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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랑의 실험 - 독일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알렉산더 클루게 외 지음, 임홍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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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이야기를 읽은 지 오래되었다. 옛날에 어느 마을에 욕심 많은 장사꾼이 살았는데, 멀고 먼 옛날 어느 고을에 마음씨 착한 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그렇듯 향수 어린 동화 말이다. 이 책에 실린 열일곱 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오래되고 슬픈 동화를 읽는 기분이었다. 촌철살인의 재기발랄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한 권의 작품집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애수’였다. 또한 이 타국의 옛날이야기들은 학창시절 밤을 지새워가며 한국 근현대 단편들을 읽던 추억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현진건의 ‘빈처’, 김유정의 ‘떡’, 전영택의 ‘화수분’ 등 내가 그 시대를 살아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잊지 못할 아프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했다.

  작품집에는 괴테, 토마스 만, 헤쎄, 카프카 등 낯익은 거장들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주로 장편으로 주목받은 작가들이지만 새롭게 소개되는 흥미로운 단편들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토마스 만의 ‘루이스헨’은 그간에 보아왔던 토마스 만의 작품과 완전히 달랐다. 미모의 젊은 아내가 소심한 뚱보 남편을 파티 석상에서 쇼크사 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인데 만은 이야기 서두에 이렇게 쓰고 있다. 세상에는 아무리 대담한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도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결혼사례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경우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다. 마치 연극에서 얼간이 노인네와 생기발랄한 미인이 사랑의 모험으로 결합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듯이. 스물두 살에 쓴 작품이라기엔 다소 벤자민 버튼스럽다. 오히려 나중에 발표한 ‘트리스탄’이나 ‘토니오 크뢰거’가 더 젊은 작품이란 생각이 들 정도.

  그밖에 좋았던 작품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그리고 알렉산더 크루게의 ‘어느 사랑의 실험’이었다. 심리소설의 대가라고 일컬어지는 슈니츨러는 그 명성답게 그리 대단하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은 죄책감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묘하게 얽어놓은 수작이다. 슈니츨러의 심리학은 참으로 명석하고 현실적이면서도 감동을 준다. 한편, 크루게의 ‘어느 사랑의 실험’은 독자에게 ‘불행이 일정한 도를 넘으면 더 이상 사랑을 작동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던진다. 나치 치하에서 자행되었던 잔인한 생체실험 과정을 보여주는데 연출된 극본, 무미건조한 보고서와 같은 문장이 다소 충격적이다.

  나머지 모든 작품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 보다는 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재미있는 옛날이야기에 목마른 독자들이라면 직접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특별히 독문학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거나 흥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 사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읽힐 만큼 재미와 가치가 있다. 또한 전집 중에서 단 한권의 책만 받아보았지만 매우 정성껏 엮었다는 느낌이 든다. 깔끔한 장정에 오자, 탈자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더러 번역체의 어색한 문장 때문에 외국 소설을 꺼려하는 독자들도 많은데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주로 숨겨진 단편들을 발굴하여 싣다 보니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깊이 있게 탐색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학전집은 아니지만 거장의 싹을 품고 있는 새롭고 흥미로운 작품들과 조우할 수 있는 즐거운 책읽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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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3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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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5 09: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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