면 야, 하숙생! 그러신단다. 제 방에 틀어박혀 책 보다, 인터넷 서핑하다, 잠시잠깐 방 밖으로 얼굴을 비추니 그럴 만도. 엄마는 아예 나가라고 하신단다. 하지만 독립할 자신도, 결혼할 생각도 없단다. 독립을 하기에는 기회비용이 많이 들고 결혼은 필요성을 못 느끼고. 그렇게 확고한데도 우리 나이가 그런 건지 무언의 압박 같은 것을 피할 수는 없다고. E는 그런 애매와 불안 사이의 무료함을 쇼핑으로 달래고 있었다. 너희는 백만 원이 생기면 뭘 할 거니? 여행을 갈까, 가방을 살까. 대학원 교수님이 삶의 넓이를 알고 싶으면 ‘삼국지’를 읽고, 삶의 깊이를 알고 싶으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어보라고 했다면서 내게서는 정이현의 책을 빌려갔다. ‘추노’ 재방송을 보면서는 입을 못 다물었다. 짐승남들의 초콜릿 복근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나, 이제부터 저 드라마 봐야겠다, 한다. 얘는 남들 모두 뱀파이어 에드워드에 꽂힐 때 혼자 늑대인간에 꽂혀서 난리다. 으이구, 지지배.

  친구들은 내가 결혼한 후로 이구동성으로 너무 비관적이 됐다고 한다. 씩씩하긴 해도 별로 낙천적인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더 비관적이 되었다니, 그저 약간 더 현실적이 된 것 뿐인데 아가씨들 눈에는 좀 각박해 보였는가 보다. 나는 결혼했지만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고 남편이나 결혼생활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해주곤 하는데 결혼한 지 일 년 남짓 된 새댁치고는 너무 건조했나 보다. 그냥 너희들 상상만큼 장밋빛이 아니라는 말인데 자꾸 결혼하라고 부추기지는 못할망정 은근히 혼자 살 것을 종용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나야 친구들이 유부녀가 되면 공감대와 이야깃거리가 늘어나니 좋지만 나 안 심심하자고 일생일대의 큰 변화를 마구잡이로 부추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욱이 매사 적응이 빠른 H라면 모를까, E는 결혼하면 나만큼이나 엄청 툭닥거리며 살 것 같아 쉽사리 권할 수도 없다.

  유럽에 갔다는 S와 육아에 바쁜 K는 오지 못했는데 다 같이 모인데도 좀 묘한 관계망에 얽혀 있기는 하다. 대학 시절 내내 동아리다 뭐다 외도를 많이 했던 나는 그래서인지 오히려 두루두루 친한 편인데 좁은 과 내에서 나 모르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는가 보다. 예전엔 소문만 듣고 같이 흥분한 적도 있었지만 그새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다 보니 지난 시절의 동동거림이 생경할 지경이다. 내 삶은 그때만큼 뜨겁고 흥미진진하지 않지만 그 동안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조금이라도 더 깊어지거나 넓어졌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 근본마저 두루뭉술해질 것 같지는 않지만 이제는 각 세우며 나 자신을 내던지는 일에 자신이 없어졌다. 점점 그렇게 되어버렸다.

  E는 미안했는지 다음에는 몸도 무거운데 그냥 시켜먹자고 말한다. 그래도 핑계 김에 오랜만에 남편과 김밥을 말면서 즐거웠다. 그는 친구들이 올 시간에 맞춰 도시락까지 예쁘게 싸서 자취하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친정엄마한테도 갖다 드렸더니 사위한테 손수 싼 김밥을 다 얻어먹는다고, 나중에 소풍 도시락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며 감탄하신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인 것이 결혼이라지만 그런 몇몇 순간들 때문에 살게 되는 것 같다. 비관적인 유부녀도 그래서 종종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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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7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17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밥에 우엉조림을 넣으면 감칠맛 납니다. 냉중에 한번 시도해보시길...^^

깐따삐야 2010-01-18 11: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난번엔 당근을 안 넣고 우엉조림을 넣었어요. 이번에는 오이도 들어가고 해서 뺐죠.^^

조선인 2010-01-18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엉조림 한 표. 그나저나 정말 정갈해보고 얌전한 말음새입니다. 부러운데요?

깐따삐야 2010-01-18 11:53   좋아요 0 | URL
남자라서 그런지 꽉꽉 잘 말더라구요. 무려 스무 줄을 쌌는데도 안 징징거리고. 참말로 무던한 남자이긴 해요.

무스탕 2010-01-18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위가 싼 김밥 드시는 장모님은 정말 기분 좋으셨을거에요 ^^

울 동네 김밥집도 김밥에 우엉조림을 넣어요 :)

깐따삐야 2010-01-18 11:56   좋아요 0 | URL
제가 집에서 싼 엄마표 김밥을 정말 좋아라 하는데 남편이 비슷하게 흉내를 낼 줄 알아서 다행이죠. 엄마한테 늘 얻어다먹기만 하는데 가끔씩 싸다 드려야겠어요.^^

레와 2010-01-18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뻐요! ^^

깐따삐야 2010-01-19 09:27   좋아요 0 | URL
^^
 
<한낮의 시선>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을 읽고 아직도? 라는 생각을 했다. 작가 이승우에 대해서. 이십대 초반,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성영화에 나오는 코메디언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극심한 허무함에 빠져 있었다. 나는 도저히 나를 구원할 수가 없었다. 친구를 따라 성당에 나가보기도 했고 서점과 도서관의 심리, 철학 코너에서 하루 종일 배회하기도 했다. 젊은이라면 누구나 그런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 시기로부터 벗어난다.

  그 무렵에 읽었던 책들이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김성동의 『만다라』,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과 같은 책들이었다. 종교도 없었고 주변의 종교인들에 대해서도 다분히 회의적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위와 같은 책들을 문학으로, 소설로 읽었다. 그때 작가 이승우와 처음 만났다. 젊고 열정적인 신학도가 아니라면 결코 써내지 못할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빛나는 처녀작이란 대개 그 시기의 그 아름다움으로 제 몫을 다 할 뿐. 작가도 세파를 피해갈 수 없으니 그가 추구하는 세계에도 변화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는 쓰고 있다. 신과 절대자, 아버지에 대해. 최근에 가장 주목받았던 『생의 이면』도 그렇고 꾸준히 내놓고 있는 중단편집에 실린 작품들 또한 그 색채에 일관성이 있다. 그런데 지겹지 않다. 도리어 눈물겹다고 해야 하나. 두 번 쯤 감탄하게 된다.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해 꾸준히 밀고 나가는 그 고집에 한 번, 그리고 무겁고 답이 없는 이야깃거리를 쉽고 흥미진진하게 풀어가는 솜씨에 한 번. 책을 만들기에만 급급한 요즘 작가들이 눈여겨 배워야 할 미덕이다.

『한낮의 시선』속에 담긴 사연도 이전에 그가 추구했던 이야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날, 폐결핵으로 요양 중에 문득 아버지를 찾아 나서게 된 청년이 있다. 이런저런 환영과 꿈에 시달리다가 무언지 모를 힘에 이끌려 지난 세월 무의식 속에 묻혀 있었던 아버지를 찾지만 청년은 아버지로부터 자식임을 거부당한다. 하지만 폭군이면서 동시에 보호자였던 병장을 살해한 일병의 이야기를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렵고 불안한 ‘있음’보다 두렵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은 ‘없음’이 더 두렵고 불안했을 것이다(p.142). 실제로 그렇다. 인간이 종교를 갖고, 예술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 그렇듯 삶 전반을 아우르는 숱한 행위들은 어쩌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불확실성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인간은 그 두렵고 불안한 ‘있음’을 찾아다니고 의지한다. 아버지를 찾는 청년의 운명 또한 그렇다. 그는 인정받을 수도 있지만 거부당할 수도 있다. 선택은 오롯이 아버지의 몫이다. 하지만 평화로운 ‘부재’보다는 불편한 ‘존재’를 기어이 찾아 나선다. 의지할만한 권위와 절대를 지향하는 인간 운명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나는 천내로 데려가 달라는 말만 했다.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숲이 천내의 숲이라는 걸 나는 꿈을 꾸는 동안에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숲속에 들어가 있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장 깊은 곳, 하늘을 받치고 선 키 큰 나무들과 투명한 햇빛이 큰 품이 되어 껴안는, 가장 오래된 시간의 정적 속에 들어가 있고 싶었다. 그곳에서라면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고, 무엇에도 쫓기는 일 없이 그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그루 나무처럼 햇빛에 휩싸인 채 다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곳에서라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p.159). 마침내 마음속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청년이 가고 싶은 곳. 천내의 숲. 그곳은 혼돈이나 갈망 없이 다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곳,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상태로 머무를 수 있는 곳이다. 결국 믿고 기댈만한 절대적 존재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인간 운명이지만 그 질긴 존재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한낮의 투명한 숲속에 홀로 설 수 있는 경지, 천내의 숲은 그 경지의 종착점이자 작가 이승우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이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여전히 삶과 인간의 근원을 파고드는 작가의 꾸준한 고집에 존경과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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